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 사숙이다(3) >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세 사람이 입을 맞추면 없는 호랑이도 만든다고 했다·
하물며 아주 거짓도 아닌 이야기에 살이 붙으니 사정을 속속들이 모르는 사람은 누구라도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남궁소소는 웃음을 참느라 시뻘게진 얼굴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저들이 말한 ‘미녀들과의 염문’에는 자신의 지분이 가장 클 텐데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대장부가 따로 없네·’
슬쩍 앞을 보았더니 도화곡의 제자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떠들어 대는 선객들을 향한 분노도 느껴졌다·
자기들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리는 것이다·
“주문한 음식들 나왔습니다요·”
마침내 음식이 나왔다·
도화곡 제자들의 앞에는 만두 한 접시가 놓였다·
반면 나와 남궁소소의 앞에는 숯불 화로 위에서 펄펄 끓는 화과아와 어향육사 그리고 검남춘 두 병이 놓였다·
빈부 격차는 세상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법이다·
도화곡 제자들은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지 우리 쪽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조용히 만두를 나누어 먹었다·
특이하게도 이곳의 화과아는 고기가 처음부터 육수에 담겨 완전히 익혀진 채 나왔다·
그것도 뼈다귀가 붙어 있는 갈비가 통째로·
빨리 먹고 배를 타야 하는 손님들을 위해 시간을 단축해 주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육수가 말도 못하게 진했다·
나도 젓가락을 들어 화과아에 담긴 양고기를 집어갔다·
순간 남궁소소가 자기 젓가락으로 내 젓가락을 탁 치면서 말했다·
“잠깐!”
“음?”
“향채(香菜)가 잔뜩 들었습니다·”
속으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라고 생각하는데 남궁소소가 얼른 덧붙였다·
“향채라면 우리 둘 다 질색하잖습니까·”
봄에 성도의 ‘천하제’ 객점에서도 화과아를 먹은 적 있다·
그때도 향채가 잔뜩 들어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잘도 먹었고·
심지어 남궁소소는 향해 좋다며 조금 더 넣어 달라고까지 했다·
그제서야 나는 그녀의 의중을 간파하고 얼른 맞장구를 쳐주었다·
“뭐어?”
“이 동네는 화과아에 쓸데없이 향채를 넣어 먹는 모양이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빼달라고 미리 말할 것을·”
“도로 가져가라고 해·”
“점소이 하는 꼬라지를 보면 그런다고 돈을 돌려줄 것 같지도 않은데요·”
“그러게 왜 쓸데없이 이것저것 시켜가지고·”
“이것저것 다 먹고 싶어서 그랬죠· 두 가지를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이를 어쩐다····”
남궁소소는 잠시 망설이더니 앞에 앉은 세 명의 여자들에게로 슬쩍 시선을 주었다·
향채라는 말이 나올 때부터 우리를 슬금슬금 곁눈질하던 여자들이 눈을 마주치자 얼른 얼굴을 만두 접시에 박았다·
남궁소소가 슬그머니 물었다·
“혹시 향채가 들어간 화과아라도 괜찮다면 가져가 드시겠습니까? 보셨다시피 손도 대지 않은 음식입니다·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둘째와 셋째는 이게 웬 떡이냐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첫째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양하겠습니다·”
“아니 음식이 아까워서·”
“호의만 받겠습니다·”
“···!”
첫째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다시 한번 확실한 거절 의사를 밝혔다·
둘째와 셋째는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금세 마음을 다잡는 눈치였다·
작전 실패다·
오랫동안 굶은 것 같아 뭐라도 좀 먹여 보려고 했더니만 저렇게 경계심을 늦추지 않을 줄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믿음직스러우면서 더 안심되었다·
표사들은 여러 가지 지켜야 할 규칙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표사십규이고 특별히 육로삼금과 수로삼금이라고 따로 빼서 만든 것도 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각각 육로와 수로로 표행을 할 때 엄격히 금지하는 세 가지 것들을 말한다·
육로삼금의 첫 번째는 새로 연 객점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는 주인이 바뀐 객점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고 세 번째는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었다·
말이 표사들의 규칙이지 실제로는 강호행을 하는 무림인들이 항상 금과옥조로 여겨야 할 가르침들이었다·
첫째 제자는 배가 고파 기력이 쇠하는 와중에도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을 먹지 말라는 규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깨끗한 새 음식이 자신의 눈앞에서 그대로 전해졌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남궁소소가 마음만 먹는다면 잠깐 동안에도 독을 타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도화곡이 대별산에 있던 시절 구대제자들 중에서는 오직 섭부용이 이끄는 칠검향만 바깥출입이 가능했었다·
다시 말해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저 녀석들이 이 정도로 조심스럽게 행보를 하는 것은 매우 칭찬할 일이었다·
‘잘 적응하고 있구나·’
한편 도화곡의 제자들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 몰랐던 남궁소소는 살짝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세 명을 여자들을 너무 애송이로 본 탓이다·
당황한 그녀를 보자 이번엔 내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때였다·
“그거 내가 먹어도 되겠소?”
갑작스러운 말과 함께 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나와 첫째 제자 사이의 빈자리를 불한당처럼 털썩 차지하고 앉았다·
황소같은 체격과 머리통에 어울리지 않게 손톱 반달만 한 눈을 가진 사십 줄의 장년인이었다·
옆구리에는 작두처럼 크고 끝이 직각으로 절단된 칼을 차고 있었다·
꼭 개작두 같았다·
내가 아는 강호의 인물들 중에 저런 개작두를 성명병기로 들고 다니는 자는 두 명 정도에 불과했다·
하나는 무림맹에서도 만난 적 있는 금안표국의 표두 여불강이고 다른 하나는 사천성 일대를 돌아다니며 강호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살인마 화우도(火牛刀)였다·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한번 칼을 뽑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질에다 황소를 닮은 얼굴 때문에 화우도라 불린다고 들었다·
무공 수준은 절정급·
확인한 바는 없지만 하오문이 집계한 흑도 백대고수 중 한 명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한데 화우도는 혼자 다니는 법이 없었다·
그 못지않게 포악하고 잔악무도한 세 명의 의제들과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함께 다녔다·
이들 네 명을 일컬어 강호인들은 사천사흉(四川四凶)이라고 불렀다·
재빨리 장년인의 뒤쪽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살벌한 용모에 피 냄새를 철철 풍기는 세 명의 인간들이 서 있었다·
한 명은 외팔이었는데 구절편을 허리에 감았고 한 명은 혼자 똥이나 닦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엄청난 뚱보였는데 쇠로 만든 초자검을 허리에 찼다·
마지막 한 명은 작은 키에 엷게 화장을 한 여자였는데 턱과 코밑에 까뭇까뭇한 수염이 올라오고 있었다·
’여장남자?‘
그들이 자신들의 앞에 서자 조금 전까지 나를 열심히 씹어대던 선객들은 도망치듯 자리를 비켜 주었다·
사천사흉은 당연하다는 듯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갑작스러운 고수들의 출현에 나도 그리고 남궁소소도 바짝 긴장했다·
세 명의 도화곡 제자들도 사색이 되었다·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조용하던 반점 안이 태풍이라도 불어닥친 것처럼 술렁였다·
곳곳에서 강렬한 살기도 감지되었다·
“먹어도 되냐고 물었소만·”
“안 될 것도 없겠지요·”
남궁소소가 얼른 펄펄 끓고 있는 화과아 탕그릇을 화로째 화우도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화우도는 만족한 표정을 짓고는 탕그릇 속에 맨손을 넣어 큼지막한 양갈비 하나를 덥석 집어 들었다·
이어 김이 뿌옇게 오르는 그것을 입으로 천천히 뜯기 시작했다·
자신의 내공을 과시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였다·
하지만 효과는 직방이었다·
지켜보고 있던 무인들 상당수가 매우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최소 일갑자 이상의 내공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신기였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재밌는지 사천사흉의 나머지 것들은 입가에 가만히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 세 명은 구석에 앉아 있는 우리와 상대적으로 입구 쪽에 앉아 있는 다른 수십 명 무사들 사이의 길목을 차지하고 있었다·
천금풍을 익힌 도화곡의 제자들이 갑자기 도망치는 걸 막는 동시에 다른 무인들이 선수를 치는 것도 막으려는 것이다·
의제들과 함께 단숨에 반점을 장악해 버린 화우도는 양고기를 뜯는 한편 석상처럼 굳어 있는 세 명의 도화곡 제자들을 보며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가 수장이더냐?”
“그건 왜 묻는 거죠?”
역시 키 큰 첫째가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양손을 탁자 밑으로 내린 다음 소매 끝에 꽂아둔 비격쌍뇌창을 슬그머니 뽑았다·
순간 화우도가 손에 들고 있던 양고기를 내려놓은 후 나를 돌아보며 툭 내뱉었다·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시겠소?”
“예?”
“어느 문파의 후기지수들인지 모르겠소만 살아서 배를 타고 싶으면 하려던 식사나 조용히 마저 하고 가시오· 경고하건대 나는 한번 칼을 뽑으면 뒤를 생각지 않는 사람이외다·”
이 자는 우리가 무인이라는 걸 이미 간파하고 있다·
그것도 기운을 안으로 갈무리할 만큼 상당한 수준이라는 것까지·
게다가 어쩐 일인지 정도문파의 제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남궁소소의 맑은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광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제법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름 대우를 해준답시고 반공대나마 해주는 것이고·
“무언가 오해를 하셨군요· 저희는 다만 초면에 건방져 보일까봐 손을 내리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그러면서 나와 남궁소소는 얼른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어차피 비격쌍뇌창은 이미 뽑아서 바닥에 떨어뜨려 놓았으니 상관없었다·
한편 우리가 무림문파의 제자들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도화곡의 제자들과 반점 안에 있는 다른 무림인들도 적지 않게 놀라는 눈치였다·
화우도는 이어 도화곡의 첫째 제자에게 물었다·
“화리(火經)의 내단은 어디에 있느냐?”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화리는 천지간의 알 수 없는 조화로 말미암아 제 명을 넘어서까지 산 붉은 잉어를 말한다·
적게는 백 년에서 길게는 몇천 년까지도 산다는데 삼백 년이 넘어가면 몸에 내단이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강에서 많이 잡히는 화리는 세상의 모든 영물들 중에서 가장 흔한 편이었다·
내가 진왕가에서 오황자에게 얻어먹은 영약 중 ‘일봉’이라 불렸던 것도 공청석유에 화리의 내단을 녹여 만든 것이었다·
덕분에 지금 내 단전엔 무려 백오십 년 동안을 수련한 양과 깊이의 내공이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외공을 익혔으면서도 절정의 경지에까지 오른 고수들도 많듯이 무공의 고하를 꼭 내공만으로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비슷한 경지에 접어든 고수들끼리 싸울 때는 내공 깊은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화리가 갑자기 왜 튀어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그걸 화우도가 도화곡의 제자들에게서 찾는 게 더 의아했다·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너희의 눈에는 반점에 모인 쉰여 명의 무인들이 핫바지로 보이느냐? 여기까지 왔으면 충분히 애썼다· 부질없는 싸움 그만하고 이제 그만 우리에게 넘겨라·”
“설사 우리에게 화리의 내단이 있다고 쳐도 귀하가 무슨 권리로 내놓아라 마라 하는 건가요?”
“영약은 본래 누군가의 뱃속으로 들어가 녹아 없어지기 전까지는 주인이 없는 법이다· 그리고 중간에서 가로채기는 너희도 마찬가지일 텐데·”
“가로챈 것이 아니라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것입니다·”
“제아무리 거금을 주었어도 장물을 샀다면 가로챈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렇게 따지면 당신들이 아니라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야 하지 않나요?”
“원래의 주인이 죽어 버렸으니 어쩌겠느냐·”
“그렇다면 우리가 줄 이유는 더더욱 없겠군요·”
쾅!
화우도가 주먹으로 탁자를 거칠게 내려쳤다·
도화곡의 세 제자들이 동시에 움찔 놀랐다·
겉으로는 강단 있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벌벌 떨고 있었던 것이다·
“선택하거라· 지금 내 손에 목숨을 잃든가· 아니면 화리의 내단을 내놓든가· 내 입장에서 가장 쉬운 건 너희 모두 숨통을 끊어 놓은 다음 넷째 의제를 시켜 옷을 하나씩 벗기면서 뒤져보는 것이다만·”
여장한 남자를 말하는 것이다·
“무림인들이 뒤쫓는 걸 알면서도 몸에 지니고 다닐 거라고 생각했다면 우리를 너무 멍청이로 보았군요· 아니면 귀하가 멍청이든가·”
“좋아· 너희의 말을 믿으마· 대신 너희 중 한 명이 내 아우들과 함께 내단을 숨겨둔 곳으로 가서 가져와야 한다· 물론 나머지 두 명은 나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고·”
“싫다면요?”
“하나씩 쳐 죽여야겠지·”
철컹!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우도가 자신의 성명병기인 개작두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무공수준이라면 손으로도 충분히 쉽게 때려죽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개작두를 올려놓은 것은 점점 투기를 끓어 올리는 주변의 무인들을 향한 경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