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 사숙이다(6) >
돈을 더 받을 일도 없고 당연히 내가 안전하게 데려갈 것이다·
나는 살짝 장난기가 발동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한번 물어보았다·
“중간에 우리가 내단을 노리면 어쩌려고?”
“표사님들이시라고 들었습니다만·”
“표사는 비적으로 돌변하지 말란 법이라도 있나?”
“최소한 우리가 아는 표사들은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목숨을 걸고 지켜주었죠·”
“···!”
대별산에 있던 도화곡을 성도로 옮기는 과정에서 동원되었던 천룡표국의 모든 표사들을 말하는 것이다·
삼십 년 전의 일이었다·
해남도의 다섯 개 흑도 문파에게 쫓기던 일가족 네 명이 두 명의 표사들로부터 호위를 받으며 광동성 광서성 귀주성 사천성을 지나 대설산까지 장장 한 달 동안 여정을 한 적이 있었다·
춥다고 울며 보채는 아이를 업고 대설산을 마지막으로 넘은 젊은 부인은 표행을 완수하고 돌아가려는 표사들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과 치마폭을 잘라 미투리 두 짝을 삼아주며 말했다·
‘죽을 때까지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당신들이 산다는 천룡표국 쪽을 향해 절 하겠습니다· 우리가 죽고 나면 아이들이 또 죽을 때까지 절하며 두 분의 무사 안녕을 기원할 것입니다· 부디 안녕히 돌아가십시오·’라고·
이 얘기는 내가 전생에서 장궤 전립성에게서 들은 얘기들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회만 닿으면 졸라서 듣고 또 들었다·
나는 도화곡의 세 제자들에게서 삼십 년 전의 그 부부를 보았다·
절절함이야 그 부부들만큼 하겠느냐만 그래도 저들이 강호의 표사라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는지가 느껴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누구인지 왜 표사가 되려고 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내가 선뜻 대답하지 않자 갈등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세 여자는 초조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반점 안의 흑도들은 흑도들대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만약 내가 이 의뢰를 받아들여 버리면 그야말로 낭패기 때문이다·
‘한번 죽어봐라!’
은잠을 챙겨 품속에 넣고 말했다·
“나는 동료와 함께 호북과 강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표행을 하는 독표(獨鏡) 이립이라고 하오· 나와 동료는 의뢰를 받아들여 지금부터 도화곡의 제자 세 분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호송을 할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하오·”
“도화곡의 구대제자 옥소군 은옥교 서동예는 지금부터 이립 표사님과 그의 동료 표사님께 신병을 의탁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면서 세 여자가 나와 남궁소소에게 꾸벅 포권지례를 해온다·
얼떨결에 나와 남궁소소도 마주 포권지례를 했다·
이립은 아무렇게나 지껄인 이름이었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사천사흉이 깨어나거든 세상에 있지도 않은 인물을 찾느라 개고생 좀 해보라고·
물론 도화곡의 제자들에게는 여객선에 타고 난 후 더는 시간 끌지 않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누구인지를 밝힐 생각이었다·
‘마침 이름까지 말해주네·’
상대방에게 자신들을 소개할 때는 연장자부터 말하는 것이 예의이다·
야무진 첫째가 옥소군이고 그만 좀 눈치 주라며 점소이에게 당차게 쏘아붙이던 둘째가 은옥교고 마지막으로 무섭고 두려운 와중에도 부상당한 사저들을 쉬지 않고 보살피던 막내가 서동예인가 보다·
‘이름도 전부 예쁘네·’
아마도 계약의 조건을 확실히 못 박아 두기 위해서 사문과 세 명 전부의 이름을 자세하게 말해 준 것 같았다·
그럴수록 나는 빨리 배에 타서 내가 누군지를 말해주고 싶었다·
옥소군 은옥교 서동예는 구명줄이라도 잡은 것처럼 얼굴이 환해졌다·
반대로 흑도들은 하나같이 썩어 문드러졌다·
그때 점소이가 대바구니 하나를 가져왔다·
은전을 넉넉하게 주었더니 월병뿐만 아니라 삶은 양고기와 술까지 넉넉하게 넣어 준 모양이었다·
이것 역시 남궁소소가 의도한 바였을 것이다·
그녀는 점소이로부터 대바구니를 건네받은 후 내게 말했다·
“가시죠· 표두님·”
“앞에서 길을 열어라·”
“알겠습니다·”
남궁소소가 먼저 반점을 문을 열고 나갔다·
내가 손짓을 하자 도화곡의 세 여자가 서둘러 남궁소소의 뒤를 따라갔다·
마지막으로 반점에 남은 나는 낭패한 기색의 흑도들을 서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다시 눈에 띄면 목들을 잘 간수하시오·”
***
세찬 강바람에 황포돛이 잔뜩 부풀었다·
나는 구름과 함께 북쪽으로 흘러가는 황포 돛배의 선미 쪽 갑판 위에 앉아 술을 홀짝이며 휴식을 취했다·
남궁소소는 반대로 선수의 갑판에 서서 십리경과 맨눈으로 번갈아 보며 주변을 살폈다·
어차피 표사들로 신분을 위장한 김에 추적자나 매복자나 아니면 수상한 배들이 있는지를 보는 것이었다·
선객들은 갑판 한가운데의 차양 아래에서 이번에도 바람 때문에 소리를 꽥꽥 질러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조금 전 반점의 창 너머로 지켜본 무림인들의 싸움 얘기를 다들 신나게 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이따금 나를 흘끔거렸다·
내가 사천사흉을 때려눕히는 걸 보고는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것이다·
도화곡의 제자들은 일반 선객들과 조금 떨어진 오른쪽 난간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남궁소소가 손수건에 싸서 준 월병을 받아서는 말을 붙여 볼 사이도 없이 허겁지겁 먹어댔다·
흑도들에게 쫓기는 데다 행낭이며 검까지 전부 잃어버려 사흘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고 했다·
역설적이게도 그 모습이 너무나 다급하면서도 평화로워 보여서 나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잠시 기다려 주기로 했다·
이윽고 남궁소소가 준 월병이 바닥나고 마지막 하나만 남았다·
그러자 둘째 은옥교가 집더니 첫째 옥소군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건 옥 사저께서 드세요· 어제저녁에도 우리에게 만두를 양보하느라 거의 못 드셨잖아요·”
옥소군이 월병을 받아 다시 서동예에게 주며 말했다·
“동예야 네가 먹어· 어제 종일 나와 옥교를 번갈아 업고 뛰느라 네 기력이 가장 많이 소진됐을 거야·”
서동예는 은옥교에게 주었다·
“은 사저께서 드세요· 내상 때문에 어제도 먹은 걸 전부 게워 내셨잖아요·”
“그럼 셋이 똑같이 나눠 먹어요·”
은옥교가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 월병을 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딱지보다도 작은 월병을 세 조각으로 쪼개서는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그 와중에도 은옥교는 조금 큰 쪽을 옥소군과 서동예에게 주고 자신이 가장 작은 걸 먹었다·
‘눈물 나네· 눈물 나·’
이윽고 배를 적당히 채운 여자들은 마지막으로 역시나 남궁소소가 챙겨준 백주를 한 모금씩 하고는 ‘휴우·’하고 길게 숨을 토해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죽으라는 법은 없군요·”
“전 세상에서 월병이 제일 맛있는 것 같아요·”
막내 서동예의 말에 첫째 옥소군과 둘째 은옥교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다 은옥교가 갑자기 주변을 한번 쓰윽 살피더니 옥소군 쪽으로 얼굴을 갖다 대고 모기만한 소리로 속삭였다·
나도 모르게 공력을 잔뜩 끌어 올렸다·
“구 사저는 무사할까요?”
“지금쯤이면 성도를 코앞에 두고 있을 거야·”
“우리가 흑도들을 유인한 보람이 있어야 할 텐데요·”
“걱정하지 마· 숙정은 용감한데다 우리 중에서 경공술과 은신술이 가장 뛰어나니 틀림없이 성공할 거야·”
이 여우들 좀 보소·
눈치를 보아하니 내단을 손에 넣은 후 몸을 숨긴 채 대기 중이던 다른 제자에 벌써 빼돌린 모양이었다·
저들이 목숨 걸고 흑도들을 유인하는 사이 그 제자가 내단을 들고 도화곡으로 잽싸게 내뺀 것이다·
아마 처음부터 그럴 작정으로 한 명을 마지막까지 숨긴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작전은 순전히 저 첫째 옥소군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고·
서동예가 은옥교에게 물었다·
“정룡 사숙께서 무한에 오셨다는 게 사실일까요?”
“봇짐장수들이 없는얘기를 지어내진 않았겠지·”
“무한까지 온 김에 성도도 다녀가시면 좋을 텐데·”
“정룡 사숙이 보고 싶니?”
“은 사저는 안 보고 싶으세요?”
“나도 당연히 보고 싶지· 지금처럼 도화곡이 어려울 때는 더더욱· 하지만 사숙께서는 미곡 운송일로 한창 바쁘실 거야· 사람들 말이 표국은 일 년 중에서 지금이 가장 바쁘대·”
“그 얘긴 저도 들었어요·”
“그리고 항주에서 무한까지 보다 무한에서 성도까지의 거리가 두 배는 더 멀어· 말을 갈아타며 쉬지 않고 오셔도 보름은 족히 걸릴걸·”
“처음부터 사천이 아니라 절강성으로 이사를 했으면 좋았을걸· 그럼 천룡표국과도 가깝고 지금보다 훨씬 자주 왕래를 했을 텐데요·”
“미곡운송철이 지나면 한 번 오시지 않을까?”
“정말요?”
“그랬으면 좋겠다고·”
확실히 도화곡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더는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서동예가 말했다·
“사숙께서 여자관계가 복잡한 건 사실이에요·”
얼른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려서부터 기루와 도박장을 제집처럼 들락거린 것도 사실이고요· 돌아가신 사조님 말씀이 남자들의 여색과 도박은 평생을 가도 못 고친다고 하셨는데 큰일이네요·”
“갑자기 무슨 말이니?”
“아까 봇짐장수들 얘기 들으셨잖아요· 정룡 사숙께서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시고 표행을 가는 곳마다 미녀들과 염문을 뿌린다고요·”
“고양이를 본 이야기가 아홉 사람의 입을 거치면 호랑이에게 물려갔다 살아 돌아온 이야기로 변한다고 했어· 하물며 수천 리 밖의 소문은 하나도 믿을 게 못 돼·”
“이건 도화곡의 구대제자들이라면 대부분 아는 이야기예요· 두 분 사저들께서도 처음 듣는 얘기는 아닐 텐데요?”
“정룡 사숙께서 워낙 출중하시다니 보니 시기를 하는 사람들이 나쁜 말들을 지어내는 걸 거야· 엄청난 가문에다 학문이면 학문 무공이면 무공 용모면 용모 돈이면 돈· 어느 것 하나 빠지시는 게 없으시니 말이야·”
“여자도 많으시고요·”
“대체 그런 얘길 누구한테 들은 거니?”
“저는 정룡 사숙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에게서 직접 들었어요· 그러니까 안 믿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남궁소소 선배요·”
“뭐?”
‘뭐!’
나는 반사적으로 선수 쪽을 돌아 보았다·
전방을 살피던 남궁소소의 작은 등짝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그녀도 도화곡 제자들의 대화를 들은 게 틀림없다·
‘이 여자를 강에 확 밀어 버리고 차라리 내가 쌍욕을 한번 먹자!’
나는 다시 쓰윽 몸을 일으킨 후 선수 쪽으로 걸어갔다·
중간쯤에서 도화곡의 제자들이 잠시 나를 보았지만 이내 다시 자기들 이야기로 돌아갔다·
이윽고 선수의 갑판에 한 발을 척 올렸을 때 남궁소소가 귀신같이 알고는 홱 돌아보았다·
그리고 얼른 전음을 보냈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왜?]
[왠지 나를 밀어버릴 것 같아서요·]
[잘도 아시는군·]
[일단 진정부터 하세요·]
[대체 왜 그런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닌 거요?]
[난 기억에 없어요·]
[시치미를 뗀다고 될 일이 아니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사실은 내가 바로 그 호색한 사숙이다·’라고 신분을 밝힐 수 있겠소·]
[지금 한가하게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에요· 기회가 없어 미처 말을 못했는데 아까 영화반점에서 흑도들을 제압하자마자 내가 왜 서둘러 밖으로 나간 줄 알아요?]
[또 무슨 희한한 소리를 하고 빠져나가려고?]
[흑도들이 타고 온 배들을 쫓아 보내려고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사천구룡방도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한 도화곡의 복수를 흑도들이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게 이상해서 봇짐장수들에게 물어보러 간 거였어요·]
[···!]
나는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이건 나도 줄곧 이상하게 생각하던 차였다·
다만 나는 도화곡의 제자들에게 내 신분을 밝힌 후 천천히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들 말이 도화곡은 곧 풍비박산 날 거래요·]
[왜?]
[운남성 깊은 밀림 속에 살던 백포산군(白砲山君)이 은거를 깨고 홀로 도화곡의 최고수들과 생사결전을 치르기 위해 오고 있대요· 이미 한 달 전에 도화곡에 경고를 했고 지금쯤이면 장강을 넘었을 거라고요·]
[백포산군이 누군데 그러오?]
[한때 천하십대고수의 한 명으로 불렸던 무신급의 초고수예요· 어느 날 운남의 애뇌산 깊은 밀림으로 사라지고 난 이후 삼십 년 동안 생사를 아는 이가 없어 잊힌 인물이죠·]
내가 아는 무림인들은 전생에서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물 정도로 국한됐다·
지금으로부터도 삼십 년 전의 인물이면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회자되지 않은 이상 내가 알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내가 정작 놀란 것은 천하십대고수의 한 명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강호에는 천하십검과 천하십권이 있다·
무림고수들의 서열 매기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천하십도니 천하십각이니 하며 좀 더 세분화도 한다지만 대부분은 천하십검과 천하십권을 말했다·
한데 이런 분류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만든 서열이 천하십대고수였다·
다만 이런 초강자들끼리는 손속을 나눈 적이 극히 드물고 나누었어도 강호인들 대부분이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병기와 주먹의 끝을 본 괴물들의 싸움은 우열을 가늠하기 매우 어려워서 천하십대고수라는 말은 잘 쓰질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인다면 천하십대고수의 서열을 정할 때 그 인물만큼은 반드시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강호에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로는 현 무림맹주인 설산신검 장초풍과 남궁세가주인 뇌검 남궁유룡 정도가 있었다·
듣도보도 못한 괴수가 도화곡의 최고 고수들과 생사결전을 치르러 오고 있다는 말에 나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충격을 느꼈다·
[대체 그런 거물이 왜?]
[도화곡의 전대 곡주이신 여종매 선배께서 사천구룡방주인 만세노조 뇌정갑과 구백여 합을 주고받은 끝에 숨통을 끊어 놓으셨던 것 기억하세요?]
[당연히·]
[알고보니 뇌정갑이 그의 제자였대요·]
[그게 무슨!]
[그래서 말인데 당주님이나 나나 일단은 지금처럼 신분을 숨기는 게 좋겠어요· 도화곡으로 가서도 마찬가지고요· 필요하면 곡주님께만 살짝 귀띔해 드릴 수는 있겠지만·]
[그건 또 왜?]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도화곡은 물론이거니와 무림인들의 시선이 한동안 우리에게 집중될 거예요· 그러면 운신이 어려워져요·]
[생각해둔 계획이라도 있소?]
[그건 당주님이 찾아야죠· 그 방면으로는 전문가잖아요· 난 다만 적을 가까이에서 정확히 보려면 은밀하게 움직이는 쪽이 더 유리하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 곡주님의 숨겨둔 눈과 귀와 칼이 되어 드리는 거죠·]
[혹시 갑자기 표두님이라고 부르며 들어온 것도 그 때문이오?]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