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 표사들을 모으는 고수(4) >
표왕부에서의 만남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비룡당의 집무실에서 황금장표 석불원과 독대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는 다짜고짜 전표 하나를 내밀었다·
만금전장주의 수결이 선명하게 찍힌 것이었는데 마치 며칠 전에 발행한 것처럼 깨끗했다·
항주의 본장이 마교도들에게 보름씩이나 장악당한 일로 뿌리가 흔들렸던 만금전장은 기적적으로 되살아 났다·
한 달 전 이종산이 내가 갖다 바친 마총의 보물 전부를 만금전장을 통해 처분하고 그 수익마저 위탁하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절강성 최고의 부호인 천룡표국이 만금전장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다는 신호를 강호인들에게 보낸 것이다·
덕분에 봇물 터지듯 만금전장을 빠져나갔던 돈들이 조금씩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만금전장으로선 구사일생한 것이지만 무작정 좋아할 수만도 없었다·
만금전장의 생사여탈이 이종산의 손에 달려 버렸기 때문이다·
전립성은 이제는 천룡표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만금전장의 고독하고 처절한 싸움이 시작될 거라고 했다·
아무튼 석불원이 바로 그 만금전장의 전표를 내게 내밀었다·
그것도 무려 금전 일천 냥짜리·
짐작하건대 산동의 갑부인 그가 만금전장과 거래를 함으로써 표국업계의 대선배인 이종산에게 조금 힘을 실어 주려는 것 같았다·
무언가 부탁할 게 있는 것이다·
“이게 뭡니까?”
“자네를 객표(客鏢)로 고용하는 대가일세·”
객표는 표국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쓰는 공식적인 용어로 객원표사를 말한다·
내가 객원표사를 고용한 적은 있어도 고용을 당한 적은 없는지라 기분이 묘했다·
일전에 무림맹의 일을 하긴 했으나 그땐 여러 표국의 표사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참여한 공동표행이었다·
지금처럼 일방적인 객표로 고용된 것은 아니었다·
“금전을 일천 냥씩이나 준다고요?”
“이건 계약금일세· 표행에 성공해서 표물을 표주에게 무사히 인계하는 날 그곳에서 똑같은 전표를 하나 더 주지· 표행에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한 달을 넘지 않을 걸세·”
정리하자면 석불원이 누군가로부터 모종의 의뢰를 받았고 그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나를 객표로 고용하겠다는 뜻이다·
‘꿀꺽!’
산동에 사는 천하 사대명표 중 한 명인 황금장표 석불원이 나를 객표로 고용하기 위해 이 먼 항주까지 찾아 왔단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는 그가 내민 금전 일천 냥짜리 전표가 놓여 있었다·
사실 돈이야 이제는 평생 써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있다·
하지만 그건 재산이고 이건 표행의 대가로 받는 표행비였다·
다시 말해 표사로서의 내 몸값이 무려 금전 일천 냥이라는 뜻이다·
이건 내게 금전 삼십만 냥을 수중에 넣은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이런 건 일반 표사들에게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그야말로 명표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이었으니까·
실제 이종산이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명표라 불리던 시절 숱한 부호들이 먼 길을 마다치 않고 달려와 그에게 표행을 부탁했었다·
그때 부호들이 내민 것이 바로 금전 일천 냥짜리 전표였다고 한다·
물론 그만큼 위험하고 어려운 의뢰였고 이종산은 단 한 건의 실패도 없이 모조리 해치워 버렸다·
결국 명표라는 칭호만으로는 이종산의 대단함을 표현할 수 없었던 강호인들은 그에게 표왕이라는 별칭까지 안겨 주었다·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물었다·
“왜 하필 저입니까?”
“자네가 이 일의 가장 적임자니까·”
“저를 어떻게 아시고요?”
“강호에 소문이 자자한 자네를 어찌 모르겠나· 항주에 두 마리의 잠룡이 웅크리고 있는데 하나는 다선초당의 창룡검이고 다른 하나는 천룡표국의 풍운비룡이라고 하더군·”
본래 이 말은 남직예가 자랑하는 두 명 젊은 고수 남궁세옥과 양조창을 두고 떠돌던 말이었다·
한데 남궁세옥이 항주에 와서 지내다 보니 소문도 자연스럽게 따라서 옮겨 온 모양이었다·
남궁세옥에게 묻어가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이렇게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명표로 불릴 날이 있지 않겠나·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십니까?”
“표행단이 모두 꾸려지기 전까지는 가르쳐 줄 수 없네· 물론 자네도 표행단에 들어 와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지만·”
“저 말고도 표사들이 또 있습니까?”
“물론이네·”
“몇 명이나요?”
“그것 역시 지금은 말해 줄 수 없네·”
“아시다시피 최소한의 정보는 주셔야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무조건 승낙을 했다가 알고 보니 암표나 밀표였다고 하면 피차 곤란해지니까요·”
암표는 표물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무조건 운송해 주는 것을 말하고 밀표는 나라에서 유통을 금한 물건들을 비밀리에 호송하는 걸 말한다·
암표는 불법과 합법을 오가고 밀표는 명백한 불법이며 천룡표국에선 취급하지 않는다·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석불원은 잠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말했다·
“칠마종의 전설에 대해 잘 알고 있겠지?”
“어쩌다 보니 최근에 연루가 되어서요·”
“이백여 년 전 천성교의 교주가 마교통일대전을 벌일 당시 매번 칠마종의 허를 찌르는 기습전을 펼치기로 유명했네· 그게 칠마종이 패망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됐지· 이후 강호인들은 천성교의 교주가 달렸던 진격로를 마교일통지로(魔敎一統之路)라고 불렀네· 한데 그때 일만 마병의 길 안내를 한 사람이 누군 줄 아는가?”
“누굽니까?”
“바로 표사였네· 그 시대의 명표로 불렸던·”
“···!”
“역설적이게도 오랜 세월이 흘러 무림맹이 철옹성 같은 십만대산을 뚫고 들어가 천마성교를 무너뜨릴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해준 사람 역시 표사였네· 마찬가지로 그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표사들 중 한 명이었지·”
천마성교가 멸망한 것은 불과 30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때는 이갑룡이 태어날 무렵이었고 이종산이 명표의 칭호를 얻으며 천하가 좁다 하고 이름을 떨칠 때였다·
‘혹시!’
삼십 년전 젊은 이종산이 무림사의 중요한 현장에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불현듯 심장이 두근거렸다·
“강호인들이 무림의 전설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알고 있는 일들이 사실은 표사들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네· 이런 일들은 비밀리에 진행되고 대량의 살인을 동반하지만 암표니 밀표니 하는 잣대로는 말할 수가 없는 것들이지·”
작은 바람은 숲의 나뭇가지에 모조리 걸리지만 큰바람은 나무를 타고 넘으며 숲 위에서 분다고 했다·
석불원은 지금 내게 표행의 천외천(天外天)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세상의 규칙이나 도덕 너머에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표행 그리고 그걸 해내는 최고 수준의 표사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마저 저버리는 건 아닐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
표행단을 이끌 표두가 황금장표 석불원이기 때문이다·
그를 협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절대 인간의 도리를 저버릴 위인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표왕이 그를 후배로 인정해 주며 반가워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실 석불원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괴팍하고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첫 번째 산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의 외동아들로 태어났으면서 힘들고 험난한 표사의 길로 들어선 것이 그렇다·
두 번째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표국에서 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를 표사라 불렀고 그 역시도 그렇게 불리는 걸 가장 좋아했으며 결국엔 사대명표 중 한자리까지 당당하게 차지했다·
세 번째 그는 어떤 의뢰가 들어오든 그 일에 딱 맞는 사람을 귀신같이 찾아내서 최소의 인원으로 표행단을 꾸리는 걸로 유명했다·
그 과정에서 돈이 얼마가 들어가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에게 표행은 일이 아니라 끊을 수 없는 취미이자 유일하게 즐거움을 주는 유희였으며 한계를 향한 끝없는 도전이었다·
강호인들은 그를 미쳤다며 손가락질했지만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겠습니다·”
“신중히 생각하게· 금액을 보면 알겠지만 아주 위험한 일이네· 말하자면 난 자네에게 목숨값을 제시한 것이지·”
“표사에게 위험은 거북의 등껍질 같은 것이죠·”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이다?”
“그렇습니다·”
“듣던 대로 대단한 배짱이군·”
“감사합니다·”
“이제 이 전표는 자네 것이네·”
석불원이 전표를 내쪽으로 밀었고 나는 즉석에서 계약서를 작성해 한 부씩 나눠 가졌다·
이로써 나는 당분간 석불원의 객표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만약 둘 중 한 사람이 중간에 계약을 파기한다면 두 배로 보상 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경력에 치명적인 흠집이 생길 것이다·
“한데 표행단 속에서 제 지위는 무엇입니까? 표두는 당연히 선배님이실 테고요·”
“쟁자수일세·”
“예?”
한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표사로서의 내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할땐 언제고 고작 쟁자수로 쓰겠다고?
그것도 무려 금전 일천 냥에?
“이제부터 표행이 끝날 때까지 자네는 내 쟁자수일세· 첫 번째 임무를 주지· 지금 당장 튼튼한 말 네 필과 당분간 먹을 건량을 준비하게· 한 식경 후에 출발할테니·”
“잠깐만요· 선배님·”
“표두님이라고 부르게·”
“잠깐만요· 표두님· 저는 어제 막 보름간의 표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최소 사흘은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 지위 말씀인데요· 무언가 착오가····”
“다른 표사들을 구하려면 최소 열흘은 걸릴 걸세· 그때까지 가면서 쉬도록 하게· 그럼 나는 마지막으로 선배님이나 한 번 더 뵙고 오겠네· 자식을 사지로 데려가는데 보고는 하고 가야지·”
“저기요· 선배님 아니 표두님·”
***
나는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다시 떴다·
석불원을 따라서 온 항주의 구석진 곳 어느 작고 오래된 객점에서 우연히 아는 노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노인은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정확하게는 사천성 성도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성도에 머무를 당시 그곳 하오문 향주인 장인보와의 접선 장소로 쓰고 또 숙박 장소로도 썼던 ‘천하제’ 객점의 황 노인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나는 항주에 오면 안 되나?”
“너무 뜻밖이어서 그렇지요·”
“반갑지는 않고?”
“반갑죠· 반가운데·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성도에서는 분명히 존댓말을 했는데 지금은 대뜸 반말이다·
나이 차이가 워낙 많이 나니 그 정도는 뭐 괜찮다·
어차피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니었고·
“당분간 여기서 지내기로 했네·”
“왜요?”
“원래 특별한 일이 없다면 대륙의 이곳저곳을 떠돌며 한두 달씩 머문다네· 이번엔 어찌다 보니 항주로 오게 된 것이고·”
“천하제 객점은 어찌고요?”
“그거야 장인보가 알아서 하겠지·”
[조심하십시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와 함께 온 사람도 무림인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연배가 있으시다고 해도 하오문 성도 분타의 향주를 그렇게 막 불러도 되는 겁니까? 노인장께서도 하오문의 문도이신 것 같던데]
황 노인의 말에 나는 전음으로 응수했다·
거지 콧구멍만한 객점에 손님이라곤 나와 석불원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남의 문파의 내밀한 사정인데 누가 들으면 곤란하지 않겠나· 한데 배려가 무색하게 황 노인은 대놓고 말했다·
“내가 내 수하를 부르는데 왜·”
“그게 무슨!”
그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엽차와 주전자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털썩 맞은 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석불원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안면이 있으신가 봅니다·”
“도화곡의 문도들을 이끌고 성도로 왔을 때 내가 옆에서 지켜보며 먹여주고 재워주고 했지·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아이들 시켜서 물어다 주기도 하고·”
“그렇게 친절한 분이신 줄 몰랐습니다·”
“내 일곱 번째 제자가 준 신표를 허구헌날 검수(劍首)에 매달고 다니는데 모른 척할 수가 있어야지· 어렸을 적에는 항주의 하오문도들에게 꽤 잘 해주기도 했고·”
하오문도 일곱 명의 제자를 둔 스승 장인보를 수하라고 부르는 위치· 순간 나는 양주의 매용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하오문주의 칠제자인 소수옥녀(素手玉女)를 상징하는 증표예요· 가는 동안 검의 손잡이 끝에 매달아 주세요· 하면 하오문도들이 공자님을 찾아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