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 표사들의 전통(2) >
“누구냐!”
“웬 놈들이냐!”
“침입자들이다!”
깡! 까강! 깡깡!
가불염이 아홉 명의 표사들과 함께 금성루의 수문무사들을 뚫고 길을 열었다·
나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곳곳에서 도검을 꼬나 쥔 무인들이 벌떼같이 쏟아져 나왔다·
금성루의 호기무사들을 비롯해 이곳에 묵고 있는 강북의 여러 표사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튀어나온 것이다·
화르륵!
가불염이 수문무사에게서 빼앗은 횃불을 내 얼굴에 들이댔다·
이번에는 나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잘 보일 수 있도록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우르르 달려 나오던 호기무사와 표사들이 교룡방의 뱃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풍운비룡!”
“풍운비룡이다!”
웅성거리는 호기무사들과 표사들을 무시하고 나는 먼저 숨부터 골랐다·
이제부터 상대해야 할 사람은 지금까지 싸웠던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수였다·
특히 표행의 경험으로도 그렇고 무리를 이끌어 본 경험으로도 그렇고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실력과 내공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마침내 결의를 다진 나는 안쪽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이 몸은 천룡표국 비룡당주 이정룡이라고 하오· 북천표국의 국주이신 조령검객 여문탁 대협을 뵈러 왔소이다!”
북쪽 전각의 일 층 문이 활짝 열리면서 회랑을 앞세운 개방형의 객실이 나타났다·
그곳에 북천표국주 여문탁을 비롯해 아홉 명의 강북 출신 표국주들이 각각의 수뇌부를 거느린 채 앉아 있었다·
천룡표국이 범선들을 동원해 미곡시를 모조리 쓸어 버리자 밤 늦도록 대책회의를 하던 중인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여문탁의 바로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여사평은 얼굴이 돌덩어리처럼 굳어졌다·
여문탁은 그런 여사평을 힐끗 일별한 후 객실 안쪽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나를 보러 왔다고?”
“그렇습니다·”
“이 밤중에?”
“예를 따질 때가 아니어서요·”
“감히 누구 앞이라고!”
강북의 표국주 하나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동석해 있던 다른 여덟 명의 표국주들도 모두 눈썹을 역팔자로 사납게 꺾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여문탁만큼은 아니지만 저들 아홉 명의 표국주들 역시 절정을 바라보거나 혹은 이미 절정의 경지에 든 고수들이었다·
동시에 표국 일로도 산전수전 다 겪은 노강호들이었다·
이럴 땐 그저 뻔뻔한 게 최고다·
나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아홉 명의 표국주들 한 명 한 명의 시선을 전부 받아냈다·
여문탁이 다시 말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나 오늘은 늦었으니 날이 밝으면 다시 찾아오시게· 하면 내 충분히 시간을 내주도록 하겠네·”
“저는 오늘 꼭 빚을 받아가야겠습니다·”
“빚?”
“사람들을 물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도가 지나치군·”
“적반하장이라는 말씀으로 돌려드립니다·”
“정녕 이리 무례한 사람이었나!”
“표국업계의 후배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을 물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를 보는 여문탁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을목청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서늘하고 섬뜩한 한기가 내 눈을 뚫고 들어와 심장을 찔렀다·
분명 격기는 아닌데 그것보다도 더 적나라하게 내 속을 더듬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이것이 호북제일검의 경지!’
이윽고 여문탁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일 때문에 이리 흥분했는지 어디 말 해보시게·”
“북천표국에서 자맥질에 익숙한 자들을 사주 오늘 아침 청수탄에서 저의 범선을 침몰시키려 한 일에 대해 책임을 묻고자 합니다·”
“···!”
“사과는 필요 없습니다· 재발 방지의 약속도 필요 없습니다· 이 일을 처음부터 계획하고 사주한 자의 신병만 제게 넘겨주시면 됩니다·”
좌중이 벌집을 건드려 놓은 것과도 같았다·
정원으로 쏟아져 나온 수백 명의 표사들과 객실에 있는 표국주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그런가 하면 사방을 둘러싼 삼층 전각들에서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구경하던 기녀들과 늙은 상단주들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문탁이 살광을 폭사하며 말했다·
“칼 찬 사람들은 입이 무거워야 한다네· 입 밖으로 나온 말에 책임을 지지 못하면 그 말이 칼로 변해 내 목에 꽂힐 수도 있는 법이거든·”
“한낱 말 한마디가 그러할 진데 칼을 함부로 휘두른 값은 얼마나 비싸겠습니까? 북천표국에선 부디 칼값을 잘 계산해 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딱딱하게 굳는 여문탁의 얼굴을 뒤로하고 가불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불염이 길게 휘파람을 불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정문으로 들이닥쳤다·
교룡방주 을목청과 그에게 곤죽이 되도록 얻어터진 분타주 무삼통 그리고 을목청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칠 인의 호위무사들이었다·
갑작스러운 인물들의 등장에 좌중이 다시 한번 크게 술렁였다·
여문탁이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을목청에게 물었다·
“방주께서 여긴 어쩐 일이시외까?”
“귀하의 자식과 내 제자가 작당해서 천룡표국의 범선을 공격한 모양이외다· 피차 범선의 출현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으니 누가 주도를 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오·”
교룡방에서의 일이 끝나갈 무렵 알게 된 사실인데 무삼통은 을목청의 첫 번째 제자였다·
무삼통은 장강이 장차 표국의 범선들로 넘쳐나면 방도들의 밥줄이 끊길까 걱정하는 차에 범선 다섯 척이 선객 오백을 싣고 다시 청수탄으로 향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청수탄 분타주인 그는 자신의 영역이 강도들에게 유린당하는 것 같은 기분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때 여사평이 좋은 계획이 있다며 접근을 해왔고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놈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이게 무삼통이 진술한 청수탄 사건의 자초지종이었다·
한데 을목청은 자신의 장제자가 북천표국주도 아니고 그의 아들놈인 여사평에게 한낱 수하처럼 조종당했다는 사실을 가장 참을 수 없어 했다·
그래서 저렇게 ‘둘이서 함께 작당’이라는 말로 묶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와서 증언까지 해주는 마당에 나는 모른 척했다·
을목청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튼 본방은 이 일로 천룡표국에 큰 빚을 졌고 충분한 사과와 함께 적절한 배상을 할 작정이오· 이에 아무래도 모르고 계실 것 같아 사실을 알려드리는 것이니 북천표국주께선 알아서 잘 처리하시기 바라외다!”
말을 모두 끝낸 을목청이 나를 보며 물었다·
“이제 됐나?”
“감사합니다·”
“그 말은 내가 해야 할 것 같군· 싸게 계산해 주어 고맙네· 국주께는 내가 일간 찾아뵙고 오해를 풀겠다고 전하시게·”
갑작스러운 전개에 아홉 명의 표국주들과 수백 명의 표사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교룡방주 을목청은 무림의 거물 내가 부탁을 했다고 해서 없는 말을 지어내 증언해줄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하나같이 여문탁과 그의 아들 여사평에게로 향했다·
만약 여사평이 정말로 교룡방의 방도들을 사주해서 혹은 결탁해서 천룡표국의 범선을 침몰시키려 했다고 치자·
하면 이는 천룡표국이 북천표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좌중의 공기가 요동쳤다·
여문탁의 얼굴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북천표국주가 그런 비겁한 짓까지 했을 리 없다고 생각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사평이 혼자서 그런 무모한 짓을 벌였다는 것도 선뜻 납득이 되지 않았었다·
철담도룡이라는 별호에서도 알 수 있듯 여사평은 어려서부터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는 평가를 들었던 놈이긴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수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을 일으켰었고·
한데 현생에서 나와 이렇게 더러운 일로 엮일 줄이야·
어딜 가나 의욕만 앞서고 경험은 모자라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위치가 마치 제가 잘나서 손에 쥔 것인 줄 착각하는 멍청이들이 문제다·
‘남의 표국 얘기할 것도 아니지·’
자식은 아비가 가장 잘 아는 법이다·
여문탁은 굳은 표정의 여사평을 보고 놈의 짓임을 확신한 것 같았다·
사실 내가 나타났을 때부터 여사평과 관련 있음을 그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한데 아무것도 묻지를 않는다·
‘뭐지?’
시간을 끌려는 속셈이었다·
그래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다음 수긍을 할지 반격을 할지 결정하려는 것이다·
그러려면 지금 여사평에게서 자신이 했다는 진술을 받아내 버리면 안 된다·
반대로 하지 않았다는 진술도 받아내면 안 된다·
부인을 했다가 나중에 거짓말인 것이 들통나면 무인으로서 더 큰 것을 잃게 된다·
일단 모든 걸 뒤로 미루어야 한다·
‘늙은 생강이라고 하더니 과연·’
사실 여문탁으로서 환장할 노릇일 것이다·
그가 내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아들었네· 한데 이 일은 자네 선에서 해결할 일이 아닌 것 같군· 오늘은 그만 돌아가게· 하면 정확한 전후사정을 파악한 후 내가 직접 천룡표국주를 찾아뵐 것인즉·”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습니다·”
“타 방파 사람들의 말만 믿고 부국주를 두말 없이 내줄 정도로 북천표국이 만만한 곳인 줄 알았는가?”
“시간을 끌어 북천표국에도 좋을 것이 없습니다·”
“무슨 뜻이지?”
”저는 여사평에게 그가 휘두른 칼값만 돌려받고 돌아가겠지만 천룡표국주님께서 직접 걸음 하시면 범인이 누구이든 북천표국주님께 칼값을 받으려 하실 겁니다· 표왕의 청구서를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여문탁은 여사평을 넘겨주면 내가 목숨을 취해버릴까봐 두려워했다·
백번 양보해서 사정을 조금 봐 준다고 해도 팔 한 짝 정도는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
북천표국의 장남인 여사평이 천룡표국의 범선을 침몰시키려다 들켜서 그곳의 사남인 이정룡에게 팔을 잘렸다·
이런 소문이 도는 순간 북천표국의 명예와 위신은 땅에 떨어진다·
강호인들은 여사평의 외팔을 볼 때마다 오늘 일을 쑥덕거릴 것이다·
여문탁이 여사평을 쉽게 넘겨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때였다·
쾅!
“네 놈이 아비의 위세를 믿고 감히 우리를 겁박하는 것이더냐?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놈 같으니라고· 뭣들 하는 거냐· 저놈들을 당장 쫓아내라!“
강북의 표국주 중 한 명이 탁자를 내리치며 외친 말이었다·
채채채채챙!
칼 뽑는 소리가 끝도 없이 울려 퍼졌다·
어느새 오백여 명으로 불어난 강북의 표사들이 번뜩이는 도검을 앞세운 채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불염과 우리 쪽 표사들도 도검을 뽑아 들고 내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 기세는 오백 명의 표사들이 뿜어내는 투기에 묻혀 조금도 위협이 되질 않았다·
가불염이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칼침 맞은 걸 따지러 왔다가 협박이 무서워 그냥 돌아가면 강호인들은 천룡표국엔 사람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하면?“
“육검진을 펼치세요· 범인이 나타나 잘못을 시인하고 죗값을 치를 때까지 결사항전 합니다!”
“존명!”
우렁찬 열 개의 목소리와 함께 나를 중심으로 육검진이 펼쳐졌다·
이것이 여문탁이 던진 패에 대한 나의 응수였다·
저들은 그쯤하면 내가 겁을 집어 먹고 일단 후퇴할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나는 판을 더 키워 버렸다·
저들은 절대로 나와 표사들을 해칠 수가 없다·
그랬다간 정말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멈출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밀어 붙일 수도 없는 여문탁과 강북의 표국주들은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스르릉!
나도 마사무네를 뽑아 들었다·
이윽고 첫 번째 격돌이 시작되려 순간!
퍼르르르릉!
허공에서 무언가 한참을 펄럭이는가 싶더니 오백의 표사들이 밀고 들어오는 앞쪽 땅바닥에 커다란 깃발 하나가 ‘푹!’ 하고 꽂혔다·
붉은 바탕에 비상하는 황금빛 용 한 마리가 수 놓인 그것은 다름 아닌 천룡표국의 표기였다·
그것도 오직 국주가 직접 표행을 나섰을 때만 쓸 수 있는 표왕기!
“누가 천룡표국의 표사들을 겁박하는가!”
천지가 쩌렁쩌렁 울리는 사자후와 함께 말을 탄 채 정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놀랍게도 이종산이었다·
그의 뒤로는 방금 사자후를 내지른 총표두 곽석산을 비롯해 이갑룡과 을룡 그리고 황룡당주 황자충 적룡당주 양진각 청룡당주 유지평이 따랐다·
다시 그들의 뒤에는 중무장한 천룡표국의 표사들이 역시나 전부 말을 타고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 들어오고 보니 얼추 삼백 명은 될 것 같았다·
본격적인 미곡운송을 위한 본대의 병력이 무한에 도착한 것이다·
이갑룡과 을룡은 그에 편승하여 함께 온 것이고·
그 와중에 표사 복장을 한 이병룡과 남궁소소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