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 장강십팔탄(2) >
애초 든든한 무기가 되어 줄 거라고 생각했던 교룡방의 조운선 오십 척은 북천표국이 한수의 수룡방으로부터 빌려온 오십 척 때문에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본래 강물은 섞여도 조운선은 섞이지 않는다고 했다·
타 방파가 장악한 강으로 조운선이 들어간다는 건 곧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천표국은 수룡방의 배만 빌릴 뿐 그걸 운용하는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교룡방의 방도들로 채우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싸울 이유가 없었다·
이종산은 무언가 이렇다 할 반격을 하지 않았다·
모든 게 표비 때문에 생긴 일인지라 표비를 내리지 않는 한 백약이 무효하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너무나 잘 아는 것이다·
나는 전생에서 삼십 년 전 수백에 달하는 표사와 쟁자수들의 밥줄이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조금 미안해졌다·
‘그땐 사정도 모르고 욕만 했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흑단목으로 만든 아홉 대의 화려한 사인교가 황학산 정상에 갑자기 나타났다·
사인교에는 적게는 육순에서 많게는 여든 살은 되어 보이는 노인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좌중이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강변을 굽어보던 북천표국과 강북의 다른 표국 사람들도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후 아홉 명의 노인들은 사인교를 탄 채 황학루의 꼭대기까지 올랐다·
이어 입구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북천표국주와 한 명씩 가볍게 묵례를 주고 받고는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가마꾼들이 걸음을 멈추었고 사인교가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졌다·
그제야 이종산이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나아가며 정중히 포권지례를 올렸다·
“이 아무개가 구상(九商)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천하십검이 이 아무개면 우리는 사람도 아니지·”
“무슨 그런 말씀을·”
“얼굴이 빨개지는 걸 보니 수상한데· 혹시 국주께서도 속으로는 우리를 쌀벌레라고 욕하셨던 것 아니오?”
쌀벌레라는 말은 대자본을 앞세워 미곡을 수탈적으로 사고팔아 남긴 이익으로 호의호식하는 상인들을 양민들이 손가락질하며 욕할 때 쓰는 말이었다·
이종산이 더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함께 온 노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쌀벌레를 하고 싶으시면 혼자 하실 것이지 왜 가만히 있는 우리까지 끌고 들어가시는 겁니까?”
“강남팔상 중 맏형인 내가 쌀벌레면 나머지도 다 쌀벌레지· 쓸데없이 토를 달기는·”
“형님이라뇨· 같은 상단주들끼리!”
“같은 상단주? 냉 가야 내가 죽은 네 큰 형님과 함께 조부님들 명으로 남만에서 여름에 모피 장사하던 얘기를 또 해주련?”
“알았어요· 알았어· 아유 지겨워 죽겠네·”
“형님도 많이 양보한 거라는 걸 알아야지· 어디서 감히·”
듣고 있던 또 다른 젊은 노인이 끼어들었다·
“한데 황삼 선배님 왜 자꾸 강남구상이 아니고 팔상이라고만 하시는 겁니까? 정말 섭섭합니다· 제가 선배님들을 따라 다니며 모신 지가 벌써 십 년이 넘었습니다·”
“너는 아직 장사를 좀 더 배워야 돼· 그때까진 어림도 없어· 예순 살도 안 된 것이 어디서 어른들 얘기하는데 건방지게 시리·”
“예순은 오 년 전에 벌써 넘었습니다· 그리고 장사는 아홉 살 때부터 가업으로 배웠고요·”
“시끄러워· 앞자리가 칠로 바뀌면 그때 끼어들어·”
이들은 강남의 구대 미곡상단주들이었다·
강남구상은 각각의 위상에 초점을 맞춘 호칭이고 실제 저들을 하나의 묶음으로 부르는 이름은 거상련(車商聯)이었다·
이곳 무한은 물론이거니와 광동성과 광서성에 열리는 미곡시까지 좌지우지한다는 거대 상인단체이자 세력·
북천표국의 온갖 포섭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거래처를 바꾸지 않고 남아 있는 아홉 곳이었다·
저들이 이처럼 서로 호형호제할 정도로 허물없이 지내는 건 선대 때부터 서로 싸우고 지지고 볶으며 친분을 쌓아왔기 때문이었다·
거상련의 련주이자 황금상단의 단주인 황삼(黃校) 뇌일봉이 씬득씬득 웃고 있는 이종산을 발견하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웃으시는 게요?”
“오랜만에 선배님들을 뵈니 반가워서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이 무공도 모르는 늙은이들로 하여금 이 높은 곳까지 올라오게 했소?”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또 흔해 빠진 산삼주나 먹자고 하려고?”
“이번엔 특별히 남궁세가로부터 선물 받은 봉황명주 열 병을 가져왔습니다· 모두 삼십 년씩 묵은 것으로 남궁장의 술창고 가장 깊은 곳에서 꺼낸 것이라 들었습니다·”
“남궁세가라면 양주의 그 남궁세가?”
“봉황명주면 뇌검이 혼자 몰래 먹는다던 술인데·”
“뇌검이 팔십이 넘도록 천하십검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팔팔한 게 다 봉황명주를 장복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지요·”
일전에 남궁세가를 방문했을 때 준마를 선물하고 답례로 받은 술이다·
남궁세가의 가문비전주인 봉황명주를 준비했다는 말에 늙은 상단주들의 눈빛이 꼭 길가다 새알을 발견한 아이들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뇌일봉이 말했다·
“이 국주가 많이 급해지신 게로군· 우리가 다른 곳과 거래를 틀까봐 이렇게까지 단단히 준비해온 걸 보면 말이지· 클클클·”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요·”
“실망하셨소?”
뇌일봉의 목소리가 갑자기 착 가라앉았다·
상단들이 대거 북천표국과 강북의 표국들로 거래처를 옮긴 것을 두고 묻는 말이었다·
다른 여덟 곳의 상단주들까지 진지한 표정으로 이종산을 바라보면서 가볍던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표국이든 상단이든 각자가 거느린 사람들의 밥줄이 걸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치열할 수밖에 없지요·”
“한데 천룡표국은 왜 끼어들지 않는 것이오?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이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곳이야말로 천룡표국일텐데·”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한 곳쯤은 전통을 지켜 다음 대에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고집불통을 봤나· 이러니 아무 죄 없는 우리만 계속해서 손해를 보지· 선친의 유언만 아니었으면 이참에 북천표국으로 화악 바꿔버리는 건데·”
“저도요·”
“저도요·”
“저도요·”
여덟 명의 상단주들 전부가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따라 했다·
하지만 지켜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맹세하는 것처럼 들렸다·
강남의 미곡시를 작지우지한다는 거상련의 상단주들이 부모가 죽어가면서까지 남겼다는 말을 거역할 리는 없을 테니까·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던 북천표국주와 강북의 표국주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황학루의 구 층으로 올라오는 입구에서 살짝 웅성거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잠시 후 천룡표국 무한 분타의 장궤인 방금옥이 다소 추레한 차림의 중년인 한 명을 이끌고 나타났다·
중년인은 다리를 심하게 절었는데 그 바람에 유독 눈에 띄었다·
황학루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중년인은 부담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방금옥이 말했다·
“이분께서 국주님을 뵙고 싶다고 하시어 모시고 왔습니다·”
“이종산이라고 합니다·”
“방립동입니다·”
“저를 보자 하셨다고요”
“저는 남직예의 합비에 근거지를 둔 만보상단(萬寶商團)의 대행수입니다· 닷새 후 미곡 이백 섬을 합비로 운송하고자 하온데 비록 운송량은 다른 상단의 절반도 채 안 되지만 기회를 주신다면 천룡표국에 의뢰를 하고 싶습니다·”
고작 미곡 이백 섬이라는 말에 지켜보고 있던 강북의 표국주들 사이에서 나지막한 실소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이종산은 진지하게 말했다·
“천룡표국은 다른 표국들 보다 이 할이 비쌉니다·”
“알고 있습니다·”
“작은 상단이라면 한 푼의 표비도 부담스러우실 텐데 어찌하여 천룡표국에 의뢰를 하시려는 겁니까?”
방립동은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잠시 방금옥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그녀와 조금 아는 사이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같은 방씨이기도 했다·
방금옥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결심한 듯 말을 이어갔다·
“십여 년 전 저는 천룡표국이 운송하던 미곡을 털려고 했던 비적이었습니다· 그때 귀 표국의 표사가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지금도 한 쪽 다리를 절고 있지요·”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에 이종산은 물론이거니와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한 사람의 약점이 공개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종산이 서둘러 말했다·
“더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허락해 주시면 끝까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좌중의 공기가 태풍을 만난 것처럼 요동치는 가운데 방립동의 말이 이어졌다·
“병신이 되는 대신 얻은 쌀을 팔아 죽은 지 한 달도 넘은 홀어머니의 장례를 겨우 치렀습니다· 이후 만보상단에 들어가서 십 년을 악착같이 일했지요· 그러다 상단주의 눈에 들어 지금은 대행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상단주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연로하신 탓에 합비의 총단에 계십니다· 상단의 모든 결정권은 저에게 일임하셨으니 다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가 원망스럽지 않으십니까?”
“원망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한데 왜?”
“원망하는 마음만 있는 건 아닙니다·”
“···?”
“혹시라도 오해를 하실까봐 말씀드리는데 저는 지금 천룡표국에 보은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감히 저희처럼 작은 상단이 어떻게···· 다만 저희가 맡기는 미곡 때문에 저 같은 사람들이 한 번의 실수로 죽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러는 것입니다· 저희의 의뢰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천룡표국은 만보상단의 의뢰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또한 원하시는 목적지까지 표물을 안전하게 운송해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방립동와 이종산은 서로를 향해 다시 한번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했다·
미곡 이백 섬이면 표마차 열대 분량이고 교룡방의 조운선으로 딱 한 척을 채울 선적량이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그나마도 석 달간 계속 왕복하는 것이 아니고 일회성으로 끝날 모양이었다·
작은 상단이 본격적으로 미곡을 취급하기 전에 경험을 쌓을 요량으로 해보는 것이다·
이런 걸 상계의 말로 ‘길잡기’라고 한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과 그로 말미암은 일화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갖가지 표정과 반응을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강남구상과 천룡표국의 사람들은 모두 먹먹한 표정이 되었다·
비록 오고 가는 액수는 크지 않지만 인간사 돌고 도는 인연이 참으로 기구하지 않은가·
그때였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 왔다·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니 장강변을 따라 이어진 관도의 저 아래쪽으로부터 한 떼의 인마가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일행이 아닌 듯 백 장 이상 늘어진 상태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려왔다·
숫자가 족히 오십 기는 되어 보였다·
이윽고 미곡시가 열리는 강변 개활지에 도착하자 일부는 각각의 상단들이 설치해둔 천막으로 들어가고 일부는 역시나 각각의 표국들이 주둔하고 있는 장소로 사라졌다·
눈치를 보아하니 무한의 바로 아래쪽 탄에서 대기하고 있던 상단과 표국의 무사들이 급히 무언가를 보고하러 온 것 같았다·
“전쟁이라도 난 거야 뭐야?”
언제 나타났는지 전병과 술을 갖고 올라온 이병룡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십여 명은 말을 타고 황학산을 가로질러 올라왔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황학루의 꼭대기까지 올랐다·
가장 먼저 도착한 표사가 북천표국주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범선 다섯 척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무슨 헛소리야! 장강에 범선이라니·”
“저만 본 게 아닙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던 상단과 표국의 무사 수십 명이 함께 보았습니다·”
“자세히 말해 보아라!”
“오늘 아침 괴이한 모양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선 다섯 척이 교룡방의 도움도 받지 않고 청수탄(靑水難)을 거슬러 올랐습니다· 해 질 무렵이면 무한까지 올라올 겁니다·”
“아침에 청수탄을 지났는데 저녁에 여길 닿는다고?”
“놀랍게도 평수에서의 속도가 말만큼이나 빠릅니다·”
해가 지려면 이제 한 시진도 남지 않았다·
그 정도라면 이곳 황학루에서 배가 보일 수도 있었다·
표국주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가장자리로 몰려가 십리경으로 장강을 훑기 시작했다·
이종산과 갑룡과 을룡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얼른 십리경을 뽑아 눈에 붙였다·
과연 다섯 척의 커다란 범선이 여덟 개의 돛을 펼친 채 전속력으로 달려오는게 보였다·
선봉에 선 대장선의 선수에는 황해노경과 함께 남궁소소가 협봉검을 허리에 찬 채 보무도 당당하게 서 있었다·
‘해냈구나!’
이번 작전은 돌발변수가 워낙 많아서 일곱 개의 급류를 거슬러 오른 다는 전제 하에서도 닷새 정도는 늦어질 수 있다는 각오를 했다·
한데 무슨 조화인지 오히려 예상했던 것보다 이틀이나 더 빨랐다·
뒤늦게 배를 발견한 사람들 틈에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맙소사!”
“진짜 범선이야!”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누군가 주돛에 깃발을 올리고 있습니다·”
깃발을 내건다는 말에 황학루의 구 층 전체에 잠시 쥐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십리경에 눈알을 바짝 갖다 댔다·
십리경이 없는 사람들은 십리경을 가진 사람들의 입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범선을 다섯 척이나 장강에 올려서 무한까지 끌고 올라온 미친 인간들이 도대체 누군지 궁금한 것이다·
그러다 목구멍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소리가 있었다·
“저건!”
“천룡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