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미친 놈(4) >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을 깬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만치 앞에서 백포산군이 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저 미친 노인네가 아침 댓바람부터 또!’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돗자리며 표기를 챙기려 들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대로 백포산군은 이번에도 십여 장 앞에서 걸음을 뚝 멈추었다·
“일어나라· 싸우자·”
“또요?”
“날이 밝았으니 약속한 하루가 지났다·”
천근처럼 무거운 눈까풀을 들어 올리며 동쪽을 보았다·
과연 해가 마방산 봉우리 위로 막 떠오르는 중이었다·
“아직 아침도 안 먹었습니다·”
“어차피 다 게워낼 텐데 아침은 먹어서 무얼 하려고·”
‘야 이 미친 늙은이야!’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꿀떡 삼켰다·
그와 계약을 맺고 표행을 시작한 지 오늘로 꼭 이레째였다·
그사이 나는 대로를 지나 공터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나의 표행과는 별개로 백포산군은 매일 아침 이렇게 찾아와 싸움을 걸어왔다·
그의 요구이자 조건은 하나였다·
천금풍을 펼쳐 도망가는 대신 자신을 상대로 오십 초식만 버티면 남은 하루 동안의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는 것·
잠자는 동안의 안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나는 그때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지난 엿새 동안 그와 여섯 차례에 걸쳐 모두 삼백여 초식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박룡수와 귀영무와 십초박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그동안 익혔고 또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웠다·
그 결과 나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옷은 찢어져 걸레가 따로 없고 머리카락은 봉두난발이 된 지 오래였으며 장력을 얻어맞은 왼쪽 얼굴은 잔칫날 아이들이 차고 노는 돼지 오줌보처럼 부풀어 올랐다·
여기까지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고 속으로는 더욱 심각했다·
온몸 구석구석 피멍 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급기야 사흘 전부터는 아침에 볼일을 볼 때마다 피똥을 한 바가지씩 쏟아내는 중이었다·
그나마 본원진기를 살피는 부적의 기운과 가공할 공력 그리고 용린신갑이 있었기에 치명적인 내상을 입는 것만큼은 피했다·
만약 이것들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그리고 백포산군이 오십 초식을 모두 펼치자마자 약속한대로 공방을 뚝 그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길바닥에서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을 것이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삼백여 초식의 공방을 주고받는 동안 나도 백포산군의 손목과 허벅지와 어깨 등을 여섯 차례나 가격하는 데 성공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때렸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어떤 가격도 그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한 방은 되지 못했다·
한데도 백포산군은 치명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놀라고 자존심 상해했다·
특히 내가 오십 번 중에 한번은 자신보다 빠르거나 전권을 뚫는 초식을 펼쳤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질 못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가 익힌 보법과 권법에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집착과 호기심을 보였다·
그런 연유로 오십 초식의 공방을 가까스로 버틴 내가 쓰러져 신음하는 동안 그는 수양버들 아래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나와의 싸움을 끊임없이 복기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어김없이 이렇게 찾아와 하루 동안의 안전을 조건으로 싸움을 걸어왔다·
지난 하루 동안 생각해낸 새로운 수법을 내게 적용해 보려는 것이다·
“파훼법은 찾으셨습니까?”
“내가 널 이기지 못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거늘 아침부터 무슨 파훼법 타령이더냐· 잔말 말고 싸울 준비나 하거라·”
“아침부터 싸움을 하자고 한 건 선배님이십니다·”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말을 하는 백포산군의 눈동자가 어제와 달리 별처럼 반짝였다·
지난 여섯 번의 싸움으로 그는 내 무공에 대한 탐색을 완전히 끝낸 것 같다·
그리고 오늘 오십 초식 안에 나를 확실히 쓰러뜨리고 표물을 빼앗을 자신이 있었다·
그가 그렇다면 그럴 것이다·
“확실히 파훼법을 찾으신 것 같군요·”
“그것보다 더 재밌는 걸 알아냈지·”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좀 가르쳐 주시죠·”
“사십 년 전 청해성에 예사롭지 않은 권맥(奉脈)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당대의 전인인 맹인 권사는 겨우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언젠가 문일지백의 무재를 만나면 반드시 강호를 진동시킬 공부라고· 아무래도 그 무재가 나타난 것 같군·”
그가 말한 권맥은 비영문이다·
맹인 권사는 북해투왕 혁방세의 사부이자 나의 사조인 유성권(流星奉) 상남포를 말하는 것이었고·
애석하게도 혁방세의 대에 이르기 전까지 비영문의 귀영무와 십초박은 무학이 지닌 가치에 비해 크게 명성을 떨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반면 혁방세가 동북삼성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북해투왕이라는 명성을 얻을 무렵에는 백포산군이 운남성의 애뇌산에 은거를 한 상태였다·
나는 그제야 장법의 끝을 본 백포산군이 권법의 끝을 본 북해투왕의 무공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활동하던 장소도 시대도 다른 나머지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두 명의 거인은 서로 만나서 손속을 겨룰 일이 없었던 것이다·
해서 백포신군은 내가 바로 그 무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사실은 나 이전에 이미 북해투왕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거늘·
천천히 몇 걸음을 옮겨 보았다·
어깨가 축 처지고 가랑이 쪽을 중심으로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럼 시작할까?”
“잠깐만요·”
나는 한 손을 뻗어 백포산군을 멈추게 했다·
이어 행낭을 뒤져 엿새에 걸쳐 싸우는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운철검을 꺼냈다·
보옥이 요란하게 박힌 황금빛 손잡이의 단검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보옥과 황금을 보고 그러는 모양인데 이 단검의 진짜 가치는 바로 운철로 만든 날에 있었다·
천하십대고수 답게 백포산군은 바로 알아보았다·
“귀물을 가졌군·”
“장인일수록 좋은 연장을 쓰는 법이죠·”
“검으로 아직 단련이 부족한 지(指)를 대신한다라· 네 놈이야말로 파훼법을 찾은 모양이구나· 과연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이야·”
“예?”
“무릇 권(奉)을 막는 것이 장(掌)이고 장을 뚫는 것이 지(指)이고 지를 부러뜨리는 것이 권(奉)이다· 이거 너무 싱겁게 끝나버리나 했더니만 오늘이야말로 가장 재밌는 싸움이 되겠군· 음하하하!”
내공이야 괴수급이지만 초식은 수십 년씩 수련한 것이 아니다 보니 아직은 몸에 완전히 배지 않았다·
해서 맨주먹보다 짧아도 칼을 하나 쥐는 것이 내게는 여러모로 편하고 또 실전에서도 유리했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숨겼다가 꺼냈을 뿐인데 저 미치광이 노인은 이상한 소리를 하다가 갑자기 혼자서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러다 마침내 웃음이 끝나는 순간 운남에서 온 미치광이 노인과 항주에서 온 미친 표사의 일곱 번째 싸움이 시작되었다·
뻐버벙!
연이은 백포산군의 격공장에 허공의 세 지점에서 강렬한 폭발이 이어났다·
한순간 대기가 종잇장처럼 일그러져 보였다·
폭발을 한번은 피하고 한번은 비스듬히 비켜 맞고 한번은 정통으로 얻어맞은 나는 막강한 경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튕겨 날아갔다·
뱃속이 진탕 당하며 오작육부가 뒤집히는 것 같았다·
만약 삼십 년 정도의 내공을 지닌 일류급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뱃속의 내장이 가닥가닥 끊어지면서 즉사해 버렸을 것이다·
허공에서 세 차례나 맹렬하게 회전해 놓쳐버린 중심을 잡은 나는 평사낙안의 수법으로 착지하려 했다·
“요 미꾸라지 같은 놈!”
귀청을 찢는 일갈과 함께 어느새 눈앞에 나타난 백포산군이 아직 완전히 자세를 잡지 못한 그래서 한순간 허공에 거꾸로 선 내 목을 향해 좌수를 뻗어왔다·
대경실색한 나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도 발작적으로 십초박의 선팔초를 출수했다·
한 손에는 주먹 대신 운철검이 들려 있어서 더욱 위력적인 살초로 변했다·
“죽엇!”
퍼퍼퍼퍼퍼퍽!
하지만 웬걸 어찌 된 영문인지 방금까지도 눈앞에 있던 백포산군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꼴사납게 머리통부터 땅바닥에 쿵 찧으며 떨어지는 순간 뒷덜미에서 무언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다급히 나려타곤의 수법을 펼치며 앞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내가 구르는 방향을 따라 기둥뿌리 같은 백포산군의 다리가 바닥을 힘차게 찍어왔다·
쿵! 쿵! 쿵!
세 번을 가까스로 피한 나는 네 번째에서 박자를 맞춰 백포산군의 발등을 운철검으로 질풍처럼 찍어갔다·
“죽엇!”
어차피 속도로는 그를 따라잡지 못하니 요행에 맡긴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그게 먹혔고 백포산군이 한순간 공격을 멈추었다·
그 틈을 타 두 다리를 허공으로 소용돌이치듯 휘저으며 신형을 솟구쳤다·
가까스로 화를 피했다 싶은 순간 눈앞에서 손바닥 모양의 화염이 급격하게 커지고 있었다·
‘이게 무슨!’
백포산군이 바로 앞에서 좌장을 출수한 것이다·
죽을힘을 다해 화염의 정중앙으로 운철검을 찔러 넣었다·
“죽어라!”
검끝이 백포산군의 왼쪽 손바닥을 뚫으려는 순간 이미 그가 떨친 구천홍영잠의 장력이 내 왼쪽 가슴에 닿고 있었다·
뻐엉!
막강한 장력 이 심장을 강타하고 오장육부와 뼈와 근육을 거쳐 뇌를 파고 들었다·
숨이 턱 막히는 충격과 함께 한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붕 떠오르고 어딘가로 한참이나 날아가고 다시 낙하하는 게 느껴졌다·
잠시 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등짝에 무언가 닿으면서 내 몸도 낙하를 멈추었다·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고통이 전혀 없었다·
다만 주변의 모든 소리가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팔다리는 움직이지도 않았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파란 하늘이 팽글팽글 돌더니 어느 순간엔 그것마저 사라지고 세상이 온통 칠흑으로 변했다·
한번 캄캄해진 세상은 좀처럼 밝아질 줄 몰랐다·
죽는 건가?
이렇게?
’오초식만 버티면 되었는데····‘
저 멀리 산릉선에서 도화곡의 구대 제자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는 노래를 부르며 오고 있는 게 보였다·
주변엔 온갖 봄꽃들이 만발했다·
대별산을 넘어 올 때 보았던 풍경이었다·
그게 갑자기 지금 눈에 왜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였다·
도화곡의 제자들이 산꼭대기에서 척후를 살피는 나를 발견하고는 노래를 부르다 말고 일제히 고함을 질러댔다·
“사숙!”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입으로 검은 피를 왈칵 쏟았다·
핏덩어리를 쏟아내자 막혔던 숨통이 트이며 가까스로 숨을 쉴 수 있었다·
“헉헉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공터 너머에서 도화곡의 구대 제자들이 아우성치며 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통천방의 흑도 삼백여 명이 도검을 뽑아 들고는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도화곡 제자들과 살벌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뒤쪽에서는 일천여 명에 달하는 군중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가까스로 일어나 앉았다·
백포산군은 그런 나를 무슨 괴물 쳐다보듯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새 내공이 일갑자 정도 늘었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소문에 떠도는 화리의 내단을 네가 먹었더냐?”
“···!”
“화리의 내단을 복용한 후 지난 엿새 동안 나와 싸우는 틈틈이 운기행공을 통해 진기를 흡수한 모양이군· 어쩐지 때려도 때려도 다음 날이면 멀쩡하게 털고 일어나더라니·”
“오래 사셔서 그런지 귀신이 다 되셨습니다·”
“상승 무공에 영약에 남들은 평생을 가도 만나지 못할 기연을 네 놈은 잘도 만나고 돌아다니는구나·”
“운이 좋았습니다·”
“행운이 거듭되면 운이 아니다· 너의 뛰어난 무재와 타고난 근성과 두려움을 모르는 기백이 그것들을 불러들인 것이지· 그런 걸 두고 연이라고 한다·”
“···?”
“노부를 상대로 삼백초식 넘게 버텼으니 그만하면 잘 싸웠다· 어딜 가서도 절정고수 소리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니 당황스럽군요·“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겠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군요·”
“표물 운송에 실패했으니 네놈이 좋아하는 표단에 적힌대로 팔 한 짝을 내놓아야 한다·”
“표물은 아직 제 품속에 있습니다만·”
“팔을 자른 후 내가 가져갈 것이니라·”
“순서가 바뀌었군요·”
“순서만 바뀌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