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 표사들의 전통(3) >
금성루가 발칵 뒤집혔다·
북천표국주 여문탁과 아홉 명의 다른 표국주들은 그대로 석상이 되어 버렸다·
오백여 명에 달하는 강북의 표사들은 표왕기 너머에 낭떠러지라도 있는 듯 감히 넘어오지를 못하고 멈춰 섰다·
천하십검의 일인이면서 천룡표국의 국주이자 표왕이라고까지 불리는 전설적인 표사의 등장에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들리는 건 오직 말발굽 소리뿐·
또각 또각 또각····
이종산은 내 곁에서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곽석산 황자충 양진각 유지평은 휘하의 표사들을 이끌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강북의 표사들은 낭떠러지에 이어 이번엔 앞쪽에서 거대한 벽이 밀고 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앞다투어 물러나기 바빴다·
나는 마상의 이종산을 올려다보며 목구멍을 쥐어짰다·
“여길 어떻게····”
“천룡표국의 범선이 공격당했는데 국주인 내가 아무런 손도 쓰지 않고 보고만 있을 거라 생각했더냐·”
“하지만 총표두님도 안 계셨는데 누가····”
“내게 야조가 있음을 간과했구나·”
‘흑살객!’
대부분의 큰 문파들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음지에서 조용히 일하는 비밀 조직들을 운영한다·
이들을 보통 비선 혹은 비각이라고 하는데 천룡표국에서는 아직까지 이런 조직을 따로 운영하지 않았다·
대신 충성심이 강한 표왕부의 호위각에서 그런 일들을 도맡아 처리해 왔다·
그런 이유로 천룡표국의 표사들은 표왕부의 호위각을 달리 비각이라고도 불렀다·
흑살객은 비공식적으로는 바로 그 비각의 각주이고 공식적으로는 표왕부의 호위장인 가뢰압을 일컫는 별호였다·
이종산을 항상 그림자처럼 따르지만 외부에서는 위급한 상황 일 때를 제외하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유령같은 존재·
내가 호리독사와 독고완을 풀어 교룡방도들의 뒤를 밟게 한 것처럼 이종산도 흑살객으로 하여금 비각의 무사들을 풀어 추적게 한 모양이었다·
하면 호리독사와 독고완이 교룡방도들을 뒤쫓은 것부터 시작해 내가 을목청과 담판을 짓고 나아가 금성루로 쳐들어오는 것까지 모두 지켜보았다는 뜻이 된다·
이종산으로부터 줄곧 보호받고 있었다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든든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 손오공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순간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교룡방주 을목청이 어느새 내 옆으로 쓰윽 다가서고 있었다·
그는 이종산이 뭐라고 할세라 얼른 포권지례부터 올렸다·
“이 밤에 이런 장소에서 천룡표국주를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기왕에 이렇게 뵈었으니 청수탄에서 본 방의 방도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먼저 사과를 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방주님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천룡표국은 앞으로도 교룡방과 변함없는 관계를 유지해 나갈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진심···이십니까?”
“방주님께서 이 일과 무관하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늦게나마 책임을 지기 위해 제자의 목숨까지 거두시려 한 것도요· 교룡방과 방주님의 본의가 그렇다면 청수탄에서의 일은 사고였던 셈이지요·”
“국주····”
“더불어 범선이 장강을 거슬러 오르는 일과 관련하여 교룡방에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했음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양해와 허락이 다르고 죄송하다와 사과한다가 또 다르다·
이종산은 ‘양해’와 ‘죄송하게 생각한다’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범선으로 장강을 오르는 일이 결코 교룡방에게 허락을 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강 조운에 대하여 교룡방이 그동안 누려왔던 독점적 권리를 인정하고 충분히 존중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종산이 교룡방과 자신의 체면을 세워주자 을목청은 크게 감동을 한 것 같았다·
아마도 나한테 머리끄덩이를 잡히는 봉변을 당했다가 그 아버지에게 위로를 받으니 저도 모르게 앙금이 눈 녹듯 녹으면서 무장해제가 되는 듯한 기분이지 않을까?
을목청은 사뭇 비장한 음성으로 말했다·
“교룡방은 수백 년 전 일곱 개의 방회로 나누어져 있을 때부터 강남북의 표국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특히 천룡표국과는 서로의 혼상례(婚喪禮)를 챙길만큼 각별했지요· 잠시 투닥거림은 있었으나 선조들이 지켜온 상부상조의 전통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아랫사람들끼리의 관계는 윗사람들에게 달려있다·
한때 서로 칼을 겨누었던 교룡방의 무사 칠 인은 어느새 우리 쪽 진영으로 와서 비룡당의 표사들과 함께 섞여 있었다·
가불염이 을목청의 제자인 무삼통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지만 칠 인의 무사들 중 누구도 제지하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이종산은 이어 객실에 모여 있는 강북의 표국주들을 쓸어보았다·
그리고 흡사 구름 속에서 천둥이 꾸르릉 거리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본표국이 청수탄 사건의 범인을 색출하려 하거니와 만약 이를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공범으로 간주 마땅히 그 책임을 함께 물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아닌 표왕의 경고이기에 살벌하기 짝이 없게 들렸다·
그는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반드시 지키고 관철시키는 사람이었다·
도화곡의 문파 이전 건을 제외하곤 평생 단 한 번의 표행도 실패한 적 없다는 전설적 기록이 그가 얼마나 강하고 지독한 사람인 지를 증명한다·
그 마저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지만 도화곡이 사천에 무사히 뿌리내리는 걸 돕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었다·
나는 응징을 하러 온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온몸에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강북의 표국주들은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함부로 맞설 수 없는 약자의 치욕을 견디느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자 이종산은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북천표국주 여문탁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북천표국주께서는 들으시오· 교룡방주께서도 이미 증언을 하신 바 귀 표국의 부국주가 청수탄의 일과 무관하지 않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오· 이에 범선의 주인인 본 표국의 비룡당주가 귀 표국의 부국주에게 지금 당장 몇 가지 물을 것이 있다는데 협조해 주시면 고맙겠소·”
북천표국과 여문탁의 체면을 생각해 에둘러 말하지만 좋게 말할 때 당장 여사평을 내놓으라는 소리다·
그러면서도 마땅히 응징하겠다 하지 않고 심문을 하겠다고 했다·
그것도 본인이 아니라 내게 맡기는 것으로·
이 역시 서로의 입장을 매우 정교하게 고려한 말이었다·
이종산이 직접 여사평을 심문하면 까마득한 노강호가 새파란 아이를 핍박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면 여문탁으로서도 여사평을 내주기가 껄끄럽다·
강호인들은 호북제일검인 조령검객 여문탁이 천하십검인 표왕 이종산이 두려워 자식을 넘겨주었다고 하지 않겠나·
하지만 내가 심문을 하겠다고 하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여사평을 내주어도 최소한의 체면은 지키게 된다·
더불어 북천표국으로서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망신이겠지만 최악의 경우 표국 간의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상황을 자식들 간의 싸움으로 한정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대단한 정치술이다·’
일세를 이끄는 수장들을 상대하는 이종산의 수완과 경륜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역시 표국의 국주라는 자리는 단순히 표행만 잘한다고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이종산이 서슬은 시퍼레도 여사평이 저지른 짓에 비하면 나름대로 배려를 해주었다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금성루 전체에 술렁거림이 끝도 없이 번져갔다·
이제 저들은 선택을 해야 한다· 끝까지 맞서서 전면전을 벌일 것이냐 아니면 여사평을 내게 넘겨줄 것이냐·
북천표국의 표사들은 어떨지 모르나 여사평 때문에 천룡표국의 표사들과 칼부림을 벌이고 싶은 강북의 표사들은 여기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또한 북천표국 때문에 천룡표국과 전면전을 벌이고 싶은 표국주들도 없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여문탁을 향했다·
그쯤하고 아들 여사평을 넘기라는 압박이었다·
이렇다 할 무림 대문파가 없는 호북성에서 북천표국은 사실상 패자의 지위를 누려왔다·
그곳의 국주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호북제일검 조령검객 여문탁은 치욕과 분노로 수염을 바르르 떨었다·
그가 어디를 가서 이런 수모를 당할 것인가·
만인 위에 군림할 충분한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강한 세력과 고강한 존재 앞에서 그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더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이윽고 여문탁이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가 보아라·”
여사평은 각오하고 있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잠시 후 대여섯 장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고 나와 마주하며 섰다·
이종산은 자신이 할 일은 여기까지라는 듯 내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됐다· 생각지도 않게 이종산이 나타나 여문탁과 아홉 명의 표국주들이라는 고산준봉들을 찍어 눌러 주었다·
그 바람에 나는 이제 여사평만 상대하면 된다·
이종산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여사평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사평 귀하는 어젯밤 교룡방의 청수탄 분타주를 포섭해 천룡표국의 범선을 침몰시키려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시오?”
“어젯밤 그를 만난건 사실이다· 하지만 난 단지 머지않아 표국의 범선들이 장강을 뒤덮게 될 것이고 그리되면 교룡방은 큰 낭패를 볼 것이라고 경고했을 뿐이다·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나와 무관하다·”
“무슨 방도가 없겠냐는 내 질문에 청수탄을 거슬러 오르는 범선 한 척만 침몰시키면 모든 게 깨끗이 해결될 거라는 말도 했었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빽 끼어든 사람은 무삼통이었다·
여사평이 즉각 반박했다·
“내가 큰 실언을 했음을 인정하겠소· 하지만 싸우는 법을 일러줬다고 해서 나를 당신의 배후로 지목하는 건 지나친 억측이오· 혹시 나를 끌어들여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려는 수작이 아니오?”
“교룡방을 걱정하는 척하면서 가만히 있던 나를 부추기고 구체적인 방법까지 일러주며 범선을 침몰시키게 한 것이 사주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방금 귀하의 입으로도 말했거니와 내가 한 일이라곤 함께 교룡방을 걱정하고 비겁하지만 방도를 가르쳐 준 것뿐이오· 한데 그것이 부추김을 거쳐 사주로 돌변하는군· 그건 지나친 비약이오!”
여사평의 갑작스러운 일갈에 무삼통은 잠시 말문이 막히는 듯했다·
내가 보기에 무삼통은 처음부터 여사평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하기사 그랬기에 여사평의 꾐에 빠져 그런 무모한 짓도 저질렀겠지만 말이다·
여사평은 대범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약아빠진 여우이기도 했다·
게다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아무런 물적 증거를 남기지 않는 저 주도면밀함이라니·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주변의 정세에도 불구하고 여문탁은 거물답게 시종일관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강북의 아홉 표국주들은 하나같이 한숨을 돌린 듯한 얼굴들이었다·
여사평의 언행이 매우 부적절하긴 하지만 저 정도 가지고 이 난리를 피우는 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히려 잘 걸렸다는 듯 슬그머니 역공의 빌미를 찾으려는 기색도 읽혔다·
어떻게든 여사평의 입에서 자백을 받아내야 한다·
만약 실패하면 도리어 나와 천룡표국은 물론 이거니와 이종산까지 역풍을 맞는다·
한편 여사평이 이렇게까지 뻔뻔하게 나오자 가장 먼저 관제묘에서 내부의 조력자 역할을 제안받았던 이병룡이 더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려 했다·
나는 서둘러 전음을 보냈다·
[끼어들지 마세요!]
[뭐?]
[가만히 계시라고요·]
[너··· 다 알고 있었어?]
[형님이 얘기해봤자 딱히 증거도 되지 않거니와 지금 끼어들면 미리 보고해 대책을 세우도록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천룡표국 표사들의 눈길이 곱지 않을 겁니다·]
[여사평이 대범하게도 범선을 노릴 줄은 몰랐다· 그리고 나 나름대로는 놈의 공격에 대비를 하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은 것은····]
[혼자 공을 세우고 싶어서겠죠· 그래야 한시라도 빨리 쟁자수 노릇을 때려치우고 묵룡당으로 복귀할 수 있을 테니까·]
[귀신이 따로 없군·]
[아셨으면 방해하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 여사평 저 개자식이 새빨간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이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다 수가 있습니다· 기다려 보세요·]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야!”
‘드디어 나섰다!’
분노의 일성과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숫자는 대략 삼십여 명 조금 전까지 금성루의 전 객실에서 술을 마시던 대형 미곡상단의 상단주들이었다·
어젯밤의 일이었다·
저들은 미곡운송건을 놓고 북천표국을 비롯해 강북의 여러 표국들과 사실상 얘기가 거의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범선을 타보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나는 기꺼이 대장선에 자리를 만들어 주었고 강남구상을 비롯한 다른 대형 상단주들과 똑같이 귀빈 대우를 해주었다·
그러다 범선의 하판에 구멍이 나고 곧 침몰할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들은 배를 빨리 강변에 대라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급기야 자신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강남의 표국주들을 부추겨 선미의 상갑판을 장악하려고까지 했었다·
물론 이종산이 한 방에 제압해 버렸지만·
이후에는 범선이 빠른 물살에 떠내려가거나 수차례 급회전을 하면서 심한 뱃멀미와 함께 적지 않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내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그들은 정말로 죽음을 생각했다·
청수탄은 상인들에게 그만큼 공포의 대상이었다·
부자 몸 사리듯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나는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다 이루어 남은 욕망이라곤 오래 사는 것밖에 없는 늙은 상단주들의 삶에 대한 집착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여사평은 무모하게도 그런 노인들이 탄 범선을 침몰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걸 이용해 여사평을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