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 다시는 표사들을 무시하지 마라(3) >
횡액을 피한 사람은 궁장여인을 비롯해 고작 다섯 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쓰러진 사람들에게 달라붙어 부상 정도를 살피기 바빴다·
그 모습을 보고 이병룡은 이제야 조금 속이 풀리는지 처지도 잊은 채 죽겠다며 웃어 젖혔다·
조영영이 내게 물었다·
“화맥석이 뭐예요?”
“불에 달귀지면 폭발하는 돌이오·”
“그런 돌도 있어요?”
“폭발하는 강도가 달라서 그렇지 생각보다 많은 돌이 열을 받으면 폭발하오· 그중에서 화맥석은 적은 화력에도 불구하고 가장 빨리 그리고 크게 폭발하는 돌이고·”
조영영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그런데 이래도 괜찮을까요?”
“당연히 안되지·”
그때 나를 마차 안에 처넣었던 야차가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머리들 집어넣어!”
우리 세 사람이 머리를 쏙 집어넣자 야차가 쇠창살 문을 닫고는 자물통을 찾아 잠그려고 했다·
순간 나는 오른발에 육성의 공력을 담아 쇠창살 문을 박찼다·
콰창!
뻐억!
굉음과 함께 쇠창살 문이 터지듯 열렸다·
동시에 자물통을 잠그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야차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천하의 그 어떤 고수도 쇠몽둥이에 머리통을 맞고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야차는 조금 달랐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지 휘청거리며 뒷걸음질을 치긴 했어도 쓰러지진 않았다·
항주의 망향가동에서 만났던 벽안귀랑 붙여 놓으면 막상막하일 것 같았다·
그래도 시간을 벌기에는 충분했다·
“잠시 후 다시 봅시다!”
나는 황당해 하는 조영영과 이병룡에게 말을 해놓고 마차에서 뛰어내려서는 산 아래쪽을 향해 냅다 달렸다·
“한 놈이 도망친다·!”
“내가 맡겠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궁장여인이 울퉁불퉁한 숲길을 경공술을 펼치며 그야말로 나는 듯 달려오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백 년 공력의 바탕 위에 도화곡에서 배운 천금풍의 경공술을 신나게 펼쳤다·
한참을 달리던 중 불안한 마음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한데 지금쯤이면 엉덩이까지 따라붙었어야 할 궁장여인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무심코 앞을 앞을 돌아보는데 놀랍게도 대여섯 장 앞에서 궁장여인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헛!”
대경실색한 나는 귀영무의 보법을 펼치며 벼락처럼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동시에 진각을 밟으며 마치 시위 떠난 화살처럼 신형을 쏘았다·
무림인들은 이를 통칭 궁신탄영(弓身彈影)의 수법이라고 한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나 싶었는데 또다시 앞을 막아선 궁장여인과 맞닥뜨려야 했다·
“제기랄!”
이번엔 왼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귀영무의 보법이 워낙 신출귀몰해서 아직까진 궁장여인을 따돌렸다는 점이다·
나는 또다시 죽으라고 경공술을 펼쳤다·
“경신공의 이름이 뭐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옆을 힐끗 돌아보니 궁장여인이 왼쪽으로 대여섯 장 떨어진 곳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달리고 있었다·
내게 시선을 딱 고정해 놓은 채 앞을 보지도 않는데 나무며 바위 등을 귀신처럼 피하고 밟으면서 달리는 중이었다·
“이런 미친!”
“양손을 뒤로 묶이고도 어떻게 그처럼 빨리 달릴 수가 있지? 갑자기 방향을 꺾는 것도 경신공의 묘리인가? 아니면 보법?”
표범은 달릴 때 기다란 꼬리를 움직여 중심을 잡는다·
꼬리가 없는 사람은 두 팔을 사용한다·
두 팔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한데 나는 지금 나는 두 팔을 뒤로 한 채 쇠사슬에 묶인 상태였다·
때문에 백 년 공력에다 천금풍의 경공술이 제아무리 무림일절이라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본 실력의 오 할도 채 펼치지 못했다·
“대답하지 않을 거면 지금 잡고·”
“경신공과 보법을 번갈아 펼치는 중이오·”
“경신공의 이름은?”
“천금풍!”
“천금풍?”
“도화곡이라는 신비 문파의 절학이오· 나는 도화곡의 첫 번째 속가제자이고·· 나를 죽이면 천룡표국 뿐만 아니라 도화곡으로부터도 추적을 받게 된다는 뜻이지·”
“천금풍이라 멋진 이름이군·”
“귀하가 펼치는 경신공은?”
“우리의 정체를 알고 싶어?”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
“소용없는 짓이야·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유령들이거든· 우리가 익힌 무공 또한 이승의 것이 아니고·”
“유령이 왜 대낮에 돌아다니는 지 모르겠군·”
“이제 그만하고 돌아가야겠어·”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텅!
나는 짧게 도약한 다음 정면에 버티고 선 아름드리 고목을 두 발로 힘차게 찍으며 다시 한번 벼락처럼 방향을 틀었다·
동시에 사력을 다해 신형을 쏘았다·
힐끗 돌아보니 잠깐 사이 궁장여인과의 거리가 십여 장이나 벌어진 상태였다·
순간 그녀가 좌수를 뿌리듯 힘차게 펼쳤다·
‘암기!’
진작부터 이능력을 발동하고 있던 나는 그녀의 소맷자락 속에서 번쩍이는 은침 세 개가 쏘아져 나오는 걸 똑똑히 보았다·
절체절명의 순간 나는 은침 하나를 귓불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흘려보내는 데 성공했다·
비켜나간 은침은 수풀을 지나 앞쪽에 있던 도토리나무에 ‘툭!’ 하고 박혔다·
하지만 앞에 하나를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머지 두 개가 내 뒷덜미에 정확히 꽂혔다·
“억!”
뜨끔해지는 느낌과 함께 사지가 마비되었다·
무얼 어찌해볼 틈도 없었다·
달려가는 속도 그대로 엎어진 나는 배를 땅바닥에 갈면서 한참을 미끄러져 가다가 도토리나무에 머리를 ‘쿵!’ 박고서야 멈춰 섰다·
‘역시 이 여자였군!’
이병룡과 조영영을 사로잡은 정체불명의 고수 만금전장에 들어서는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나를 쓰러뜨린 점혈법의 달인이 바로 저 여자였던 것이다·
잠시 후 궁장여인이 내 옆으로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이어 목덜미에 박힌 은침 두 개만 뽑아 회수했다·
은침을 뽑혔어도 마비는 풀릴 기미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평범한 점혈법도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멋진 승부였소·”
“이런 것도 승부인가?”
“인생은 매 순간이 무언가와의 승부요·”
궁장여인은 엎어진 내 배 아래로 발등을 집어넣더니 호떡 뒤집듯 홱 뒤집었다·
이어 희고 고운 손으로 배꼽 아래에 묶여 있는 쇠사슬을 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그 상태에서 나를 무슨 짐짝처럼 들고는 다시 경공을 펼쳐 달려가기 시작했다·
백이십 근에 육박하는 짐짝을 들고도 그녀는 여전히 바람처럼 표표했다·
하지만 하늘을 향해 누운 채 끌려가는 아니 들려가는 나는 상체와 하체의 무게로 말미암아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반대로 뒤집어 들어 주시오· 허리가 아파 죽을 것 같소·”
“그러면 몸이 반으로 접히면서 내가 불편하지·”
“그럼 빨리라도 가 주시오!”
“그런 속 편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닐 텐데· 내 생각엔 아무래도 야차곤(夜文提)이 당신을 그냥 두지 않을 것 같거든·”
그 덩치의 별호가 야차곤이었나 보다·
곤(植) 자가 붙은 건 아무래도 어깨에 메고 다니는 대초자곤 때문일 것이고·
어쩐지 야차라 부르고 싶더라니·
하지만 나는 누구처럼 그 괴수같은 놈에게 두들겨 맞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잠시 후 궁장여인과 나는 본래의 장소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어느새 모두 정신을 차린 상태였고 이병룡과 조영영은 마차 안 쇠창살에 갇혀서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바깥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꼴사나운 모습으로 잡혀 오는 걸 보고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친 곳은?”
“폭압 때문에 다들 잠깐 정신이 나가긴 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너는?”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코피를 흘렸던 것 같은데·”
“못난 꼴을 보였습니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이었음을 안다·”
“죄송합니다·”
궁장여인이 눈 위의 칼자국과 나눈 대화였다·
쿵!
그녀가 뒤늦게 나를 바닥에 던져 놓았다·
저만치에서 성난 야차곤이 나를 발견하고는 콧김을 펑펑 뿜어대며 달려왔다·
쇠창살에 맞은 이마가 주먹만 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복수심에 눈이 먼 야차곤이 나를 냅다 걷어차려는 찰나· 나는 궁장여인을 향해 회심의 일갈을 내질렀다·
“남곤산(南昆山)까지 10일 안에 데려다주겠소!”
퍽! 퍽! 퍽! 퍽! 퍽!
모든 게 항상 생각했던 대로 풀리는 건 아니다·
야차곤은 나를 일각이 넘도록 두들겨 팬 후에야 비로소 속이 좀 풀리는지 ‘후우’ 하고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그나마도 궁장여인 때문이었다·
그녀가 멈추라고 하지 않았으면 종일도 패고 앉았을 놈이었다·
나는 그제야 벌레처럼 웅크렸던 몸을 폈다·
온몸의 삭신이 쑤셔왔다·
그나마 백 년 공력을 끌어올려 호신강기를 펼쳤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지금쯤 뼈가 열 군데는 부러졌을 것이다·
궁장여인이 다가와 말했다·
“우리가 남곤산으로 가는 건 어떻게 알았지?”
“항주에서 남만으로 가는 관도(官道-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관에서 관리하는 주요 도로)는 대부분 남곤산을 지나지· 표국으로 위장 했다는 건 관도를 타겠다는 뜻 아니었소?”
“우리가 가진 지도에는 항주에서 남곤산까지 최소 20일이 걸린다고 적혀 있다· 이틀이 지났다고 해도 아직 18일이나 남았는데 어떻게 10일 만에 도착할 수 있다는 거지?”
“그건 당신들이 나를 두들겨 패지 않았을 때나 나눌 이야기고 이제는 물 건너갔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좋소·”
“식사는 하루 세 번 볼 일은 원할 때마다 볼 수 있게 해주고 널빤지는 물론 쇠창살에서도 꺼내 주도록 하지·”
“사람을 이렇게 두들겨 패놓고 계산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식사 볼일 쇠창살 모두 받고 두 당 말 한 필씩 내어 주시오· 그리고 저 거인 원숭이랑 정정당당히 한판 붙게도 해주고·”
딱히 누구를 가리키지도 않았다·
한데도 궁장여인을 비롯해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야차곤에게로 향했다·
거인 원숭이라는 말에 물을 마시며 갈증을 달래고 있던 야차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거인 원숭이라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야차곤에게 도전한 내가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이다·
궁장여인이 다시 내게 물었다·
“정정당당한 싸움이 아니어서 야차곤에게 맞은 것 같아?”
“승부를 보려는 게 아니오· 사람을 통나무처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어 놓고 두들겨 패는 당신들에게 무인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려는 것일 뿐·”
내가 무도(武道)를 논하자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모양이었다·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몰라도 최소한 여자를 사고파는 흑도들처럼 생으로 무도(無道)한 무리는 아니었다·
어딘지 기품이 느껴지는 궁장여인의 언행도 그렇고 엄격한 상하 간의 규율도 그렇고 아무리 보아도 꽤 족보 있는 세력의 후예들인 것 같았다·
“한데 그렇게 맞고도 싸울 수 있나?”
“기회만 주시오·”
“좋아· 야차곤이 이십 초식을 펼칠 때까지도 서 있다면 원하는 걸 모두 들어주지· 대신 쓰러진다면 당신은 남곤산까지 가는 동안 나의 충견이 되어야 할 거야·”
“이미 끝난 계산에 자꾸 뭘 붙이시네· 그럼 나도 하나를 더 얹어야 저울이 맞지· 만약 내가 거인 원숭이를 쓰러뜨리면 귀하의 이름을 가르쳐 주시오·”
“···!”
“그리고 가는 동안 거인 원숭이를 나의 충직한 하인으로 부리겠소· 그 정도는 되어야 서로 계산이 맞지 않겠소? 께름칙하다면 없던 걸로 하고·”
“하겠습니다!”
갑자기 끼어든 자는 야차곤 본인이었다·
자신을 계속해서 거인 원숭이라 부르고 무시하는 내 말에 약이 바짝 오른 것이다·
궁장여인과 눈이 마주치자 야차곤은 다시 한번 자신 있게 그러나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하게 해주십시오!”
궁장여인은 잠시 야차곤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천천히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야·”
“덩치 크다고 소가 왕 노릇 하지 않는 법이오·”
“두고 보면 알겠지·”
칠척장신에 울퉁불퉁한 근육 얼굴의 절반을 뒤덮은 철사 수염 노란 동공에 커다랗게 부릅뜬 눈·
야차곤은 단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로 하여금 주눅 들게 하는 흉성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인 원숭이라는 한마디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 오를 만큼 순진했다·
결정적으로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오만함도 있었다·
누군가 내게 검을 휙 던졌다·
공중에서 낚아채고 보니 다선초당에서 남궁세옥에게 빌렸던 바로 그 검이었다·
내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아예 갖고 왔나 보다·
철거렁~ 철거렁·
야차곤이 등에 메고 있던 장초자곤을 풀었다·
머리통을 박살 내주마!”
저 묵직한 것이 머리통에 떨어질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오금이 저렸다·
싸움의 첫 번째는 상대의 유리함은 빼앗고 나의 유리함은 앞세우는 것이다·
툭!
나는 들고 있던 장검을 던져 버렸다·
“원숭이 한 마리 상대하는데 무슨 검씩이나·”
“뭐?”
“갈등할 필요 없소· 장초자곤이 당신의 성명병기인 줄 알고 있으니 부끄러워 말고 마음껏 휘둘러 보시오· 난 적수공권으로 상대할테니·”
“후후 검법보다는 권법이 그나마 조금 더 나은 모양이지? 오냐 나도 맨손으로 상대해주마· 어디 덤벼 보····”
뻐억!
발끝에 무려 구 성의 공력을 모아 놓고 있던 나는 야차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귀영무의 보법을 펼쳤다·
이어 왼 주먹으로 콩팥이 있는 오른쪽 옆구리를 힘차게 가격했다·
거의 동시에 상체를 비틀며 오른 주먹을 비정상적인 각도로 뻗어 올려 놈 턱주가리를 후려쳤다·
뻐억!
주먹 끝에 욱씬하게 느껴지는 타격감이 턱뼈를 제대로 가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숨돌릴 틈도 없이 오른 주먹을 그대로 잡아당기며 놈의 명치에 팔꿈치를 내리꽂았다·
뻐억!
이어 앞으로 질풍처럼 솟구치고 회전하며 야차곤의 왼쪽 귓방망이를 우장(右掌) 즉 오른쪽 손바닥으로 올려붙였다·
뻐엉!
‘철썩!’이 아니라 ‘뻐엉!’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나는 것은 장이 부딪히는 순간 손바닥을 살짝 오므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풍압이 귀를 파고들어 고막을 때린다·
야차곤은 귓속에서 흡사 천둥이 친 것과도 같은 충격을 느꼈을 것이다·
이 수법이 무서운 이유는 고막이 터지면서 뇌에도 막대한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콩팥에 턱에 명치를 가격당한 것으로 모자라 고막까지 터져버린 야차곤은 눈을 허옇게 뒤집어 뜬 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그때까지도 놈의 손에는 장초자곤이 들려 있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보니 미쳐 버릴 틈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의 일방적인 구타가 시작되었다·
뻐버버버버버버벅!
뻑! 뻑! 뻑!
어느 순간 눈 위의 칼자국이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그는 체공 상태에서 두 발을 번갈아 내뻗으며 내 주먹을 받아내고 밀어냈다·
놈의 발바닥을 통해 전해오는 반탄력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무려 다섯 걸음이나 물러난 끝에 멈춰 설 수 있었다·
채앵!
일 장 앞으로 떨어져 내린 그가 돌연 검을 뽑았다·
“멈춰!”
궁장여인의 일갈이었다·
검은 정확히 내 목으로부터 오른쪽으로 팔 하나의 거리에서 뚝 멈추었다·
“나를 욕보일 셈이냐!”
“죄송합니다!”
그때였다·
털썩!
묵직한 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야차곤이 장초자곤을 쥔 채 대(大) 자로 쓰러져 있었다·
나는 손을 탈탈 털며 말했다·
“별것도 아닌 게 죽으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나도 속으로 깜짝 놀랐다·
앞서 흠씬 두들겨 맞는 바람에 나야말로 약이 바짝 올라 죽을힘을 다하긴 했지만 이렇게 손발이 빠르게 움직여 줄 줄이야·
한편 궁장여인과 눈 위의 칼자국을 비롯한 사람들은 모두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야차곤이 쓰러졌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궁장여인에게 당당하게 물었다·
“그래서 귀하의 존성대명은?”
“···!”
“이제 와서 딴말할 사람으로 보진 않았소만·”
“연···소교·”
“연소교라 예쁜 이름이군· 난 이정룡이라고 하오· 만나서 반갑소·”
소교(小橋)는 작고 예쁜 딸을 말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도 무림인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귀한 딸이었던 것이다·
나는 쓰러진 야차곤에게 다가가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말라깽이 장년인이 황급히 내게로 신형을 쏘았다·
그러자눈 위의 칼자국이 나지막하게 일갈했다·
“내버려 둬!”
열쇠를 찾은 다음 마차의 쇠창살 우리로 다가가 자물통을 열기 시작했다·
쿵광대는 소리만 들었지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던 조영영과 이병룡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들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네가 이겼어? 설마 그 짐승을?”
“빨리 나오기나 하세요·”
말과 함께 쇠창살 문을 확 열어젖혔다·
조영영과 이병룡은 처음엔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걸어 나왔다·
그러다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자 그제야 행동에 조금 자신감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쇠창살이 실려 있는 마차를 통째로 발로 차서 개울가에 처박아 버렸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을 묶은 쇠사슬 중 양손과 허리를 연결한 부위를 풀려고 했다·
“무슨 짓이냐?”
말라깽이가 버럭 외쳤다·
“양손을 뒤로해서 말을 탈 순 없소· 설마 이런 사소한 것까지 약속에 없던 거라며 시비를 걸 생각이오?”
말라깽이가 눈 위의 칼자국을 보았고 눈 위의 칼자국이 내버려 두라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두 사람의 쇠사슬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비록 양손은 수갑으로 묶였을지언정 허리로부터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제 뒤로 돌려진 양손을 아래로 해서 타고 넘으면 자연스럽게 앞쪽으로 오게 되고 움직임도 한층 자유로워 질 것이다·
나는 이어 결투를 하기 전 저만치 풀어 놓은 내 수갑도 주워다가 스스로 철컹철컹 채웠다·
타고 갈 말을 달라고 했지 완전한 자유를 달라고 하진 않았으니 나도 수갑은 차는 게 맞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차를 끌던 말 한 마리에 훌쩍 올라타서는 고삐를 잡아채며 말했다·
“오늘 저녁은 저기 보이는 능선에서 먹을 거요· 다들 서두르시오· 이랴!”
말이 경쾌하게 걸음을 옮겼다·
힐끗 스치며 본 사람들은 어처구니없음에 말릴 생각도 못 하고 하나같이 넋 나간 표정들만 짓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나아갔다·
적당히 멀어졌다고 생각되었을 때 왼쪽 팔뚝을 꾹꾹 눌러 살 속에 박혀 있던 바늘을 뽑았다·
아까 도망칠 때 궁장여인 연소교가 쏜 암기 세 개 중 하나를 가까스로 빗나가게 만든 다음 몰래 회수한 것이었다·
상황이 다급한데다 연소교가 워낙 빨리 도착하는 바람에 제대로 숨길 사이도 없이 일단 팔뚝에 쑤셔 넣고 보았다·
아파 죽는 줄 알았다·
‘암기 하나 얻기 더럽게 힘드네·’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바늘을 소맷자락 속 삼중으로 덧댄 천에 조심스럽게 끼워 놓았다·
본래는 비격쌍뇌창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만든 곳이었다·
고생은 했지만 마치 창 한 자루를 손에 넣은 것처럼 든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