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 사숙이다(7) >
영화촌을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 우리는 마침내 성도의 초입에 있는 포구촌에서 하선을 했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정도로 배가 고팠지만 도화곡의 세 제자가 어찌나 서두르는지 국수 한 그릇 사 먹을 틈도 없이 곧장 마방산으로 향했다·
성도 시내의 서쪽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마방산 입구는 봄에 왔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집과 점포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원래 백도를 표방하는 무림문파가 하나 나타나면 이 시대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인 치안이 비약적으로 개선된다·
그런 이유로 무림문파 주변은 사람들이 꼬이면서 자연스럽게 촌락이 형성된다·
덧붙여 무림문파의 제자들과 그곳을 찾는 외지인들과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한 다원 반점 주루 등의 여러 가지 점포들도 차례로 생겨난다·
한데 지금은 그런 걸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인파가 도화곡의 장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천여 명은 될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누군가 커다란 이불을 연달아 터는 것처럼 ‘뻥뻥’ 하는 굉음도 울려 퍼졌다·
“싸움이 벌어진 것 같은데요?”
남궁소소의 말이었다·
놀란 도화곡의 제자들이 사람들을 지나쳐 장원을 향해 달려갔다·
나와 남궁소소도 재빨리 뒤를 따랐다·
대로를 가득 메우고 있던 군중을 지나자 예사롭지 않은 체구와 용모에 도검을 패용한 무림인들이 보였다·
대충 삼백은 되어 보였다·
“통천방!”
“설마 벌써!”
“아직 아흐레나 남았는데!”
옥소군 은옥교 서동예가 차례로 한마디씩 하고는 통천방 무리를 피해 앞으로 치고 나갔다·
통천방은 이십 년 전 성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아홉 개의 흑도방파 중 한 곳이었다·
그곳의 방주가 바로 뇌정갑이었고 아홉 개의 흑도방파를 일통해 사천구룡방을 세웠다·
하지만 올해 봄 도화곡의 전대 곡주인 여종매에게 뇌정갑이 죽자 사천구룡방은 다시 예전의 구룡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유흥가에서 기루 하나라도 더 먹기 위해 자기들끼리 치열하게 세 싸움을 벌이는 중이라고 들었다·
통천방의 흑도들을 지나자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의 건너편에서는 도화곡의 제자 이백여 명이 곡주인 이막하의 주도 아래 검진을 펼치며 정문을 막아선 상태였다·
그 모습이 흡사 철벽이 버티고 선 것 같았다·
도화곡의 삼대 비기 중 하나인 멸살구곡대진이었다·
열 명으로 백 명을 잡고 백 명으로 천 명을 막아낸다는 검진·
한데도 앞에는 이미 적지 않은 제자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채 다급한 조치를 받거나 들것에 실려 안으로 후송되는 중이었다·
그 숫자도 어림잡아도 삼십여 명은 될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공터 한가운데에서는 칠순을 넘긴 사대장로들이 협봉검을 뽑아 들고는 한 명의 괴노인을 상대로 맹공을 퍼붓는 중이었다·
사방에서 쇄도하며 같으면서도 제각기 다른 묘용의 검초를 난도질하듯 뿌려대는데 지켜보는 내가 다 섬뜩할 정도였다·
흡사 폭풍우 치는 날 바닷가에 외로이 서 있는 바위를 상대로 벼락과 바람과 빗줄기와 파도가 동시에 몰아치는 것 같았다·
‘엄청나다!’
그러나 폭풍우가 아무리 거세게 몰아쳐도 바닷가의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는 것처럼 괴노인 역시 그랬다·
놀랍게도 적수공권인 괴노인은 넓은 공터를 미끄러지듯 휘젓고 다녔다·
동시에 사방에서 위협적으로 날아드는 검초들을 오직 장법만으로 전부 막고 쳐냈다·
뻥! 뻐뻥! 뻥! 뻥!
그가 장력을 출수할 때마다 사대장로들은 허공을 격해오는 막강한 경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가 다시 공격해 오기를 반복했다·
허무하게도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벼락과 바람과 빗줄기와 파도는 그토록 강맹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바위의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아니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다·
“격공장(隔空掌)!”
남궁소소가 목구멍을 쥐어짰다·
허공을 격해 멀리 떨어진 상대에게 타격을 가하는 장법의 경지를 일컫는 말이었다·
천하의 모든 권법가들이 꿈꾸는 극상의 경지·
이제 보니 사대장로는 괴노인을 상대로 협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더는 난동을 부리지 못하도록 사력을 다해 막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뻐벙! 뻥! 뻥!
괴노인의 보법이 파격적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좀 전과는 다른 폭발음이 연달아 울렸다·
동시에 사대장로들이 순차적으로 강력한 일격을 얻어맞고는 대여섯 장 밖으로 뻥뻥 나가떨어졌다·
한순간 중심을 잃고 구르다가 벌떡 일어나며 반격의 자세를 취해보지만 두 명이 입으로 검붉은 피를 왈칵 토해냈다·
저런 쳐죽일!
울컥해서 나가려는 나를 남궁소소가 황급히 붙잡았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잔뜩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거망동했다간 일을 더 망칠 거라는 경고였다·
“와아아아!”
지켜 보고 있던 통천방의 흑도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반면 이막하와 함께 장원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도화곡의 제자들은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현실을 인지한 사대장로들은 공세를 이어가는 대신 일단 숨을 고르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괴노인은 괴노인대로 딱히 서둘러 공격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덕분에 잠시 싸움이 중단되었다·
그 틈을 타 옥소군이 외쳤다·
“사부님!”
“소군!”
뒤쪽 검진 속에서 장년의 여제자가 반색하며 외쳤다·
세 여자 모두 공터를 가로질러 사문의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특히 사부라고 부른 사람의 곁으로 다가가 부모라도 만난 것처럼 안겼다·
은옥교와 서동예는 눈물까지 터뜨렸다·
주변에 있던 다른 사형제들이 그녀들을 앉거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장년의 여제자가 옥소군에게 무언가를 물었다·
내가 있는 곳에서 십수 장이나 떨어졌지만 내공이 넘쳐 흐르다 보니 구태여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들렸다·
“다친 곳은 없느냐?”
“보시다시피 모두 무사해요·”
“흑도들에게 쫓긴다는 소식을 듣고 사흘 전 제자들을 급파했다· 한데 너무 늦은 것 같아 걱정을 태산같이 하던 참이었느니라·”
“사흘 전이라면 확실히 늦었을 거예요·”
“한데 어찌 모두 무사한 것이더냐?”
“영화촌에서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표사님들을 만났어요· 그분들께 호송을 부탁해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다·”
“고마운 분들이구나· 지금 어디 계시느냐?”
“그렇지 않아도 저기 함께 오셨어요·”
그러면서 옥소군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와 남궁소소는 십수 장 떨어진 공터의 건너편에서 통천방의 흑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자신들을 따라 공터를 건너오지 않은 우리를 보고 옥소군 은옥교 서동예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큰 싸움이 벌어져 도화곡이 위험에 처한 듯 하자 끼어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세 사람은 사형제들과의 회포를 잠시 미루고 우리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여기까지 안전하게 호송해 준 것에 대한 감사와 우리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시와 원래 목적지까지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가 담긴 포권지례였다·
나와 남궁소소는 모른 척 하며 인사를 받지 않았다·
우리의 목적지는 처음부터 도화곡이었고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한데 이것조차 세 여자에겐 통천방의 흑도들 앞에서 우리를 되도록 노출하지 않으려는 행동으로 비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선을 거두어 적들을 살폈다·
도화곡이 모든 전력을 다해 맞고 있는 상대는 병장기를 휴대한 삼백여 명의 통천방 흑도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예 병장기를 뽑지도 않은 상태였다·
도화곡 제자들을 이백여 명이나 출동하게 만들고 이미 수십 명을 쓰러뜨렸으며 마침내 사대장로마저 내상을 입게 만든 자는 공터 한 가운데 서 있는 한 명의 작고 볼품없는 노인이었다·
오척단구에 빼싹 마른 노인은 은발을 넘어 하얗게 탈색된 머리카락과 수염과 눈썹을 얼굴에 붙이고 있었다·
백발 백염 백미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머리카락은 위로 말아 올려 상투를 틀었고 수염은 무려 배꼽까지 내려왔으며 백 년은 기른 것 같은 눈썹은 빗자루처럼 축 늘어져서 움푹 들어간 눈을 반쯤이나 덮고 있었다·
그리고 기세가 있었다·
단지 두 다리를 가볍게 벌리고 서서 뒷짐을 쥐었을 뿐인데 방원 십여 장의 공간이 그가 뿜어내는 기세로 가득찼다·
보기만 하는데도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백포산군!”
남궁소소의 목구멍을 비집고 나온 소리였다·
그녀도 나처럼 완전히 압도당한 것 같았다·
한편 사대장로는 자신들이 최후의 보루라도 되는 듯 내상을 입은 와중에도 좀처럼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죽음 따위는 이미 초연한 사람들 같았다·
하지만 백포산군은 이제 사대장로에게는 흥미를 잃었다·
그는 뒤쪽에서 이백의 제자들과 함께 멸살구곡대진을 펼치고 있는 이막하를 향해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말했다·
“언제까지 늙은이들의 뒤에 숨어 있을 셈인가?”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 법· 도화곡은 지난날 사천구룡방과의 일전과 관련하여 복수를 목적으로 한 그 어떤 비무나 도전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다시 한번 천명합니다·”
“헛소리! 노부가 지금 당장에라도 뚫고 들어가 모조리 쓸어버리면 그뿐· 너희에게는 이 싸움을 피하고 말고 할 선택권이 없다·”
가볍게 언성을 높이는데도 불구하고 천둥이 치는 것처럼 대기가 떵떵 울렸다·
나도 모르게 심장이 고동쳤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까지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은 삼십 년 은거를 깨고 나와서 한 첫 살인이 고작 이런 오합지졸들이라는 게 내키지 않아서니라·”
“노옹께서 왜 이렇게 진노했는지 이유를 모르는 바 아니나 지난 날 먼저 길을 막고 싸움을 걸어온 것은 귀하의 제자였으며 승부 또한 정당하게 이루어졌음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가 원하는 건 딱 두 가지다· 도화곡주의 목을 내 손으로 비트는 것과 장원을 불태워 버리는 것· 만약 끝까지 저항한다면 내가 가는 걸음걸음 시체가 쌓일 것이니라!”
백포산군의 광오한 협박에 도화곡의 제자들은 부글부글 끓었다·
느닷없이 나타나 사문을 풍전등화의 위기로 몰아넣은 초고수의 무공이 두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말할 수 없는 분노도 솟구치는 것이다·
백포산군은 피는 피로 갚는다는 무림의 원칙에 따라 뇌정갑이 죽고 사천구룡방이 멸문지화를 당한 것처럼 곡주도 죽이고 도화곡을 이 땅에서 지워버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상대는 이미 삼십 년 전부터 하늘 아래 열 손가락에 꼽힌다고 했던 극초절정의 고수·
패배가 분명한 이막하의 입장에서는 비겁하다고 손가락질을 받을지언정 선뜻 나서서 싸울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패배는 곧 도화곡의 패배이고 이는 도화곡의 멸문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대장로가 죽음을 각오하고 최후의 보루처럼 막아선 것도 그 때문이고·
그렇다고 언제까지 피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계속 버틸 생각이라면 결국 이백여 명이 멸살구곡대진을 펼치며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여태 구경만 하고 있는 통천방의 흑도 삼백여 명을 싸움에 끌어들이는 좋은 빌미가 될 것이 뻔했다·
설사 통천방의 흑도들이 끼어들지 않더라도 도화곡의 제자들이 멸살구곡대진으로 백포노군을 잡을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였다·
앞서 이미 수십 명이 쓰러져 뒹굴다가 들것에 실려 후송되는 걸 보았다·
돌아가는 정황으로 미루어 그들은 사대장로들이 나서기 전에 이미 한차례 백포산군과 격돌을 했다·
그야말로 백척간두에 진퇴양난이었다 ·
그때 남궁소소의 전음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저분 진짜 곡주님이 아니세요·]
[그게 무슨 말이오?]
[아무래도 도화곡에 역용술의 대가가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도 저 정도로 완벽하려면 최소 한나절은 공을 들였을 거예요·]
[대체 왜?]
[곡주님에게 무슨 변고가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아까 서동예가 이상한 말을 했소·]
[아직 아흐레나 남았다는 말 말인가요?]
[난 백포산군이 오려면 아흐레나 남은 줄 알았다는 말로 들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가 오는 날짜를 정확히 안다는 게 더 이상하군·“
[만약 그게 곡주님에 관한 말이라면?]
[의원들 누구도 환자가 털고 일어날 날짜를 정확히 말해주지는 않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꼬집어 아흐레라고 한 걸 보면 아흐레 후에는 무조건 일어나는 상황이라는 뜻이오· 그게 뭘까?]
[백포산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꺾을 방법을 찾아내 급하게 폐관수련에 들어가셨던 게 아닐까요? 없는 살림에 거금을 주고 화리의 내단을 세 개나 부랴부랴 구해온 것도 생사결을 앞두고 내공을 크게 증진하기 위해서이고요·]
[그게 맞는 것 같군!]
[한데 백포산군이 끝까지 고집을 피워 혈사를 일으키려 하면 곡주님도 은거를 깨고 나오실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도화곡은 끝장이에요·]
[일단 내가 시간을 끌어야겠소·]
[어떻게요?]
[그를 늪으로 끌고 들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