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 황금을 칼처럼 휘두르다(8) >
당문 무사의 돌발행동은 좌중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했다·
비룡당의 표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천룡표국이 성도에서 당문에게 아무리 빚을 졌다고 해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나도 똑같았다·
내가 한마디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이건 아니지!”
차가운 음성과 함께 앞으로 나선 사람은 남궁소소였다·
그녀는 당군백을 싸늘한 표정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군백 우린 너를 도와 납치당한 노의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왔다· 한데 너는 지금 우리를 당문의 복수에 동원된 것으로 만들어 버렸어· 이건 나나 정룡 공자에 대한 도리가 아니야·”
“은혜는 두 배로 갚고 원수는 열 배로 되갚아 주는 건 당문의 오랜 규칙이에요· 제겐 그 규칙을 엄중히 수행할 의무가 있어요· 지금도 어딘가에서 의술을 펼치고 있는 당문의 의원들을 위해서라도요·”
“그럼 우릴 끌어들이지 말았어야지!”
“의뢰는 여기까지만 부탁드리겠어요·”
당군백이 나를 돌아보며 한 말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준 모든 도움을 거래에 의한 수행으로 만들어 버리는 말이었다·
남궁소소가 두 눈 가득 불길을 담으며 일갈했다·
“당군백!”
“가 호위 심문을 시작하세요!”
가 호위라 불린 무사가 낭인들을 쓸어 보며 서늘한 음성으로 외쳤다·
“단 한 명이다!”
가불염이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어떻게 할지를 묻는 것이다·
정확히는 내가 명령만 내리면 당문의 무사들을 저지하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지켜보는 걸로·’
가 호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머리를 박고 있던 대여섯 명의 낭인들이 벌떡 일어났다·
부상을 당해 쓰러져 신음하는 자들 중에서도 서너 명이 발버둥을 치며 일어나 앉았다·
낭인들은 자신들이 아는 것을 앞다투어 필사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데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전부 똑같았다·
죽은 냉철양에게 거액의 의뢰가 들어왔고 그가 자신들을 규합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
그러나 냉철양은 이미 죽어버렸고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다·
남궁소소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였다·
“모두 헛수고외다!”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사십 줄의 낭인 하나가 난간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독수에 당했는지 손발을 달달 떨며 입과 코로는 피를 질질 흘리는 중이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당문의 의원들을 납치해 달라면서 자신의 신분을 밝힌단 말이오·”
“사람인 이상 생김새는 있겠지·”
“쉰 살가량의 노인이었소· 죽림을 깊이 눌러 써서 얼굴은 볼 수가 없었고 절강성 토박이 말투를 사용했소· 의뢰 내용은 죽이지 말고 열 흘 정도만 데리고 있다가 풀어 주라는 것이었고·”
“그걸 어떻게 알지?”
“의뢰를 받을 때 함께 있었으니까·”
“죽은 냉철양과는 무슨 사이지?”
“내 형이오·”
“···!”
순간 좌중이 고요해졌다·
나는 재빨리 낭인들의 반응을 살폈다·
모두가 얼굴이 노래진 것이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다는 표정들이었다·
최소한 저자가 냉철양의 동생은 맞는 모양이었다·
가 호위가 당군백을 돌아보았다·
당군백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 호위가 품 속에서 호두알만한 자기병을 꺼내 주면서 말했다·
“해독제다·”
“이 정도로도 살려주는 거요?”
“싫으면 다른 사람을 줄까? 만약 양보한다면 네 놈들에게도 의리라는 게 있음을 인정해 열 명을 살려 주자고 아가씨께 부탁드려 보지·”
“아니오· 내가 먹겠소!”
낭인이 얼른 자기병을 낚아채 안에 든 것을 냉큼 마셔 버렸다·
그 사이 당문의 다른 무사들이 엽선을 끌고 와서는 낭인을 강제로 태운 후 힘차게 밀었다·
이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지?’
잠시 후 엽선이 안갯속으로 사라지자 남은 낭인들은 분노에 치를 떨고 두려움에 온몸을 떨었다·
차라리 도망이라도 치다가 죽겠다는 생각인지 물속으로 뛰어드는 자들도 있었다·
당군백의 일갈이 터졌다·
“모두 시작하세요!”
***
항주에 한 가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저잣거리에 나타나 가난한 병자들에게 의술을 펼치던 강호낭중 일곱 명이 알고 보니 저 멀리 사천당문에서 온 명의들이었다·
한데 정체 모를 낭인 집단이 그들을 납치해 가는 바람에 당군백을 비롯해 그녀와 절친한 후기지수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중이다·
그 후기지수들은 다름 아닌 천룡표국의 풍운비룡과 다선초당의 남궁소소다·
어떤 자들인지는 몰라도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 먼 곳까지 와서 봉변을 당한 당문의 의원들을 안타깝게 여겼다·
더불어 하루빨리 범인들이 잡혀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의원을 여는 문제로 신의방과 마찰을 빚고 있다던데 혹시 신의방 쪽에서 사주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한데 사흘 만에 새로운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낭인 삼십 명이 몰살을 당했다더군·”
“의원들은 모두 무사했다며·”
“그러니까 말이야·”
“어떤 시체들은 독공에 당해 눈알이 녹아 없어지고 어떤 시체들은 창자가 흘러나온 채 서호 위를 둥둥 떠다녔다는군·”
“심지어 시체를 서호에 버렸다고?”
“그 바람에 서쪽 산그늘 아래에는 지금도 고기가 바글바글 하다는군· 물속에 가라앉은 시체들을 뜯어 먹으려고 말이야·”
“풍운비룡과 남궁소소도 함께 있었다던데·”
“무슨 소릴· 당문의 복수행에 동원되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 풍운비룡과 남궁소소가 격노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절교를 선언하고 떠났다던데·”
“그 얘긴 나도 들었네· 그나마 천룡표국과 다선초당의 비호가 사라졌으니 당문이 항주에 의원을 내기는 더욱 힘들게 됐군·”
이제는 누구도 당문의 의원들을 납치해 간 범인이 누구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대신 당문의 의원들이 인명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며 실력도 가장 형편없는 자들만 따로 좌천되어 온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문의 의원들은 또다시 저잣거리에서 강호낭중 노릇을 했다·
대신 이제 일곱 명이 한 곳에 모여 각자의 돗자리를 펼쳤다·
그 주변을 당군백과 열 명의 호위무사들이 도검을 차고 지켰다·
사람들은 무슨 역병 환자 보듯 힐끔거리며 지나쳤다·
납치당하기 이전에도 찾는 환자가 많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예 단 한 명도 진맥을 받아 보려 하지 않았다·
일곱 의원이 모여서 새 돗자리를 깐 지 사흘째 되는 날 오후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들을 찾았다·
신의방주 단극명과 항주를 대표하는 십여 의원의 원주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제자들이었다·
모두 합치고 보니 무려 서른 명이나 되었다·
나는 그 광경을 조금 떨어진 길바닥에서 남궁소소와 함께 국수를 사 먹으며 구경하고 있었다·
당연히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복에 역용까지 한 상태였다·
역용은 남궁소소가 해주었다·
“신의방주가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가을에 있는 방주직의 연임 문제를 놓고 다른 유력 의원 몇 곳과 살벌한 기 싸움을 벌인다는 소문이 있더니만 이번 기회에 뭔가 입지를 굳히려나 봐요·”
“그래도 이건 좀 과한데·”
“과해야 일이 된다니까요· 무려 항주에 뿌리를 내리려는 당문을 쫓아낸 인물· 그 정도 강단과 실적이면 연임은 따 놓은 당상이죠· 여론도 자기들에게 유리하고요· 뭐 그렇게 유도를 한 거겠지만·”
“그런 얘기들은 어디서 들은 거요?”
“저도 이제 항주 사람이거든요·”
팔순에 백발이 성성한 단극명은 본래 태의원(太醫院) 의관 출신으로 전 황제를 진맥하던 귀한 몸이었다·
황실은 물론이거니와 황족들과도 인맥이 깊어 항주의 지부대인 조차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하인들이 멘 사인교를 타고 왔는데 당문의 무인들이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 앞에서도 두려워 움츠러드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무림인들에게 선후배가 있듯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당문의 일곱 노의원이 돗자리에서 일어나 단극명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갖추었다·
“노 선배님을 뵙습니다!”
일곱 개의 목소리가 하나처럼 울렸다·
단극명은 마치 황제라도 된 것처럼 사인교 위에서 그들을 굽어보았다·
이어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당군백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당군백이 두어 걸음 앞으로 나와 역시나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올렸다·
“사천당문에서 온 당군백입니다· 방주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평소 흠모하던 노 선배님을 이렇게 뵙게 되어 실로 영광입니다·”
“나는 의원일세· 자네와 같은 무림인을 후배로 둔 적 없네만·”
“아시다시피 저는 무림인이기 이전에 의가(醫家)의 후손입니다· 노 선배님께서 보시기엔 조악하기 짝이 없는 수준에 불과하겠지만 의술도 조금 알고요·”
“의술을 안다고 모두 의원이라든가· 사람을 살려야 의원이지· 하물며 무자비한 살생을 일삼는 자들과 내 어찌 선후배를 논할까·”
“가르침은 가슴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또한 기회를 주신다면 신의방에 입방해 다른 여러 의원님의 말씀 또한 경청하겠습니다·”
“그쯤하면 됐네· 이제 그만 항주를 떠나 주시게·”
그때쯤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항주를 떠나라는 단극명의 말에 군중은 삼삼오오 동조하는 목소리들을 내기 시작했다·
“신의방이 항주의 의원들을 대표한다고는 하나 다른 의원들을 쫓아낼 권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희는 여기에 계속 머무르겠습니다·”
“내게 그런 권리는 없어도 살인자들을 관아에 고발할 강단은 있다네· 상대가 제아무리 처절한 복수로 악명 높은 무림문파라고 할지라도·”
말이 좋아 강단이지 사실은 관을 동원하겠다는 협박이다·
단극명의 한 마디면 지부대인은 당장에라도 관군을 내어 줄 것이다·
단극명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데는 당군백을 쳐내더라도 나나 천룡표국이 비호를 해주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단극명과 신의방의 힘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항주에서 천룡표국과 표왕의 권세를 넘을 수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당군백은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저희가 살인을 했다는 증거라도 있는지요?”
“내가 보았소!”
저만치 옆쪽에서 한 사람이 군중을 헤치고 나타났다·
사흘 전 서호에서 살려 보내준 냉철양의 동생이었다·
그는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서호에서 당신들이 죽인 난풍파검 냉철양의 동생 냉철심이오· 그날 당신들은 내 형 외에도 스물여덟 명의 낭인들을 몰살했소·”
“당신들이 먼저 아무런 죄도 없고 무공도 모르는 당문의 의원들을 납치해서 좁고 더러운 배 밑에 감금했죠·”
“나도 관아로 가서 달게 벌을 받을 것이오· 하지만 우리는 겁만 조금 주고 돌려보낼 생각이었소· 한데 당신들은 갑자기 나타나 내 형님과 스물여덟 명의 동료들을 처참하게 몰살해 버렸지·”
“우리가 몰살하는 걸 직접 보았나요?”
“독공에 당해 피를 쏟아내며 쓰러지고 도검에 당해 목이 뚫리고 배가 갈라지고 가슴이 벌어져 신음하는 동료들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떠났소· 대라신선(大羅神仙)이 온다고 해도 살릴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이었으니 당연히 모두 죽었겠지·”
“결국 직접 본 게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그따위 수작이 먹힐 것 같소? 그들은 모두 내 동료들이오· 죽지 않았다면 대체 어디에 있기에 나타나지 않는단 말이오·”
그때였다·
“비키시오!”
우렁찬 외침과 함께 천룡표국의 깃발을 단 표마차 다섯 대가 군중을 헤치고 나타났다·
마부석에는 왕소표를 비롯해 비룡당의 표사들이 앉아 있었다·
표마차는 정확히 당문의 의원들 앞에서 멈추었다·
그러자 뒷문이 벌컥 열리면서 또 다른 칼찬 사람들이 들것에 환자들을 실어서 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냉철심의 두 눈이 빠질 것처럼 튀어 나왔다·
들것을 든 사람들은 그날 서호에서 마지막까지 부상을 거의 당하지 않은 낭인들이었다·
들것에 실려 붕대를 친친 감고 누운 환자들은 반대로 독공과 도검에 당해 처참하게 죽어가던 낭인들이었고·
그들 모두를 합치니 정확히 스물여덟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영문을 모르는 군중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반면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한 단극명과 신의방 의원들의 얼굴에선 놀람과 당혹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들것을 당문의 노의원들 앞에 모두 놓아둔 낭인들은 먼저 의원들을 향해 공손하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이어 당군백에게도 한차례 고개를 숙이고는 좌중을 쓸어 보다 냉철심에게서 딱 멈췄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냉철심이 먼저 물었다·
“광견(狂犬) 어떻게 된 것이냐?”
“냉철심 이 후레자식!”
“뭐?”
“네 놈의 형제들은 처음부터 우리를 속였다· 우리 중 누구도 납치하는 대상이 당문의 의원이라는 걸 몰랐지· 그러고도 둘이서만 잘도 도망을 쳤겠다?”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왜 우리가 살아서 돌아올 줄 몰랐나 보지? 노의원들이 다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군백 소저께서 죽어가던 동료들을 모두 살려 주셨다· 그리고 아직까지 밤낮으로 치료를 해주고 계시지·”
그게 무슨!
“가서 도망친 네 형에게 다시는 소주 땅을 밟지 말라고 전해라· 만약 우리 눈에 띄면 그날이 너희 형제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대신 오늘은 네 놈 손모가지 하나만 내놓고 가라· 그래야 저기 쓰러져 있는 동료들에 대한 예의지·”
거짓말이다· 냉철양은 분명히 죽었다·
당군백을 도와주고 냉철심을 엿먹이기 위해 일부러 저러는 것이다·
열세 명의 낭인들이 냉철심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갔다·
“빌어먹을!”
대경실색한 냉철심이 갑자기 경공을 펼쳐 달아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