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 소나기는 종일 내리지 않는다(7) >
만금전장은 경향대운하를 연한 항주의 북쪽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다·
말이 좋아 항주의 외곽이지 실제로는 백 리가 넘는 길이었다·
백 년 공력이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그곳까지 경공을 펼쳐 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대신 도착하면 진이 빠져서 한동안은 다리가 후들거릴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관제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선초당이 있었다·
삼경을 훨씬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다선초당엔 불이 환하게 켜진 상태였다·
이맘때면 휘영청 보름달이 든 밤마다 선등을 잔뜩 내걸고 유람을 나온 배들로 서호가 가득 찬다·
한데 재밌게도 호숫가에서 선등을 내건 수백 척의 배들을 바라보는 풍경 또한 일품이라 새벽이 깊어 가도록 다원을 찾는 손님들이 제법 있었다·
남궁세옥이 깜짝 놀라며 나를 맞았다·
“정룡?”
때마침 사이좋은 자매들처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세 명의 아리따운 여자들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은인을 뵙습니다·”
“선배님!”
남궁소소 매소옥 당군백이 차례로 말했다·
당군백은 원래 항주에 분타를 세우기 위해 의원들과 무사들을 잔뜩 데리고 왔다·
한데 남궁소소가 용봉지회의 아끼는 후배를 여곽에서 재울 수 없다며 한사코 다선초당에 머물게 했다·
덕분에 당군백은 물론 당문의 무사들과 의원들까지 전부 한 달째 다선초당에 머무르는 중이라고 들었다·
“놀라지들 마십시오· 잠깐 어디를 좀 가야 하는데 쓸만한 말이 있으면 한 마리 얻어 탈까 해서 들렀습니다·”
“혹시 병룡의 일 때문인가?”
남궁세옥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다른 도울 일은?”
“천룡표국으로 사람을 보내 왕대표와 왕중표로 하여금 여정을 꾸린 채 다선초당으로 와서 대기하라고 좀 전해 주십시오· 삼각을 제외한 비룡당의 표사들을 전부 이끌고요·”
“알았네·”
“번견도 몇 마리 끌고 오라고 하시고요· 무엇보다 호리독사를 꼭 찾아서 데려오라고 전해 주십시오·”
“알았네·”
“그리고 또····”
“말만 빌리러 온 게 아니었군·”
“갑자기 죄송합니다·”
“무슨 섭섭한 말을· 뭐든 말해보게·”
“검 한 자루만 빌려주십시오·”
다선초당에서의 볼일을 끝낸 나는 곧장 만금전장까지 말을 달렸다·
마침내 도착했을 때는 새벽이 깊다 못해 머지않아 동이 터 오를 것 같았다·
사실은 지금은 하루 중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때문에 살수나 표물을 노리는 비적들은 이때를 손꼽아 기다린다·
대륙의 스물아홉 개 도시에 분타를 거느린 대형 전장답지 않게 만금전장은 작고 소박했다·
이는 전장업의 특성상 표국이나 상단처럼 많은 인원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전해 듣기로 만금전장 항주 본장의 가솔은 행수와 호원무사들을 비롯해 하인들까지 전부 합쳐야 겨우 백 명을 넘긴다고 했다·
대신 분타로 파견된 인원들을 전부 합치면 엄청나게 늘어난다·
남의 집을 방문하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었다·
심지어 대문엔 노장주의 병환으로 당분간 손님을 맞지 않으니 전장 업무를 볼 사람은 항주 시내의 분점을 이용하라는 안내문까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외손이 실종된 지금 만금전장의 사람들도 전부가 한가하게 잠들진 않았을 것이다·
쾅! 쾅! 쾅! 쾅!
몇 번 문을 두들기고 기다리자 잠시 후 대문이 열리며 대여섯 명의 호원무사들이 횃불을 밝힌 채 나타났다·
“누구시오?”
한 사람이 물었다·
검을 가슴에 품고 팔짱을 낀 사내였다·
왼쪽 눈 위를 사정없이 가로지르는 칼자국이 유난히 섬뜩했다·
눈동자도 상처를 입은 것 같은데 안대를 쓰지 않은 걸 보면 시력이 완전히 나간 건 아닌 모양이었다·
“천룡표국의 이정룡이오·”
신분을 밝히자 사내가 움찔 놀랐다·
시건방지게 끼고 있던 팔짱도 슬그머니 풀더니 느릿느릿할망정 포권지례도 올려왔다·
“사공자님을 뵙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실례가 많소이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어서 말이오·”
“별말씀을요· 한데 혼자 오셨습니까?”
말을 하면서 사내가 내 뒤쪽을 살폈다·
“그렇소·”
“이 새벽에 호위무사도 없이 어찌···?”
“귀하에게 용건을 말해야 통과하는 것이오?”
“그럴 리가요· 어서 드시지요·”
사내가 앞장서며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호원무사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 쾅 하고 대문이 닫혔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휙 하고 한줄기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
동시에 호원무사들이 들고 있던 횃불이 전부 꺼져 버렸다·
무언가 잘 못 되었음을 깨달은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쓰캉!
검을 채 절반도 뽑기 전에 목덜미 세 곳에서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정신이 좀 드세요?”
“소저!”
깜짝 놀란 나는 바닥을 짚고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한데 철거렁 소리와 함께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손을 뒤로 한 채 굵은 쇠사슬에 허리가 친친 묶여 있었다·
발만 이용해 일어나 앉아 주변을 살폈다·
“여긴 어디요?”
“마차 안이에요·”
그녀의 말처럼 덜컹덜컹 어디론가 가고 있는 마차 안이었다·
굵은 쇠창살로 만든 우리의 바깥에 판자를 덧대 실체를 감춘 마차 안에는 나 말고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
한 명은 조영영이었고 한 명은 누가 밟아대기라도 했는지 얼굴이 온통 시퍼렇게 멍들고 부풀어 올라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는 괴인이었다·
괴인은 백의 경장에 소매 없는 노루털가죽 저고리를 입고 있었는데 이는 사냥꾼들이 흔히 하는 복장이었다·
조영영과 괴인도 양손을 뒤로한 채 쇠사슬에 묶인 상태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요?”
“실종된 병룡 공자에 대해 무언가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해서 만금전장을 찾았는데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그만 훈혈(暈穴)에 침을 맞고 혼절했어요· 그리고 깨어보니 이러고 있더군요· 한나절이 지나고 난 후에는 당주님께서 똑같은 모습으로 들어오셨고요·”
“우리를 납치한 자들의 정체는 아시오?”
“몰라요·”
“얼굴은 본 적은?”
“없어요·”
“혹시 만금전장에서 소저를 맞이해준 호원무사도 왼쪽 눈 위에 칼자국이 있었소?”
“당주님도요?”
아무래도 만금전장에 큰 변고가 있는 것 같다·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장원 전체가 정체불명의 세력에게 장악 당한 것이다·
대체 얼마나 거대한 세력이라야 감히 천룡표국의 삼공자와 사공자를 납치하고도 모자라 만금전장을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장악할 수 있는 걸까?
우선은 눈앞의 일에만 집중하자·
솔직히 만금전장까지 걱정해 주고 싶은 마음도 없고·
나는 살짝 경계하는 표정으로 만신창이가 된 괴인을 힐끗 본 후 조영영에게 물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소?”
“없어요·”
“다행이오·”
“당주님은요?”
“워낙 순식간에 당해버려서 그만·”
“다행이에요·”
반 년 전 백선객점에서 처음 봤을 땐 오라버니라고 하고 실종된 매소옥을 찾아 함께 몇 날 며칠을 다닐 때는 아예 부르지를 않더니 지금은 또 당주님이라고 부른다·
잘 됐다·
그나마 이렇게 부를 호칭이라도 생겼으니·
나는 옆에 있는 괴인에게 불쑥 물었다·
“귀하도 잡혀 왔소?”
“뭐 하는 수작이야?”
대뜸 공격적인 반말이 돌아온다·
한데 무슨 고초를 얼마나 겪었는지 목이 완전히 쉬어 숫제 쇳소리였다·
그나마도 있는 힘껏 쥐어짜야 겨우 알아들을 만큼 흘러나왔다·
“난 이정룡이라고 하오·”
“이 자식이 미쳤나!”
“이 양반이 보자 보자 하니까····”
전생에서 쟁자수 생활 30년 동안 갈고닦은 내공으로 욕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뼈저리게 가르쳐 주려는 순간 조영영이 불쑥 끼어들었다·
“형님이세요·”
“예?”
“형님이시라고요·”
“병룡 형님 말이오?”
“예·”
나는 다시 한번 괴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목구비며 볼이 원래보다 최소 세 배는 부어 있어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싸가지 없는 말투를 보면 확실히 맞는 것 같다·
“아니 형님께서 왜 아직까지 항주에 계십니까?”
“말 시키지 마· 목 아프니까·”
“제가 대신 말씀드릴게요·”
조영영의 얘기를 요약하자면 이랬다·
이병룡은 모두가 잠든 새벽 일급 표사 열 명만 대동한 채 은밀히 표행을 떠났다·
암표행이 으레 그렇듯 자신과 표사들 전부 털가죽 옷을 입고 모피로 짐작되는 보퉁이를 말 안장에 싣는 등 철저하게 사냥꾼으로 위장했다·
한데 항주를 벗어나는 순간 정체불명의 고수들을 만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부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때 당한 수법도 침혈 즉 바늘 같은 암기에 훈혈을 맞고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곳으로 옮겨진 후 표사들과 떨어져 사흘 밤낮 이유도 모르고 두들겨 맞았다·
고문이 무엇인지 공포가 무엇인지를 뼛속까지 가르쳐 준 후에야 그들은 장보도를 어디에 숨겨 놓았는지 불라고 했다·
“하지만 형님께선 애석하게도 처음부터 장보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해요· 벽안귀가 가져온 것은 장보도가 아니라 만금전장이 장보도를 숨겨둔 장소를 밀어로 가르쳐 주는 서신이었고요·”
아무래도 배달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날까봐 노련한 만금전장주가 한 번 더 안전장치를 해둔 모양이었다·
이병룡이 죽통을 받고 내용물을 읽어 본 것은 겉에 역시 만금전장에서만 쓰는 밀어가 적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금장주는 대체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길래 직접 전하지 않고 이렇게 복잡하고 번거로우면서 위험한 과정을 거친 걸까?
“장보도를 숨겨둔 장소를 말하면 되잖소·”
“그건 죽어도 말할 수 없었대요·”
“왜?”
“그걸 말하는 순간 자신은 모르겠으나 함께 사로잡힌 표사들은 모두 죽여 버릴 것 같아서 최대한 버텼대요·”
꼴에 제 표사들 귀한 줄은 알아가지고·
하기사 그것마저도 없으면 니가 인간이겠냐만·
“그래서 표사들의 생사는 확인했소?”
“사흘 전까지는 살아 있는 걸 확인했대요·”
“마차는 언제부터 이동을 시작했소?”
“이틀 전부터요·”
“내가 이틀이나 혼절해 있었소?”
“예·”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니·”
다시 정리를 좀 해보자·
여태 항주에 머물고 있던 놈들이 갑자기 이동을 시작했다면 장보도를 손에 넣었기 때문일 공산이 컸다·
그동안 이병룡을 고문하는 한편 만금전장주에게는 이병룡과 표사들을 인질로 삼고 장보도를 숨겨둔 위치를 말하라고 갖은 협박을 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조영영과 나까지 차례로 나타나 인질로 잡히는 바람에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더는 감당할수 없게 된 만금전장주가 장보도를 넘겨준 것 같다·
하지만 놈들은 장보도의 진위를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를 살려둔 채 장보도를 찾으러 가거나 혹은 이미 장보도를 손에 넣은 후 장보도에 표시되어 있는 장소로 떠나는 것이고·
“만금전장엔 왜 갔어?”
이병룡이 괴로운 듯 벽에 기대어 딴 곳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
“형님을 찾으러 갔지 왜 갔겠습니까?”
“그런다고 누가 고마워 할 줄 알고?”
“그런 기대는 터럭 만큼도 안했습니다·”
“멍청한 놈·”
“멍청하기로 따지면 일급 표사들을 열 명씩이나 거느리고도 제대로 싸움 한 번 못해보고 사로잡힌 사람이 더 멍청하지 않을까요?”
“난 나를 위해서 일하다 이렇게 됐지만 너는 남을 위해서 설레발을 치다가 사로잡혔잖아· 그러니까 네 놈이 훨씬 멍청한 거야·”
“무언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전 사로잡힌 게 아니라 어떤 멍청이가 살해당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찾아내기 위해 잠입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빨리 찾을 줄은 몰랐지만·”
“···?”
“···?”
나는 고개를 옆으로 꺾은 다음 왼쪽 귀를 아래로 향하게 해서 한참을 흔들어 댔다·
마치 귓구멍에 들어간 벌레를 털어 내려는 듯·
어느 순간 감이 딱 오자 두 발끝을 앞으로 모으고 상체를 최대한 구부렸다·
이어 양발의 엄지 발가락을 이용해 왼쪽 귓구멍에서 흘러나온 실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밀랍으로 겉을 얇게 싼 팥알만 한 알갱이 세 개가 줄줄이 딸려 나왔다·
나는 그중 한 개를 이빨로 뚝 끊어서 잘근잘근 씹어 먹었다·
갑자기 누가 방귀를 뀐 것 같기도 하고 똥을 싼 것 같기도 한 구린내가 마차 안 가득히 퍼졌다·
“그게 뭐야?”
“천리추향단(千里追香丹)입니다· 오른쪽 귓구멍에 세 개 더 있습니다·”
“어디서 났어?”
“당군백에게 얻었습니다·”
“언제?”
“오는 길에 다선초당에 들러서요·”
“왜?”
“제가 만약 실종되면 호리독사가 번견을 앞세우고 추적해 올 수 있게요· 참고로 호리독사는 천리추종술에도 일가견이 있습니다· 이 인간 계속 비싼 공짜 밥만 먹이다가 이제 제대로 한 번 써먹게 생겼네·”
“납치될 줄을··· 알았다고?”
“제가 점쟁이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만 혹시 몰라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준비해 뒀는데 그중 하나가 맞아 떨어진 거죠·”
“그러다 놈들이 널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형님이 살아 있다면 저도 쉽게 죽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미친 놈!”
“행여나 형님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착각은 하지 마십시오· 이번 일은 순전히 국주님··· 아니 아버지를 위해서 하는 겁니다·”
다선초당에 갔을 때 나는 남궁소소에게 용린신갑도 맡겼다·
오직 그녀만이 용린신갑의 비밀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겐 맡길 수가 없었다·
그 외 이부시랑에게서 받은 마패와 소수옥녀 매용초에게서 받은 붉은 수실도 함께 맡겼다
하지만 비격쌍뇌창만큼은 남궁소소조차 모르게 다선초당의 문 앞 기둥에 끄트머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박아 두었다·
나중에 용린신갑을 찾으러 갈 때 비격쌍뇌창도 함께 회수하면 된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간단했다·
만약 이병룡의 뒤를 추적해 가다 그를 납치해간 세력에게 사로 잡히면 철저하게 몸수색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지금 일신에 지닌 무공을 제외하면 완벽한 맨 손이었다·
이 상태로 최대한 버티며 호리독사가 비룡당의 신입 표사들을 이끌고 달려와 주길 기다려야 한다·
나는 양발의 엄지발가락을 이용해 남은 천리추향단 두 개를 다시 귓구멍으로 쑤셔 넣었다·
굵은 엄지발가락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가늘고 긴 검지 발가락을 손가락처럼 벌려 쑤시고 돌리느라 한동안 애를 먹었다·
마침내 일을 마무리한 후 앞을 바라보니 이병룡과 조영영이 아직도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 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영영에게 아까부터 궁금하던 걸 물었다·
“그런데 밥은 몇 시진마다 한 번씩 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