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 황금을 칼처럼 휘두르다(9) >
처참하게 죽었다는 사람들이 비록 중상을 입었을지언정 전부 살아서 돌아오자 군중이 크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살인자들과는 같은 의원으로 불릴 수 없으니 항주를 떠나라던 단극명과 신의방의 의원들은 다 같이 사이좋게 공황상태에라도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그때쯤엔 당문의 노의원들이 중상 입은 낭인들의 붕대를 거의 벗긴 상태였다·
환자들의 부상 정도가 생각보다 심했던지라 군중 속에서 ‘아아’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 광경을 보고 사람들이 한두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대체 배를 몇 바늘이나 꿰맨 거야· 무슨 백 년 묵은 지네라도 붙어 있는 줄 알았네·”
“저 정도 상처면 창자가 흘러나왔을 것 같은데 용케도 살아 있군·”
“저기 저 사람은 목구멍을 뚫리고도 살았어·”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을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살린 거지?”
“귀밑머리가 흰 당문의 의원들치고 명의가 아닌 이가 없다더니 과연 그 말이 사실인가 보군·”
“다른 건 몰라도 칼에 맞거나 어디 부러졌을 때는 당문의 의원들이 항주의 의원들보다 낫지 않을까? 아무래도 무림세가니까 말이야·”
“무림의 고수들이 찾는 의원이라면 속병도 잘 보지 않을까? 게다가 당문의 의원들이라면 수백 년을 내려온 비기며 약방문이 산더미처럼 쌓였을걸·”
“그거야 직접 확인해 보면 되지·”
군중 속에서 한두 명이 걸어 나와 슬그머니 마음에 드는 노의원들 앞에 가서 섰다·
그들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앞다투어 튀어 나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노의원들이 깔고 앉은 돗자리 앞에는 일곱 개의 기다란 줄이 생겨 버렸다·
줄은 계속해서 끝도 없이 길어졌다·
심지어 새치기를 했네마네 하며 자기들끼리 싸우기도 했다·
그때쯤엔 단극명과 신의방 의원들은 앞으로 나온 군중에게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자세히 보니 다들 썩어 문드러진 표정들을 하고 은근슬쩍 줄행랑을 치는 중이었다·
“군백은 처음부터 납치를 사주한 범인들을 찾을 생각이 없었던 거예요· 범인을 찾으면 그들이 누구이든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하고 그러면 항주에서는 언제까지고 전쟁만 해야 할 테니까요·”
“관즉득중(貢則得衆) 너그러우면 대중을 얻을 수 있다는 공자의 가르침에 딱 부합되는 판단이군· 한데 냉철양은 갑자기 왜 죽인 거요?”
“공자고 뭐고 간에 우두머리 하나는 족쳐야죠· 그나마 의원들이 모두 살았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정말 사주한 자까지 찾아내 모조리 숨통을 끊어 놓았을 거예요· 제가 봐서 아는데 당문의 가풍은 정말 무서워요·”
“나한테 귀띔이라도 해주지·”
“상황이 그렇게 다급하게 돌아갈 줄 알았나요· 특히 맨 처음 뛰어든 어떤 사람이 워낙 독하게 칼질을 해대는 바람에 낭인들이 죽어가고 있어서 설명하고 말고 할 시간도 없었고요·”
“그 사람 덕분에 그나마 아군들이 덜 다쳤지·”
“비난하는 거 아니에요· 당주님 말씀처럼 초전에 기세를 꺾어 놓지 않았다면 일이 훨씬 어려워졌을 거예요· 그런데 나한테 뭐 할 말 있지 않아요?”
‘‘할 말? 무슨 말?”
“없으면 됐어요·”
내 무공이 비약적으로 높아진 것을 두고 하는 말인 모양이었다·
한데 왜 더 캐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 주려는 걸까?
“한데 소저는 어떻게 알고 맞장구를 쳐준 거요?”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째서?”
“지금 당장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이 아니라 내가 평소 알고 있던 당군백의 성품을 믿었기 때문이죠· 저 녀석이 저렇게 행동할 때는 분명 무언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거야 하고요·”
당군백도 당군백이지만 남궁소소가 새삼 다시 보였다·
다른 사람을 이렇게까지 믿을 수 있다는 건 상대의 품성이 훌륭한 탓이라고만 할 수 없다·
그전에 내 품성이 상대를 믿을 만큼 의로워야 한다·
공자가 말한 군자의 덕이란 그런 것이다·
***
“비룡당에서 보호하고 있는 보물들의 그림과 목록입니다· 금과 은의 무게부터 시작해 대략적인 제작 시기까지도 적혀 있고요·”
“최선을 다해 가장 좋은 가격으로 처분해드리겠습니다· 또한 맡겨 주시는 돈은 안전하게 잘 보관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거래는 모두 차명으로 할 것입니다· 제가 이곳에 보물과 돈을 맡겼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십시오· 만약 그 사실이 알려지는 날엔 전액을 다른 전장으로 옮기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투자는 장주께서 판단하여 자유롭게 하시되 제게 항상 동의를 구하셔야 합니다· 언제든 거액을 출금할 수 있으니 금전 일만 냥 정도는 상시 준비를 해두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용화전장이 소유하고 있는 향연루라는 소장원이 있습니다· 이걸 귀 전장에서 사들이실 수 있겠습니까?”
“본래 그곳은 용화전장의 입장에선 계륵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신의방을 눈치를 보느라 아주 골치 아픈 물건이 되어 버렸지요·”
“돈은 달라는 대로 주십시오· 그리고 그 장원을 꼭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되팔아 주세요· 들어가는 비용은 전부 제 돈으로 쓰시고요·”
“고객의 귀한 돈인데 달라는 대로 다 줄 수야 있나요· 그 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적절한 값에 잘 매입한 후 말씀하시는 대로 깨끗하게 처리를 해놓겠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남기시고요·”
“예?”
“좀 전에 열심히 불려 준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항주에는 대형 전장들이 많은데 어찌 저희처럼 작은 비룡전장(飛龍錢任)에 이 큰돈을 맡겨 주시는 겁니까?”
“그래서 싫으십니까?”
“그럴 리가요· 당주님께선 짐작도 못 하시겠지만 저는 지금 꿈을 꾸는 것만 같습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어떻게 잠이 들까 걱정입니다·”
비룡전장의 장주 노적산·
지금은 항주와 소주와 소흥 세 곳에만 분타를 거느린 신생 전장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십 년 후 그는 대륙 전역에 수백 개의 분타를 거느린 초거대 전장의 장주가 된다·
황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는다는 뜻에서 금적산(金積山)이라는 별호도 얻고·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세상의 흐름을 읽는 탁월한 안목과 과감한 투자 그리고 한번 약속한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목숨 걸고 지키는 고집이었다·
노적산의 뛰어남은 당장 올해부터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그를 암중에 숨겨두고 칼처럼 쓸 생각이었다·
진짜 칼로는 베지 못하는 자들을 상대할 금검(金劍)으로·
“이름이 같아서요·”
“예?”
“제 별호가 풍운비룡이잖습니까· 비룡전장과 인연을 맺으면 왠지 좋은 일들만 일어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꼭 그렇게 되도록 만들겠습니다· 다시 한번 저희에게 이렇듯 큰 기회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방 노인의 방물점은 한동안 문이 잠겨 있더니 무려 열흘 만에야 다시 열렸다·
다른 사람이 주인이었다면 폐업하고 도망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 노인은 이곳에서 무려 오십 년을 장사한 터줏대감이었다·
나는 남궁소소를 흉내 내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기다렸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기왕이면 주문하신 물건에 가장 적합한 백수우각(白水牛角)을 구하러 다니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백수우각요?”
“백수우각은 왜국에서 난 것을 최고로 치는데 대나무처럼 가벼우면서도 질기고 단단한 특유의 성질 때문에 결코 부러지는 법이 없지요· 빛깔도 백옥처럼 영롱하고 말입니다·”
백수우각은 흰 물소뿔을 말한다·
검은 물소뿔에 비해 열 배쯤 귀하기 때문에 가격도 비싸고 무엇보다 구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왜국의 백수우각은 조직이 치밀하면서도 가벼워 부르는 게 값이라고 들었다·
“기대되는군요·”
“공방으로 들어가서 금방 갖고 나오겠습니다·”
나와 남궁소소는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방 노인이 사라진 오른쪽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남궁소소의 정수리가 내 턱밑에 오게 되었다·
봉잠 대신 꽂아 놓은 대나무 젓가락이 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비녀가 남궁세옥의 봉잠만 있는 게 아닐 텐데 왜 하필 대나무 젓가락을 꽂아 놨는지 모르겠다·
“당군백은 좀 어떻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죠· 아침부터 저녁까지 환자들이 줄을 서는 바람에 쉴 틈도 없이 호위를 서야 하거든요·”
“아직 의원을 열 장원은 못 구했소?”
“곧 구할 것 같아요·”
“어디를?”
“처음 목표대로 향연루요·”
“용화전장에서 판다고 했소?”
“웬걸요· 용화전장에서 골치가 아프니까 비룡전장이라는 신생 전장에 헐값에 팔아 치워 버렸나 봐요· 비룡전장이 그걸 당군백에게 비싼 값에 되팔 생각이고요·”
“얼마나 비싸게 팔기에?”
“소문에 따르면 금전 서른 냥에 산 걸 일흔 냥에 내놓았다고 하더라고요· 무려 마흔 냥의 차익을 남긴 거죠·”
“하여튼 전장 놈들이란·”
“그래도 신의방 눈치 안 보고 팔겠다고 하는 게 어디에요· 코딱지만한 전장의 입장에서는 신의방 의원들을 어떻게든 구워삶아도 모자랄 판에·”
“그건 그렇군·”
“당군백에게 궁금한 게 많았나 봐요· 평소엔 어떻게 참았을까? 뭐든 물어봐요· 아는 건 다 말해 줄 게요· 좋아하는 음식이나 뭐 이런 것도·”
“머리는 뭘로 감았소?”
“오늘요?”
“그렇소·”
“그것까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본인이 감지 않았소?”
“혹시 지금 제 머리 얘기하는 거예요?”
“그렇소·”
“갑자기 그건 왜요?”
“꽃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
“···?”
“목련청으로 감았어요·”
“목련 냄새였군·”
“보통은 목련 향기라고 하죠·”
“같은 말 아니오?”
“다르거든요·”
그때 문이 열리면서 방노인이 비단 보자기를 들고 나왔다·
탁자에 놓고 보자기를 풀자 감쪽같이 수리된 봉잠이 나타났다·
그 옆엔 백수우각에 목련을 조각하고 다시 금박을 입힌 목련잠이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봉잠도 소박하면서 고아한 멋이 있었다·
하지만 목련잠의 화려한듯하면서도 우아한 기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떻습니까?”
“명불허전입니다·”
“감사합니다·”
“얼마인가요?”
남궁소소가 수리된 봉잠을 집어 얼른 품속에 챙겨 넣고는 방 노인에게 물었다·
“수리비는 지난번에 받았는뎁쇼?”
“그러니까요· 그 비용을 제가 이 남자에게 지금 줘야 하거든요· 수리비로 정확히 얼마가 책정되었나 해서요·”
방 노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말했다·
“됐소·”
“아뇨· 갚을래요·”
“됐다니까·”
“갚겠다니까요·”
“다른 때는 어떻게든 뜯어내려고 하더니·”
“다른 때는 어떻게든 돈을 안 쓰려고 하더니·”
“이번만 특별히 쓰는 거요·”
그러면서 나는 목련잠을 쓰윽 남궁소소 쪽으로 밀어 놓았다·
“뭐예요?”
“한번 해보시오·”
“이걸 제가 왜 해요?”
“그럼 내가 하고 다니오?”
“큰어머니 드린다고 하지 않았어요?”
“큰어머니가 비녀를 좋아하시려나 모르겠다고 했겠지· 그리고 큰어머니께 드릴 은비녀는 이미 따로 하나 샀소· 모종의 일로 사과를 좀 드려야 해서· 그럼 다음에 봅시다·”
팔다리가 오글거려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잰걸음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십여 걸음을 막 옮겼을 때였다·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전생에서 오십 년을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 귓구멍을 팍 뚫고 들어와 박혔다·
“우리 한 달만 만나 볼래요?”
“···!”
하늘에서 정수리로 번개가 내려쳐서 척추를 관통한 후 땅으로 빠져나간 것 같았다·
두 다리는 땅에 찰싹 붙어서 움직이질 않았다·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고 귓속에서는 방금 남궁소소가 한 말이 송곳처럼 계속 고막을 찔러댔다·
[우리 한 달만 만나 볼래요?]
[우리 한 달만 만나 볼래요?]
[우리 한 달만 만나 볼래요?]
마른 침을 몇 번이나 삼켰는지 모르겠다·
한참이 지난 후에서야 나는 가까스로 심장을 진정시키고 돌아섰다·
십여 걸음 앞에 남궁소소가 불이라도 난 것처럼 빨개진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뒷머리에는 어느새 대나무 젓가락 대신 목련잠을 꽂아 놓았다·
목련 향기가 나는 머리카락에 목련잠이 꽂혔으니 이제야말로 완벽하게 무언가 조화를 이룬 것 같았다·
그리고 목련꽃만큼이나 예쁘고 아름다운 남궁소소의 어깨가 팔이 두 다리가 바람에 이는 나뭇가지처럼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녀도 나만큼이나 긴장한 것이다·
“한 달만 만나봐요· 우리· 한 달 후에도 좋으면 계속 만나는 거고 싫으면 깨끗하게 헤어지고요· 나 정도면 예쁜 축에 들지 않나요? 그리고 계속 이렇게 나 혼자만 얘기해요?”
“혹시 지금 내 귀에서 피 나오?”
“알아듣게 말해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정말 갑자기라고 생각해요? 난 아닌 것 같은데·”
“나도 소저가 마음에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오· 하지만 나이 차이가 그러니까 내 말은 왠지 이러면 내가 파렴치한이 되는 것 같고····”
“언제부터 좋아했는데요·”
“뭐요?”
“방금 마음에 아주 없진 않았다면서요· 그거 좋아했다는 말 아닌가· 그래서 언제부터 날 좋아했느냐고요·”
“남궁세가에서 소저가 말도 없이 실종되던 날 밤에· 그날은 내 마음이 다른 때와 조금 달랐소· 꼭 화골산(化骨散-시체를 녹여 없애는 극독)을 물에 타서 한 사발 들이 마신 것 같았다고나 할까·”
“고백은 내가 먼저 했지만 좋아한 건 그쪽이 먼저였군요· 그 점은 서로 확실히 해두자고요· 이의 없죠? 그리고 내일 낮에 바빠요?”
“특별히 바쁜 일은 없소만·”
“그럼 정오까지 월성교로 나와요·”
“월성교는 왜?”
“월륜산(月餘山) 꼭대기에 있는 육화탑(穴和塔) 구경하러 가게요· 사람들 말이 거길 올라가면 항주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대요· 탑 속에는 개화사(開化寺)라는 절이 있어서 향을 사르며 소원도 빌 수 있고요· 이런 내 정신 좀 봐· 중요한 약속이 있었는데 깜빡했네·”
그러더니 갑자기 간다는 인사도 없이 냅다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는 완전히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나는 무슨 귀신에라도 홀린 것 같았다·
무언가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방 노인이 소맷자락 속에 양손을 척 끼우고 앉아서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얼른 달려가서 은전 다섯 냥을 꺼내 탁자 위에 척 내려놓았다·
목련잠 가격과 똑같은 액수였다·
“비밀로 해주시는 겁니다·”
방 노인이 은전을 싸악 쓸어 담아 품속에 챙기고는 꼭 다문 입술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나 역시도 잊었던 약속이 생각난 사람처럼 냅다 줄행랑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