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 표사들을 모으는 고수(1) >
남직예성과 절강성의 경계에 구벽산(九壁山)이라는 절산이 있었다·
삼십여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를 거느린 구벽산은 그 험난함 때문에 예로부터 사람들의 통행이 드물었다·
그런 구벽산 하고도 더욱 인적이 드문 동쪽 어느 산기슭에 표사들이 ‘박가주점’이라 부르는 작은 주막이 있었다·
말이 좋아 주점이지 수백 년 묵은 팽나무 그늘에 탁자와 의자를 대충 뿌려놓고 이것저것 만들어 파는 곳이었다·
“잠시 쉬었다 간다·”
나는 표사 일곱 명을 거느리고 어느 부호의 시집가는 딸을 건양(建陽)까지 호송해준 후 항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지참금을 가지고 타지로 시집가는 젊은 여자는 온갖 비적들뿐만이 아니라 장가를 가지 못한 시골 남자들에게도 약탈의 대상이었다·
옆 탁자에서 남궁소소가 국수를 먹으며 말했다·
“이번 표행은 여러모로 뿌듯했어요·”
“어째서?”
“새색시가 고맙다는 말을 백 번은 하더라고요·”
“고작 그것 때문에?”
“고작이라뇨· 그때가 가장 보람 있었는데· 당주님이 왜 그렇게 명표가 되려고 하는 건지도 조금은 알 것 같고요· 더 응원하게 됐어요·”
이번 호송건에는 특별히 비룡당의 신입 여자표사 세 명을 전부 동원했다·
호송을 하는 열흘 동안 좀 더 세심한 곳까지 신경을 쓸 수 있을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애초 여자 표사들을 고용한 것도 그런 목적이었고·
예상은 적중해서 신부와 그녀를 데리러 항주까지 왔던 신랑은 건양 땅에 무사히 도착한 후 따로 은전을 다섯 냥이나 챙겨 주었다·
문제는 남궁소소가 그걸 보았다는 거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 밤은 여곽에서 묵으면 안 되나요? 따뜻한 물에 목욕도 좀 하고요· 가욋돈도 넉넉히 챙겼잖아요·”
“노숙은 표행의 꽃이오·”
“등에 굳은살 박히겠어요·”
“마침내 진짜 표사가 되겠군·”
“수전노·”
“엄살쟁이·”
“사기꾼·”
“국수귀신·”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주고받던 나와 남궁소소는 뭔가 뜨거운 시선을 느끼고 동시에 옆을 돌아보았다·
독고완 탁중로를 비롯해 여표 염지약 여소옥 운휘향이 각자의 음식을 먹다 말고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유일하게 한 사람 호리독사만 술을 병째로 홀짝이다가 더는 나오지 않자 주둥이에 눈을 갖다대어 보고는 말했다·
“한 병 더 시켜도 됩니까?”
남궁소소는 얼른 돌아앉아 국수를 마저 후루룩 쩝쩝 빨아댔다·
나도 마주 앉은 남자들과 함께 돼지고기를 신나게 집어 먹었다·
“맛있군·”
“돼지고기는 역시 뱃살이죠·”
“확실히 비계가 많으니 풍미가 삽니다·”
“돼지고기는 비계 때문에 먹는다는 말도 있지요· 여기에 죽엽청만 곁들이면 금상첨화인데 느끼한 맛도 잡고·”
나와 독고완과 탁중로와 호리독사가 차례로 한 말이었다·
표행을 하다보면 공통적으로 여자들은 잠자리를 제일 따졌다·
그러나 남자들은 술과 고기만 실컷 먹여주면 딱히 불만이 없었다·
그때였다·
두두두두두·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용같고 범같은 이십여 명의 기마인들이 한 대의 마차를 끌고 나타났다·
기마인들은 모두 도검궁으로 무장했는데 앞줄 세 번째에서 달리는 사내는 흑수표국(黑獸標局)이라고 적힌 표기를 특수 제작한 지게에 장착해 짊어진 상태였다·
순간 나와 독고완과 탁중로는 표정을 굳혔다·
반면 남궁소소와 세 명의 여표들은 오히려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건양까지 가고 오는 동안 만난 다른 표국의 표사들이 천룡표국 비룡당의 표사라는 말을 듣고 하나같이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당주님 표기를 펼칠까요?”
여표들 중 막내인 운휘향이 신난 얼굴로 물었다·
항주로 돌아가는 길에는 표마차도 없이 단출했기 때문에 표기까지 접어 버린 상태로 여행하는 중이었다·
“모두 저들과 말을 섞지 않도록·”
나의 서늘한 명령에 여자들의 표정도 뒤늦게 굳어졌다·
눈치 빠른 남궁소소가 독고완을 붙들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흑수표국은 어떤 곳이죠?”
“저들은 흑도들입니다·”
“네?”
“복건성 최대의 흑도방파 중 한 곳인 흑사방(黑砂常)에서 운영하는 표국인데 표사들 역시도 흑사방 출신의 흑도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죠·”
“흑도방파에서 표국을 운영한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런 곳에 누가 표물을 맡기죠?”
“누가가 아니라 무엇을의 문제입니다· 정상적인 표국에서는 거절하는 온갖 더럽고 추악한 물건들을 고액을 받고 운송해 주지요· 그리고 그런 걸 의뢰하는 곳이 생각보다 꽤 많습니다·”
“예를 들면요?”
다음 말은 탁중로가 받았다·
“흑시(黑市)를 가보셨습니까?”
“아직· 하지만 어떤 곳인지는 알아요·”
“그곳에서 불법으로 거래되는 반인륜적인 물건들 대부분이 바로 흑수표국 같은 곳에서 운송하는 겁니다· 그 외에 돈만 주면 신분을 숨긴 채 납치 감금 파옥 암매장 등도 서슴지 않고 자행하고요·”
그때쯤 흑수표국의 표사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먼저 도착한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에서 내리고 나무에 고삐를 묶었다·
정확히 말하면 남궁소소와 세 명의 여표들을 향한 시선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들른 주점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미녀 네 명이 나란히 앉아 국수를 먹고 있으니 눈이 해까닥 돌아갈밖에·
나를 비롯해 동석한 남자가 네 명이나 있고 여자들까지 모두 탁자 위에 검을 올려 놓았지만 그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점소이가 얼른 달려가 물었다·
“뭘로 드릴깝쇼?”
“저쪽 손님들이 먹는 게 뭐지?”
“돼지고기와 죽엽청으로 드릴깝쇼?”
“말고 예쁜 아가씨들께서 드시는 거 말이야?”
“국수를 드시고 계시는뎁쇼·”
“그럼 우리도 국수로 줘· 쫙 깔아 봐·”
“국수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보시다시피 저와 어머니가 단 둘이서 주점을 꾸려나가는지라·”
“그럼 일단 돼지고기랑 술부터 좀 내와 봐· 돼지고기는 미리 다 삶아 놨을 거 아냐·”
“그게 남자 손님들께서 드시는 요리입죠·”
“요리는 개뿔· 빨리 가져와!”
“예 알겠습니다·”
미간에 검상을 새긴 서른 줄의 털북숭이가 점소이에게 호통을 쳐놓고는 남궁소소를 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하고 웃었다·
‘저 씨부럴놈이!’
나는 슬그머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어 검갑으로 손을 가져가려는 찰나 남궁소소가 갑자기 술 호리병을 내게 쓱 내밀었다·
“한 잔 받으실래요?”
“···?”
“한 잔 받으세요· 어서요·”
동시에 그녀의 전음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난 괜찮아요· 검을 차지 않으면 저잣거리에만 나가도 항상 겪는 일이에요· 고작 여자들을 보고 예쁘다며 웃었다는 이유로 흑사방과 전쟁을 할 순 없잖아요· 안 그래요?]
저들은 단순한 흑도가 아니다·
어쨌거나 표국의 꼴을 갖추고 있으니 여기서 격돌이 벌어지면 천룡표국과 흑수표국의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면 흑사방까지 자동으로 개입할 것이다·
남궁소소는 그걸 우려하고 있었다·
“지금은 이 술을 마실 자격이 없는 것 같소·”
나는 남궁소소가 주는 술을 거절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따라서 일어났다·
탁자 위에는 먹다 남은 돼지고기와 아직 밀봉도 제거하지 않은 죽엽청이 잔뜩 놓여 있었다·
남궁소소와 세 명의 여표는 죽림을 써서 얼굴을 가렸다·
그제야 흑수표국의 표사들은 잔뜩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도 표사랍시고 대놓고 희롱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오히려 그게 더 약이 올랐지만 말이다·
계산을 하고 떠나려는 순간 놈들 중 일부가 끌고 온 표마차의 차양을 확 걷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까무잡잡한 피부에 크고 아름다운 눈을 가진 남녀 곤륜노 일곱 명이 양손을 묶인 채 대나무 우리 안에 갇혀 있었다·
그중에는 열 살가량의 사내아이도 둘이나 섞여 있었다·
흑수표국의 표사들은 물동이에 물을 가득 떠 와서는 대나무 우리 앞에 섰다·
그러자 곤륜노들이 손을 허겁지겁 창살 밖으로 내밀었고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손바닥에 대충 부어주는 물을 앞다투어 마셔댔다·
남궁소소를 비롯해 세 명의 여표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그 모습이 흑수표국 표사들의 시선을 끌었다·
아까부터 눈에 거슬리던 털북숭이가 쓰윽 다가와 삐딱하게 서서는 우리에게 시비조로 물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 눈으로 내가 보는데 무슨 문제라도?”
“음? 으하하· 그것도 그렇군요· 실컷 보십시오·”
털북숭이가 웃자 주변에 있던 이십여 명의 표사들도 일제히 웃음보를 터뜨렸다·
웃음 사이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겨가지고 꼴에 여자들 앞이라고 큰소리는 치고 싶은가 보지·”
“내가 저자라도 그럴 것 같은데· 여자들 얼굴을 좀 보라고· 후우·”
잠시 후 털북숭이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내게 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합시다· 이 몸은 복건성 흑수표국의 표사 방지중이라고 하오· 강호의 형제들은 냉심귀도(冷心鬼刀)라는 과분한 별호를 안겨주었지요·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찌 되시는지?”
“천룡표국의 이정룡이오·”
“알고 봤더니 천룡표국의 이정···!”
사내는 말을 하다말고 그대로 석상이 되어 버렸다·
주변에서 자리를 잡던 표사들도 곤륜노들에게 물을 먹이던 표사들도 전부 동작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잘못 건드렸다 싶었는지 털북숭이는 마른 침을 꼴깍꼴깍 삼킬 뿐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때 우두머리로 짐작되는 오십 줄의 장년인이 표사들을 헤치고 다가왔다·
그가 나를 향해 공손하게 포권지례를 하며 말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풍운비룡 대협을 여기서 뵙는군요· 표행을 이끌고 있는 흑수표국의 표두 백몽추라고 합니다·”
장년인은 털북숭이와 달리 자신의 별호를 말하지 않았다·
어떤 별호를 말하든 감히 풍운비룡이라는 네 글자와 견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혹여 수하들이 무례를 저지른 것이 있다면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출신들이 비천한지라 예의를 모르는 녀석들이 많습니다·”
“예의를 모르니 조심하라는 뜻입니까?”
“무슨 그런 말씀을·”
“비켜주시죠·”
장년인 난혼사검(難魂死劍) 백몽추가 옆으로 물러났다·
나는 털북숭이 방지중을 쏘아보듯 스쳐 가며 외쳤다·
“모두 출발한다!”
***
“많이 놀랐소?”
“저런 일이 자주 있나요?”
“항상 있는 일이오·”
“항상요?”
“지금도 바다를 가운데 두고 한족 해적들은 곤륜노를 잡아다 노예로 팔아넘기고 곤륜노의 해적들은 또 한족과 남만의 묘족들을 잡아다 자기들 나라로 끌고 가 노예로 팔아넘기고 있을 것이오·”
“무서운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요·”
“세상은 본래 잔인하고 비정한 곳이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겐 더더욱 그렇고·”
“갑자기 철부지가 된 느낌이군요· 무림세가의 딸로 태어나 나름 산전수전을 겪을 만큼 겪었다고 자부했는데·”
“구해주자고 할 줄 알았소만·”
“그랬다면 어떻게 했을 거예요?”
“세상 곳곳에서 수많은 악행들이 벌어지고 있소·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모두 참견할 수는 없는 노릇이오· 난 협객 노릇을 할 생각도 없고·”
“저도 알아요·”
남궁소소 뿐만 아니라 세 명의 여표들도 굳은 표정이 좀처럼 풀어지질 않았다·
대나무 속에 갇혀 있던 아이들과 눈을 마주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놈들 아마 돈푼깨나 지니고 있을 겁니다·”
불쑥 끼어든 사람은 독고완이었다·
여표 운휘향이 물었다·
“어째서 그렇죠?”
“표사가 스무 명이나 되는 걸 보면 처음엔 표마차를 최소 다섯 대 이상 끌고 북쪽으로 갔을 겁니다· 표마차 한 대당 실려있는 곤륜노의 숫자도 지금보다 많았을 것이고요·”
“그 말은?”
“처분하고 남은 곤륜노만 데리고 돌아가는 중이라는 뜻이지요· 이동의 편의성을 위해 빈 표마차는 아마도 싸게 팔아치워 버렸을 것이고요·”
독고완의 말에 남궁소소와 여표들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한편 나는 계속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지금이 아닌가?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한때 이곳에 녹림산채가 있었다·
채주의 별호가 탈혼살부(奪魂殺洋)였던가?
그는 남직예의 대도시에서 떠돌던 삼류 무사 쉰여 명을 끌어모아 이곳에서 동가채(東家蒙)라는 산채를 열었다·
내가 천룡표국에 들어간 시점을 시작으로 반년쯤 후의 일이고 대략 삼 년 정도 이 자리에서 장사를 해 먹었다·
한데 산적질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칼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람을 보는 안목도 있어야 하고 협박하는 기술도 있어야 하고 치고 빠지는 판단력도 있어야 한다·
한데 동가채는 채주의 미숙함으로 말미암아 삼 년만에 수하들 절반이 죽거나 불구가 되어 떠나 버린다·
설상가상으로 탈혼살부 자신도 구벽산 남쪽 고갯마루를 장악하고 있던 남가채의 채주에게 패해 그만 그의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니까 전생의 기억대로라면 지금은 탈혼살부가 동가채를 갓 열고 녹림의 길로 들어선 시점인 것이다·
그때 왼쪽 산비탈의 무성한 숲에서 무언가 기척이 느껴졌다·
‘왔다!’
나는 속으로 반색을 했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말을 멈추었다·
이어 잔뜩 심각한 표정으로 산비탈의 숲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남궁소소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저기 무언가 있소·”
“뭐가요?”
“모르겠소· 한데 아주 많소·”
“대체 뭐가 있기에?”
남궁소소의 말에 호리독사가 말에서 훌쩍 내리더니 주먹만한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이어 비탈의 숲을 향해 냅다 던졌다·
딱!
“악!”
“출동이다!”
갑작스러운 외침과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무슨 산사태라도 난 것처럼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에 하나같이 칼이며 도끼 등을 꼬나 쥐었는데 그 숫자가 오십여 명이나 되었다·
“저건 또 뭐야?”
호리독사가 후다닥 물러나며 목구멍을 쥐어짰다·
표사들이 놀란 말을 진정시키는 사이 괴인들은 어느새 전부 내려와 십여 장 앞에서 길을 막고 섰다·
누가 녹림도 아니랄까봐 하나같이 얼굴에 ‘나쁜 놈’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흉악하게 생긴 저게 과연 인간의 얼굴인가 싶은 자가 커다란 도끼를 어깨에 얹고는 휘적휘적 걸어 나왔다· ‘탈혼살부·’
전생에서 나는 그를 십여 차례 이상 보았다·
물론 표사들이 전부 알아서 처리했기 때문에 나와 그가 직접 대화를 나눌 일은 없었다·
풋풋한 시절의 탈혼살부를 보니 한편으로는 반갑고 한편으로는 깜깜한 그의 앞날이 심히 걱정되었다·
그가 대여섯 장을 앞에 두고 멈춰서서 내게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돈 될만한 건 전부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명년 오늘이 네 놈들의 제삿날이 될····”
말을 하다 말고 탈혼살부가 마른 침을 꼴딱 삼켰다·
남궁소소와 여표들이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죽림을 살짝 들어 올렸는데 그 바람에 뒤늦게 여자들의 아름다운 용모를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란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탈혼살부는 다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것이다!”
채채채챙!
표사들 전부가 마상에서 도검을 뽑아 쥐었다·
협상을 할 때 하더라도 일단은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것이 표사들의 불문율이었다·
내가 한가롭게 물었다·
“여긴 본래 산채가 없던 곳인데· 내가 모르는 사이 새로운 산채라도 열렸나? 귀하가 채주이시오? 별호는 무엇이오?”
“탈혼살부·”
“처음 들어보는 별호군·”
“앞으로 자주 듣게 될 것이다·”
“예로부터 녹림에겐 길목이 재산이라고 했소· 어떻게든 사람들이 자주 이 길을 이용하도록 만들 생각을 해야지· 그렇게 첫 대면하는 날부터 탈탈 털어먹으려고 하면 누가 이리로 다니겠소?”
“집이 어디지?”
“항주요·”
“혼인은 했나?”
“그건 왜 묻는 거요?”
“훈수질은 집에 가서 어린 자식들에게나 실컷 하라고· 그러려면 일단은 살아서 돌아가야겠지?”
사내의 뒤쪽에 있는 녹림도들에게서 왁자지껄 웃음보가 터졌다·
탈혼살부는 한칼이라도 먹인 것처럼 의기양양해 했다·
나는 품속에서 전낭 하나를 꺼냈다·
입구를 열어 거꾸로 들자 동전 쉰 개 정도가 손바닥에 가득 쌓였다·
동전을 본 탈혼살부와 그의 수하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부자인 줄 알고 은전을 기대했다가 동전만 잔뜩 나오자 맥이 탁 풀린 것이다·
나는 동전을 한 손으로 힘껏 움켜쥐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어 번을 돌려가며 반죽 주무르듯 꾹꾹 움켜쥐자 쉰 개의 동전은 하나로 뭉쳐져 쇠떡이 되어 버렸다·
“···!”
“···!”
지켜보고 있던 표사들 전부 깜짝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손으로 동전을 주물러 쇠떡을 만드는 괴력은 일갑자의 내가고수라도 쉽게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탈혼살부와 녹림도들은 어떻겠나·
그들은 모두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입이 쩍 벌어져서는 그대로 석상이 되어 버렸다·
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쇠떡으로 뭉친 동전을 내공을 담아 왼쪽 숲에 있는 도토리나무를 향해 냅다 던졌다·
터엉!
굉음과 함께 둥그런 쇠떡이 나무 둥치에 파고 들어가 박혔다·
그 충격으로 근처에 앉아 있던 새떼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뽑아서 갖고 가시오·”
한순간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탈혼살부가 말했다·
“운이 좋군· 마침 오늘이 내 아버지의 제삿날이다· 자식 된 도리로 오늘만큼은 피를 보고 싶지 않으니 조용히 지나가라·”
그러더니 홱 돌아서서 수하들과 함께 잰 걸음으로 도망쳤다·
이렇게까지 쉽게 포기할 줄 몰랐던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궁소소와 표사들도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거기 서!”
탈혼살부가 우뚝 멈춰 섰다·
“뒤로 돌아!”
그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한 발을 산비탈 쪽으로 내디뎌 도망칠 준비를 한 상태에서 그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냥 보내 준다니까!”
“당신들 초짜지?”
“누구더러 초짜래!”
“그렇게 해서 밥 먹고 살겠소? 내가 좀 가르쳐 주리이까? 산적질이라면 나도 이골이 날 정도로 경험해본 사람인데·”
“무슨 헛소리야!”
“지금 산밑 박가주점에 복건성의 표사놈들이 잔뜩 와서 술과 고기로 배를 채우고 있소· 수중엔 곤륜노 수십 명을 처분하고 받은 돈이 있지· 어떻게 탈탈 털어먹는지 내가 직접 보여주겠소·”
“당신이 뭘 어떻게?”
“역용에 변복을 하고 기다렸다가 채주인척 하고 나타나는 거지· 입은 내가 털테니 당신들은 뒤에서 욕이나 하며 머릿수만 채우고 있으시오· 정확한 위치와 자세 및 동선은 차차 알려 주겠소·”
“무슨 그런 어처구니없는····”
“대신 조건이 있소· 일이 끝나면 해 질 무렵이 될 것 같은데· 오늘 밤은 산채에서 재워 주시오·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따뜻한 물도 넉넉히 데워주고· 침상의 이불도 새 걸로 깔아주고·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도 정성 들여 지어 주고· 어떻소?”
이쯤 되니 당황한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 쪽 표사들이었다·
표사가 녹림으로 위장해 다른 표국의 표사들을 털어먹는다는 말에 독고완 탁중로 염지약 여소옥 운휘향은 얼굴이 노래졌다·
호리독사는 산적들이 담근 술을 훔쳐 마실 생각에 벌써부터 발갛게 상기되었고 남궁소소는 내가 도망치듯 떠나자고 한 이유를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이를 하얗게 드러내며 웃었다·
그 사이 수하들에게 가서 한참을 상의하고 돌아온 탈혼살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익분배는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