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 경사(京師)에서(2) >
십여 명의 용 같고 범 같은 무인들이 드넓은 내실로 들어섰다·
맞춰 입은 듯한 청의무복에 검갑을 비스듬히 들었는데 기도가 출중하다 못해 살벌했다·
‘고수들이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먼저 양해를 구하듯 진왕에게 묵례부터 올렸다·
이어 좌우를 둘러보다 우리 일행을 발견하고 기세를 끌어 올렸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지금 우리는 모두 비무장 상태였다·
한데도 맹수가 맹수를 알아보듯 바로 무림인들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내가 책임을 지겠네·”
진왕의 말이었다·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알았다는 듯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하들을 입구의 양쪽으로 물렸다·
그사이 바깥에서는 아까부터 누군가 회랑을 따라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무인들은 누군가의 등장에 앞서 주변을 점검하러 온 호위무사들이었던 것이다·
‘대체 누구이기에 감히 진왕가의 장원에서까지····’
잠시 후 문제의 인물이 들어섰다·
강인한 인상에 금실로 봉황을 수놓은 남색장포의 사내였는데 마치 제집 드나들 듯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위엄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존재 따윈 가볍게 무시하고 곧장 진왕에게로 가는 걸음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존귀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지난날 진왕을 처음 보았을 때도 이런 비슷한 느낌이었다·
평생을 군림하며 산 자의 몸에 자연스럽게 밴 권위라고나 할까·
뒤이어 화려하고 복잡한 옷을 입은 스물 초반의 아리따운 여자가 잰걸음으로 들어섰다·
어딘지 모르게 살짝 이국적인 용모의 그녀는 우리가 구출해온 유구국 왕자를 쏙 빼닮았다·
순간 왕자가 여자를 향해 빽 소리치며 달려갔다·
“(누나!)”
“(쇼고!)”
두 사람은 누가 지켜보든 말든 그 자리에서 부둥켜안고 눈물을 터뜨렸다·
훨씬 키가 컸던 여자는 왕자의 머리통을 꼭 끌어안고 정수리에 볼을 비비며 쉴 새 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왕자를 억지로 떼어 내더니 한쪽 무릎을 털썩 꿇어 시선을 맞추었다·
이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왕자의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다가 또다시 와락 껴안고 펑펑 울었다·
“(쇼고·)”
“(누나·)”
지켜보고 있던 모모카와 남궁소소도 덩달아 울었다·
좀 전까지 우아하게 웃음 짓던 진왕비와 공주도 어느새 손수건을 꺼내 조용히 눈물을 찍고 있었다·
진왕과 의문의 사내는 인사도 미룬 채 두 사람의 해후(選追)를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미나모토도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아차리고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저간의 사정도 모르고 왜국말도 못 알아듣는 나와 호리독사만 눈알을 또록또록 굴리며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그때 남궁소소가 전음을 보내왔다·
[둘이 남매인가 봐요·]
[그럼 유구국의 공주?]
[그런가 봐요·]
[어쩐지 닮았더라니·]
유구국의 공주라는 젊은 여자는 아무래도 사내의 아내인 듯했다·
사내의 나이가 서른쯤 되어 보이니 정실보다는 후실일 것이고·
이윽고 유구국의 왕족 남매가 눈물을 그쳤다·
하지만 다시는 헤어지지 않으려는 듯 손을 꼭 잡은 채 찰싹 붙어 있었다·
왕이었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도 각자가 다른 곳에서 들었을 것이다·
영영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피붙이를 낯선 타국에서 다시 만난 남매의 정이 얼마나 애틋하겠나·
모모카도 여자에게 다가가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넸다·
여자는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모모카를 끌어 안고 또 한참을 울었다·
울면서 뭐라고 말을 하는데 눈치를 보아하니 동생을 끝까지 지켜주어 고맙다고 하는 것 같았다·
대충 해후의 의식이 끝나자 사내를 향한 진왕 일가족의 인사가 시작되었다·
“어서 오시게·”
“어서 오세요· 황자·”
“어서 오시어요· 오라버니·”
진왕을 시작으로 진왕비와 공주가 차례로 인사를 했다·
마지막에 이르러 공주는 허리까지 깊숙이 숙였다·
‘맙소사· 황자라니!’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남궁소소와 호리독사도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여기서 진왕을 만난 것도 놀라자빠질 지경인데 급기야 황자까지 출몰(?)하다니·
가만있어 보자·
그럼 내가 황자의 처남을 구출해온 건가?
황자도 진왕에게 예를 갖추었다·
“당숙께서 저의 오랜 고민을 해결해 주셨군요·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일세·”
“이번 일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황자는 진왕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진왕이 당황해하며 그를 붙잡았다·
당숙은 아버지의 사촌 형제를 일컫는 말이다·
황자는 진왕의 오촌 조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저 황자는 몇 번째일까?
지금 황실엔 모두 일곱 명의 황자들이 있었다·
본래는 장남인 황태자를 비롯해 모두 여덟 명이었다·
황태자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데다 덕이 높아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서른 무렵 중병이 찾아와 그만 세상을 하직해 버리고 말았다·
이후 황태자의 자리를 비워둔 상태에서 남은 일곱 명의 황자들끼리 십여 년째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싸움을 벌여오는 중이었다· 호사가들은 이를 두고 칠황쟁패전(七皇爭顯戰)이라고 불렀다·
당금 황제의 건강이 점점 안 좋아지는 상태에서 황태자로 책봉되는 황자는 그야말로 철권을 휘두르게 된다·
당혹스럽게도 나는 이 전쟁의 끝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야망이 크고 엄청난 외척들을 등에 업은 이황자나 삼황자나 사황자 중 한 명이 황태자로 책봉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한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오황자가 황태자로 책봉된다·
이름이 주걸륭이었던가?
오황자는 지금 서른 중후반이었다·
그러니까 서른 살 정도로 보이는 저 황자는 육황자나 칠황자쯤 될 것이다·
이런 얘기들은 대부분 내가 전생에서 쉰 살까지 살며 조금씩 들어서 알게 된 것들이었다·
그러니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도 모르고 그나마 굵직한 일들 외에는 알지도 못했다·
예를 들어 육황자나 칠황자에게 유구국 공주 출신의 부인이 있었고 왜국에 인질로 잡혀 있던 처남을 구출하려 했다는 것도 까맣게 모르는 일이었다·
전생에서는 과연 누구를 보냈으며 성공을 하기는 했을까?
혼자서 이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 석불원이 내게 전음을 보내왔다·
[유구국이 사쓰마의 속국으로 전락하기 전 그곳의 왕이 대륙의 황자에게 공주를 서둘러 시집 보냈네· 나는 평소 안면이 있는 진왕으로부터 적국에 볼모로 잡혀있는 유구국의 왕자를 구출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고·]
[이미 다 알아차렸거든요·]
[오황자께서 어찌하여 갑자기 왕림하셨는지 모르겠으나 오늘 우리가 보고 들은 건 절대 외부에 발설해선 안 되네·]
‘이런 미친!’
벼락이 정수리로 떨어졌다가 척추를 따라 몸을 관통한 다음 발바닥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목이 타고 식은땀이 흐르며 다리가 달달달 떨렸다·
나는 지금 장차 대륙의 황제가 될 인물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상상조차 못 한 일·
과연 이래도 되는지 겁이 다 날 지경이었다·
[왜 그렇게 떠는가?]
[아 아닙니다·]
‘진왕이 오황자의 사람이었을 줄이야·’
그때쯤 진왕과의 짧은 담소를 끝낸 오황자가 한쪽 구석에 나란히 서 있는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진왕이 말했다·
“이번 일에 투입된 표사들이네·”
“오오 그래요?”
왕자를 구해온 사람들이라는 말에 오황자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부인까지 매우 호의적인 표정으로 변했다·
오황자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직접 걸어서 다가오기까지 했다·
“황자전하를 뵈옵니다!”
석불원이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나도 남궁소소도 호리독사도 호리독사의 손에 멱살을 잡힌 미나모토도 재빨리 무릎을 꿇어 엎드렸다·
“모두 고개를 들라·”
누구의 명이라고 거절하겠나·
모두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고개만 살짝 들어 올려 황자의 발끝을 응시했다·
오황자는 대견하다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짓다가 석불원에게 물었다·
“귀공이 표두이오?”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름이 무엇이오?”
“석불원이라고 하옵니다·”
“작은공도 크게 치하하는 것이 황실의 법도· 하물며 오황자의 처남을 구했는데 어찌 그냥 넘어갈 것인가· 바라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소원을 이뤄 주겠다는 뜻이다·
돈이면 돈 벼슬이면 벼슬 오황자는 무엇이든 다 들어 줄 기세였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남궁소소와 호리독사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분명 자신들에게까지 차례가 올 터 무얼 말할지 머리가 팽팽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황실로 향하는 공물(貢物) 운송권이나 달라고 해볼꺼나·
절강성 전역에서 항주로 집하되는 공물들만 확보해도 돈방석에 올라앉게 된다·
단발성 의뢰만 가득한 비룡당에 최초의 장기표행건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도 엄청난 규모의·
“외람된 말씀이오나 소인들은 이미 진왕전하로부터 충분한 대가와 분에 넘치는 치하를 받았사옵니다·”
“대가와 포상은 다른 것이오·”
“정히 그러시다면 술을 한잔 내려 주시옵소서· 오황자전하께서 내려 주시는 술을 받았음을 평생 영광으로 알겠사옵니다·”
아니 이 양반이 거기서 말을 그딴식으로 해버리면 어쩌자는 건가·
남궁소소와 호리독사의 눈동자도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뭔가 엄청난 걸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방에 나가떨어진 모양이다·
황태자는 흡족한 표정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남궁소소을 보았다·
순간 두 눈을 크게 떴다·
남궁소소의 빼어난 용모를 뒤늦게 알아차리고 깜짝 놀란 것이다·
“그대도 표사인가?”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름이 무엇인가?”
“남궁소소이옵니다·”
“양주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천하십검 중 한 명인 뇌검 남궁유룡이 금지옥엽으로 아끼는 손녀라네·”
지켜보고 있던 진왕이 차분한 음성으로 끼어들며 한 말이었다·
나는 왠지 진왕이 오황자에게 지켜야 할 어떤 선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관과 무림이 제아무리 호수와 강의 관계라고 해도 남직예성의 패자로 군림하는 대남궁세가를 모를 수는 없었다·
심지어 남궁세가보다 한참이나 세가 약한 신창양가 조차 군문으로 진출해 천하의 군졸들에게 양가창법을 전수하고 있는 마당에·
용모가 매우 빼어난 일개 여표인 줄 알았던 남궁소소의 신분이 뜻밖이었는지 오황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용히 지켜보던 유구국 왕족 남매와 모모카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모습이 재밌는지 진왕비의 옆에 서 있던 공주가 또 실실 웃어댔다·
그녀는 남궁소소처럼 엄청난 신분의 무림 여고수를 친구로 둔 것이 마냥 좋은 것 같았다·
“알고 봤더니 대단한 분이었구려· 하지만 제아무리 무림세가의 영애라 할지라도 할수 없는 것이 있을 터· 바라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오황자의 말투가 살짝 반공대로 바뀌었다·
무림세가도 할 수 없는 일을 자신은 할 수 있다는 식의 말에선 황궁과 황실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사실이 그렇기도 하고·
“표행비 만으로 충분하옵니다·”
앞선 석불원의 거절에 이어 신분까지 밝혀진 마당에 추접스럽게 시리 무얼 요구할 수 있겠나·
남궁소소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오황자는 호리독사에게도 물었다·
“귀하도 무림세가의 인물인가?”
“소인은 천룡표국의 객표이옵니다· 전하·”
“객표?”
“일이 있으면 그때그때····”
“이름은 무엇인가?”
“하종도 이옵니다· 전하·”
“소원을 말해보라·”
“없습니다· 전하·”
오황자는 미나모토에게도 물었다·
“그대는?”
“그의 이름은 미나모토이옵고 왜인입니다· 전하·”
석불원이 설명을 했고 남궁소소가 재빨리 미나모토에게 물었다·
미나모토가 뭐라고 하자 남궁소소가 그대로 통역을 했다·
“그 역시 바라는 것이 없다고 하옵니다·”
“이 사람들 좀 보게· 황자가 큰맘 먹고 소원을 들어주겠다는데 원하는 것이 없다니· 말로만 듣던 무림 협사들의 기개가 이런 것인가? 하하하·”
소원이 없을 리가 있나·
표두가 첫 번째 대답을 잘 못 끊는 바람에 일이 확 꼬여 버려서 그렇지·
이런 분위기에서 간이 어지간히 크지 않고서야 감히 누가 소원 운운하겠나·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오황자가 마지막으로 내게 물었다·
석불원부터 시작해 옆으로 한 명씩 옮겨가며 물은 것인데 어쩌다 보니 내가 제일 마지막에 꿇어 있었다·
“이정룡입니다· 전하·”
“자네가 풍운비룡이군·”
“저를 어찌····”
“당숙께 들었네· 천룡표국의 사공자로 항주에서 숙부님 내외분은 물론이거니와 소야의 목숨까지 구했다지? 향시와 전시에서 연달아 장원급제한 천고의 기재이기도 하고·”
소야는 공주의 이름이었다·
성이 주 씨여서 주소야였고·
항렬로 따지면 그녀는 오황자의 육촌 동생일 것이다·
“받잡기 어렵습니다· 전하·”
그때 모모카가 황자빈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뭐라고 속삭였다·
황자빈이 깜짝 놀라서는 몇 가지를 묻고 답하더니 오황자에게 고스란히 전달해 주었다·
“저 젊은 표사님이 지혜를 내어 쓰루마루성의 본성에 있는 천수각과 여러 전각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고 합니다·”
“듣던 대로 화끈한 친구로군·”
“당치 않습니다· 소인은 다만 일개 표사로서 표두의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그대도 소원이 없는가?”
“있습니다· 전하·”
오황자는 물론이거니와 지켜보고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특히 석불원과 남궁소소와 호리독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뻔뻔해져야 한다·
욕 먹는 건 한순간이고 이득은 평생 간다·
무려 황제가 될 인물을 언제 또 만나고 말까지 섞어 보겠나·
“그래 청이 무엇인가?”
“외람된 말씀이옵니다만 진왕전하와 황자전하만 모시고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다시 한번 얼어붙었다·
특히 석불원을 비롯한 우리 일행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나는 지금 감히 진왕과 황자의 앞에서 다른 황족들을 모두 물려 달라는 요구를 한 것이다·
이유를 불문하고 이는 대단히 무례한 발언이었다·
“자중하시게!”
석불원이 착 가라앉는 음성으로 나를 나무랐다·
표사들의 언행을 감독해야 하는 표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꼭 다문 입술로 버티었다·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이다·
“비밀스러운 청인가 보군· 모두 물러가라·”
오황자가 말했다·
그러자 호위무사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전하!’ 라고 짧게 불렀다·
신분을 논하기 이전에 나는 이미 무림의 고수다
호위를 책임진 입장에서는 오늘 처음 보는 무림고수 앞에 오황자만 달랑 놓아둘 수가 없는 것이다·
진왕이 있다고는 하나 그는 무공을 모르니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고·
“물러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오황자가 거듭 말하자 호위무사의 수장은 마지 못한 듯 짧게 고개 숙인 후 수하들을 데리고 나갔다·
진왕도 고개를 끄덕여 진왕비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 전부 쫓아 보냈다·
드넓은 내실엔 이제 나와 오황자와 진왕만 남게 되었다·
사방이 쥐죽은 듯 고요한 가운데 진왕이 말했다·
“황자와 독대를 하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닐세· 자네가 아무리 큰 공을 세웠어도 지금 한 행동만으로 이미 절반의 값을 치렀다는 걸 명심하게·”
질책과 경고가 동시에 들어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진왕이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조언하는 것 같았다·
오황자가 다시 말했다·
“이제 소원을 말해보시게·”
“그 전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잠시 시간을 허락해 주실 수 있겠는지요?”
“요구가 많군· 말해보라·”
황자의 말투가 조금씩 차가워지고 있었다·
내가 진왕의 총애만 믿고 감히 황자의 호의를 이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진왕도 표정이 굳어졌다·
“오랜 시간 표행을 하다 보면 가장 곤란한 것이 여름철 식수의 변질입니다· 특히 호리병에 비해 들고 다니기 편한 가죽수통의 물이 잘 상하지요·”
“그래서·”
“그걸 막기 위해 저희가 잘 쓰는 방법 중 하나가 은전을 넣어두는 것입지요· 이유는 모르겠으나 은전을 세 개만 넣어 두어도 며칠이고 신선한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독을 감별하고 다스리는 은의 효능은 나도 잘 알고 있네· 해서 나 역시도 은으로 만든 식기들을 애용하고 있고·”
“한데 더러 불순물이 많이 섞인 가짜 은전을 모르고 넣어두는 일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은과 색깔이 비슷하면서 무게는 더 많이 나가는 납(鉛) 같은 것 말입니다·”
“납이 섞인 가짜 은전의 유통이 있음도 알고 있고·”
“이걸 모르고 넣어둔 표사나 쟁자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두통 현기증 경련 등의 증상을 일으키다가 점차 헛것이 보이고 발작과 마비가 차례로 일어나다가 눈이 멀며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보통 그 전에 잇몸 아래로 검은 선이 나타나지요·”
“그걸 왜 내게 말하는가?”
“불경스러운 말씀인 줄 아오나 황자전하의 잇몸에도 표사와 쟁자수들에게 보았던 것과 비슷한 선이 생기고 있습니다· 부디 황실 밖의 훌륭한 의원을 찾아 진맥을 받아보시길 청하옵니다·”
“···!”
“···!”
오황자와 진왕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굳어졌다·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오황자는 곧 황태자가 되고 황제까지 된다·
하지만 권좌에 오른 지 일 년 만에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죽음에 이른다·
원인을 두고 황실 사정에 밝은 의원들을 통해 이런저런 말들이 흘러나와 소문으로 떠돌았는데 그중 하나가 납독이 골수에까지 미친 탓이라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때는 한 귀로 흘려들었다·
한데 오늘 오황자를 보자 수십 년 전의 소문이 생각나서 일단 지르고 본 것이다·
어쨌거나 그가 죽는 것은 확실하고 이참에 명의를 찾아 진맥을 받아보면 꼭 납독에 의한 것이 아니어도 원인을 찾을지 모르니까·
표사와 쟁자수들에게 나타났다는 검은 선은 아랫니의 아래쪽 잇몸 깊은 곳에 생긴다·
해서 입술을 까뒤집지 않고는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검은 선을 보았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한데 오황자와 진왕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격한 반응을 보였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 시선을 나누었다·
이어 진왕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사람을 물린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나?”
“그렇습니다·”
“잘했네·”
이 양반들 보소·
내 말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대로 믿는 눈치다·
“혹시 알고 계셨는지요?”
“자네가 말한 초기증상들이 조금씩 심해지고 있었으나 원인을 몰랐네· 북방으로 떠돌아다니느라 몸을 돌볼 겨를도 없었고· 꼭 황궁밖의 뛰어난 의원을 찾아 진맥을 받아보도록 하지· 이미 잘 알겠지만 이 얘긴 절대 발설해선 안 되네·”
“물론입니다·”
오황자는 다른 황자들과 달리 대단한 외척이 없었다·
하지만 국경지대를 떠돌며 수많은 오랑캐들의 침입을 막은 덕택에 그곳 백성들로부터의 신망이 두터웠다·
또한 오랜 시간 생사고락을 함께한 장수들과의 인맥이 있었다·
이는 황태자의 자리를 노리는 다른 황자들에게 목에 가시처럼 성가신 일이었다·
황제가 서거하면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전생에서 오황자의 죽음이 누군가의 오랜 음모로 말미암은 독살이라고 확신했다·
내가 아는 황궁의 분위기를 진왕이나 오황자가 모를 리 없었다·
오황자가 말했다·
“혹시 내게 할 청이라는 게 이것인가? 황궁 밖의 명의를 찾아 진맥을 받아보라는 것·”
“그렇습니다· 전하·”
“그대는 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구태여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내게 호의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오황자에게서 나를 보았다·
그래도 나는 독살을 시도하는 형들은 없었다·
아닌가? 그들도 때가 되면 나를 죽이려고 들까?
“공맹을 익힌 자가 어찌 벌이 두려워 충언을 주저하겠습니까·”
나를 내려다보는 오황자의 눈동자가 한없이 깊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진왕도 더할 나위 없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 일어나라·”
나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하도 오랫동안 꿇어 앉아 있었더니 쥐가 날 지경이었다·
오황자의 단호한 말이 이어졌다·
“소원이야 그렇다 치고 진맥을 받았으니 그 값은 치러야겠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말해보라· 이건 황자의 명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