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 무저갱(2) >
“마찬가지다·”
“무슨 뜻이오?”
“어느 쪽으로 가든 상관없단 말이지· 길이 잠시 갈라진 것일 뿐 삼십여 장만 더 나아가면 다시 만나니까· 그때까지 별일도 없고·”
“그럼 비밀이랄 것도 없잖소·”
“누가 뭐라고 했나·”
“광동칠살에게 두들겨 맞을 때는 왜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은 거요? 어느 쪽으로 갔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텐데·”
“시간을 끌다 죽는 게 우리의 임무였으니까·”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주는 건 바라지도 않겠다· 저기 석벽 위에 꽂혀 있는 요령이나 두 개만 가져다 다오·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호신용으로만 쓰겠다고 약속할 수 있소?”
“머리는 비상할지 모르나 인정에 약한 것이 큰일 할 그릇은 못 되는군· 사내라면 무릇 만 명을 베어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배포가 있어야 하거늘·”
“큰일 할 생각은 없소만·”
“잠시나마 목숨을 빚진 값으로 충고 하나 해주지·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 말고 네 수하들 생사나 걱정하는 게 좋을 거다· 후후·”
“가 표두!”
“하명 하십시오·”
“요령 하나만 가져다주세요·”
“존명!”
가불염은 순식간에 석벽을 타고 올라갔다가 벽에 박힌 요령을 뽑아 내게로 가져다주었다·
요령을 건네받은 나는 단단한 바위에다 대고 사정없이 내리쳤다·
따앙!
쇳소리가 사방에 울리더니 요령의 한쪽 끄트머리가 뚝 떨어져 나갔다·
남은 곳도 중심부를 향해 큰 금이 두어 개 정도 쩍 간 상태였다·
깨지고 금 간 요령을 술법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살살 치시오· 생각보다 쉽게 쪼개지는 것 같으니·”
“···!”
나는 표사들을 이끌고 오른쪽 협곡으로 뛰어 들어갔다·
삼십여 장을 달려나가자 술법사의 말처럼 정말 하나로 합쳐졌다·
그때부터는 돌멩이 깔린 지대가 끝나고 부드러운 땅이 시작되었다·
시야가 미치는 석벽은 이끼들로 가득했고 어디선가 가랑비처럼 떨어져 내린 물방울들이 바닥을 촉촉하게 적셨다·
물과 흙과 햇빛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식물은 기어이 뿌리를 내린다·
어느 순간부터 주변이 온통 딸기밭이었다·
아무리 작게 잡아도 이천칠백여 명의 사람들이 휩쓸고 지나간 바람에 중앙의 통로 쪽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그래도 햇빛이 비치는 왼쪽 가장자리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딸기들이 그렇게 먹음직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당군백이 달려가며 말했다·
“이걸 여기서 보다니·”
“뭔데 그러시오?”
“환몽지초(幻夢之草)라고 겉으로 보기엔 딸기 같지만 먹으면 온갖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마는····”
“카악 퉤! 퉤! 퉤!”
당군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다급히 침을 뱉어대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달리기를 뚝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당군백이 급히 호리독사에게 물었다·
“몇 개나 드셨어요?”
“다섯 개 먹었습니다·”
“그걸 왜!”
“맛만 본다는 것이 그만·”
“술을 마시고 토하길 세 번 정도 반복하세요·”
“물로 하면 안 됩니까?”
“물론 되죠·”
“다행이군요·”
“대신 종일 환청에 시달리겠지만·”
움찔 놀란 독사는 곧장 술을 벌컥벌컥 마신 후 스스로 혈도를 눌러 토악질을 했다·
다들 아침도 거르고 뛰어왔는데 혼자 뭘 그렇게 먹었는지 내용물이 한 바가지였다·
나는 표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아무거나 주워 먹지 않도록!”
“존명!”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환몽지초의 숫자도 늘어났다·
팔대금지 치고는 무언가 조금 심심하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갑자기 지독한 비린내와 함께 눈앞에 기괴한 광경이 펼쳐졌다·
수천 마리의 뱀들이 무언가에 짓이겨지고 찢기고 토막 난 채 죽어 있었다·
그 한 가운데서는 백여 명의 사람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죽으라고 운기행공을 하는 중이었다·
“뱀 반 사람 반이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모두 뱀에게 물린 것 같아요·”
호리독사 남궁소소 조영영이 차례로 한 말이었다·
한데 죽은 뱀들의 모양이 좀 이상했다·
하나같이 붉은 빛에 대가리에는 작은 돌기 같은 것이 삐죽 솟아 있었다·
당군백이 신음처럼 말했다·
“설마 독각사(獨角能)?”
“그건 또 뭐요?”
“환몽지초를 먹고 산다는 독사예요· 기괴한 생김새와 달리 독성은 일반 독사보다 조금 더 강한 수준이고요· 다만 번식력이 아주 뛰어나서 한 마리가 발견되면 주변이 온통 독각사의 소굴인 경우가 많아요·”
인세에 보기 드문 환몽지초와 수천 마리의 독각사는 결코 우연히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자연의 섭리를 이용해 반영구적으로 발동이 가능한 독진(毒陣)을 펼쳐 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백여 년 동안 인간의 접근을 막았던 환몽지초와 독각사의 독진도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다·
“저 사람들은 살 수 있겠소?”
“고수들은 내공으로 태우면 될 것이고 도저히 감당이 안 되겠다 싶은 사람들은 딸기처럼 생긴 환몽지초를 따다 먹으면 도움이 될 거예요·”
당군백은 중독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딸기처럼 생긴’이라고 말했다·
저들을 살리고 싶어 하는 내 의중을 간파한 것이다·
“아깐 독초라고 하더니·”
“원래 독과 약은 둘이 아니에요· 대신 물과 희석해서 아주 조금씩 시간을 두고 천천히 복용해야 해요· 운기행공도 쉬지 말고요·”
당군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여 명의 중독자들이 환몽지초를 찾아 사방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협곡 속을 달렸다·
수십 장의 간격으로 사람들에 의해 짓뭉개진 기화요초들이 나타났다·
그때마다 쓰러져 신음하는 사람들과 새까맣게 짓밟힌 독물들을 만났다·
날아다니는 독지네 비천오공 황소도 쓰러뜨린다는 독벌 금망대봉 사람의 얼굴을 닮은 독거미 인면지주까지·
소문으로만 듣던 이름들이 당군백의 입에서 흘러 나올 때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반면 당군백은 마치 귀한 장난감이라도 찾은 것처럼 살아 있는 것들을 암수 한 쌍씩 채집해 항상 갖고 다니는 작은 호리병들 속에 넣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사람들이 앞서 달려간 전방으로부터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천둥이 치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았으며 어떤 때는 우박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때마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협곡 전체에 울려 퍼졌다·
독물들이 출현했던 구역을 지나 수십여 장을 더 달리자 어른 머리통만한 크기의 날카롭게 쪼개진 돌덩어리들이 사방에 나뒹굴었다·
대략 십여 장 정도의 거리만 딱 그랬는데 얼마나 많은지 바닥의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돌덩어리 아래에는 오십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깔려 죽어 있었다·
이는 눈앞에 보이는 저 많은 돌덩어리들이 위에서 떨어졌음을 의미했다·
앞서 맨 처음 들렸던 천둥소리의 원인이었다·
“기관진식이에요·”
남궁소소가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좀처럼 나서지 않다가 상황이 심각해지자 저도 모르게 나선 모양이었다·
“기관진식에 대해서도 조예가 있으시오?”
“기문과 기관은 본래 한 계통이죠·”
“지금부터 내 옆에 있으시오·”
“알겠어요·”
기관진식의 함정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다만 모두가 파괴된 채로였다·
어떤 곳은 대여섯 장 깊이로 바닥이 쑥 꺼진 가운데 뾰족한 창이 빽빽하게 솟아 있었다·
어떤 곳에는 쇠못이 숭숭 박힌 통나무 수백 개가 허공에 매달려 있었고 어떤 곳에는 사방 벽에 만 발은 될 듯한 강철 화살이 박혀 있었다·
그런가 하면 매캐한 연기와 함께 기름불이 솟구치는 곳도 있었다·
화마는 우리가 도착했을 때조차 아직 꺼지지 않은 상태였다·
모든 난관마다 희생자가 속출했다·
앞서 독물이 출현하는 구간과 달리 이곳의 희생자들은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이미 피투성이가 되거나 불에 그을려 죽어 있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기관진식들이었다·
정말 놀라고 펄쩍 뛸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천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 많은 기관진식들을 통과했다는 사실이었다·
남궁소소가 말했다·
“독진도 그렇고 기관진도 그렇고· 이곳을 설계하고 설치한 전대의 진법가들도 삼천 명이 한꺼번에 밀고 들어오는 건 예상치 못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점점 조직화 되고 있소·”
“그건 어떻게 알죠?”
“아까부터 함정은 갈수록 위험해지는데 희생자들의 숫자는 반대로 점점 줄어들고 있소· 이는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을 찾아 보다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오·”
“무려 삼천여 명이 모였으니 군백처럼 독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도 적지 않을 거예요· 기관진식도 마찬가지고요·”
“내 뒤에 왔더라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비룡당의 표사들이 죽었겠죠·”
“이렇게까지 희생이 클 줄은 몰랐소·”
“이곳이 죽을 자리인 줄 모르고 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당주님께서는 다만 그들에게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기연과 보물을 얻을 기회를 제공해 주었을 뿐· 선택은 각자가 하는 거죠·”
남궁소소는 어떻게든 나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좀처럼 불편함이 가시지 않았다·
꼭 목에 커다란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그나저나 우리야 보물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니 저들과 딱히 싸울 일이 없겠지만 삼뇌와 천마성교의 잔당들은 죽을 맛이겠군요·”
“여길 좀 보십시오!”
남궁소소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하는 사이 화마를 피해 척후를 살피던 표사가 외쳤다·
황급히 달려가 보니 협곡의 방향이 꺾이며 갑자기 어두워졌다·
까마득히 보이는 위쪽의 석벽이 붙어 버리면서 햇빛이 가려진 탓이다·
이제부터는 사실상 커다란 동굴인 셈이었다·
그리고 동굴의 입구랄 수 있는 위치의 오른쪽 석벽에 음각으로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오독육관(五毒大關)을 뚫고 들어 온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겠다· 만족하고 돌아간다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주변엔 요강단지만한 항아리 십여 개가 몇 개는 깨지고 몇 개는 엎어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저만치 떨어진 구석에서 호리독사가 은전 하나를 주워들고 왔다·
“저 항아리마다 이게 들어 있었나 봅니다·”
항아리 하나마다 은전이 만 개는 들어갈 것 같았다·
열 개니 모두 십만 냥쯤 되는 거액이었다·
이곳까지 살아서 들어 온 이천여 명이 사이좋게 나누면 한 사람당 대략 오십 냥씩은 챙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들어온 값으로는 턱없이 작았다·
그래서인지 단 한 명도 돌아가는 사람 없이 모두 저 시커먼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럴 땐 사람 많은 게 오히려 불리하군요·”
“돈이 얼마가 됐어도 들어갔을걸요·”
“그럴까요?”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몰랐다면 모를까 분명히 알고 왔고 또 은전까지 본 이상 그냥 돌아가기는 쉽지 않았을 거예요· 결정적으로 두려움을 나눠 가질 동료들이 이천여 명이나 되고요·”
“듣고 보니 그렇군요·”
조영영과 남궁소소가 나눈 대화였다·
가불염이 말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묵룡당주님이 위험해집니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이쯤 되니 나도 살짝 겁이 났다·
내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나를 아들처럼 대해주는 이종산을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위험을 무릅 쓸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병룡 이 개자식을 구하기 위해 비룡당의 표사들 전부를 위험에 빠뜨리는 건 내키지 않았다·
모두가 나를 믿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기 위해 천룡표국을 찾아온 인재들이 아닌가·
“전원 여기서 대기하도록·”
“당주님!”
“지금부터는 나 혼자 들어가겠습니다·”
“그건 안 됩니다!”
“명령입니다·”
명령이라는 한 마디에 가불염은 합죽이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평소 내 말이라면 추호의 의심도 없이 따르던 습관이 오히려 지금은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당군백 조영영 등도 지금 와서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일이 납득시키고 있을 시간이 없다·
“지금부터 가불염 표두가 비룡당을 이끕니다·”
동굴 속으로 들어가자 바깥에선 들리지 않던 굉음들이 귓속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그건 꽝꽝 쳐대는 천둥번개와 폐부를 찌르는 악귀들의 울부짖음과 수천 명의 칼싸움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나는 듯한 소리였다·
단지 소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천둥번개가 꽝꽝 치고 있었다·
섬광이 번쩍일 때마다 언뜻언뜻 보이는 풍경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거대한 지하 공동 전역에서 온갖 종류의 듣도보도 못한 악귀 수천 마리가 갖가지 모양의 병장기를 뽑아 들고는 서로를 향해 죽일 듯이 덤벼들고 있었다·
그 와중에 사방팔방의 땅밑에서는 시뻘건 화염이 솟구쳐 악귀들을 화덕 속의 통닭처럼 구워대고 있었다·
그때마다 악귀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지옥도!’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그림일 것이다·
상상도 못 했던 광경에 나는 그만 오금이 저렸다·
저 많은 악귀들은 대체 어디에서 튀어 나왔으며 앞서 뛰어 들어간 사람들은 또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한 걸음을 옮기고 두 걸음째 옮기려는 순간 무형의 기운이 내 몸을 관통하는 게 느껴졌다·
이어 하단전에서부터 오장육부를 태워버릴 것 같은 열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한동안 잠잠하던 부적이 깨어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입고 있던 옷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허공으로 넘실거렸고 두 눈은 갑자기 밝아져 어둠 속에서도 삼 장 밖에 있는 개미를 볼 수 있을 지경이 되었다·
더불어 몸 전체가 주체할 수 없는 활력으로 가득 찼다·
손을 뻗으면 뻗는 대로 검을 휘두르면 휘두르는 대로 모든 걸 부수고 갈라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런 적은 없었는데!’
잠시 후 부적의 열기가 사그라지면서 옷자락도 사그라들었다·
동시에 눈을 미혹하던 모든 것들 또한 시야에서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난 광경은 더욱 놀라웠다·
석벽마다 기기묘묘한 부적들이 끝도 없이 새겨져 있고 가장자리를 따라 돌탑 수백 개가 쌓여 있는 거대한 지하 공동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에서 이천여 명에 달하는 사파와 흑도인들이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서로 싸우고 있었다·
흑교방 야월방 우도방 잔월방 비응방 벽수채 용수채 등의 흑도들도 마찬가지였다·
혼전 중에 피아를 식별하기 위해 둘렀다는 형형색색의 두건이 무색하게 그들은 같은 방파의 방도들끼리도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아마 서로를 악귀로 인식하고 저렇게 죽을 때까지 싸우도록 설계된 기문진인 것 같았다·
한데 그 아수라장 속에서 나에게만 유일하게 기문진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서둘러 주변을 돌아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어른 상체만한 바윗덩어리가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런 무모한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른다·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했다·
마치 몸 안의 공력이 일시적으로 증폭된 것 같은 기분·
쿵쿵 달려가 바윗덩어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이어 공동의 석벽 한가운데 있는 병풍만한 부적을 향해 모든 공력을 끌어 올려 냅다 던졌다·
꽈앙!
바위가 터지고 석벽의 일부가 떨어져 내리면서 부적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동그스름한 바위를 들어다 가장자리를 따라 늘어선 돌탑들을 향해 굴리듯 던졌다·
쿵! 쿠구구궁! 쿵! 쿵! 쿵!
사람 키 높이의 돌탑 십여 개가 와르르 무너졌다·
동시에 죽일 듯이 싸우던 이천여 명의 사람들도 화들짝 놀라서는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기문진이 깨져 버린 것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때 저만치에서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주저앉아 헉헉거리는 천면신투가 보였다·
누구의 칼에 당했는지 가슴 쪽 옷자락이 길게 잘려나간 상태였다·
피도 제법 흘렀다·
뒤쪽에는 그의 것으로 짐작되는 작은 행낭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채가기 전에 얼른 다가가 주워서는 구석진 곳으로 갔다·
서둘러 행낭을 열어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각종 도구들이 나왔다·
그중에 인피면구가 한 장 있었다·
재빨리 뒤집어쓰고 이목구비를 대충 맞추었다·
그런 다음엔 머리카락 묶은 끈을 잘라 산발로 만들어 부족한 정교함을 감추었다·
마지막으로 저만치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옷을 바꿔 입었다·
잠깐 사이에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다·
이어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숨을 고르고 부상을 치료하는 틈을 타 더 깊은 동굴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한 무리의 무인들이 횃불 수십 개를 밝힌 채 마차 두 대가 지나갈 정도로 좁아진 길목을 지키고 서 있었다·
숫자는 백여 명 삼뇌의 탁월한 영도력 아래 모든 관문을 무사히 통과한 천마성교의 잔당들이었다·
그러나 아주 날로 통과한 것은 아닌지 다들 여기저기 옷자락이 찢어진 데다 지치고 피곤한 기색들이 역력했다·
“놈들이 온다!”
채채채채채챙!
뒤늦게 내 기척을 느낀 놈들이 일제히 도검을 뽑아 들며 살기를 끌어 올렸다·
동시에 횃불 십여 개를 일 장 간격으로 툭툭 던져 놓았다·
그러자 십여 장의 공간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한 명?”
어둠 속에서 나타난 나를 발견하고 누군가 목구멍을 쥐어짰다·
고수들이 한바탕 몰려오는 줄 알았다가 살짝 실망한 모양이었다·
내가 말했다·
“비켜!”
“이런 미친!”
뻥! 뻐버벙! 뻥! 뻥!
단지 좌장과 우장을 번갈아 난사했을 뿐이다·
한데 선두에서 칼을 휘둘러 오던 여섯 명이 전권 속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뻥뻥 나가떨어졌다·
벽공장력 (擊空掌刀)!
말 그대로 허공을 쳐서 멀리 떨어진 상대에게 강력한 타격을 주는 수법이었다·
최소 삼갑자 이상의 내공이 있어야만 가능한 최상승의 경지·
장법을 펼친 나도 당한 놈들도 한순간 깜짝 놀랐다·
“모두 쳐라!”
백여 명의 마교도들이 좁은 동굴을 가득 메우며 돌진해왔다·
허공을 휘젓는 시퍼런 칼날이 마치 칼의 그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답답하도록 느려 터졌다·
나는 빗살처럼 놈들 사이를 옮겨가며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어깨로 팔꿈치로 전신을 난타했다·
퍽! 뻐벙! 퍽! 퍽! 퍽!
그때마다 놈들은 물소 대가리에 받친 것처럼 뻥뻥 나가떨어졌다·
불과 며칠 전 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분명 피 냄새 철철 흐르는 일류 고수들이었다·
한데 지금은 손가락으로도 눌러 죽일 수 있을 미물처럼 느껴졌다·
이백 년 전 하늘아래 더는 적수가 없어 마교를 일통하고 홀로 천하를 오시했다는 천마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