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표사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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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행단에는 표사와 쟁자수들만 동참할 수 있소·”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대장궤께서 저를 거인표사로 고용해 주십시오· 아시다시피 전 이미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거인표사는 표행을 나가지 않소·”
“드문 일이어서 그렇지 아주 없지도 않았습니다·”
“무림 협객들을 생각하는 사공자의 협의지심은 충분히 알았으니 그만하면 됐소· 고인들은 우리가 잘 모실 테니 사공자께선 한 달 후 있을 회시 준비에나 박차를 가하시오·”
“제가 향시를 본 건 오로지 거인표사가 되어 표행을 나가기 위해서였습니다· 한데 표사도 될 수 없고 표행에도 나갈 수 없다면 전 회시를 보지 않겠습니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더이상 무엇이 두렵겠나·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배수진을 쳐버렸다·
사람들이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손지백이 한 손을 들어 사람들을 진정 시킨 후 말했다·
“회시에 급제하면 최소 지방 현령이오· 표국에서 거인을 표사로 고용해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십 년까지 뒷바라지를 해주는 것도 바로 그 현령을 만들기 위해서고· 한데 그걸 포기하고 표사가 되겠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이 순간 손지백은 물론이고 천룡각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종산을 향했다·
이쯤 되면 그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서였다·
한데 어쩐 일인지 이종산은 조용했다· 그를 바라보는 손지백도 조용했다·
또 전음으로 대화를 하는 것이다· 이윽고 시선을 거둔 손지백이 내게 물었다·
“그토록 표사가 되려는 이유가 무엇이오?”
이 순간 나는 이종산이 내게 기회를 주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대답에 표사로서의 내 운명이 달려있다·
어떤 꼼수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솔직한 말로 정면 돌파해야 한다·
나는 이종산과 곽석산 이갑룡 을룡 병룡 각 당의 당주와 각주들 그리고 삼십여 명의 표두들을 한 명 한 명 눈에 담았다·
그리고 말했다·
“다소 불손하게 들리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전에 여기 모이신 선배 표사님들께 제가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일부러 선배 표사님들이라는 호칭으로 운을 띄웠다·
“여러분들께선 왜 표사의 길을 가셨습니까? 혹시 저와는 달리 벼슬길에 오를 재주가 없어 표사가 되셨습니까?”
도발적인 한마디에 좌중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삼십여 명의 일류고수와 다섯 명의 절정고수가 뿜어내는 한기는 삽시간에 천룡각의 드넓은 내실을 냉탕으로 바꿔 버렸다·
나는 개의치 않고 힘주어 말을 이어 나갔다·
“대체 벼슬아치가 표사보다 나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짧게는 십 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씩을 표사로 살아오신 세월이 후회되십니까?”
내실을 가득 채웠던 한기가 빠르게 걷혀갔다· 내 말의 진의를 뒤늦게 파악한 것이다·
“왜 표사가 되고 싶으냐고 하문하신다면 제 대답은 이겁니다·”
나는 여기서 선망 가득한 눈길로 이종산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장 솔직한 눈길이었다·
“전 명표(名鏢)가 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뭐라고 수군거리든 제게는 표사가 되어 명표로 이름을 날리는 것이 벼슬길에 올라 이름을 날리는 것보다 훨씬 의미있는 일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표사는 칼을 차고 표국업에 뛰어든 무인 전부를 지칭하는 말이다·
국주인 이종산도 총표두인 곽석산도 이갑룡 을룡 병룡도 당주와 각주들 그리고 표두들까지 크게 보아 모두 표사였다·
검사가 검호를 꿈꾸고 유생이 명필을 꿈꾸듯 표사들은 누구나 명표가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강호인들은 인색하여 명표의 칭호를 함부로 주지 않는다·
지금 중원을 통틀어 명표라 불리는 표사는 그 많은 표국들 중에서도 고작 네 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사대명표(四大名鏢)라 불리며 표사들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천룡표국에서 명표의 칭호를 받은 사람은 젊은 시절의 이종산이 유일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표왕이 되었고 모든 표사들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표사의 길을 가는 동안 수많은 종류의 희로애락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종산이었다·
이종산만큼은 아니어도 다른 표두들 역시 백전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치기 어려 보일 수 있는 내 대답이 산전수전 다 겪은 그래서 이제는 조금 타성에 젖기도 했던 표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조용한 울림이 내실 전체로 퍼져 나갔다·
묵직한 침묵 속의 또 다른 언어가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고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유일하게 이 울림에 동화되지 못하는 사람은 이갑룡 을룡 병룡 형제들이었다·
저들은 처음부터 명표 따윈 관심이 없었다·
저들의 목표는 오로지 천룡표국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침묵을 깬 건 남궁소소였다·
“그런데 한 가지만 묻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곳곳에서 가벼운 웃음보가 터졌다·
그녀의 농담 한마디로 무겁던 분위기가 한층 가벼워졌다·
손지백이 이종산을 보았다·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그 순간 웃음소리가 뚝 그치며 서른여 명의 표두들 전부가 긴장된 얼굴로 이종산의 입을 응시했다·
다시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 이종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지백이 말했다·
“천룡표국은 오늘부터 거인 이정룡을 표사로 고용한다· 더불어 장량기 표두가 이끄는 감악산행 표행단에 지원조로 투입한다·”
순간 서른여 명의 표두들 사이에서 조용한 흥분이 번져갔다· 내심 모두 나를 응원했던 것이다·
반면 이갑룡 을룡 병룡과 그들이 이끄는 당과 각의 표두들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날아갈 것 같았다·
전생에서부터 그토록 원하던 표사가 마침내 되었다· 아직은 거인이라는 딱지가 앞에 붙지만 언젠간 반드시 명표라는 딱지로 바꿀 것이다·
“오늘 배표식은 이것으로 끝···”
“저도 고용해 주십시오!”
소리를 빽 지르며 일어선 사람은 남궁소소였다·
행여라도 배표식을 끝내버릴까 봐 그녀는 얼른 포권지례부터 했다·
“소생은 풍진양이라 하옵고 이번 향시에서 열 번째 석차로 급제를 하였습니다· 회시를 치를 때까지만이라도 부디 거인표사로 고용해 주시면 결초보은····”
“됐고· 자네도 표행에 따라 가려는 건가?”
“그렇습니다·”
나는 남궁소소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목구멍을 쥐어짰다·
“지금 뭐 하자는 거요?”
“얼렁뚱땅하면서 혼자 어딜 튀려고요· 국수는 회시 끝나고 사줄 생각이었습니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줄 아십시오·”
“표행은 귀하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고된 일의 연속이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해가 지면 산속이든 들판이든 아무 데서나 잠을 자야 하고· 게다가 위험할 수도 있고·”
“그런 힘들고 위험한 일로 밥을 벌어먹는 사람들도 있죠· 아이들도 키우고 부모님도 봉양하고요· 그런데 제가 오늘 만난 어떤 사람은 심지어 그게 꿈이라고 하더군요·”
“···?”
“꿈까지 같이 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며칠 경험하는 정도로 앓는 소리할 만큼 그리 나약한 유생은 아닙니다·”
남궁소소는 다시 손지백을 향해 말했다·
“양주에서 감악산까지 닷새가 걸린다고 하셨는데 제가 사흘 만에 주파하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제 고향이 양주입니다·”
“중원 전역의 강과 산맥을 문지방처럼 넘나드는 우리일세· 아무리 양주가 고향이라고 하나 우리도 모르는 지름길을 일개 유생에 불과한 자네가 알고 있다고?”
“제 손목을 걸겠습니다·”
“···!”
회시에 급제하는 것이 그녀에게 어떤 남다른 의미가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무엇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란 그녀가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이처럼 험한 길도 마다치 않는 모습에서 나는 솔직히 조금 감명받았다·
‘남자였다면 진짜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
이종산은 자정을 훌쩍 넘겨 천룡각을 나왔다·
“석산아·”
총표두라는 공식적인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른다· 옛날 생각이 나는 것이다·
“예 형님·”
곽석산도 옛날처럼 대답했다·
“너는 왜 표사가 되었느냐?”
“글쎄요· 너무 오래돼서 이제는 기억도 잘 안 납니다· 다만 지금도 가끔씩 그때 일이 생각 나곤 합니다·”
“또 대설산(大雪山) 넘던 일을 얘기하려고?”
“갑룡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던가요? 형님과 저 단둘이서 해남도의 다섯 개 흑도문파에게 쫓기던 일가족 네 명을 광동성에서부터 시작해 광서성 귀주성 사천성을 지나 대설산까지· 장장 한 달 동안 호위한 적이 있었지요·”
“다섯 개 문파나 되었던가? 하긴 추적해 오는 인간들이 끝도 없이 나타났었지·”
“아이들은 춥다고 울지 젊은 어미는 고열로 냉탕과 열탕을 오가지 아비는 우리가 행여라도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칠까 봐 전전긍긍하지· 흑도 놈들은 끊임없이 나타나지· 하이고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진절머리가 납니다·”
“네 녀석이 정말로 밤에 몰래 도망치자고 했었지· 아비가 그 얘길 우연히 엿들은 다음 날부터는 밤만 되면 잠을 안 잤었더랬지 아마· 껄껄·”
“무사히 대설산을 넘겨주고 돌아서려는데 그 어미가 자신의 머리카락과 치마폭을 잘라 미투리 두 짝을 삼아 주면서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죽을 때까지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당신들이 산다는 천룡표국 쪽을 향해 절 하겠습니다· 우리가 죽고 나면 아이들이 또 죽을 때까지 절하며 두 분의 무사 안녕을 기원할 것입니다· 부디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그날 그 여인의 마른 눈동자 미투리를 건네주던 더럽고 떨리던 손길 동상으로 얼룩진 얼굴까지· 아직도 잊히질 않습니다·”
“그게 벌써 30년 전의 일이구나·”
“그날 이후 강호인들은 형님을 ‘명표’라고 부르기 시작했지요· 제가 명표 이종산의 의제라는 사실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안 그렇고?”
“왜 이러십니까? 지금은 저도 대천룡표국의 어엿한 총표두입니다· 비록 형님처럼 명표라는 칭호를 얻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져 버렸지만 그래도 제가 걸어온 표사의 길도 나름 자부심을 가질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이다·”
“···?”
“네가 없었다면 나는 명표라는 칭호도 얻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에게는 네가 명표다·”
이종산이 누군가를 칭찬하는 일은 정말 드물다·
당사자의 면전에다 대고 이렇게 말해주는 것은 더더욱 그렇고·
그것도 남자들끼리·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정말 표사가 되고 싶은 걸까?”
넷째 아들 이정룡 얘기다·
“들으셨잖습니까· 결기를 보니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쇠심줄 같은 고집은 형님을 아주 빼다 박았습니다·”
“무공도 모르는 녀석이 대체 왜?”
“무공을 모른다는 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될까요?”
“또 무슨 말로 편을 들어 주려고?”
“물론 표사라면 응당 일신에 고강한 무공을 지녀 표물을 지켜야 겠지요·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도 표행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얼마든지 일조할 수 있습니다· 정룡은 이미 복룡당에서 그걸 한차례 증명한 바 있고요·”
“편하게 살려면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어· 정 표사질을 해보고 싶다면 제 형들처럼 서너 해 정도 표행 경험만 쌓은 후 각주가 되어도 좋고···· 한데 녀석은 아주 평생을 표사로 살며 주유천하 할 기세니 문제지·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따뜻한 방 안에서 자는 날보다 길바닥에서 자는 날이 더 많은 그런 일을····”
“오래전 저도 그런 표사를 한 명 알았었지요· 그리고 30년 후 그는 절강성에서 가장 큰 표국의 국주가 되었습니다·”
이종산은 삼십여 년 동안 무려 일천여 회에 달하는 표행을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얻은 별호가 바로 ‘표왕’이었다·
강호에 수많은 표국이 있고 그중 몇 개는 천룡표국보다도 규모가 크다·
하지만 ‘표왕’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사람은 오직 이종산뿐이었다·
큰 표물을 정기적으로 꾸준히 보내야 하는 강호의 거상들은 ‘표왕’이라는 두 글자를 보고 천룡표국을 찾는다·
강호 거상들의 신뢰는 그 전설같은 여정의 초창기에 이미 시작되었다·
이들의 ‘믿음과 신뢰’는 다른 이복형제들에 비해 외가가 보잘 것 없었던 이종산에게 강력한 힘이 되었다·
훗날 정략결혼을 하게 될 세 곳의 가문들로부터 지지를 얻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바로 그 힘으로 이종산은 각자의 외가를 등에 업고 표국 내 세력확장에만 골몰했던 다섯 형제들을 제치고 7대 국주가 될 수 있었다·
대신 그는 표행을 하는 삼십여 년 동안 수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의원들마저 포기할 정도로 중상을 입어 사경을 헤맨 적도 다섯 번이나 됐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건 기적이었다·
“녀석이 내가 걸었던 길을 되밟으며 훗날을 도모한다는 뜻이냐?”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라면 비범한 것이고 만약 정말로 순수하게 표사가 되고 싶은 것이라면 운명이 이끄는 대로 되겠지요·”
“운명이 이끄는 대로?”
“만에 하나라도 강호의 거상들이 믿고 찾는 ‘명표’가 된다면 정룡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형들과 전쟁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천룡표국의 주인 자리를 놓고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고만고만한 실력의 표사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언젠가 표행 중 고수의 칼에 목숨을 잃겠지요·”
이종산의 눈동자에 한순간 정체 모를 열기가 차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스물두 해 동안 녀석을 지켜보았다· 며칠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사실이나 그걸 녀석의 진면목일거라고 믿는 건 아비로서의 흐린 욕심이지· 지렁이는 아무리 꿈틀거려도 결국은 지렁이일 뿐인 것을·”
“지렁이 중에는 독사를 잡아먹고 멧돼지를 거꾸러뜨린다는 지렁이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지금 강호에 소문이 퍼지고 있는 오지산(五指山) 천지령(天地靈) 같은 것 말입니다·”
“객쩍은 소리말고· 함께 표행을 가겠다는 풍진양이라는 여자아이 말이야· 누군지 짐작 가는 게 있느냐?”
“전혀요· 이름이 알려지기엔 아시다시 시피 너무 어려서 말입니다·”
“걸음걸이가 예사롭지 않았다· 분명 상당한 수준의 무예를 일신에 지녔어· 무슨 사정으로 남장에 역용까지 하고 정룡에게 접근한 걸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께서도 보셨지 않습니까· 정룡을 보는 시선이 시종일관 따뜻했습니다· 맑고 정순한 호흡도 그렇고 기품이 느껴지는 언행도 그렇고 분명 명가의 후예일 것입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누군지 알아봐·”
“물론이지요·”
“그리고 장량기가 이끄는 표행단의 지원조에 똑똑하고 손 빠른 표사 하나 붙여· 갑룡이나 을룡이나 병룡의 사람이 아닌 표사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이정룡에게 호위무사를 붙이라는 뜻이다·
“가불염이라고 얼마 전 새로 들어온 표사가 있습니다· 한 자루 장도(長刀)를 성명병기로 쓰는데 그 솜씨가 어지간한 표두를 찜쪄 먹습니다· 강호의 경험도 많고요·”
“그 친구가 좋겠군·”
***
같은 시각 함께 천룡각을 나선 이갑룡 을룡 병룡 형제들도 측근들을 물린 채 셋이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무공도 모르는 놈이 표사는 무엇이고 표행은 또 무엇이란 말입니까· 미친놈·”
이병룡이 포문을 열었다·
“밤잠을 설치며 회시 준비를 해도 모자랄 판에 왜 표행에 동참하겠다고 하는지 모르겠군· 향시에서 장원급제까지 했으니 회시에 급제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말이야·”
이갑룡이 말했다·
“아주 불가능한 것이 아닌 게 아니라 가능성이 아주 크지요· 놈은 회시를 만만하게 보고 있는 겁니다·”
이을룡이 말했다·
“둘째 형님은 놈을 너무 높이 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녀석이 향시에 장원급제한 것은 사실이나 회시는 차원이 다릅니다·”
“설마 너도 회시를 볼 생각이냐?”
“설마라뇨? 무슨 말씀이 그렇습니까?”
“어라 진짜 볼 생각인가 보네?”
“당연한 일 아닙니까? 저도 엄연히 향시에 급제한 유생입니다· 정룡이 장원급제를 하는 바람에 제 꼴이 좀 우습게 됐지만 그냥 급제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경험들 해 보셨으니 잘 아실 텐데요·”
이갑룡과 을룡도 지금보다 조금 더 젊었을 때 향시에 몇 번 도전했다가 실패한 일을 꼬집은 것이다·
“웃기고 자빠졌네·”
“둘째 형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향시는 네 놈의 외가에서 지부대인에게 은궤를 갖다 주고 급제를 했다만 회시는 어떻게 급제를 할 생각이냐? 북경까지 찾아가 심사관들을 구워삶을 생각이냐?“
“그 그걸 어떻게····”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이 새끼야·”
사실을 가지고 칼질을 하는 데에야 상욕을 해도 달리 반항할 수가 없다·
철저하게 비밀로 한 일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그저 등골만 서늘해질 뿐이었다·
“그나저나 요즘 들어 정룡이 너무 커지는 느낌이구나· 그전에는 전혀 존재감이라는 게 없었는데 말이야· 아버지께서도 녀석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셨고·”
이갑룡이 말했다·
“뭘 알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이을룡이 물었다·
“아버지께서 정룡에게 운철검을 하사하셨다·”
“···!”
“···!”
이병룡과 이을룡은 동시에 두 눈을 부릅떴다·
운철검은 귀물이다· 인연이 없다면 돈을 쌓아놓고도 살 수가 없는 물건이다·
그걸 놈에게 주셨다고?
다시 이갑룡이 말했다·
“천한 싹은 나무로 자라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장량기에게 일을 좀 시켜야겠군요·”
“설마 죽이라고 할 건 아니지?”
이갑룡이 농담처럼 말하는데 왠지 이을룡과 이병룡에게는 진담처럼 들렸다·
자신들 셋 중 가장 무서운 사람이 있다면 바로 맏형인 이갑룡이다·
저 인간은 속을 알 수가 없다·
“표행을 하는 동안 정룡에게 최대한 많은 기회를 주라고 할 것입니다· 갓 나온 싹은 작은 바람에도 목이 꺾이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다 주어지는 기회마다 훌륭히 수행해 내면 어쩌려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향시에 덜커덕 장원급제해버린 것처럼 말이다·”
“향시에 장원급제한 것과 표행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차라리 다만 몇 달이라도 쟁자수 노릇을 했다면 크게 도움이 되었겠지만 말입니다·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