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표왕을 속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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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주님을 뵙습니다!”
“국주님을 뵙습니다!”
수문무사들이 일제히 문파만의 예법 즉 문례(門禮)를 올렸다·
무림문파들은 어디나 기강이 엄격하다· 칼로 밥 벌어먹는 표국은 특히 그래서 상하 간의 예법이 사병집단을 방불케 했다·
나와 장삼도 뒤로 한걸음 물러나 양손을 가운데로 모으고 살짝 허리를 굽히는 것으로 예를 갖추었다·
말을 몰아 지척까지 다가온 이종산은 장삼의 손에 들린 보퉁이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뭐냐고 묻는 것이다·
“관아에 가서 각패와 노인을 받아오는 길입니다·”
이종산은 무심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대신 나를 넘어 조금 뒤쪽에 서 있는 남궁소소에게 관심을 보였다·
“누구냐?”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다소 불손하지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언사·
그러면서 나는 고개를 뒤로 꺾어 남궁소소에게 살짝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뭘 하는 거요? 볼일 끝났으면 빨리 가지 않고·”
그러나 말과 달리 나는 혀를 뽑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뽑아 옆자리를 손가락으로 찌르듯이 가리켰다·
옆으로 오라는 말이고 곧 소개하라는 뜻이다·
궁하면 통한다고 전음술을 몰라도 임기응변으로 다 할 수 있다· 걱정 없다·
백선반점에서도 보았지만 남궁소소는 눈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는 두 걸음을 걸어 내 옆으로 오더니 허리까지 숙이며 공손하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소생은 정룡 공자와 함께 향시를 치르며 사귄 벗으로 이름은 풍진양이라 하옵고 양주 출신에 나이는 스물넷이옵니다· 뜻밖에도 대명이 자자하신 국주님을 이렇게 뵙게 되어 실로 영광이옵니다·”
뭔가 엄청난 기운이 느껴지는 인사였다· 마치 뼛속까지 각 잡힌 유생의 모습이랄까?
한마디로 예법이 몸에 밴 사람 같았다· 가풍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그런데 벗이라니· 이건 약속에 없던 말이다·
“정룡의 벗이라고?”
“그렇습니다·”
“벗이 찾아온 건 처음인걸·”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원래 내 계획은 이랬다·
지난 닷새 동안 이병룡을 축하하러 온 유생들과 무림의 후기지수들은 수백 명을 헤아렸다·
반면 난 장원급제를 하고도 손님 한 명 없었다·
하다못해 밥 한 끼 따뜻하게 차려주며 수고했다고 등 두드려 줄 어미도 외가도 없었다·
서로 데려다가 표국일을 가르쳐 주겠다던 형들은 내가 장원급제를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싹 닦아 버렸다·
그런 와중에 아는 유생 하나가 찾아와 축하를 하며 표국을 구경시켜 달라고 한다·
이 정도면 아비인 이종산의 마음이 한 번쯤 흔들릴만 하지 않을까?
인간의 측은지심이라는 지극히 불확실한 변수에 도박을 걸어보는 것이지만 나는 의외로 이 방법이 잘 통한다는 걸 전생의 경험으로 안다·
게다가 환생한 첫날 나는 “아버지께서 지난 20년 동안 소자에게 유일하게 하사한 물건이 하필 이걸로 목숨을 끊으라는 칼이군요·”라는 말로 이종산의 가슴을 한번 찌른 적이 있었다·
그도 사람인 이상 분명 나에게 부채감이 조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남궁소소가 그냥 아는 유생을 벗으로 바꿔버렸다·
제 딴에는 이 기회를 이용해 나를 자신과 좀 튼튼하게 엮어보려고 한 모양인데 덕분에 이야기가 더욱 극적으로 변해 버렸다·
나는 한 번 더 당황한 척했다· 그러면서 남궁소소를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그러나 충분히 들릴만한 소리로 화를 냈다·
”내가 어째서 당신 벗이라는 거요?“
친구 사귀는 법을 모르는 혹은 친구 사귀는데 서툰 아들을 연기한 것이다·
허구헌날 기루나 노름방을 들락거리는 아들에게 모처럼 정상적인 인간이 벗이랍시고 찾아왔다·
아비로서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너는 가만히 있거라·“
“하지만 아버지····”
“함께 향시를 보았다고?”
“그렇습니다·”
“결과를 물어봐도 되겠나?”
“겨우 급제를 하였습니다·”
음? 이건 또 뭔 소리야?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여자는 과거를 볼 수 없으니 분명 가짜 신분을 만들어 향시를 보았을 것이다·
한데 덜커덩 급제를 해버렸다고? 대체 어쩌려고·
가만 그렇다면 내게 장원급제한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한 이유가 3년 후 다시 향시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달 후 있을 회시에 대비해서?
“젊은 유생이 대단하군·”
“부끄럽고 민망합니다· 장원급제를 한 정룡 공자 앞에서 고작 열 번째 줄에 이름을 올린 제가 어찌 칭찬을 받겠습니까· 거두어 주십시오·”
순간 나는 다시 한번 귀를 의심했다· 열 번째 줄이라면 무려 10등을 했다는 말인데 이거야말로 놀라 나자빠질 일이었다·
‘가만 이것까지 전부 거짓말?’
만약 거짓말이라면 이건 애교 수준으로 넘어갈 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내 아버지이자 표왕을 모욕하는 일이다· 그건 참을 수가 없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그때였다·
“방에 씌어있던 양주 출신의 풍진양이라는 유생이 알고 보니 정룡의 벗이었군요· 이런 반가울 때가 있나· 안 그렇습니까? 국주님· 껄껄껄·”
말을 한 사람은 총표두 곽석산이었다·
어린 시절 잠시 무공을 가르쳐 준 정으로 그는 이정룡을 무척 아꼈다·
지금도 멀쩡한 유생이 벗이랍시고 나를 찾아오니 이종산 못지 않게 기뻐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방에 풍진양이라는 이름까지 붙어 있었다는 걸 보면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놀랄 노자다· 나는 시제를 미리 알고 있는 상황에서 장원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순전히 실력으로 이뤄낸 성과였다·
그냥 아는 유생에서 벗으로 벗에서 다시 향시 10등 급제자로
밋밋한 사기 계획이 훨씬 극적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죽이 척척 맞을 수가·
‘가만!’
그런데 곽석산은 그걸 어떻게 아는 걸까? 지나가다 방을 한두 번 본 정도로는 열 번째 줄에 쓰인 급제자 이름까지 기억하진 못할 텐데·
‘설마 구석구석에 붙은 방을 돌아보고 오는 길? 대놓고 자랑할 데가 없어서 총표두와 호위무사들에게라도 자랑하려고?’
나는 가만히 이종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종산은 한층 자애로운 표정으로 남궁소소에게 말했다·
“향시에 열번 째로 급제를 한 것이 부끄럽다니· 예의도 지나치면 비례라고 했네·”
“송구하옵니다·”
“젊은 나이에 급제를 하였으니 부모님들께서 크게 기뻐하시겠군·”
“아직 뵙지를 못했습니다·”
“어찌하여?”
“한 달 후 북경에서 회시가 있기로 큰 서점들과 뛰어난 유생들이 많은 항주에서 당분간 고학하며 지낼까 합니다·”
“지낼 곳은 있고·”
“형님이 항주의 작은 다루(茶樓)에서 장궤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큰 불편함은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남궁세가에서 항주에 있는 송나라 시대의 작은 원림을 통째로 사다가 고급 다루를 열었다·
남궁소소의 오라비가 당분간 그곳에 와서 관리를 한다고 들었다·
말이 좋아 작은 원림이지 연못과 후원은 물론 별각까지 거느린 저택이다·
한데 장궤라니· 하는 일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심했다·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검술의 천재라는 오라비를·
“부모님께서는 무얼 하시는가?”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업을 꾸려가기 위해 열심히 자기개발 중에 있습니다·”
할아버지 남궁무룡의 뒤를 이어 남궁세가를 이끌어 가기 위해 열심히 무공을 수련하고 계시겄지·
거짓말을 하나도 안 하면서 참 잘도 빠져나간다·
이종산도 상대의 나이가 어리다 하여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남궁소소가 가업을 특정해서 언급하지 않자 무언가 사연이 있다고 여겼는지 더는 묻지 않았다·
“한데 여기서 무얼 하는 겐가?”
내가 끼어들 순간이다·
“빌린 서책을 돌려주러 왔다가 잠시 장원을 구경시켜 달라며 귀찮게 하기에 쫓아 보내려던 참이었습니다· 금방 갈 것이니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쯧쯧쯧· 못 난놈·”
이종산은 나를 무시하고 남궁소소에게 물었다·
“장원을 구경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천룡표국이 넓기는 하나 가업을 위한 실용적인 장원일세· 풍류와 옛 선비들의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원림(園林)으로 가야지· 항주에는 유명한 고대의 원림이 많다네· 원한다면 내가 한 곳 추천해 줄 수도 있고·”
“장원의 아름다움을 보려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표국엔 어떤 사람들이 살며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저 같은 유생 나부랭이에게 표국은 아주 생소한 곳이어서요·”
“생소한 곳은 다 구경을 하고 다니는가?”
“공자께서 이르시길 민초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공부이며 유학의 근본이라 했습니다· 예전엔 그 뜻을 잘 몰랐는데 장원급제를 한 정룡 공자를 보니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여····”
그러면서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잘한다· 더할나위 없다·
남궁소소를 바라보는 이종산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이 정도면 흔들 만큼 흔든 것 같았다·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야 한다·
그냥 장원 구경이 아니라 반드시 배표식 구경이라야 한다·
“글쎄 이 친구가 엉뚱하게도····”
그때였다· 하하호호 떠드는 소리와 함께 예닐곱 명의 젊은 사내들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이병룡과 며칠 전 객점에서 보았던 그의 친우들이었다· 하나같이 불콰하게 취한 얼굴들이었다·
‘하필 이 중요한 순간에!’
이종산을 발견한 이병룡과 후기지수들이 헐레벌떡 말에서 내려서는 달려왔다· 그러곤 앞다투어 포권지례를 올려댔다·
“국주님을 뵙습니다·”
“국주님을 뵙습니다·”
“어딜 갔다 오는 길이더냐?”
“친우들과 조촐하게 식사를 하고 오는 길입니다· 저 혼자 돌아가겠다고 하는데도 구태여 집 앞까지 바래다준다고 하여····”
궁색하기 짝이 없는 변명·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낮술을 푸다가 저녁이 되자 집에 가서 한 잔 더 하자면서 끌고 오는 길이 분명했다·
향시에 합격했다는 기쁨과 조영영을 잃은 것에 대한 슬픔으로 마음이 복잡하기도 할 것이다·
다른 때는 몰라도 지금은 솔직히 나도 이해할 것 같다·
“젊어서 기쁨을 함께 나눌 친구들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들어들 가서 여흥을 더 즐기도록 하여라·”
이병룡과 후기지수들은 한바탕 혼쭐이 날 줄 알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었다·
한데 이종산이 뜻밖의 호의를 베풀자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종산은 이어 남궁소소를 돌아보며 물었다·
“배표식이라는 걸 아는가?”
나왔다· 그것도 이종산의 입에서 먼저· 이런 맙소사·
남궁소소는 나를 한번 힐끗 보더니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녀도 당황한 것이다·
“실은 저 친구가 자꾸 배표식을 보고 싶다고 해서 제가 헛소리 말라고 외부인에게 배표식을 보여주는 일은 없다며 썩 꺼지라고 호통을 치던 중이었습니다·”
“한 번 보겠나?”
“···!”
“···!”
만세다· 더는 완벽할 수가 없다·
***
낮 동안 의뢰가 들어온 표물은 모두 열일곱 가지에 마차로는 서른여섯 대 분량이었다·
서로 좋은 표행을 하나라도 더 따내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하지만 표물들은 대부분 천룡표국을 대표하는 다섯 개 당에서 골고루 나눠 가졌다·
그중에서도 이갑룡과 이을룡이 각각 이끄는 강룡당과 복룡당에서 사실상 절반 이상을 가져갔다·
사람마다 손금처럼 들여다보는 길과 지역이 따로 있었다·
이런 식으로 각각의 지역에 빠꼼한 표두와 표사를 많이 거느린 곳이 아무래도 다섯 개의 당 중에서도 두 곳이기 때문이다·
빈익빈 부익부의 법칙은 세상 어디나 똑같다·
표국이라고 해서 꼭 물건을 호송해 달라는 의뢰만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먼 곳에 편지를 전달해 달라는 의뢰도 있고 돈을 전달해 달라는 의뢰도 있으며 사람을 호위해달라는 의뢰도 있다·
그런가 하면 무림인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장원이나 기루 점포 상회 등이 일정 기간 호위를 요청해 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자잘한 의뢰들은 대부분 십여 명 안팎의 표사들을 거느린 각(閣)에서 가져갔다·
이런 것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오당(吾堂)에서도 건드리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각들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정말 갖가지 의뢰가 있군요·”
“오늘은 갑작스러운 외부인들의 참관 때문에 공개할 수 있는 것들만 한 것이오· 저기 마차에 붉은 기가 꽂혀 있는 것들은 대장궤의 직권에 따라 비밀리에 당사자들에게 직접 분배가 될 것들이오·”
내가 말한 외부인이란 남궁소소와 후기지수들이었다·
동생과 그의 벗이 배표식을 참관한다는데 형이 돼가지고 술판이나 벌이고 있을 수 있나·
해서 졸지에 이병룡도 그의 친우들과 함께 배표식에 참관하게 됐다·
“뭐가 들었기에 그렇죠?”
“대개 전장에서 다른 도시의 분타로 보내는 은전이나 귀부인들의 장신구 벼슬아치들이 고관대작들에게 보내는 뇌물 등등· 산적이나 수적들에게 정보가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것들이오·”
초저녁부터 시작된 배표식은 삼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이제 어렵게 따낸 표물을 각자의 당과 각으로 가져간 다음 아침 일찍 포장하고 담당 장궤들에게 최종 승인을 받은 후 출발하면 된다·
본격적인 표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다들 수고 많았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종산이 한마디를 끝으로 일어났다·
대장궤를 비롯해 모든 당주와 각주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는 그 순간·
밖으로 막 나가려던 이종산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총표두 곽석산도 대장궤 손지백도 그리고 각 당의 당주와 각주들까지·
천룡각에 모인 서른여 명의 표두급 수뇌 전부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얼굴을 굳히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와 함께 앉아 있는 남궁소소를 비롯해 이병룡의 친우들까지도 고개를 갸우뚱 했다·
지난번 표왕부에서처럼 무언가 나는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엔 나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딸랑··· 딸랑···
작게 울리기 시작한 요령 소리·
딸랑··· 딸랑···
모두가 잠든 밤 표국에서 저런 요령 소리가 울리면 온 세상이 쩌정쩡 얼어붙는 것 같다·
여자들은 무서움에 이불을 파고들고 젊은 표사와 쟁자수들은 혹여라도 자신들이 호출될까 봐 숨을 죽인다·
웬만큼 강심장을 지닌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때만큼은 날이 밝을 때까지 바깥출입을 삼간다·
괜한 호기심에 밖으로 나갔다가 ‘그것’들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한 달 동안 꿈자리가 뒤숭숭하기 때문이다··
나는 30년 경력의 산전수전 다 겪은 쟁자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요령 소리만큼은 도저히 적응되질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내가 기다리던 바로 그 표물이 도착했다는 신호니까·
‘드디어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