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 장강십팔탄(5) >
마침내 범선 위에서의 날이 밝았다·
약 십 리에 걸쳐 펼쳐진 청수탄은 싱그러운 아침 햇살을 받아 온통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엄청난 양의 보석을 뿌려 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저 아름다운 모습에 속아 함부로 뱃머리를 밀어 넣었다가는 금세 방향을 잃고 떠내려가 버린다·
지금이야 온순한 편이지만 장마가 지거나 폭우라도 쏟아지고 나면 청수탄은 한동안 접근조차 어려운 사지로 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청수탄의 물살에 휩쓸려 가라앉는 배가 최소 열 척이 넘었고 익사하는 사람은 수십 명에 달했다·
거대한 장강에 이처럼 급류가 생성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좌우로부터 산이 밀고 들어오면서 강폭이 다른 곳에 비해 급격히 좁아지기 때문이다·
“괘범(拙帆)!”
황해노경의 명령을 받은 갑판장 범주가 천둥같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대장선을 시작으로 뒤쪽에 도열해 있던 범선 네 척까지 모두 돛을 펼쳤다·
돛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면서 배가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추노(抽樓)!”
범선의 양쪽 옆구리로부터 스무 개의 노가 튀어 나왔다·
본래 노공 즉 노가 나오는 구멍은 쉰 개가 넘었지만 지금은 노꾼들의 수가 충분치 않았다·
“타고(打鼓)!”
두웅! 두웅! 두웅!
대장선의 북소리에 맞춰 갑판 바로 밑 일 층 선실에서 대기 중이던 노꾼들이 노를 젓기 시작했다·
지금은 비룡당의 쟁자수들이 노꾼 역할을 했다·
배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며 대장선부터 그 유명한 청수탄으로 뱃머리를 천천히 집어넣었다·
다섯 척의 범선에 나눠 탄 오백여 명의 선객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와 황해노경은 대장선 선미의 상갑판에서 모든 걸 지켜보았고·
그러나 범선은 어쩐 일인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제자리에만 머물렀다·
청수탄의 빠른 물살을 생각하면 떠밀려 내려가지 않고 버티는 것도 사실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걸 보자고 밤새 범선을 타고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갑판에 서서 지켜보던 선객들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였다·
“양범(物帆)!”
괘범은 돛을 걸어 올리고 양범은 문자 그대로 돛을 하늘에 날리라는 소리였다·
모두가 어리둥절해 할 때 이제는 쟁자수가 된 옛 흑룡도방의 선원 두 명이 각각의 밧줄을 동시에 잡아당겼다·
그러자 선수 쪽 뱃머리에 길게 누워 있던 거대한 연(鳶)이 벌떡 일어났다·
이어 바람을 받아 순식간에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비상대라 부르는 두 개의 나무 구조물을 타고 빠르게 미끄러지다 허공으로 쏘아졌다·
말 그대로 비상(飛上)이었다·
거대한 연은 밧줄을 끌고 전방 삼십여 장까지 날아오르다가 ‘펑!’ 소리와 함께 멈췄다·
그러자 빌빌대던 범선이 마침내 급류를 비스듬히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연이 멈출 때 배에 전해진 충격으로 잠시 휘청거렸던 대장선의 선객 백여 명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
대장선의 뒤쪽에서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던 네 척의 범선에서도 환호성이 오랫동안 들려왔다·
그 바람에 청수탄 초입이 한동안 왁자지껄했다·
하갑판의 목 좋은 곳에서 강남구상과 함께 지켜보던 이종산도 주변에 있던 이갑룡과 을룡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놀랍기는 선미의 상갑판에 있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막연하게 상상만 했던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보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경이로웠다·
모두가 환호성만 내지른 건 아니었다·
대장선을 비롯해 다섯 척의 범선에 나눠 탄 다른 표국의 국주들과 표사들은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강줄기를 천(川) 자 모양처럼 세 구역으로 나누었을 때 가장 깊고 물살이 센 가운데 부분을 보통 강심(江心)이라고 한다·
어느 강이나 강심을 제외한 양쪽은 상대적으로 흐름이 완만한 편이었다·
그래도 청수탄은 청수탄이었다·
범선 다섯 척은 강심을 침범하지 않고 오른쪽 구간 안에서만 지(之)자 모양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조금씩 거슬러 올랐다·
배가 방향을 바꿀 때마다 이십여 명의 선원들이 밧줄을 타고 선객들 머리 위를 휙휙 날아다녔다·
그러면 어느새 돛의 방향도 바람을 가장 효율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뀌었다·
배가 가장 오른쪽으로 갔을 때는 강변과의 거리가 불과 십여 장도 되지 않았다·
오른쪽 산비탈 아래의 강변에는 교룡방 방도 수백 명이 자신들과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를 반복하는 범선들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섯 척의 범선들은 교룡방 방도들이 대기 중인 구간을 지나쳐 계속해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가장 극적인 장소에서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공격을 해 올 거라는 황해노경의 예상과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급기야 한 시진이 흘러 급류의 기세가 조금씩 누그러지자 그것을 힘차게 거슬러 오르던 범선들의 역동성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황해노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걸까요?”
“타인의 머릿속을 어찌 모두 알겠습니까?”
“분명 여기서 거사를 도모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직 청수탄을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닙니다·”
“하지만 가장 적절한 때는 놓쳤죠· 이 정도면 범선이 교룡방의 도움 없이도 청수탄을 거슬러 오를 수 있다는 건 확실히 증명한 셈이니까요·”
“범선이 청수탄을 거슬러 오르는 것이 신기한 구경거리가 될 수는 있으나 정작 상인들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습니다· 북천표국과 교룡방이 우리에게 망신을 줄 적기는 놓쳤지만 여전히 판을 엎을 기회는 남아 있다는 뜻이죠·”
다른 배들과 달리 대장선에는 농장주와 상단주와 표국주 등의 귀빈들만 태웠다·
한데 그들 중에는 천룡표국과의 오랜 인연을 끊고 북천표국으로 갈아탄 상단주들도 있었다·
방금옥이 보고해온 바에 따르면 북천표국주인 여문탁과 그의 아들 여사평을 제외한 강북의 표국주 아홉 명도 표사들을 거느린 채 다른 범선에 타고 있다고 했다·
대장선에 탄 농장주들은 범선이 그 악명 높은 청수탄을 거슬러 오르는 걸 보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감탄했다·
하지만 상단주들은 어느 순간부터 말을 아꼈고 강남의 표국주들은 초조한 기색으로 주변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다 어느 젊은 상단주가 상갑판에 있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교룡방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으니 천룡표국의 미곡운송 비용이 크게 절감되겠구려· 이 정도면 표비를 삼 할까지도 내릴 수 있을 것 같소이다만·”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키는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농장주들의 탄성으로 왁자지껄하던 갑판이 한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만약 표비를 삼 할이나 깎아주면 상단주들은 노래를 부를 것이고 표국주들은 절망감에 크게 당황해할 것이다·
나는 이종산을 가만히 돌아보았다·
천룡표국의 표비에 관한 일이다·
이런 중차대한 일은 내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종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앞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전적으로 일임을 하겠다는 뜻이다·
나는 긴장한 표정의 사람들을 한번 쓰윽 훑어본 후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비용 절감은 천룡표국 내부의 일 죄송합니다만 그것 때문에 표비를 인하할 생각은 현재로선 없습니다·”
“하면 구태여 우리가 천룡표국에 미곡운송을 의뢰할 이유가 무엇이오?”
“모두 보셨다시피 무한에서 이곳 청수탄까지 반나절 만에 왔습니다· 이는 교룡방의 조운선보다 삼 할 정도 더 빠른 속도입니다·”
나는 분위기가 무르익도록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무한의 미곡시에서 사들인 미곡 절반은 강동으로 갑니다· 만약 최종 목적지가 회양(推揚)이라면 교룡방의 조운선으로 열흘이 걸리는 길을 천룡표국의 범선으로는 이레 만에 도착하게 됩니다· 천룡표국에 미곡운송을 맡기면 다른 표국들보다 사흘 먼저 회양의 미곡시에 물건을 푸는 셈이지요· 이게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는 분은 없으실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일반적으로 상단주들이 미곡을 팔아 챙기는 전체 수익에서 대략 오 할 정도가 표비로 지출된다·
그 오 할에서 북천표국과 동조하는 다른 표국들이 다시 이 할을 깎아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상단들보다 사흘 먼저 회양의 미곡시에 물건을 풀 수 있다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오 할에서 이 할의 비용을 줄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십 할에서 이 할의 추가 수익이 생기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지난밤 범선의 속도를 증명했고 상단주들은 청수탄을 오르기도 전에 이미 계산을 다 끝내 두었을 것이다·
셈이 얼마나 빠른 인간들인데 그걸 왜 모르겠나·
다만 산전수전 다 겪은 상계의 늙은 여우들이 일치단결 하여 고작 스물 초반의 애송이 표사인 나를 상대로 협상을 하려는 것이다·
물론 나도 실제로는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지만·
서로가 치열하게 눈치를 보고 있던 그때 범선은 물살의 속도가 확연히 다른 강심을 이십여 장 정도 남겨두고 다시 방향을 꺾어 강변 쪽으로 향했다·
범선이 기우뚱하는 순간 어디선가 ‘뚜둥퉁’ 하는 소리가 제법 긴 간격을 두고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청수탄을 오른 이후 방향을 바꿀 때마다 나는 소리였다·
그래서인지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종산을 비롯한 일부 고수들과 오랜 경험을 가진 선원들의 눈동자에 돌연 긴장감이 흘렀다·
나처럼 방금 난 몇 개의 소리가 여태 났던 것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때였다·
텅!
갑판 아래의 선실로 향하는 문이 벌컥 열리더니 물에 빠진 생쥐꼴을 한 이병룡이 헐레벌떡 튀어 나왔다·
이어 목구멍이 찢어지도록 외쳤다·
“배 밑창에 구멍이 났다!”
“무슨 소리야· 구멍이라니!”
이을룡이 신경질적으로 다그쳤다·
이병룡은 상갑판에 있는 나를 올려다보며 다시 외쳤다·
“범선이 방향을 바꿀 때 갑자기 용골과 연결된 널빤지가 ‘텅!’ 하고 떨어져 나가더니 그곳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 일단 혼자서라도 어떻게든 눌러서 막아 보려고 했는데 다른 쪽의 널빤지가 계속해서 터지는 바람에!”
“어느 정도입니까?”
“빨리 조처를 하지 않으면 금방 침몰할 거야!”
대화를 하는 그 순간에도 또 텅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누가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다섯 명의 선원들과 비룡당의 표사 열 명이 선실로 다급하게 뛰어들었다·
이제 강심 인근에서 막 방향을 틀었기에 강변까지의 거리는 무려 이백여 장에 달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말에 선객들은 공황상태에 빠져 버렸다·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이오?”
“정말 배가 침몰하는 것이오?”
“뭐라고 말을 좀 해보시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고함을 질러댔다·
이종산은 내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이갑룡과 을룡은 애써 표정을 굳히지만 입가에 미세하게 번지는 조소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지금의 상황을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눈을 마주친 황해노경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시간이 있으니 하실 말이 있으면 하시라는 뜻이었다·
나는 불안에 떠는 사람들을 향해 우렁우렁한 소리로 말했다·
“배가 침몰할 일은 절대 없습니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빨리 다른 범선을 붙여 옮겨 타면 될 일이니 너무 걱정들 마십시오·”
“다른 배들은 멀쩡할 거라는 보장이 있소?”
불쑥 지르고 들어온 사람은 사십 줄의 남양상단주 왕자경이었다·
며칠 전 금성루에서 이종산에게 그동안 천룡표국이 폭리를 취했느니 마니 하는 망발을 했던 바로 그 자였다·
그가 이번엔 나를 상대로 도발해 왔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당주께서 아직 어려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범선은 본시 수천 개의 목재를 짜 맞춘 것으로 떠다니는 건축물과도 같소· 해서 예로부터 뱃사람들은 범선을 만든다고 하지 않고 건조(建造) 즉 세우고 짓는다고 했지·”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나는 공손하게 포권지례를 하며 말했다·
일단 기를 죽였다고 생각했는지 왕자경이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지금처럼 돛을 모두 올린 상태에서 역류를 거슬러 오르며 급하게 방향까지 꺾을 때는 선체에 가해지는 힘이 상상을 초월하오· 특히 속도를 내기 위해 선폭을 좁히고 용골을 날카롭게 세운 침저선들이 평저선들에 비해 구조적으로 훨씬 더 취약하오· 고작 선객 백 명을 태우고 두 번째 청수탄을 거슬러 오르는 순간 선미 쪽 하판 곡부가 연달아 터져나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왕자경의 말은 들판에 불을 지른 것과도 같았다·
일부 상단주들과 표국주들이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만약 선실을 미곡으로 꽉 채웠다면 배를 수리한다손 치더라도 미곡들이 모조리 강물에 젖어 버렸을 게 아닌가·”
“선실을 미곡으로 채웠다면 물을 짓누르는 압력이 더욱 높았을 것이고 미처 손 쓸 사이도 없이 침몰했을 가능성이 오히려 크지 않을 까요?”
“미곡도 미곡이지만 줄초상이 났을 겁니다·”
“장강에 범선을 통한 조운은 아직 시기상조인 것 같군·”
“교룡방이 삼판선을 고집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게지·”
천룡표국과 거래를 끊었으면서 왜 대장선을 탔나 했더니만 아무래도 왕자경은 북천표국이 심어둔 간자 같았다·
전문적인 식견이 동원된 그의 말은 상단주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한데 모두 간과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이 범선들을 설계하고 만든 사람이 해룡선방의 방주인 백선왕 담적공이라는 것·
바다에서 그 어떤 강맹한 태풍에도 부서지지 않는다는 해룡선방의 배가 고작 장강 급류를 거슬러 오르다 터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저들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보아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설득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차리도록 확실한 물증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때쯤 선실 문이 다시 열리며 가불염이 튀어 올라왔다·
이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보고했다·
“준비해둔 널빤지들을 충분히 보강하고 버팀목을 받쳤습니다· 물이 들이치는 곳들은 전부 잡았고 새로 문제가 생기는 곳은 충분히 대응 가능한 상황입니다·”
마치 이런 상황이 올 줄을 알았던 것처럼 널빤지와 버팀목을 준비해두었다는 말에 선객들은 모두 어리둥절해 했다·
이제 내가 반격을 할 차례였다·
황해노경을 돌아보며 물었다·
“준비 되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시작하십시오·”
“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