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 미친 놈(2) >
나는 도화곡의 장원으로부터 삼십여 장 떨어진 대로 한복판에 깃발을 꽂고 돗자리를 깔았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정문 앞 공터의 중간쯤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백포산군과의 일전에서 이십여 장을 튕겨 나가고 또 도망치기까지 하면서 이렇게 멀어졌다·
백포산군은 골치가 아픈지 공터 오른쪽 가장자리의 커다란 수양버들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 전 석삼두가 그에게 다가가 허리를 구부리고는 한동안 무언가를 열심히 조잘대다가 어디론가 사라진 이후부터였다·
또 무언가 작당을 하는 모양인데 일단 그늘을 찾아서 들어간 것부터가 지금 당장은 싸울 생각이 없음을 말해 주었다·
도화곡의 제자 이백여 명은 공터를 가운데 두고 통천방의 흑도 삼백여 명과 대치 중이었다·
백포산군이 한발 물러나면서 싸워야 할 대상이 자연스럽게 바뀐 것이었다·
덕분에 사대장로들을 비롯해 부상 당한 제자들이 장원 안으로 호송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해 검진을 점검하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대로를 가득 채웠던 군중은 내 뒤쪽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그들은 무인의 기감이 어느 정도인지 개념이 없다보니 내가 듣는 줄도 모르고 자기들끼리 신나게 떠들어 댔다·
“백포산군이 정말로 걸음을 멈출 줄이야·”
“그냥 쳐들어가자니 자기도 찝찝한 거지·”
“하기사 표왕에 이어 뇌검의 이름까지 나왔으니·”
“백포산군 같은 고수를 조련하는 표사라니· 과연 풍운비룡의 명성이 사천까지 전해질만 하군·”
“조련까지는 너무 나갔어· 내가 보기엔 풍운비룡도 지금 목숨 걸고 도박을 하는 중이야·”
“미친 인간이지· 세상에 사람이 없어서 천하십대고수를 상대로 도박을 하다니·”
“괴수와 미친놈의 대결이라· 간만에 볼만한 구경거리가 생겼군·”
내가 자리 잡은 곳은 대로라고는 해도 마방산의 산세가 남아있어 살짝 비탈이 졌다·
산기슭에 사람들이 오고 가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길이라는 뜻이다·
이런 길은 보통 계곡을 따라 생겨난다·
도화곡의 장원으로 이어지는 길옆에도 아이들 멱 정도는 감을만한 작은 계곡이 졸졸 흘렀다·
어차피 당분간은 오가는 사람도 없을 터· 나는 돌덩어리를 두 개를 주워다 길 한복판에 팔(八)자 모양의 화덕을 만들었다·
본래 표행 중에 만드는 화덕은 장소와 시간과 기후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팔자 화덕’은 그중에서도 달랑 돌덩어리 두 개로만 만드는 가장 간단한 방식이었다·
다음에는 길 밖 비탈에서 마른 나뭇가지들을 잔뜩 주워다가 화석을 치고 불을 지폈다·
불길이 어느 정도 일어나자 팔자 화덕 위에 미리 준비해둔 납작하고 평평한 돌을 얹었다·
도화곡 제자들과 통천방 흑도들과 일천 군중은 어느 순간부터 대화를 멈추고 나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 미친 인간이 이번엔 또 무슨 이상한 짓을 하고 있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돌판이 달궈지는 동안 나는 발소리를 죽이며 길 아래의 계곡으로 내려갔다·
이어 황소 대가리만한 바위를 골라 조심스럽게 들어다가 물속에 반쯤 잠겨 있는 황소 몸통만한 바위를 힘껏 내리쳤다·
꿍!
석질 내부를 관통하는 묵직한 굉음과 함께 소대가리 바위가 물속으로 첨벙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손바닥만한 물고기 다섯 마리가 둥둥 떠올랐다·
재빨리 물고기를 건진 다음 바위 아래의 바닥도 신나게 더듬었다·
물속에서 손을 뺐을 때는 토실토실 살 오른 가재 예닐곱 마리가 들려 있었다·
“오오오!”
이게 뭐라고 군중 속에서 작은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길 위로 올라온 나는 행낭에서 작은 기름 통을 꺼내 적당히 달아오른 돌판 위에 조금 부었다·
이어 잡은 물고기와 가재를 나란히 얹었다·
치이이익!
하얀 수증기와 함께 물고기와 가재 주변으로 작은 거품들이 뽀글뽀글 올라왔다·
“딱 적당히 달귀졌네·”
이번엔 소금과 후추를 꺼내 생선 위에다 조금 뿌렸다·
칼집을 어슷어슷 내면 간과 양념이 더 잘 배지만 대신 생물은 뒤집을 때 살이 다 깨지고 흩어져 버린다·
도화곡이 지척에 있었지만 표행을 선언한 이상 지금부터는 음식을 지원받는 건 커녕 만나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접촉하는 순간 도화곡의 제자를 만났는데 왜 표물을 전달하지 않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이 생기면서 어렵게 쌓아 올린 표행의 논리가 무너질 수가 있다·
고작 삼십여 장에 불과한 여정이지만 진짜 표행을 하는 것처럼 모든 걸 나 스스로 자급자족 해야 한다·
그걸 알기에 량표위를 한 이후부터는 남궁소소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 가까이 다가오질 않고 있었다·
“술도 한 병 있으면 좋으련만·”
나무 꼬챙이 두 개로 지글지글 익어가는 물고기와 가재를 툭툭 건드려 살이 바닥과 붙어 있지 않음을 확인했다·
이어 손바닥에 내공을 약간 주입해 돌판의 끝을 툭 쳤다·
그러자 물고기 다섯 마리와 가재 일곱 마리가 살짝 튀어 오르며 몸을 홱 뒤집었다·
“오오오!”
군중 속에서 또다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괜스레 멋쩍어진 나는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지켜보고 있던 통천방의 흑도들은 하나같이 어디서 저런 미친 놈이 나타났을까 하는 표정들이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두두두두!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 오른쪽 모퉁이로부터 십여 기의 인마가 튀어나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질풍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장원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도화곡의 제자들도 그들과 대치하고 있던 흑도들도 내 뒤쪽 대로에 앉아서 구경하던 일천 군중도 전부 벌떡 일어났다·
잠시 후 썰물처럼 갈라진 군중 사이로 나타난 기마인들은 석삼두와 그의 수하 넷 그리고 처음 보는 다섯 명의 칼잡이들이었다·
다섯은 하나같이 용 같고 범 같은 기세를 풍기는 장년인들이었다·
볕에 얼굴을 얼마나 그을렸는지 곤륜노처럼 새까맸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들 다섯을 알아본 군중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체 뭐하는 작자들이기에·’
께름칙한 마음이든 나는 슬그머니 길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그들은 길 한복판에 있는 화덕을 지나친 다음 백포산군의 앞에 가서 말을 멈추었다·
이어 훌쩍 뛰어 내려 일렬로 섰다·
석삼두가 자신이 데리고 온 칼잡이들을 서둘러 소개했다·
“아까 말씀드린 분들입니다· 이곳 성도에서 가장 큰 동진표국 내에서도 삼십 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표사들이시지요·”
군중의 술렁임이 본격적으로 퍼져 나갔다·
통천방 흑도들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도화곡의 제자들은 반대로 딱딱하게 굳었고 군중은 갈수록 흥미진진하다는 표정들이었다·
‘표사로 표사를 잡겠다?’
다섯 명의 표사들이 백포산군을 향해 절도있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한 명 한 명의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까지 백포산군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는 석삼두가 만든 것이 분명한 이 판에 끼어드는 그림을 왠지 불편하고 못마땅해하는 것 같았다·
마치 간청을 하니 하기는 하는데 이건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는 듯·
이윽고 인사가 끝나자 석삼두가 무인들에게 한차례 눈짓을 하고는 턱으로 나를 가리켰다·
마치 ‘저놈이 내가 말한 그놈이오·’라고 말하는 듯했다·
다섯 명이 석삼두와 함께 내게로 다가왔다·
“하필이면 밥때에·”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나는 돗자리와 행낭과 표기만 빠르게 챙겨서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잠시 후 다섯 명이 화덕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도 그들과 대여섯 장의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통나무처럼 두꺼운 목에 각진 턱 그리고 호랑이의 그것 같은 눈을 가진 장년인이 내게 포권을 쥐어 보이며 말했다·
“이 몸은 동진표국의 악중양이라고 하외다· 함께 온 이들은 나의 동료들이고· 사천성 사람들은 우리를 가리켜 동진오표라고 하오·”
“항주 천룡표국의 이정룡입니다·”
“당금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풍운비룡을 이렇게 보는구려· 만나서 반갑소이다·”
“변변치 않은 이름을 추켜 세워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덧붙여 타성의 표사가 나타나 이렇게 소란을 피워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만하면 서로 예의는 충분히 차린 것 같으니 본론을 말하겠소· 오늘 우리가 이렇게 찾아온 것은 여기 계신 석 당주 아니 석 방주의 부탁으로 귀하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외다·”
“타성 사람에게 길을 묻지는 않을 테고 아마도 저의 표행과 관련한 것이겠지요?”
“참고로 우리 동진표국은 의뢰를 받음에 있어 흑백을 따지지 않거니와 통천방과는 오랜 거래처의 관계를 유지해 왔소이다· 이에 부득불 나서는 것이니 미리 양해를 구하는 바이오·”
거래처는 개뿔·
흑도방파인 통천방이 무얼 운송할 일이 있어 동진표국의 오랜 거래처가 되었겠나·
분명 통천방의 전대 방주인 노청봉이나 죽은 뇌정갑과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을 것이다·
표사들도 그렇고 흑도들도 그렇고 다 같이 칼밥을 먹는 처지이다 보니 가까이 지내는 경우가 생각보다 흔했다·
사실 표사들은 일의 특성 때문에라도 흑도들과 두루 안면을 트고 적당히 친분도 유지해 놓는 것이 좋았다·
당장 나만해도 걸핏하면 서호삼견을 불러다 쓰는 처지였다·
“물론이지요·”
악중양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대번에 웃음기를 거두고 석삼두에게 물었다·
“표단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없소이다·”
“표단이 없다고요?”
“저 젊은 표사만 하나 가지고 있소이다·”
“표단을 하나만 작성해 그걸 표사가 갖고 있다면 정상적인 계약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효의 명확한 사유가 되지요·”
“그게 아니고· 원래 두 장을 작성해서 각기 한 장씩 나눠 가졌는데 백포산군께서 홧김에 태워 버리셨소·”
인사가 끝나자마자 기세 좋게 나를 한 방 먹이려던 악중양은 살짝 당황한 듯했다·
이어 석삼두 쪽으로 고개를 뽑고는 군중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표단을 봐야 계약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절차도 거쳐야겠지만 표단이 없으면 모든 게 헛수고입니다· 어떤 쟁점에 대해 상대가 표단에 적혀 있다거나 혹은 없는 얘기다라고 잡아 떼버리면 그만이니까요·”
“저 표사에게 좀 보여 달라고 하면 안 되오?”
“남의 표단을 함부로 보여 달라고요? 그것도 타 표국의 표사들이 몰려와서? 까딱하다간 천룡표국과 동진표국 사이에 전쟁이 나는 수가 있습니다·”
“없는데 어떡하란 말이오?”
“이런 낭패가 있나·”
악중양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성도의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무도 당당하게 달려왔는데 까딱하다간 나와 통성명만 나누고 돌아가게 생겼으니 낭패스러을 밖에·
내가 물었다·
“죄송한데 거기 계속 서 계실 겁니까?”
“아직 볼일이 안 끝났소이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소이까?”
“고기 좀 뒤집어 주실 수 있나 해서요·”
“뭐라고요?”
“거기 화덕 위 돌판에 고기 말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불이 꺼졌기는 해도 돌판은 한번 달궈지면 열기가 오래가는 바람에·”
옆에 있던 장비 수염의 표사가 발끈하면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악중양이 얼른 한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막았다·
“오는 말에 예의가 없으면 가는 말도 고울 수가 없소· 젊은 후배 표사님께서는 언행을 조심해 주시기 바라오·”
“자신들과 아무 상관없는 표행의 문제점을 까발리러 온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것도 같은 업계에 계신 선배 표사님들께서·”
그러면서 나는 등에 짊어지고 있는 행낭의 빈틈에서 손을 쏙 꺼냈다·
이어 여러 번 접힌 종이 쪼가리를 휙 던졌다·
악중양이 종이 쪼가리를 낚아채고 물었다·
“이게 무엇이오?”
“표단입니다·”
“···!”
“그 정도면 한번 뒤집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장비 수염도 악중양도 석삼두도 나머지 표사들도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악중양이 장비 수염에게 턱으로 돌판을 가리켰다·
장비 수염의 입이 한 자나 튀어나오더니 화덕 옆에 쭈그리고 앉아 나무 꼬챙이로 물고기와 가재를 하나씩 뒤집기 시작했다·
그 사이 악중양은 표단을 읽어 내려갔다·
도화곡의 제자들도 통천방의 흑도들도 일천 군중도 모두 악중양의 입만 바라보았다·
저만치 수양버들 아래에 앉아 있는 백포산군도 악중양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도 속으로는 이 기괴한 표행을 한 방에 무너뜨릴 무언가가 있을까 하고 기대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대번에 무효를 선언하고 지금 나타난 자들에게 다시 의뢰를 하면 되니까·
처음 풍겼던 분위기와 달리 강호인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명분까지 은근히 신경쓰는 걸 보면 포악하기는 해도 아주 파렴치한 인간은 아닌 것 같았다·
이윽고 읽기를 끝낸 악중양이 말했다·
“먼저 표단을 보여 주셔서 고맙소이다·”
“별말씀을요·”
“위무표를 일으켰구료·”
“보셨다시피 그렇습니다·”
“본가인 천룡표국을 끌어들이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는 건 이 계약의 불합리함을 알고 훗날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서가 아니외까?”
“아닌데요·”
“그럼 무엇 때문이오?”
“저 혼자 먹으려고요·”
“음?”
“석 방주께서 표사님들을 서둘러 모셔 오느라 자세한 얘기를 못 전해드린 모양이군요· 뒷면에 보시면 표행비가 금전 일천 냥이라고 씌어 있을 겁니다· 한 장에 조항을 다 써넣으려다 보니 자리가 모자라서요·”
표단을 홱 뒤집어 살핀 악중양이 두 눈을 부릅떴다·
옆에 있던 네 명 표사들로 전부 다가와서는 표단에 머리통을 갖다 댔다·
그리고 하나같이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단일 표행으로 금전 일천 냥은 이른바 사대명표들이나 받는 액수였다·
그것도 목숨을 걸고 해야 할 정도의 중요한 표행일 때만·
금천 일천 냥은 이른바 명표들의 목숨값이었다·
대부분의 표사들은 평생을 가도 그런 액수의 표행은 구경조차 못하고 죽는다·
한데 이십 대 초반의 새파랗게 젊은 내가 자신들의 눈앞에서 그런 표행을 그것도 표주를 엿먹이면서까지 하고 있으니 놀라 자빠질밖에·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지 악중양이 석삼두에게 물었다·
“이 금액이 사실입니까?”
“그렇소·”
“선금도 주었고요?”
“전액 선불로 주었소·”
“아니 왜요?”
“달라고 하니까·”
“달란다고 다 주었단 말입니까?”
“설명하자면 기오·”
그러면서 석삼두는 저만치 수양버들 아래에 앉아 있는 백포산군의 눈치를 슬그머니 보았다·
백포산군이 시켜서 그리된 것이지만 감히 따질 수나 있겠나·
악중양도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 작게 혀를 차더니 내게 물었다·
“도착 날짜를 무기한으로 했던데···”
“언제 도착할지 몰라서요·”
“무기표는 아주 위험한 일에만 제한적으로 용인되는 일이외다· 그것도 반드시 표주의 배려가 있어야만 하고· 이건 꼼수라는 말을 피하기가 어려울 것이오·”
“보시다시피 저는 목숨을 걸고 표물을 운송 중입니다· 그리고 표주로부터 멱을 잡힌 상태에서 죽인다고 협박을 당하던 중이었기에 궁여지책으로 조건을 걸어 버린 것이고요· 이게 꼼수라면 살기 위해 그랬다고 치지요· 뭐·”
그러면서 나는 남궁소소의 말을 빌리자면 목매달아 죽은 시체의 그것처럼 시커멓게 멍든 목을 쓰윽 쓰다듬었다·
악중양이 또 석삼두를 돌아보았다·
멱을 잡고 죽인다고 협박했다는 게 사실인지를 묻는 것이다·
석삼두는 또 슬그머니 백포산군의 눈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악중양이 다시 내게 물었다·
“랍관정기와 량표위의 절차는 거치셨소이까?”
“사천에서는 그걸 안 하면 표행이 무효가 됩니까?”
“그런 건 아니외다만····”
“다행이군요·”
“젊은 표사님의 수완이 좋구려·”
“대충 하실 말씀도 떨어진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가 아직 저녁을 못해서요· 그렇다고 보시다시피 초대를 할 처지도 못 되고·”
악중양이 석삼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표단은 문제가 없습니다· 표사의 이름을 걸고 하는 대신 표행은 독점이어야 하고 중간에 누구든 일방적으로 취소하면 팔 하나를 내놓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데 거기다 표사는 만약 표물을 전달하지 못해도 팔 하나를 내놓겠다는 추가 조항까지 있어 시비를 삼기가 어렵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보통 노련한 표사가 만든 계약서가 아닙니다·”
“언제 표물을 전달 할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데 이게 정녕 아무런 문제가 없는 표행이라는 말이오?”
“태표(息鏡)라고 합니다· 강동에서는 만표(慢鏡)라고도 하고요· 쉽게 말해 고의로 표행을 느리게 하는 것인데 기간을 못 박아두지 않은 이상 욕을 할 순 있어도 계약을 무효로 하거나 파기하는 사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무슨 그런 개 같은 경우가!”
악중양이 나를 돌아보더니 표단을 휙 던져 주었다·
나는 허공에서 표단을 낚아채 다시 행낭 속에 잘 갈무리했다·
석삼두가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표단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악중양의 수중에 들어 왔을 때 화덕에 던져버려 확 태워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일천 군중이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그랬다간 백포산군을 천하의 파렴치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악중양이 다시 나를 보더시 살짝 조롱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가 시간을 너무 끄는 바람에 고기가 전부 타버렸구료· 이를 어쩐다····”
타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장비 수염이 나무 꼬챙이로 뒤집을 때 일부러 살을 전부 찢어 놓았다·
그 바람에 몇조각 보이는 살점들도 주워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가재는 아예 죄다 껍질이 터지면서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겨우 흔적만 남았고·
“어쩔 수 없지요·”
“실례가 많았소이다· 그럼 이만·”
석삼두와 동진오표가 뒤돌아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순간 나는 뒤쪽 군중 속에 있던 누군가를 가리켰다·
“거기 너·”
“저요?”
“너 ‘천하제’ 객점의 호객꾼 맞지?”
나와 눈을 마주친 열서너 살 가량의 소년은 양강이었다·
봄에 왔을 때 우리를 하오문주가 숙수로 있던 객점으로 안내한 바로 그 되바라진 호객꾼 녀석·
장담하건대 저 녀석도 하오문도다·
“그런데요·”
“배달도 되냐?”
“돈이 문제입죠·”
“가서 화과아랑 어향육사 하나씩 만들어 와라· 기름진 것만 먹으면 느끼하니까 단단면도 칼칼하게 한 그릇 말아 오고·”
“그걸 전부요?”
“얼마냐?”
“아흔 냥은 주셔야 합니다·”
“뭐가 그렇게 비싸?”
“아무래도 배달비가 붙으니까요·”
“배달 한 번에 일당을 다 챙기려 드네·”
나는 은전 석 냥을 툭 던져 주었다·
은전 한 냥이 동전 백 냥과 교환된다·
쉽게 말해 무려 삼백 냥을 준 것이다·
양강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밤새 지필 숯 한 가마니랑 이슬을 피할 피풍의 한 벌과 잘 익은 검남춘도 두 병 가져와라· 나머지는 심부름 값이다·”
“아무래도 수레를 준비해야 할 것 같군요· 반 시진 내에 화덕 옆으로 끌고 가겠습니다요·”
“아니· 배달할 장소는 바로 여기다·”
그러면서 나는 선 자리에다 표기를 힘차게 꽂았다·
화덕이 있는 곳으로부터 다섯 장이나 더 멀어진 위치였다·
저만치 가고 있던 석삼두와 동진오표가 걸음을 멈추고는 시뻘게진 얼굴로 나와 백포산군을 번갈아 보았다·
백포산군은 금방이라도 천둥같은 노성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