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 표사들을 모으는 고수(7) >
뇌옥(辛獄)은 남궁세가의 장원과 맞닿은 서쪽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암반을 수평으로 오십여 장이나 뚫고 들어간 자연동굴에 인공의 장치들을 가미한 수십 개의 뇌옥은 탈출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굵은 쇠창살이 촘촘하게 박힌 뇌옥 안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그곳에서조차 그는 양 손목을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쇠사슬은 다시 안쪽의 굵은 쇠말뚝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바람에 반 장 정도 되는 쇠사슬의 길이만큼이 그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자유였다·
“미나모토 히카루·”
“···?”
“놈의 이름이외다·”
남궁유룡의 조용한 설명이었다·
남궁유룡은 괜찮다는 석불원의 말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직접 안내를 해주겠다며 따라왔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석불원이 어떻게 저 쇠심줄처럼 질긴 왜인무사를 설득하고 고용하는지 궁금한 것이다·
이곳이 남궁세가인 데다 상대가 무림의 까마득한 대선배였던 탓에 석불원은 감히 안 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딱히 안될 이유 또한 없었고·
그러자 남궁중백과 남궁소소도 슬그머니 따라붙어서 뇌옥을 찾은 사람은 나까지 모두 다섯 명이나 되었다·
남궁유룡의 말이 이어졌다·
“작년 가을 노부가 본가의 고수들을 이끌고 황해안으로 가서 사흘에 걸쳐 왜구 삼백 명을 격퇴한 일이 있지요· 저자는 그때 사로잡은 두목이외다· 함께 사로잡은 놈의 수하들에게서 얻어낸 정보에 의하면 한때 유명한 무벌이었던 가문의 후예인 듯하오·”
“대화를 필담으로만 하진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만·”
“본가의 총관이 왜국말을 능숙하게 하외다· 하지만 오늘은 노부의 손녀에게 맡겨 보시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떠듬떠듬하는 것이 신기해 왜인들을 심문 할 때마다 동석시켰더니 나중엔 제법 곧잘 하게 되었소·”
석불원도 나도 깜짝 놀라서 남궁소소를 바라보았다·
특히 나는 더욱 놀랐다·
그녀를 제법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왜국 말까지 하는 줄은 까맣게 몰랐다·
남궁소소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어쩐지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석불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만히 쇠창살 너머의 왜인무사를 응시했다·
나도 따라서 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서른예닐곱 살가량이나 되었을까?
애초 그들 식의 변발을 했을 머리카락은 어느새 덥수룩하게 자라 산발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왜인답지 않게 큰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이 누구라도 다시 돌아볼 만큼 수려한 용모를 자랑했다·
정좌를 한 채 눈을 감고 앉아있던 그는 적지 않은 인기척에도 불구하고 눈을 뜨지 않았다·
마치 그대로 지박령이라도 되어버린 것 같았다·
석불원은 왜인무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남궁소소에게 말했다·
“내 말을 그대로 통역해 주게· 내 이름은 석불원이고 중원에서는 표사라는 직업을 가졌으며 한 달간 너의 목숨을 사고 싶다·”
“와따시노····”
생전 처음 들어보는 왜국 말이 남궁소소의 입을 통해서 술술 흘러나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불현듯 그녀가 매우 낯설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남궁소소가 말을 하는 중간에 정확하게는 입을 여는 순간 왜인무사가 눈을 번쩍 떴다·
이글이글 불타는 눈동자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격정이 느껴졌다·
석불원의 말이 이어졌다·
“일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나면 충분한 보상과 함께 자유를 주겠다· 가주님께서도 이미 허락을 하셨고·”
왜인무사는 남궁소소에게서 한참이나 시선을 떼지 않다가 천천히 석불원에게로 옮기고는 말했다·
“빠가야로!”
“바보 자식이라고 하네요·”
“그건 대답이 아니다·”
“아나타가 키키토레나캇타노다!”
“표두님이 못 알아들은 것이라고 하네요·”
왜인무사의 자세와 목소리 그리고 상대를 쏘아보는 눈빛에서 만만치 않은 힘이 느껴졌다·
그건 무인들이 뿜어내는 특유의 기세였다·
왜인무사의 기세가 사나운 맹수를 연상시킨다면 석불원의 그것은 온갖 맹수들을 품은 산악처럼 고요하고 깊었다·
“거절인가?”
“자신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한 명밖에 없답니다· 그 한 명이··· 돼지처럼 뚱뚱한 대륙인은 아니라고 하고요·”
“단지 고용을 할 뿐이다· 너는 돈을 받은 만큼 값을 하는 것이고· 왜국에도 낭인들은 있을 것이 아닌가·”
“또 바보 자식이라고 합니다·”
“지금 즉시 금전 이천 냥을 주고 일을 성공적으로 끝내면 그때 또 이천 냥을 주지· 이 정도면 사병 일천 명을 중무장시키고도 오(五) 년은 배불리 먹일 수 있을 것이다· 더는 힘들게 남의 나라 해안마을을 약탈할 필요가 없지·”
선금으로 금전 이천 냥을 주고 나중에 또 그만큼을 주면 도합 사천 냥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금액에 남궁유룡 남궁중백 남궁소소는 그대로 석상이 되어 버렸다·
남궁세가도 남직예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였고 어딜 가서도 돈 때문에 불편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전 사천 냥은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더구나 단일 표행의 표행비로는 더더욱·
이쯤 되자 세 사람은 석불원이 누군가로부터 의회받았다는 표행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자각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남궁유룡이 호기심과 기대가 반반 섞인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잠시 후에는 남궁중백과 남궁소소까지도 따라서 나를 보았다·
‘그렇다면 너는 도대체 얼마를 받느냐?’라고 묻는 것 같았다·
비슷하게 생긴 세 명의 집요한 눈길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손으로 애꿎은 볼만 긁었다·
미안하게도 내가 받기로 한 금액은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저 왜인무사는 쟁자수인 나와 달리 진짜 표사로 고용되려는 모양이었다·
한편 자유를 준다는 말에도 ‘빠가야로’라고 응수하던 왜인무사가 이번에는 선뜻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는 석불원을 빤히 노려보더니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잇타이 나니고토다·”
“대관절 무슨 일이냐고 합니다·”
“알 필요 없어· 너는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뿐· 대신 성공하면 그 즉시 나머지 금전 이천 냥과 함께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자신은 명예를 아는 무사랍니다· 표두님께서 시키시려는 일이 무사도 그러니까 무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보장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사천 냥에는 너의 신념 값도 포함되어 있다·”
“무사도는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헛소리하고 자빠졌네·”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혼잣말로 중얼거린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워낙 조용했던 탓에 한순간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왜인무사도 적개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본래 뜻을 몰라도 자기 욕한다는 건 아는 법이다·
“왜 그러나?”
남궁유룡이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건 그렇다고 쳐도 양민을 베거나 마을을 약탈하는 자가 무도를 논하니 기가 차서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사로서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배를 갈라 죽기도 하지· 저놈들과 반평생을 싸워왔지만 아직도 놈들이 말하는 무사도를 나 역시도 이해할 수가 없다네·”
“금수만도 못한 놈들이니까요·”
“왜인들에게 감정이 많나 보군·”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젊어서 불의를 보고 피가 끓지 않는다면 어찌 사내라 할 수 있겠나· 그 마음 더 나이 들어서도 변치 않기를 바라네· 물론 그땐 지금보다 훨씬 더 참을성이 있어야겠지만 말일세·”
“명심하겠습니다·”
남궁유룡은 이어 석불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소이까?”
“뇌옥에 갇혀 지낸 지 일 년이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눈빛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걸 보니 쉽게 기개를 꺾을 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면?”
“오늘은 그만 물러나야 할 것 같군요· 큰 미끼를 두 개나 던졌으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 마음속에서 갈등이 독버섯처럼 자랄 겁니다·”
“과연 그렇군요·”
“해서 가주님께 청이 한 가지 있습니다· 당분간 남궁세가의 객당에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매일 찾아와 저자와 바둑이라도 두려면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는 것이 나을 듯해서요·”
“그거야 당연한 말씀이지요·”
“후배가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찾아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리 따뜻하게 맞이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무슨 말씀을· 귀하가 내게는 무림의 후배일지 모르나 풍운비룡에게는 우러러 보는 선배라고 들었소이다· 풍운비룡은 내게 사질과도 같은 아이외다· 부디 표행을 함께 하는 동안 많은 경험과 지혜를 나눠 주시길 부탁드리오·”
내가 그의 의제인 북해투왕의 제자인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남궁유룡의 말에 나는 불현듯 가슴이 복받쳐 올랐다·
남궁소소는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았고·
“그리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석불원은 쓰윽 돌아서 가려고 했다·
순간 철그렁하고 쇠사슬을 끄는 소리와 함께 왜인무사가 소리쳤다·
“난테 잇타!”
모두가 걸음을 멈추고 왜인 무사를 돌아보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잔뜩 화가 난 표정의 그는 턱으로 나를 힐끗 가리키고는 남궁소소에게 다시 말했다·
“아이츠와 다레카· 난토 잇타노!”
“저 녀석이 그러니까 정룡 공자가 누구냐고 묻고 있어요· 아까 자신에게 뭐라고 한 거냐고도 묻고요·”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석불원이 눈을 반짝이더니 내게 말했다·
“그와 얘기를 한번 해보겠나?”
“제가요?”
“협상의 첫 번째 원칙은 상대를 먼저 경동시키는 것일세· 나는 긴 대화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는데 자네는 고작 한 마디 던진 것으로 성공을 한 것 같군·”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만약 그의 고집을 꺾는다면 자네에게 두 명을 더 고용할 수 있는 전권을 주지· 표행비는 두 당 금전 백 냥씩 지급하고·”
천룡표국의 표사 두 명을 데려가면 금전 이백 냥을 더 벌 수 있다·
내 몸값이 워낙 비싸서 그렇지 금전 이백 냥이면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도 좀 더 편할 수 있고·
나는 잠깐 머리를 굴려 보다가 말했다·
“두 명 받고 그에게 줄 예정이었던 금전 사천 냥 중 이천 냥을 제게 주십시오· 물론 제가 이천 냥만으로 그를 끌어들인다면 말입니다·”
“이천 냥 받고 만약 실패하면 내가 자네를 고용하는 기간을 두 달로 늘이겠네· 보았다시피 새로운 왜인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거든· 그때까지 대기를 해야 한다는 뜻이지· 아니면 나와 함께 찾으러 다니거나·”
“좋습니다·”
“나도 좋네·”
남궁유룡과 남궁중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간 내 제안과 얼떨결에 성사되어 버린 내기에 크게 당황한 것이다·
그것도 목전의 액수로만 금전 이천 냥짜리·
순간 남궁소소의 전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요?]
[무슨 문제라도 있소?]
[안 그래도 도박쟁이였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난 몰라요·]
아차차!
이 몸뚱어리의 원래 주인은 과거 허구한 날 기루와 도박장에서 살기로 악명이 높았다·
당연히 남궁유룡과 남궁중백도 보고를 받거나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방금 내가 한 제안은 가까스로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 남궁유룡과 남궁중백에게 나의 한심한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다·
‘망했다!’
괜히 욕심을 부려가지고·
나와 남궁소소는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살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남궁유룡을 유심히 살폈다·
잔뜩 굳어 있던 남궁유룡이 말했다·
“그것 참 재미있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만약에 정룡이 이기면 이 자리에서 무려 금전 이천 냥짜리 전표를 구경하게 되는 것인가?”
“일단은 그런 셈이지요·”
“집에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오니 도무지 심심할 틈이 없군· 껄껄껄·”
나와 남궁소소는 얼떨떨했다·
한참을 웃던 남궁유룡이 돌연 정색을 하고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만약 자네가 정말로 금전 이천 냥에 저 왜인의 고집을 꺾는다면 소소도 표행에 데려갈 수 있도록 도와 주겠네·”
“예?”
“뛰어난 무공에 감쪽같은 역용술에 능숙한 왜국말에· 황금장표께서 허락하신 두 명 중 한 명은 마땅히 소소여야 할 것 같네만· 아닌가?”
“그건·”
“하지만 다른 때는 몰라도 이번만큼은 반드시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하네· 특히 어미의 허락을 득해야 하지· 내가 책임지고 받아 줌세·”
남궁중백은 이미 남궁유룡과 생각이 같은 모양이었다·
나는 남궁소소를 슬그머니 보았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채 두 주먹을 꼭 말아쥐고 있었다·
어떻게든 함께 가고 싶은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한차례 길게 심호흡을 하고는 왜인무사를 노려보았다·
이어 그에게서 시선은 떼지 않은 채 남궁소소에게 말했다·
“한 글자도 뺴놓지 말고 그대로 통역하시오·”
“알았어요·”
“남궁세옥에게 졌다며?”
“남궁세옥 니 마케탓테?”
“왜국에도 쓸만한 무술이 있었다니 놀랍군·”
“와코쿠니모 부주츠가 앗타토와 오도로키다·”
“나랑도 붙어보자· 왜구놈아·”
유쾌하던 좌중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모두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왜국무사의 검술은 초절정이라 평가받는 남궁세옥과 세 번을 싸워 두 번을 비기고 고작 한 번을 지는 수준이었다·
그런 괴수에게 내가 도전을 했으니 당황할밖에·
“어서 통역을 하시오·”
남궁소소가 긴장된 목소리로 통역을 하자 이번엔 왜인무사가 고개를 갸우뚱했고 뭐라고 짧게 지껄였다·
남궁소소가 다시 그대로 통역을 해주었다·
“무슨 수작이냐고 묻는데요?”
“간단하다· 나랑 싸워서 이기면 너를 비롯해 함께 끌려온 열 명의 수하들 전부를 풀어 달라고 여기 계신 무서운 어르신께 부탁해 보겠다·”
남궁소소가 여기까지 통역을 했을 때 왜인무사가 돌연 남궁유룡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사실인지를 묻는 것이다·
남궁유룡이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계속 말을 이었다·
“만약 진다면 너는 지금부터 금전 이천 냥만 받고 한 달 동안 내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야 한다· 설사 그것이 너의 무사도에 어긋나는 일일지라도·”
“더 원하는 것이 없느냐고 묻는데요?”
“검은 큰일을 앞두고 서로 상하게 할 수도 있으니 적수공권으로 싸운다· 대신 난 한 손만 사용하도록 하지· 설마 검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는 아니겠지?”
왜인무사가 피식 웃더니 늑대가 가르랑거리는 듯한 소리로 무언가를 말했다·
남궁소소가 마지막으로 통역했다·
“반드시 두 손 모두 다 사용하고 최선을 다해라 애송이· 안 그러면 너는 내 손에 불구가 될 것이다··· 라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