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 미친 놈(6) >
나와 남궁유룡의 인사가 끝나는 순간부터 정적이 깨지고 사람들이 일제히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특히 대로를 따라 늘어선 일천 군중의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소리가 꼭 벌통을 발로 찬 것 같았다·
입은 제각각이었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저 노인이 뇌검이라고?”
“체구가 저렇게 작은데?”
“내겐 산처럼 커 보이는걸!”
“뇌검 남궁유룡을 직접 보다니!”
“집에 들어가지 않고 기다려 보길 정말 잘했군!”
뇌검의 등장 그 자체만을 가지고 한동안 떠들어 대던 사람들은 점차 그가 양주에서 성도를 단 며칠 만에 주파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레 중에서 하오문의 비둘기가 날아간 시간을 이틀 정도로 잡으면 고작 닷새 만에 산 넘고 강 건너 수천 리를 달려온 셈인데 그건 내가 생각해도 실로 전율스러운 경공술이었다·
전말은 이랬다·
이레 전 양강을 불러 이것저것 음식을 배달시킬 때 나는 그에게 전음으로 한 가지 의뢰를 했다·
[하오문의 장 향주께 부탁해 양주의 남궁세가주에게 이곳 상황을 알리고 속히 와달라는 급보를 보내주시라고 전해다오· 사례는 잊지 않겠다는 말도 전하고·]
전음은 본래 일정한 경지 이상이 되어야만 보낼 수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고수가 보내는 전음을 그냥 듣기만 해야 한다·
한데 놀랍게도 양강이 내게 전음으로 대답을 해왔다·
[하오문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천룡표국의 풍운비룡은 남이 아니니 언제 어디서든 그가 손을 내밀면 최대한 도와주라셨습니다· 그렇다고 사례를 하시면 안 받겠다는 건 아니고요·]
[무공을 익혔어?]
[조금요·]
[전혀 기운을 못 느꼈는데·]
[아직 단전이 자리 잡지 못했으니까요·]
[한데 전음을 한다고?]
[하오문의 전음술은 내공에 크게 좌우되지 않습니다·]
[문주님은 또 어떻게 알지?]
[저의 사부님이시거든요·]
[그럼 양주의 소수옥녀 매용초와는····]
[저의 사저 되시고요·]
[···!]
봄에 왔을 때 천하제 객점에서 보았던 장인보가 하오문의 향주임을 알았기 때문에 양강을 통하면 당연히 전달될 거라고 생각하고 한 말이었다·
한데 그 작은 녀석이 매용초의 사제였을 줄이야·
그리고 양강이 음식을 가지고 왔을 때 날씨를 걱정하는 척 하며 상황을 물었다·
양강은 ‘객점 주인아저씨가 그러는데 닷새쯤 후에 천둥벼락이 칠 거래요·’라는 말로 대답을 주었다·
객점 주인이 말한 천둥벼락은 당연히 남궁유룡의 별호인 뇌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비록 날짜는 이틀이나 어긋났지만 과연 남궁유룡은 하늘에서 벼락과 함께 등장했었다·
잠깐 상념에 빠진사이 군중은 어느새 남궁유룡에 이어 나를 안주 삼아 신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내가 지난 이레 동안 백포산군에게 하루에 한 번씩 개 맞듯이 맞으면서 버틴 이유가 남궁유룡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사람들은 매우 놀라워했다·
군중이 놀라고 감탄하는 내용들이 통천방의 흑도들에게는 고스란히 분기탱천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들은 여태 내게 속았다는 사실에 손발을 부들부들 떨었다·
특히 백포산군에게 얻어맞아 얼굴이 나 못지않게 퉁퉁 부은 석삼두는 콧김을 펑펑 뿜어대며 씩씩거렸다·
도화곡 멸문 이후만 믿고 통천방의 전 재산을 탈탈 털어서 표행비를 댔는데 갑자기 뇌검이 나타나는 바람에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으니 얼마나 속이 타겠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도화곡의 곡주 이막하가 남궁유룡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남궁 선배님을 뵙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이막하의 말을 따라하며 일제히 포권지례를 올렸다·
“남궁 선배님을 뵙습니다·”
일문을 이끄는 수장은 타 문파의 사람을 대할 때 그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문파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이막하의 뒤를 이어 인사한 다른 제자들의 선배님이라는 호칭 또한 지금 상황에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도화곡의 제자들은 한마디로 자신들은 낮추고 남궁유룡은 깍듯이 높였다·
남궁유룡의 무림 배분이 높고 도화곡에 여러 가지 큰 도움을 준 은인이어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그가 죽은 사조의 오랜 벗이자 연인(?)이기 때문이다·
도화곡의 제자들에게는 남궁유룡이 저승에 있을 여종매가 자신들을 지켜주기 위해 보낸 사람처럼 느껴질 것이다·
남궁유룡은 남궁유룡대로 일문의 문주를 대하는 예를 갖추어 이막하에게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했다·
“영사(令師)의 안타까운 소식은 들었소이다· 지난봄 남궁장에서 뵈었던 것이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이야· 늦었지만 위로의 말씀을 전하외다·”
“선배님과 남궁세가의 배려로 문파의 대사를 무사히 치를 수 있었노라시며 제게 자리를 잡는 대로 꼭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한데 이렇게 먼저 걸음을 하시게 만들어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곡주와 노부의 인사는 한두 마디로 끝낼 수 없을 듯하외다· 우선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한 후 천천히 회포를 풀도록 하십시다·”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이막하와의 짧은 대화를 끝낸 남궁유룡은 손녀인 남궁소소에게도 쓰윽 눈길을 주었다·
눈에 넣고 다녀도 아프지 않을 손녀가 행여라도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는 것이다·
섭부용과 함께 멀쩡한 모습으로 내 호법을 서고 있던 남궁소소가 안심하시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남궁유룡은 그제야 백포산군을 향해 돌아섰다·
이어 이막하를 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를 만큼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랜만이오· 산군·”
“삼십 년쯤 된 것 같군요·”
“애뇌산에 영초가 많다더니 여전히 정정하시외다·”
“가주께서 도화곡 이전에 큰 역할을 하셨다는 얘기는 들었소이다만 수천 리 길을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오실 줄은 몰랐소이다·”
“제자의 일은 안타깝게 생각하외다· 상생의 길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이쯤에서 걸음을 멈춰주시길 바라오·”
“귀하의 한마디에 돌릴 걸음이 아니외다·”
“도화곡이 성도에 입성할 당시 수천 명의 흑도들을 이끌고 나타나 앞을 막아선 것은 귀하의 제자였소이다·”
“흑도놈들이 죽기 살기로 자신들의 땅을 지키려고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여기에 무슨 도리를 따진단 말이외까·”
“흑도들이 했던 짓을 문제 삼을 요량이었다면 이 몸이 사천구룡방의 잔당들을 지금까지 가만히 놔두었을 것 같소이까?”
그러면서 남궁유룡은 공터의 가장자리에서 조금 뒤쪽으로 물러나 있는 통천방의 흑도들을 한차례 쓸어 보았다·
삼백여 명의 흑도들 얼굴이 한순간 잿빛으로 변했다·
다시 백포산군에게로 시선을 옮긴 남궁유룡이 말을 이어갔다·
“나는 지금 귀하의 복수행을 문제 삼는 것이외다· 아시다시피 귀하의 제자와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였던 전대 도화곡주 또한 며칠 후 죽음을 맞이했소이다· 바로 귀하가 전수한 그 구천홍염장의 일장을 맞고· 이미 당사자가 죽고 없거늘 대관절 누구에게 복수를 한단 말이오?”
남궁유룡의 말도 맞고 백포산군의 말도 맞는 것 같았다·
한데 나는 마지막에 남궁유룡이 한 저 말이야말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태의 본질을 꿰뚫는 일갈이라고 생각했다·
여종매와 뇌정갑의 승부는 여종매의 승리로 끝났지만 결국 그녀도 목숨을 잃는 것으로 성도 입성의 대가를 치루었다·
사천구룡방이 아홉 개의 흑도방파로 와해되기는 했어도 그 방도들은 여전히 살아서 패악질을 자행하고 다니니 이 또한 복수의 충분한 명분이 되질 않았다·
백포산군은 애초부터 흑도와 백도 혹은 정사지간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내키는대로 사는 인간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제자가 평생을 일구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천구룡방에 대한 애정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일천 군중이 과연 그렇다는 듯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조하는 말을 웅성웅성 쏟아냈다·
백포산군은 두 개의 눈동자로 화염을 실처럼 뽑아내면서도 입술을 꼭 다물었다·
무언가 더 할 말이 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애써 뱃속으로 삼키는 것 같았다·
그러다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중언부언할 것 없소이다· 귀하에게는 귀하의 정의가 있고 내게는 나의 정의가 있으니 무림의 방식으로 승부를 봅시다·”
“원한다면 기꺼이·”
“그러나 나는 이미 천룡표국의 표사를 통해 비무첩을 도화곡주에게 전달했고 그와 아직 끝내지 못한 승부가 있소이다· 귀하의 도전은 도화곡주와의 승부가 끝난 후에 받아 주도록 하겠소·”
“내가 그 순서를 바꾸어야겠소이다·”
“귀하가 무슨 명분으로?”
저 영감탱이 말하는 것 좀 보소· 조금 전에는 순서만 바꿀 뿐이니 어쩌니 하며 내 팔을 자르려고 하더니만·
“강호무림의 늙은 협객이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마두의 패악질을 더는 두고 보지 않겠다는데 명분은 무슨 얼어 죽을!”
남궁유룡은 백포산군의 복수행을 마두의 패악질로 규정해 버렸다·
그의 일갈이 천둥소리처럼 울려퍼졌다·
“기어이 길을 막겠다면 치우고 가는 수밖에!”
말과 함께 백포산군이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린 채 남궁유룡을 향해 비스듬히 섰다·
아래로 늘어뜨린 두 주먹에선 벌써부터 붉은 기운이 넘실대고 있었다·
“한때는 귀하와 밤새도록 자웅을 겨루며 무공을 논하던 시절도 있었지· 그러나 단 한 번도 살수를 쓴 적이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누가 더 강한 지를 가리게 되겠군·”
지잉!
남궁유룡은 별다른 동작을 취하지 않았다·
단지 아래로 늘어뜨린 용두장검에 진기만 주입했을 뿐이었다·
한데도 검신 주변에 새파란 기운이 어리면서 징징 울어댔다·
두 거물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 살기에 마주 보고 선 공간의 바닥으로부터 흙먼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십 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한 수십 년을 두고 전설이 되어 전해질 무림사의 일대사건 앞에서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죽이고 지켜 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두 개의 신형이 호롱불 꺼지듯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걸 인지하자마자 중간쯤의 허공에서 대포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고 번갯불이 작렬하듯 번쩍였다·
뻐벙뻥뻥뻥!
꽈광꽝꽝꽝!
이막하를 상대할 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붉고 밝은 구체가 다발로 쏘아졌다·
그건 차라리 불덩어리에 가까웠다·
그때마다 반 장 길이의 새파란 번개가 나타나 불덩어리를 찢어발겼다·
불덩어리가 찢겨 사라질 때마다 엄청난 풍압이 일어나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두 거물이 각각 장법과 검법에 담아낸 기운이 부딪히고 폭발하면서 집채만한 경파(勤波)가 생겨나는 것이다·
장원의 대문이 쿵쿵 울어댔고 담장의 처마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들썩거렸다·
공터 가장자리에 심겨 있던 수백 년 수령의 수양버들은 태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가지가 사방팔방으로 휩쓸렸다·
한데도 두 사람의 신형은 여전히 궤적으로 혹은 흐릿한 형체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그저 두 개의 커다란 궤적이 지면과 허공을 휘젓고 다니며 서로에게 대포를 쏘고 번개를 작렬시키는 광경이었다·
흡사 붉은 용과 푸른 용이 한데 뒤엉켜 싸우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백포산군과 뇌검이 쏘아대는 저 가공할 빛덩어리들이 말로만 듣던 권강이니 검강이니 하는 강기(罡氣)의 일종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미친!’
극도의 흥분을 느낀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어 고도의 집중력과 함께 세상을 느리게 보는 이능력까지 발동시켰다·
그러자 궤적으로만 존재하던 두 거물의 신형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움직임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격돌하되 부딪히지 않고 스치되 격돌하지 않았다·
공수의 구분은 의미가 없었다·
거리는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개념으로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일보를 옮기는 찰나의 순간에도 십여 초식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단 일 합의 격돌을 위해 신형을 수차례나 비틀고 꺾고 미끄러지기도 했다·
초서가 격을 벗어나면 신선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했다·
격을 벗어나 한없이 자유로운 경지에 접어든 거인들의 무학을 나로서는 도저히 측량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경지란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보법과 초식의 어우러짐이 만들어내는 오묘한 경지의 경이로움일 뿐 쾌속한 경지만을 놓고 보자면 나도 왠지 저 싸움에 끼어들어 잠깐은 함께 놀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잠깐은·
그 잠깐에도 몇 십 초식이 오고 갈 것이다·
‘오십 초식이 정말 절묘했구나·’
만산의 홍엽이 하나둘씩 지기 시작하는 가을 사천성 성도 마방산 기슭에서 동시대를 풍미했던 두 명의 거물은 일생 동안 갈고닦은 무공을 아낌없이 쏟아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이 싸움의 끝에 이르러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을 것이다·
만약 남궁유룡이 죽는다면 이막하도 죽는다·
남궁유룡과 이막하의 죽음을 남은 사람들이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남궁소소는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소맷자락 끝에 꽂아둔 비격쌍뇌창을 뽑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앞서 백포산군과 싸울 때도 이걸 세 번이나 출수했다·
한데 그때마다 백포산군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강력한 장력으로 날려 버렸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귀물인 바늘 두 개를 전부 잃어버릴 뻔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비격쌍뇌창과 선천오법술에도 천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기감에 나무를 뽑을 정도의 강력한 장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막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좀 달랐다·
터럭 한 올과 연결된 신경조차 온통 남궁유룡에게 쏠려 있는 상황이라면 천하의 백포산군도 어찌할 수 없다·
아무도 모르게 승부의 향배를 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안될 말!’
하루라도 도둑질을 하면 죽을 때까지 도둑이다·
오늘은 바늘을 훔치지만 내일은 황소를 훔치려 들 것이다·
만약 남궁유룡이 죽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감당해야 한다·
나는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뗐다·
그때였다·
꾸아앙!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불덩어리가 통천방 진영을 정통으로 덮쳤다·
앞쪽에 서 있던 흑도 다섯 명이 입으로 피를 쭉 뿜으며 대여섯 장이나 날아갔다·
놀란 동료들이 후다닥 달려가서 상태를 살폈다·
그와 동시에 작렬하던 번갯불이 뚝 그치며 남궁유룡이 대여섯 장 밖 뒤로 날아가서 멋지게 착지했다·
남궁유룡이 일방적으로 공세를 멈춘 것이다·
그 바람에 격렬하던 싸움이 한순간 중단되었다·
그렇게 맹렬히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머리카락 한 올 옷자락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심지어 호흡조차 여태 바둑을 둔 사람들처럼 차분했다·
잠깐 사이 무려 삼백여 초의 공방을 주고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미친 노인네들 같으니라고!’
불덩어리를 맞은 통천방의 흑도들은 검은 피를 한 차례 더 토해낸 후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만약 흑도들이 없었다면 뒤쪽의 일천 군중 중 누군가가 횡액을 당했을 것이다·
“장원으로 옮겨 계속 싸우는 것이 어떻겠소?”
“무슨 뜻이오?”
“우리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순 없소· 귀하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소·”
남궁유룡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백포산군은 살짝 당황해했다·
뿐만 아니라 이막하와 도화곡의 제자들까지 전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여태 백포산군이 도화곡의 장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목숨 걸고 싸웠는데 남궁유룡이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끌어들이려 하니 당황할밖에·
남궁유룡이 이막하에게 물었다·
“곡주께서는 잠시 양해를 해주시겠소이까?”
“멀리서 온 손님을 이레나 밖에서 머물게 했으니 푸대접도 이런 푸대접이 없었군요· 두 분 모두 안으로 드시지요· 즉시 대연무장을 비워 놓으라고 하겠습니다·”
“고맙소이다·”
이막하는 잠깐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
남궁유룡은 아직도 대답을 않고 멀뚱거리는 백포산군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제 와서 두려운 것이오?”
“천만의 말씀· 들어갑시다·”
이막하가 앞장을 섰고 남궁유룡과 백포산군이 뒤를 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때까지도 장원 입구를 지키고 있던 도화곡의 제자들 절반이 우르르 따라 들어가고 난 후 정문이 ‘쾅!’ 닫혔다·
남은 제자 절반은 입구를 지키며 검진을 펼쳤다· 열 명으로 백 명을 상대한다는 멸살구곡대진이었다·
얼떨결에 백포산군을 놓친 통천방의 흑도들이 무력으로라도 정문을 뚫으려고 하는 찰나 멸살구곡대진을 이끌고 있는 칠검향의 향주 섭부용이 일갈을 내질렀다·
“문을 열려는 흑도들은 그 즉시 목을 베라!”
백포산군이 없는 통천방의 흑도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사승의 관계를 맺으며 체계적인 무공을 익힌 도화곡 제자들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하룻밤에라도 쓸어버릴 수 있다·
석삼두는 움찔 놀라며 멈춰 섰다·
***
이막하를 비롯해 이백여 명의 도화곡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궁유룡은 드넓은 연무장에서 다시 백포산군과 마주하고 섰다·
백포산군도 발끝을 살짝 벌린 다음 양손에 서서히 경력을 담아갔다·
아직 끝내지 못한 싸움을 이어가려는 일촉즉발의 순간 남궁유룡이 갑자기 용두장검을 검갑에 ‘철컥’ 하고 집어넣어 버렸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뒷짐을 지고 서서 백포산군을 응시했다·
백포산군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무얼 하자는 거요?”
“나는 상대의 곤란함을 틈타 승리를 가로채는 소인배가 아니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오?”
“속일 생각일랑 마시오! 귀하의 몸은 처음부터 나와 결전을 치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소· 내 말이 틀렸소이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포산군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흡사 금방이라도 터져서 핏물을 뿜어낼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선 채로 검붉은 피를 한 줌이나 토해냈다·
그제야 붉게 충혈되었던 눈이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왔다·
남궁유룡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나는 한순간 내가 백포산군을 저렇게 만들었었나 하고 착각할 뻔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겨우 그를 여섯 번 때렸을 뿐이었다· 이막하도 계속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막하나 나와의 싸움 이전에 입은 내상이 확실했다·
그러다 남궁유룡이라는 극초절정의 고수를 만나 무리하게 내공을 운용하다 보니 기혈이 뒤틀린 것이고·
더불어 남궁유룡이 군중을 핑계 삼아 전장을 장원 안으로 옮긴 이유도 깨달았다·
무언가 석연치 않더라니 그는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백포산군이 자신의 검에 쓰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배려를 한 것이었다·
“낙타가 말라 보여도 천근의 고기가 있다더니 그 지경이 되어서도 그런 무지막지한 장법을 펼친 것이오?”
“수천 리를 쉬지 않고 달려와 진기가 한 줌밖에 남지 않은 몸으로 검강을 다섯 자나 뽑아낸 귀하가 할 말은 아닌 듯하오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