21화· 산적, 수적 그리고 쟁자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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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다 남은 개고기가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을 가운데 두고 나는 염왕도와 독각망을 불러 모았다·
“귀하는 누구인가?”
독각망이 대뜸 반말을 하며 물었다·
“말 조심하시오! 난 지금 천룡표국을 대표해 온 것이오· 귀하들에게 인사를 하러 온 신입 표사가 아니라!”
“옳은 말씀!”
염왕도가 옆에서 슬쩍 나를 편 들었다·
불과 조금 전 그의 부채주가 내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독각망은 잠시 눈알을 부라렸다· 그러나 나를 자극해 보아야 자기만 손해라는 걸 아는지 꾹 참는 기색이었다·
“좋소· 천룡표국의 입장은 무엇이오?”
됐다· 이만하면 일단 기선은 제압했다· 나는 남궁소소를 돌아보며 말했다·
“전낭 두 개를 전부 내놓으시오·”
“···?”
원래 전낭은 세 개 받았다· 한데 내가 두 개라고 하면서도 전부 내놓으라고 하자 남궁소소가 살짝 당황해 하며 나를 보았다·
‘어쩌라고요?‘
‘두 개만 내놔·’
‘전부 내놓으라면서요·’
‘두 개만 내놓으라니까·’
‘설마···?’
‘생각하는 그거 맞소·’
‘···!’
남궁소소는 당황한 와중에도 일단 전낭 두 개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표사나 쟁자수들이 볼 수 없도록 자신의 몸으로 가렸다·
나는 이 자리에 앉은 세 사람도 겨우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전낭 하나당 쉰 냥씩 냥씩 모두 백 냥입니다· 저희 천룡표국에서 내놓을 수 있는 전부이지요·”
염왕도는 평소보다 두 배나 많아진 액수에 눈을 크게 떴다·
독각망은 ‘고작 길 좀 막고 있다가 비켜나는 걸로 이렇게나 많이 받아 처먹었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남궁소소는 자신이 어처구니없는 일에 연루되었음을 깨닫고 고개를 푹 떨구었다·
“천룡표국의 입장은 간단합니다· 첫째 우리는 장사곡 협도가 어느 쪽의 영역인지 관심도 없고 시비에 끼어들 생각도 없습니다· 하니 시시비비는 나중에 알아서들 가리시기 바랍니다·”
“···!”
“···!”
“둘째 오늘만큼은 일정이 빠듯하니 우리를 건네주는 쪽에게 이 돈을 전부 드리겠습니다· 대별채의 채주께서는 아시겠지만 이 액수는 평소 보다 두 배가 많습니다· 일종의 급행료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시비비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사실 이것보다 더 확실하게 끼어드는 방법도 없다·
막힌 길에서 표마차를 건네주는 자가 길목의 주인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니까·
염왕도가 애써 화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그건 불가능하오· 앞서 장 표두에게도 말했지만 물이 빠지기 전에는 길을 건널 방법이 없소이다·”
“교룡채의 채주께서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우린 당장 건네줄 수 있소·”
“어떻게 말입니까?”
독각망이 가볍게 웃더니 한 손을 들었다·
그러자 강변에 정박한 범선의 갑판으로부터 무려 다섯 장에 달하는 크고 두꺼운 판자 두 개가 주르륵 미끄러져 나왔다·
판자는 땅에 한쪽 끝을 쾅 하고 박은 다음에 멈췄다·
배의 갑판과 땅을 비스듬하게 연결하는 선교목(船橋木)이다·
본시 항구의 하역장에서 저걸 큰 배에 여러 개 걸쳐 놓고 짐꾼들이 종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짐을 싣거나 내린다·
“표물은 사람이 짊어서 배로 옮기고 표마차는 저걸 양쪽 바퀴 넓이만큼 벌려 놓고 밧줄에 묶어 끌어 올릴 것이오· 그런 다음 물에 잠긴 구간을 지나 마른 땅이 나타나면 다시 같은 방법으로 내려 주겠소·”
물에 잠긴 곳이라고 해봐야 불과 삼십여 장 밖에 안된다· 그 짧은 길을 건너지 못해 이 사달이 난 것이다·
“천룡표국은 교룡채에 통행세를 내겠습니다·”
“탁월한 결정이외다· 음하하!”
독각망이 광소를 터뜨렸다·
염왕도의 얼굴이 썩어 문드러졌다· 그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정녕 이게 천룡표국의 입장이오?”
“채주님의 억울한 심정은 잘 압니다· 하지만 저희도 어쩔 수 없음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일로 대별채와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기를 빕니다·”
“십 년 넘게 맺어온 관계를 하루아침에 배신하면서 무슨 헛소리를! 내 지금 이 자리에서 선언하건대 천룡표국의 표물은 앞으로 절대 곤산을 넘을 수 없을 것이오·”
“하면 대별채에서 직접 지금 우리 앞을 막아서고 있는 교룡채를 치워버리고 길을 건네주시든가요· 본시 통행세란 그런 일을 해달라는 대가로 드리는 게 아니었습니까?”
“···!”
“본인들이 어쩌지 못해서 벌어진 일을 왜 애꿎은 천룡표국 탓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교룡채와 싸움이 되지 않을 것 같자 저희에게 덤터기를 씌우시려는 것 아닙니까?”
“보아하니 대별채가 작은 산채에 불과하다고 무시하는 모양인데 하면 녹림맹(綠林盟)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염왕도는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발했다·
꽉 다문 어금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말이 그의 분노를 짐작케 했다·
내가 노리는 게 이거였다·
그는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떠나야 한다·
절대로 천룡표국이나 교룡채를 만만하게 보고 한판 붙으려고 해선 안 된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흥 녹림맹 무서운 줄은 아는 모양이군·”
“불씨 하나가 온 들판을 태우고 돌멩이 하나가 천 겹 물결을 일으키는 법입니다· 채주님께선 그걸 감당하실 수 있으신지요?”
“무슨 엄포인가?”
“녹림맹까지 나선다면 우리 천룡표국과 전쟁을 하겠다는 말씀이신데 그걸 대별채의 채주께서 이렇게 즉흥적으로 결정해도 되는지 여쭙는 것입니다· 참고로 전 할 수 있습니다만·”
순간 염왕도의 눈썹이 꿈틀했다· 녹림맹과 천룡표국이 전면전을 벌이면 끝내는 녹림맹이 이기게 될 것이다·
일단 머릿수가 워낙 많으니까· 그러나 녹림맹 또한 궤멸적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이후 너도나도 한자리 해 먹겠다며 나설 것이고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만 최소 10년은 걸릴 것이다·
그런 중차대한 일을 일개 채주에 불과한 염왕도가 결정한다고?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늙은이가 어디서 약을 팔고 지랄을·
“네 놈은 대관절 무엇이관데 할 수 있다는 거냐?”
“표왕이 저의 아버지입니다·”
“뭣!”
“제가 천룡표국의 국주이신 표왕 이종산의 넷째 아들입니다· 장량기가 제게 표두 자리를 양보한 게 제가 입교식에서 대별채의 부채주를 때려 눕힌 게 설마 우연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전부 사기에 기연 덕이지만 염왕도가 속사정을 알 리 없다·
협상은 원래 절반은 뻥으로 시작하는 법· 나는 시원하게 엄포를 놓았다·
“가만 넷째 아들이라면 향시에 장원급제를 했다던 그···· 어쩐지 언변이며 풍모가 예사롭지 않더라니 알고보니 천룡표국의 사공자이셨구려· 이거 몰라뵀소이다· 하하하·”
독각망이 갑자기 넉살 좋게 인사를 해왔다·
매양 물 위에서만 사는 줄 알았더니 그 소문은 어디서 또 들었나 보다·
염왕도는 다시 한번 얼굴이 썩어 문드러졌다·
멀쩡한 표두를 놔두고 왜 새파랗게 어린 신참 표사가 나오나 했다가 이제야 모든 걸 깨닫고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까? 지금 선전포고 하신 것 맞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이대로 표국에 사람을 보내 아버지께 상황을 알려야겠습니다· 물론 저는 경솔하게 대처했다고 크게 곤욕을 치르겠지만 채주님께서는 아마 목숨을 거셔야 할 겁니다·”
“빌어먹을!”
염왕도는 벌떡 일어나더니 뒤에 있던 수하들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모두 철수한다!”
산적들이 우르르 떠나자 독각망이 내게 말했다·
“사공자의 용기 있는 결단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오·”
“보셔서 아시겠지만 천룡표국은 대별채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녹림맹과의 관계도 불편해지게 생겼습니다· 교룡채에서는 이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이오· 교룡채와 수로맹은 결코 사공자의 호의를 잊지 않을 것이오· 더불어 앞으로의 관계 또한 더욱 탄탄해지길 빌겠소·”
사공자라는 말에 유난히 힘을 준다·
천룡표국 내에서 형제들 간의 알력다툼이 있음을 알고 도움 될 일이 있다면 나에게 힘을 실어 주겠다고 은근슬쩍 내비치는 것이다·
내가 아무래도 형님들의 그림자가 어른 거릴 수밖에 없는 대별채와의 오랜 관계를 끊고 자신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는 것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지금 당장은 저의 체면부터 세워 주셔야겠습니다· 뒤쪽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다들 표정이 말이 아닐 겁니다· 아무리 표두라지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오랜 동맹 관계를 깨고 새로운 동맹을 맺었으니까요·”
“어찌해드리면 되겠소이까?”
“지금부터 반 시진을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마차와 표물을 전부 물 건너 마른 땅으로 옮겨 주십시오·”
“이를 말씀을· 편하게 쉬고 계시오·”
독각망은 수하들을 돌아보며 사자후를 내질렀다·
“표물과 마차를 전부 배에 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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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룡표국의 진영으로 돌아오자 표사며 쟁자수 할 것 없이 전부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장량기가 다가와 그를 알고 난 후 처음 보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무얼 말이오?”
“작게는 대별채와 교룡채 크게는 녹림맹과 장강수로맹의 눈치를 모두 보아야 하는 우리 입장에선 절대로 한쪽을 편들어선 안 됩니다· 갑자기 튀어나와 균형을 깬 교룡채 쪽으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일을 망칠수록 장 표두께는 좋은 것 아니오?”
“이미 다 알고 계시는 듯하니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표행을 떠나오기 직전 이공자님으로부터 최대한 많은 기회를 사공자님께 드리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경험 없는 내가 매번 실패를 거듭해서 끝내 아버지와 표국 사람들의 눈 밖에 나길 바라셨겠지· 형님들께서 원하는 대로 되었는데 왜?”
“이공자님의 사람이기 이전에 저 역시 천룡표국의 표사입니다· 이공자님께서 열두 살 사공자님께서 여섯 살 때 천룡표국으로 들어와 온갖 밑바닥 일부터 시작했지요· 천룡표국은 제가 청춘을 바친 곳입니다·”
“이건 또 무슨 작전이오?”
“네 분 공자님들께서 어떤 싸움을 벌이시든 좋습니다 저 같은 일개 표사야 담벼락 위의 풀처럼 바람 따라 누울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천룡표국에 큰 해를 끼치는 일 만큼엔 일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만큼은 정녕 표사로서 하고 싶지 않습니다·”
“호백구의 포장을 바꿔치기 하는 것도 표국에 결코 이로운 일은 아닌 걸로 아오만·”
“믿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그 일에 연루되지 않았습니다·”
“고중태를 때려 입막음 하는 걸로 보면 범털 같았소만·”
“사공자님!”
“이게 그렇게나 큰일이오?”
“단순히 대별채와 천룡표국 사이에 분쟁이 생긴 것이라면 설혹 산적 두어 명이 죽었어도 제 손으로 해결할 자신이 있습니다·”
“한데 그게 아니다?‘
”문제는 대별채의 영역에서 대별채를 내치고 갑자기 쳐들어온 교룡채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개 표사가 아니라 천룡표국의 사공자님께서요· 반드시 녹림맹이 나설 것입니다·”
“대별채와의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교룡채와는 척을 져도 되는 것입니까? 교룡채의 뒤에도 수로맹이 있습니다만·”
“그건····”
“그리고 그렇게 걱정이 되면 처음부터 나서시지· 등 떠밀어 놓고 뒤에서 웃으실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이러시는 겁니까?”
장량기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사공자님께서 매운 생강 같은 두 늙은이를 상대하시다 버거워 나가떨어지실 줄 알았습니다· 하면 제가 나서서 대별채의 채주를 달래 볼 생각이었습니다·”
“남은 전낭을 전부 쥐여 주면서 말이지요?”
전생에서 장량기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러나 이미 작심하고 온 독각망을 고작 돈 몇 푼으로 달랠 수는 없었다·
“장 표두님의 생각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니 기다리십시오· 만약 일이 잘못되면 전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공손한 존댓말이 술술 흘러나온다·
생각지도 않았던 표사 장량기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장량기는 무언가 더 말을 하려다 말고 굳은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이번엔 남궁소소가 다가왔다· 그녀는 어깨가 닿을 만큼 바싹 다가와 앉았다·
그러곤 사람들 모르게 자신의 품속을 툭툭 친 후 모기만한 소리로 속삭였다·
“이거 어떻게 합니까?”
“뭘 말이오?”
“전낭 말입니다· 하나 남았잖습니까·”
“잘 갖고 있다가 내가 달라면 주시오·”
“이걸 왜 나한테 맡겨 두는 겁니까?”
“아깐 최선을 다해 돕겠다더니?”
“그땐 분쟁을 해결하려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귀하가 중간에서 공금을 횡령하려는 작전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요·”
“남아일언 중천금이오· 돕겠다고 했으면 끝까지 도우시오· 표사나 쟁자수들이 눈치채지 않게 특별히 조심하시고·”
“이것 보세요· 정룡 공자····”
그때였다·
우지끈 펑!
범선과 땅을 연결하던 선교목 하나가 터져 나가면서 마차가 강물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때부터 난리가 났다·
자맥질에 익숙한 수적들이 재빨리 강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 마차를 끄집어냈다·
천만다행으로 마차는 바퀴 한쪽만 부러졌다·
더욱 다행인 것은 빈 마차였다는 점이고 더더욱 다행인 것은 떨어진 게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잠시 후 독각망이 내게로 와서 말했다·
“사공자 잠깐 얘기를 좀 할 수 있겠소?”
“문제가 생긴 것 같군요·”
“표국에서 쓰는 마차가 원래 저렇게 무거운 것이오? 10년 동안 한 번도 문제가 없었던 선교목이 그만 부러졌소이다·”
“워낙 험하게 사용하다보니 바닷가에서 자라는 참나무를 켜다가 기름을 잔뜩 먹여서 만들지요· 보기보다 아주 무겁습니다· 제조단가도 높고요·”
“아무래도 교룡채로 돌아가서 선교목을 몇 개 더 가져와 두 개씩 겹친 다음 다시 작업을 해야 할 것 같소이다· 다만 그러려면 내일이나 되어야····”
“내일이면 물이 빠져 길이 뚫릴 텐데 저희 입장에서는 구태여 표물과 마차를 배에 실었다가 내렸다가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다른 방법은 없소이다·”
“이제 와서 이러시면 곤란하지요· 저는 채주님만 믿고 대별채와 척을 지면서까지 일을 벌였거늘·”
“이번 한 번만 수하들 앞에서 내 체면을 좀 살려 주시오· 하면 이 신세는 반드시 갚겠소이다·”
“채주님 체면을 살려 드리기 위해 제 체면은 땅에 떨어져도 상관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제가 구태여 그렇게 해드릴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어쩌고 있나 하며 쓱 돌아보니 표정들이 가관이다·
수적들은 난감함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장량기와 표사들은 대별채와 척까지 지며 벌인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어쩔 거냐며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드리면 좋겠소?”
”제게 채주님의 체면도 살리고 제 체면도 지킬 묘안이 하나 있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그게 무엇이오?“
“교룡채의 형제들께서 타고 오신 비조선 30척을 일 장 간격으로 연결한 다음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부교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교를 이용해 표물과 마차를 마른 땅까지 옮기는 것이지요·”
“비조선은 충분하오만 널빤지가 없소이다· 부러진 선교목을 쓸 수도 있겠으나 너무 무거운 데다 그마저도 턱없이 모자라오·”
“팔뚝 굵기의 가는 통나무를 세 개씩 엮어 널빤지 대용으로 쓰면 어떻습니까? 마을마다 좁은 개울을 건널 때 흔히 보는 애기 통나무 다리처럼 말입니다·”
“좋은 생각이긴 하오만 지금 주변은 온통 가파른 비탈에 바위들뿐이라 쓸만한 나무를 구하려면 곤산으로 올라가야 할 것이외다·”
“올라가면 되지요· 가는데 한 식경 나무들을 찍는데 한 식경 끌고 오는데 한 식경· 반 시진 조금 넘으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만·”
“대별채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물에서라면 모를까 산속에서라면 아무리 숫자가 많다고 해도 우리는 녹림의 상대가 되질 않소이다· 적지 않은 수가 죽어 나갈 것이오· 고작 통나무 좀 얻자고 그럴 수는 없소·”
“그러니까 대별채의 채주께 사정을 말하고 협조를 구해야지요· 아니면 말씀하신 것처럼 전쟁만 있을 뿐입니다·”
“날 더러 그 산짐승을 찾아가 고개를 숙이란 말이오? 그럴 순 없소· 내가 녹림의 산채를 찾아가 나무를 달라고 사정한 걸 알면 수로맹의 형제들에게 두고두고 비웃음을 살 것이오·”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사공자께서요?”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나도 나지만 사공자께서도 아까 염왕도와 그렇게 얼굴을 붉히고 싸우셨는데···· 정말 가실 수 있겠소이까?”
“채주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닙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건 저의 첫 표행입니다· 만약 여기서 어중간하게 그만둬 버리면 저는 표국에서 영원히 무능하고 멍청한 놈으로 찍힐 것입니다·”
“이거 면목이 없구려· 그나저나 대별채의 채주가 순순히 허락해 줄지 모르겠소이다·”
“되도록 해야지요· 전낭이나 돌려주십시오·”
“전낭은 왜?”
“지금 절 더러 빈손으로 대별채를 찾아가란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스스로 장담한 일을 실패해 대별채에게 도움을 구하는 입장이니 응당 내놓으시는 게 맞지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소·”
그러면서 독각망이 전낭 하나를 내놓았다·
눈이 동그래진 남궁소소가 얼른 전낭을 받으려 했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탁’ 치고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게 뭡니까?”
“대별채와 교룡채가 힘을 합쳐 표물을 옮기는 것이니 각각 절반씩 나눠 가지는 게 맞지 않겠소이까?”
“이럴 거면 채주님께서 직접 가십시오·”
“왜 내 말이 틀렸소?”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채주님께서 대별채의 채주시라면 쉰 냥 받고 나무를 찍어 가라고 하겠습니까?”
“···?”
“채주님과 저에게 체면이 있는 것처럼 대별채의 채주님께도 체면이 있습니다· 백 냥을 전부 준다고 해도 나무를 안 내어 줄 겁니다· 어쩌면 교룡채의 채주님더러 직접 산채로 올라와 사과부터 하라고 할지도 모르지요· 그리고는 모든 걸 없던 일로 하라고 요구할 겁니다·”
“하면 우리더러 공짜로 일을 해주란 말이오?”
“이게 왜 공짜입니까? 제가 대별채와 척을 지면서까지 이 길목을 교룡채에 통째로 넘겨주었는데· 정말 아까부터 계산을 이렇게 띄엄띄엄 하시깁니까?”
독각망의 얼굴이 굳어지며 한참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좀 전과 달리 차갑기 그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대별채와 다시 손을 잡으려는 생각은 아니겠지요?”
“교룡채에서 사소한 일로 이렇게 계속 딴지를 거신다면 저로선 그 방법도 생각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그리고 분명히 못박아 두건데 어느 쪽을 선택할 지는 전적으로 저의 마음입니다· 강요하지 마시기를·”
나를 노려보는 독각망의 눈동자에 횃불이 켜졌다· 나 역시 지지 않고 독각망을 노려 보았다·
“하하하· 알았소이다·”
독각망은 큰 결심이라도 한 것마냥 전낭 두 개를 전부 내밀었다·
나와 전낭을 번갈아 보는 남궁소소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손은 잽싸게 전낭을 받아 챙기고 있었다·
이로써 장량기에게서 받은 전낭 세 개가 다시 돌아온 셈이다·
하지만 아직 하나가 더 남았다·
“마차 수리비도 주십시오·”
“그것까지?”
“제가 채주님의 체면을 지켜 드리기 위해 애쓰고 있으니 채주님께서도 제 체면을 지켜 주셔야지요· 마차 바퀴가 터져 나간 걸 모두 보았는데 그냥 넘어간다면 표사와 쟁자수들은 저를 호구라고 뒤에서 욕할 것입니다·”
“후후· 십 리 길을 넘어가면 참말이 없다더니· 사공자께서는 소문으로 듣던 것과 아주 딴판이시오· 좋소· 얼마를 드리면 되겠소?”
“쉰 냥만 주십시오·”
“그렇게나 비싸오?”
“보셔서 아실 것 아닙니까? 표국의 마차는 저자에 돌아다니는 마차와는 다릅니다· 그나마 여분의 바퀴가 있어 그것만 교체하니 망정이니 박살이라도 났으면 이백 냥은 주셨어야 합니다·”
“알겠소· 시작은 비록 이렇게 시끌벅적해도 이후에는 별일이 없었으면 좋겠소·”
“이를 말씀입니까· 호사다마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 있을 모든 나쁜 일들을 첫날에 전부 액땜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저도 그렇게 생각하겠습니다·”
“사공자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한결 마음이 가볍구려· 껄껄껄·”
독각망이 품속에서 전낭 하나를 꺼내더니 이제는 자연스럽게 남궁소소에게 건네주었다·
남궁소소는 반쯤 넋이 나간 채로 달달 떨면서 그것까지 챙겼다·
이제 산적놈들을 찾아가 잘 구슬린 다음 마지막으로 크게 한 번 땡기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