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 바다 건너 동쪽으로(6) >
정오 무렵 우리는 시마즈 가문의 본거지인 쓰루마루성(鶴九城) 하고도 객당 쯤으로 짐작되는 어느 전각 삼 층 돗자리 방에 모여 있었다·
왜국의 모든 것이 생소한 나와 호리독사는 창가에 얼굴을 걸치고 서서 이국적인 풍경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성 안이 미로처럼 복잡하군·”
“담과 나무도 쓸데없이 많고요·”
“마차가 들고나는 동선을 모조리 방해하는 것이 여러모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구조이오·”
“진퇴로가 복잡한데다 높은 창문들이 많아서 함부로 들어왔다간 눈에 띄어 잡히기에도 딱 좋습니다·”
“복잡한 와중에도 간편한 지름길이 분명 있을 거요· 성 안에서 쓰는 물자의 원활한 수급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니까·“
“이 정도 규모와 역사를 지닌 성이라면 가보(家資)로 내려온 보물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다른 제후들과의 전쟁에서 빼앗은 것도 엄청날 것이고요· 왜인들은 특히 골동품을 귀중히 여긴다던데·”
“골동품?”
“대륙에선 부르는 게 값이죠· 왜국의 골동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부호들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거든요·”
“그게 그렇게 돈이 되오?”
“되다 말다요·”
“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뾰족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남궁소소가 허리에 두 손을 척 걸치고는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성의 구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소·”
“보물 훔치는 얘기 하는 거 다 들었거든요·”
“각자가 잘하는 방식으로 보는 것이오· 하 표사는 물건을 훔치는 상상을 통해 나는 물건을 운송하는 상상을 통해·”
“됐고요· 이제 어떡해요? 성밖에 매복해 있다가 타키히로를 납치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에게 잡혀 와 버렸으니 말이에요·”
“잡혀 온 건 아니지·”
“오기 싫은 걸 억지로 왔으면 잡혀 온 거죠·”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었소·”
“그러게 왜 거기서 사기를 쳐 가지고·”
“사기가 아니라 사고였소·”
“사기로 사고를 친 거겠죠·”
그때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있던 미나모토가 나를 노려보며 조용히 ‘빠가야로’라고 말했다·
살짝 어처구니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게 저 인간이 술취한 낭인무사의 손모가지를 잘라버리는 바람에 생겨난 일이 아니던가·
이건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한마디 하려는 순간 남궁소소가 선수를 쳤다·
“(그건 아니죠· 그때 이 당주가 나서서 임기응변으로 수습하지 않았다면 우린 지금쯤 도망자 신세가 되어 있을 거예요· 수천 명의 왜국 무사들은 우리를 잡기 위해 온 도시를 뒤지고 다니는 중일 것이고요·)”
“(그리고 이 모든 게 귀하가 칼을 함부로 뽑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하다못해 낭인무사의 손목을 길 한복판으로 차버리는 일만 없었어도···)”
“(나도 호리독사가 그럴 줄 몰랐소·)”
“(네?)”
“(혼전 중에 낭인무사가 자신의 손모가지를 주우려고 하자 그가 냅다 발로 차버리더군· 그럴 시간이 있으면 칼질이나 한 번 더 할 것이지· 멍청하게 시리·)”
“(확실히 봤나요?)”
“(알고서 하는 말 아니오?)”
“(···!)”
남궁소소의 얼굴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어 무슨 이유에선지 호리독사를 힐끗 보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자한테 뭐라고 한 거요?”
“각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기운 빠지지 않게 말을 좀 가려서 하라고 했어요· 앞으로는 허락 없이 칼을 뽑지도 말고요·”
“그랬더니?”
“죄송하대요· 자기도 후회하고 있다고·”
“표정은 전혀 미안한 게 아닌데·”
“그만들 하게·”
석불원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는 이어 남궁소소에게 통역을 하라는 눈짓을 하고는 미나모토를 돌아보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결과가 좋으니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는 줄 알아라· 하지만 또 다시 내 허락없이 칼을 뽑았다간 너의 손모가지가 먼저 잘릴 것이다·”
석불원의 말에 나와 남궁소소와 호리독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대표로 물었다·
“결과가 좋다고요?”
“애초 티카히로를 납치해 몸값으로 삼으려 한 것은 철옹성 같은 성에 침투하고 왕자를 찾고 데려서 나오는 세 단계를 하룻밤 사이에 처리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일세· 하지만 자네 덕분에 첫 번째 단계에 성공했고 오랜 시간 머물 수도 있게 되었지·”
“그 말씀은?”
“왕자를 바로 훔치도록 하세·”
일순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흘렀다·
좌중의 공기가 저절로 팽팽하게 조여지는 가운데 나는 한층 진지해진 음성으로 물었다·
“일단 다른 과정은 다 생략하고서라도 찾으면 데려갈 방법은 있습니까? 제 말은 볼모로 와 있는 그가 없어지는 순간 유구국의 왕실이 곤란해질 텐데 그걸 아는 왕자가 순순히 우릴 따라나서겠냐는 것이죠·”
“나도 똑같은 질문을 했었지·”
석불원은 품속에서 한 자 정도 길이의 막대기를 꺼냈다·
자세히 보니 그건 구리로 만든 피리 즉 동적(銅哲)이었다·
동적 특유의 빛깔로 말미암아 고태미가 물씬 풍겼다·
한데 재질만 특이할 뿐 생김새는 대륙의 다른 대나무 피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게 뭡니까?”
“표주가 내게 준 증표일세· 이걸 왕자에게 보여주면 두말하지 않고 따라나설 거라고 하더군· 그리고 유구국의 왕은 이미 죽고 없네· 지금은 경쟁 관계에 있던 전왕의 동생이 뒤를 이어 권좌에 오른 상태이지·”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경우 새로 권좌에 오른 왕은 볼모로 잡혀간 조카의 귀환을 바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국(大國)의 정치와 선진문물을 보고 배운 조카가 성인이 되어 돌아오면 그를 중심으로 정적들이 힘을 뭉쳐 왕권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해서 아예 귀환을 하지 못하도록 갖은 방법을 동원한다·
심지어 평소 줄을 대고 있던 대국의 실력자들에게 손을 써서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리기도 한다·
왕자와 함께 볼모로 잡혀간 귀족의 자제들이 하나둘씩 죽어 나갔다고 하더니 무언가 더러운 음모가 진행 중인 듯한 느낌이었다·
“알겠습니다·”
***
세상일이 그렇듯 모든 게 계획대로 되진 않았다·
쓰루마루성에 머문 지 사흘째가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타키히로와 저녁 식사를 했고 왜국 무사들의 마상 활쏘기 시합을 구경했으며 사람들이 화려한 복장에 이상한 가면을 쓰고 나와 춤과 노래를 하는 공연을 관람했다·
하지만 볼모로 잡혀 왔다는 유구국의 왕자를 만나기는커녕 그에 관한 어떤 정보도 얻지 못했다·
남궁소소가 밥을 가져다주는 하인들에게 이것저것 말을 붙여도 보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왕자를 언급하는 것이 무슨 금기라도 되는 듯 모두가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그렇다고 대놓고 왕자의 거처가 어디인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대번에 의심을 살 테니까·
나흘째 되는 날 밤 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우리 중 은신술과 잠행술이 가장 뛰어난 호리독사를 성안에 풀어 놓은 것이다·
새벽이 깊어서야 돌아온 호리독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도 마십시오· 경계가 삼엄한 건 둘째 치고 성의 구조가 어찌나 복잡한지 한참을 헤맸습니다· 특히 걸핏하면 나타나는 성벽과 해자 때문에 잠행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어디까지 들어갔소?”
지난 며칠간 살펴본 결과 왜국의 성은 천수각(天守閣)이라 불리는 성주 일족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삼중의 높다란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성벽과 성벽의 거리는 수백 장이 넘었는데 당연하게도 그 사이는 전부 복잡한 정원이나 전각 등으로 채워진 상태였다·
쉽게 말해 성 안에 성이 있고 또 그 성 안에 성이 있었던 것이다·
지난 사흘 동안 우리는 제일 바깥의 외성에만 머물렀으며 중성으로 들어가는 건 오직 타키히로의 초대가 있을 때만 한시적으로 가능 했었다·
가장 안쪽의 본성은 아예 꿈도 못 꾸었다·
석불원은 유구국의 왕자가 아무리 볼모라지만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중성의 어느 구석진 전각에 억류되어 있을 거라고 했다·
“중성까지 들어갔습니다·”
“왕자의 거처로 짐작되는 곳은?”
“못 찾았습니다·”
“어째서요?”
“하룻밤 사이에 이 넓은 성 안을 혼자 어떻게 다 훑고 다니겠습니까? 설사 다 뒤진다고 해도 여기 유구국의 어린 왕자가 산다고 누가 지붕에다 표시를 해놓은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눈치껏 찾아야죠· 귀족처럼 보이는데 혼자 이상한 복장을 하고 마당에서 왔다 갔다 하는 아이가 있다거나·”
“아이들은 이 시간에 보통 자지요·”
“그건··· 그렇지요·”
나는 금방 수긍을 해버리고 말았다·
야밤에 안내자도 없이 몰래 돌아다니며 한 번에 왕자의 거처를 찾는다는 것부터가 무리한 기대이긴 했다·
가만히 석불원을 돌아보았다·
성 안까지 들어온 이상 왕자에 대한 정보를 쉽게 접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는 뜻밖의 장벽에 매우 당황하는 눈치였다·
한편 보고를 끝낸 호리독사가 눈치를 보더니 등에 짊어진 것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그건 자신의 상의를 탈의해 임시로 만든 보자기였다·
보자기 속에서 예사롭지 않은 빛깔의 백자 호리병 다섯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인간이 기어이 골동품을 훔쳐온 것인가?
남궁소소가 물었다·
“이게 뭐죠?”
“술입니다·”
“술요?”
“어디서 향냄새가 나기에 따라갔더니만 역시 사당 같은 것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옳다구나 하고 들어갔더니 제단과 함께 술이 잔뜩 있더라고요·”
“일부러 사당을 찾아갔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왜요?”
“본시 어느 집이든 조상에게 올리는 술은 가장 좋은 걸로 쓰는 법이지요· 왜놈들이라고 뭐 다르겠습니까?”
“정말 대단하시네요·”
“뭘 이 정도 가지고· 후후·”
그러면서 호리병 하나를 집어 밀봉을 제거하더니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남은 병들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고작 한 모금을 했을 뿐인데도 이름 모를 꽃향기가 입안 가득 은은하게 퍼졌다·
미나모토가 뭐라고 했다·
남궁소소가 몇 가지를 묻고 난 후 통역해 주었다·
“기나이라는 지방에서 가져온 벚꽃주라고 해요· 그중에서도 좀처럼 보기 드문 극상품이라고 하네요·”
내가 물었다·
“기나이?”
“여기서 수천 리 떨어진 북쪽 지방이래요· 어렸을 때 그곳 어느 성(城)에서 살았고요· 성 곳곳에는 오래된 벚나무 수천 그루가 있었는 데 해마다 봄만 되면 벌을 쳐서 얻은 꿀과 꽃잎으로 술을 담가 마셨다고요·”
“어렸을 때라고 말하는 걸 보면 최소 이십여 년은 전일 듯한데 그때 마셨던 술맛을 아직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게 놀랍군·”
“고작 술맛을 기억하는 걸로 무슨 놀랍기까지나· 저는 열네 살 때 들었던 절간의 깨진 풍경 소리도 기억하는걸요·”
호리독사가 불쑥 끼어들며 한 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보광사(賣光寺)라고 특이한 불상으로 유명했던 절이 하나 있었습니다· 부처님 눈알 자리에 주먹만한 금덩어리 두 개가 박혀 있었죠·”
“흉측했겠군·”
“천만에요· 솜씨 좋은 장인이 조각해서 끼워 넣었는지 감쪽같았습니다· 독특한 데다 영험하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찾아오는 신자들도 제법 많았고요· 거기서 일 년 정도 행자 생활을 했었습니다·”
“스님이 되려고 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한데 왜 그만둔 거요?”
“어느 날 큰스님 심부름으로 연등에 쓸 종이를 사러 시내로 나갔는데 글쎄 계산을 하려고 보니 제 품속에 주먹만한 금덩어리 두 개가 들어 있지 뭐겠습니까? 그길로 승은 내 길이 아니다 싶어 내뺐습니다·”
“···!”
“···!”
“···!”
“아무튼 그때 그 절간 대웅전 한 귀퉁이에 깨진 풍경이 하나 매달려 있었는데 바람만 불면 다른 멀쩡한 풍경들과 어울리어 나는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지요·”
중이 되려고 절간에 들어갔다가 자신의 끼와 재능을 발견하고 본격적인 도둑의 길로 들어섰다는 말을 이렇게 당당히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석불원과 남궁소소는 기가 막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순간 번쩍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거다!”
나는 술을 마시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사람들도 깜짝 놀라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석불원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
“우리가 왕자를 찾을 수 없다면 왕자로 하여금 우리를 찾아오게 하면 됩니다·”
“어떻게 말인가?”
“동적을 보여주면 왕자가 아무 말 없이 따라나설 거라고 했다지요? 그 말은 곧 왕자가 동적을 아주 잘 안다는 뜻이 됩니다· 한데 동적은 결코 흔한 물건이 아니죠· 저는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건 처음입니다·”
뒤늦게 내 의중을 간파한 남궁소소가 흥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는 들어 본 적 있어요· 구리로 만든 피리와 대나무로 만든 피리는 소리가 확연히 달라요· 게다가 왜인지 모르지만 선배님께서 보여 주신 동적은 대륙의 것이에요· 왕자가 그 소리를 듣는다면 호기심을 느끼고 찾아올 수도 있어요·”
석불원이 두 눈을 부릅떴다·
연신 호리병을 꺾던 호리독사는 물론이거니와 멀뚱거리며 우리를 지켜보던 미나모토까지 남궁소소의 설명을 듣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음 날 밤 석불원은 객당의 삼 층 창가에 서서 동적을 불었다·
내공의 고수인데다 각종 악기 연주에도 조예가 깊어서 그의 곡은 심금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소리는 어둡고 습한 밤의 공기를 타고 멀리멀리 퍼져갔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왕자는 찾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그다음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소득이 있었다면 석불원의 연주에 심취한 성내의 몇몇 무사들과 하인들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찾아와 동적을 연주해 달라고 조른 것이다·
덕분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신나게 불어 댈 수 있었다·
그렇게 엿새째가 되었다·
왕자는 여전히 찾아오지 않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적을 불어 왕자로 하여금 우리를 찾아오게 만든다는 내 작전은 사실상 실패했다·
“황해노경과 약속한 날이 오늘까지예요·”
늦은 저녁 남궁소소가 말했다·
지금쯤이면 왜인들의 눈을 피해 먼 바다로 나갔던 흑룡선이 육지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그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각은 정확히 자정까지였다·
어두워지면 육지 쪽으로 접근했다가 날이 밝기 전에 무조건 먼 바다로 빠져나가야 한다는 게 황해노경의 조건이자 경고였다·
그래야 들어오고 나갈 때 왜국의 군선이나 해적선 등과 맞닥뜨리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설사 맞닥뜨려도 도망칠 수가 있고·
모두의 시선이 석불원을 향했다·
어디까지나 그가 표행단을 이끄는 표두였으므로 어떻게 할지를 묻는 것이다·
“세 번째 계획을 실행해야겠군·”
“그게 무엇입니까?”
내가 물었다·
석불원은 대답 대신 호리독사에게 되물었다·
“시킨 건 어떻게 됐나?”
“본성까지 침투하는 길은 확실히 알아 두었습니다· 하지만 천수각은 끝내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경계가 너무 살벌해서요·”
“타키히로의 거처는?”
“천수각에서 백여 장 정도 떨어진 서쪽 별채에서 처자식들과 함께 기거하고 있습니다· 젊은 놈이 벌써부터 첩이 한 둘이 아니더군요·”
“수고했네·”
나도 모르는 사이 석불원이 호리독사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나 보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석불원에게 물었다·
“이게 다 무슨 말입니까?”
“반 시진 후 우리는 본성의 천수각으로 침투해 성주를 납치한다· 그런 다음 인질로 잡고 왕자를 불러내 함께 성을 빠져나간다· 인질은 안전을 확보한 후에 풀어줄 것이고·”
“타키히로가 아니고요?”
“자정까지 바닷가에 도착하려면 협상이고 뭐고 할 시간이 없네· 몸값이 아니라 왕자의 거취를 결정할 수 있는 자를 곧장 인질로 잡아야 한다는 뜻이지·”
“우리로 치면 무려 한 성(省)을 다스리는 제후입니다· 엄청난 숫자의 무사들과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수들이 지키고 있을 겁니다·”
“대신 위치가 아주 명확하지·”
“너무 위험합니다·”
“자네들이 마침내 돈값을 할 때가 왔군·”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시간이 없네·”
“표두님!”
“배짱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내가 사람을 잘 못 본 것인가? 아니면 이번 표행의 위험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었나?”
나도 남궁소소도 호리독사도 모두 합죽이가 되어 버렸다·
대담한 사람인 줄은 진작에 알았지만 이 정도로까지 미친 인간인 줄은 몰랐다·
마치 심장이라는 게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남만으로 이병룡을 구하러 갔을 당시 나를 보는 비룡당의 신입 표사들의 심정이 이랬을까 싶기도 했다·
“작전을 말해주지· 일단 본성까지는 호리독사를 따라 침투한다· 그런 다음 이 당주는 남궁소소와 호리독사를 데리고 타키히로의 거처로 가서 바람을 살펴 불을 지르도록 하게· 최대한 크게· 그 틈을 타 나와 미나모토는 달빛이 비치지 않는 천수각의 반대쪽 벽을 타고 오를····”
“쉿!”
갑작스러운 내 신호에 석불원이 하던 말을 뚝 그쳤다·
이어 약간의 시차를 두고 표정이 굳어졌다·
누군가 마당을 가로질러 오고 있는 기척을 뒤늦게 감지한 것이다·
석불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잠시 나를 보았다·
내가고수인 자신보다 뛰어난 내 기감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남궁소소와 호리독사와 미나모토는 여전히 영문을 몰라 이리저리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누군가 계단을 따라 삼 층으로 천천히 올라오는 소리를 듣고는 그제야 표정을 굳혔다·
발걸음 소리는 우리가 머무는 문밖에서 뚝 그쳤다·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인기척을 내지 않았다·
답답해진 남궁소소가 다가가서 먼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아름다운 용모에 크고 넓은 치마를 입은 젊은 여자가 회랑에 서 있었다·
딱 봐도 하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귀족이라고 하기에는 옷차림이 지나치게 수수한 편이었다·
남궁소소가 왜국어로 물었다·
“(누구시죠?)”
“오늘은 동적을 연주하지 않나요?”
“우리 말을··· 아세요?”
“조금요·”
남궁소소가 고개를 돌려 석불원을 바라보았다·
어찌할지를 묻는 것이다·
석불원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궁소소가 다시 젊은 여자에게 말했다·
“오늘은 피곤해서 연주를 하지 않기로 했어요· 초저녁에 찾아오셨던 분들도 그래서 전부 돌려보냈고요·”
“사례는 충분히 해드리겠어요·”
“죄송해요·”
남궁소소가 문을 닫으려는 순간 내가 말했다·
“잠깐·”
나는 천천히 젊은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
이어 그녀의 뒤쪽을 향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연주가 듣고 싶다면 얼굴을 보이시오·”
그러자 여자의 치맛자락 뒤에서 잠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열 살가량의 사내아이 하나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