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 소나기는 종일 내리지 않는다(5) >
백선객점을 찾았을 때는 삼경이 가까울 무렵이었다·
일 층부터 손님이 뜸하다 싶더라니 삼 층으로 올라가자 딱 한 무리만 보였다·
그들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탁자 위에는 소가 먹고 지나간 것 같은 온갖 산해진미들의 잔해와 값비싼 검남춘 호리병 이십여 개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나를 발견한 호리독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일견과 이견은 만사가 귀찮다는 듯 고개만 돌렸다·
오직 삼견만이 그나마 손까지 흔들어 보이며 나를 반겼다·
“여어· 비룡당주!”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네· 우리도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서 먼저 먹었네· 저녁 식사는 했나?”
“아직요· 한데 뭘 이렇게 많이들 드셨습니까?”
“천룡표국의 비룡당주께서 승진 기념 턱으로다가 한잔 거하게 살 거라고 해서 평소에는 못 먹어 본 것들을 좀 시켜 보았지· 생각보다 양이 많아서 고생을 좀 했네·”
그새를 참지 못하고 호리독사가 제 뱃속에 술을 채워 넣으려고 수작을 부린 모양이었다·
문제는 검남춘 병들인데 밀봉의 색깔이 꺼멓게 변색된 걸 보면 최소 십 년은 묵은 것 같았다·
저 정도면 은전 다섯 냥은 각오해야 한다·
그때였다·
“덥다· 더워·”
유생 차림의 젊은 선비 하나가 쥘부채를 부치며 삼 층으로 올라왔다·
서른 살쯤이나 되었을까?
뽀얀 피부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인상적인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로 다가왔다·
“저를 보자고 하셨다고요?”
“귀하가 누구인지에 달렸소만·”
“목리극이라고 합니다·”
사내가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해왔다·
천 개의 귀와 눈을 가졌다고 하는 하오문 항주 분타의 향주였다·
나이부터 성별까지 그는 모든 것이 장막에 가려진 사람이었다·
심지어 목리극이 이름인지 별호인지조차 아는 이가 없었다·
당연히 지금의 모습도 진면목이 아닐 것이다·
비록 역용을 했을지언정 소문으로만 듣던 목리극의 등장에 서호삼견이 숨소리까지 죽이며 관심을 보였다·
“내가 누군지는 알 것이고 귀하가 하오문의 향주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겠소?”
“수실을 알아본 것만으로도 부족할까요?”
“워낙 중요한 일인지라·”
“성도에서 사천구룡방과 결전이 있기 이틀 전 여기 계신 객원표사들 중 한 분이 이당주로 변장해 일당주의 묘족 출신 첩이 기거하는 장원으로 침투 그녀를 겁탈하려는 것처럼 하여 자중지란을 유도했었지요· 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당주의 첩들을 전부 구출해 주었고요· 이걸 알 정도면 틀림없지 않을까요?”
“첫 번째 사건은 내가 일으킨 것이 맞소· 하오문 성도 분타 사람들의 도움으로· 하지만 냉목풍의 첩들을 탈출시켜 준 건 내가 한 일이 아니오만·”
“우리가 한 일이네·”
갑자기 끼어든 사람은 이견이었다·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남의 다리 긁은 소리?
나는 눈이 동그래져서 이견을 바라보았다·
“언제요?”
“도화곡주께서 서거하시고 표사들 전부가 닷새 정도 휴식을 취했잖나· 그때 뚝딱 해치웠네· 때마침 사천구룡방이 심각한 내전에 휩싸이는 바람에 생각보다 쉬웠지·”
“왜요?”
“그야 돈을 준다고 했으니까·”
“누가요?”
“남궁소소가·”
나는 냉목풍의 첩들을 이용할 생각만 했지 짐승 같은 놈의 압제에서 구해줄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아마도 나 스스로 무림인이기보다는 표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한데 남궁소소는 달랐다·
여자들의 억울한 사정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뼛속까지 백도 무림인이었다·
“구출한 여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일부는 새로운 도화곡주께서 당분간 비밀리에 보호해 주시기로 약속하셨다고 들었네·”
“한데 제게는 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남궁소소가 말하지 말랬으니까·”
“왜요?”
“그때 자네는 도화곡의 속가제자가 되어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신임 곡주로부터 무공구결들을 전수 받고 있었지· 우리 계획을 들으면 반드시 동참하려 할 것이고 그러면 귀한 시간을 뺏게 될 거라며 절대 알리지 말라고 했네·”
나는 호리독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귀하도 동참했었소?”
“제가 여자들을 포댓자루에 담아 훔쳐 나오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제일 중요한 역할이지요·”
이쯤 되니 이 인간은 비룡당의 객원표사인지 남궁소소의 수하인지 살짝 헷갈릴 지경이었다·
어쨌든 이 정도라면 쥘부채가 상당한 지위의 하오문도라는 건 충분히 증명이 된 셈이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앉으십시오·”
“고맙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호삼견과 하오문 향주를 한 자리에 모으게 됐다·
나는 용모파기 두 장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들 대충 얘기는 들으셨을 겁니다· 열흘 전 합비로 암표행을 떠난 천룡표국의 삼공자께서 도착 예정일 보다 닷새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소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암표를 맡긴 자는 자신을 복건성에서 온 상인이라고 소개한 칠순 노인으로 육척장신에 두상이 작고 길쭉하며····”
나는 장궤에게서 들었던 내용을 짧게 덧붙였다·
하지만 말투와 용모에 관한 것 몇 가지뿐 딱히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도 사람인 이상 어디선가는 밥도 먹고 길도 묻고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항주에 지인이 있어 만났을 수도 있고요· 이 자를 보았거나 알만한 사람이 있는지 최대한 빨리 수소문해 주십시오· 사례는 충분히 해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이견이 대수롭지 않게 툭 내뱉었다·
대번에 좌중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삼견이 착 가라앉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서요?”
“여기서·”
“예?”
이견이 용모파기를 들어다 삼견의 얼굴 옆에 척 갖다 대며 말했다·
“너랑 닮았어·”
“둘째 형님도 참 오십 년 묵은 검남춘을 스무 병씩이나 얻어 마시고 지금 농담이 나오십니까?”
“농담이 아니야·”
이견은 용모파기를 삼견에 이어 일견과 호리독사는 물론 내 얼굴에까지 척척 갖다 대고는 말했다·
“보시다시피 누구와 비교해도 조금씩 닮았을 만큼 평범한 얼굴이야· 하다못해 코밑에 점이 있다거나 눈 밑에 칼자국이라도 있어야지· 이래 가지고선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야·”
“듣고 보니 그건 그렇네요·”
저게 오십 년짜리 검남춘이었다고?
스무 병 전부?
이 노인네들이 진짜·
이후로도 삼견과 이견이 서로 한 입씩 주고받으며 용모파기에 대해 한참이나 떠들어 댔지만 딱히 귀담아 들을만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당장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이들을 지렛대 삼아 족히 수천 명은 될 흑도와 하오문도들의 눈을 빌리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용모파기를 본 직후부터 한마디도 않고 뚫어지게 노려보던 일견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게 실제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것인가?”
“왜 그러십니까?”
“자세히 보면 낯빛이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붉고 눈동자도 어쩐지 약간 푸른 빛을 띠는 듯해서 하는 말이네· 우리가 돈 떼먹고 도망친 놈들을 추적하기 위해 용모파기를 숱하게 그려 보니 화공들마다 사람을 그리는 자기만의 색감이 있더군· 그래서 혹시나 하고 물어 본 것이네·”
“실제 모습을 묘사한 것 맞습니다· 화공은 낯빛을 아예 채색하지 않으려 했는데 목격자가 그렇게 주문을 했습니다· 눈동자의 색깔도 그렇고요· 혹시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한 명 생각나는 사람이 있긴 한데 이게 살짝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말이지· 자칫하다간 혼선만 줄 수도 있네·”
“그건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잘 기억도 나지 않고····”
나는 품속에서 어린아이 주먹만한 가죽 전낭을 꺼내 탕 소리가 나도록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약간 풀어진 입구 사이로 은전 세 개가 슬쩍 삐져 나왔다·
“동호교방(東湖紋常)에 우리 말을 기가 막히게 하는 아라사 놈이 하나 있네· 20년 전 큰 태풍에 배가 난파당하자 널빤지를 타고 복건성 바닷가로 떠내려왔다더군· 이후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도 않고 눌러살면서 어찌어찌 항주까지 기어들어 온 모양일세· 힘이 장사인데다 싸움을 어찌나 잘하는지 지금은 동호교방에서 데려다 쓰고 있지·”
“혹시 벽안귀(善眼鬼)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렇네·”
서호 주변에는 수백 곳을 헤아리는 주루와 기루가 성업 중이다·
워낙 숫자가 많다 보니 네 곳의 대형 흑도방파가 분할해 관리하고 있었다·
그중 서쪽을 먹은 것이 서쌍교방이고 정확하게 호수의 건너편인 동쪽을 장악한 곳이 동호교방이었다·
바로 그 동호교방에 푸른 눈의 벽안귀가 하나 있다는 소문은 나도 들었다·
벽안귀가 천룡표국을 찾았을 리도 없지만 설사 그랬다면 당연히 모두가 눈에 띄었을 것이다·
분명 무언가가 더 있다·
“아직 전낭 값으로는 모자랍니다만·”
“알다시피 이놈의 용모가 워낙 눈에 띄다보니 가끔 살인을 하러 갈 때는 꼭 인피면구를 쓴다네· 그럼 이 용모파기처럼 낯빛은 불그스름하고 눈알은 푸른 모습이 되지· 다만 한 가지 그놈은 육순 노인이 아니라 한창 기운이 펄펄한 사십 대일세·”
육척장신에 두상이 작고 길쭉하며 붉은 낯빛과 푸르스름한 눈동자를 가진 자·
상당 부분이 일치한다·
나이 차이가 꽤 나지만 인피면구를 쓰면 나이를 속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이상한 점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냥 넘길 일도 아닌 것 같았다·
만약 벽안귀가 용모파기의 진짜 주인이라면 복건성 출신의 상인이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 되는 셈이다·
“확인을 해봐야겠습니다·”
“우린 더이상 도와줄 수가 없네· 알다시피 동호교방과 서쌍교방은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방파라서 우리가 나서면 항주에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네·”
“이미 충분히 도움이 됐습니다·”
나는 그제서야 전낭을 누르고 있던 손을 뗐다·
일견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견이 잽싸게 전낭을 채가서는 품속에 챙겼다·
나는 그제야 목리극에게 물었다·
“지금 당장 벽안귀가 정확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아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눈치를 채면 도망갈 수도 있으니 최대한 은밀하게· 부탁드립니다·”
“누구 부탁이라고 거절하겠습니까· 한 식경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게나 빨리요?”
“벽안귀가 어디에 있든 그가 있는 곳으로부터 삼십 장 이내에 저희 하오문도가 반드시 있을 겁니다·”
***
서호의 동쪽은 항주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이다·
이곳도 풍광 좋은 호숫가에는 크고 화려한 주루와 기루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니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뻗은 골목길을 따라 오래되고 낡은 전각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어디선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온다고 해서 항주 사람들은 이곳을 망향가동(望鄕歌洞)이라 불렀다·
망향가동은 무려 천년이나 된 매음굴이자 매음굴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대를 이어 살아가는 빈민촌이었다·
홍등이 사방에 내걸린 망향가동으로 들어온 지 일각·
길가는 남자라면 아무나 붙잡고 늘어지며 호객행위를 하는 아이들이 이상하게 내게는 단 한 명도 달라붙지 않았다·
앞에서 걸어가는 녀석 때문이다·
열대여섯 정도의 나이에 벌써부터 얼굴에 칼자국을 세 개나 새긴 녀석은 하오문에서 붙여준 길잡이였다·
이윽고 사내아이가 어느 전각 앞에 이르자 붉은 대문에다 갑자기 코를 팽 풀었다·
그러고는 제 손을 배에 쓰윽 닦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다·
“어이!”
사내아이가 슬쩍 뒤돌아보았다·
은전 한 냥을 허공에 튕겨 주었다·
사내아이는 잽싸게 낚아채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기감을 잔뜩 끌어 올린 다음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이어 지난 한 달 동안 죽으라고 수련한 잠백비행의 은잠술을 펼치며 사내아이가 찍어준 대문의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좁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게구멍처럼 똑같이 생긴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보였다·
그중 한 곳으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만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병룡의 생사조차 확인이 안 된 상태에서 거사가 끝날 때까지 한가하게 기다려 줄 수가 없었다·
문 앞으로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거 말 좀 물어봅시다·”
방안에서 나던 여러 가지 요란한 소리가 잠시 뚝 그치는가 싶더니 곧 다시 시작됐다·
“벽안귀를 찾고 있소만·”
다시 소리가 그쳤다·
이번엔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육척장신에 푸른 눈을 가진 사내가 웃통을 깐 채 나타났다·
달빛 아래에 드러난 우람한 근육질의 상체가 온통 붉고 꼬불꼬불한 털로 뒤덮인 것이 꼭 산해경에나 나올법한 짐승처럼 보였다·
“뭐 하는 새끼야?”
이국적인 용모에 어울리지 않게 완벽한 우리말이 튀어나오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내가 놀라자 벽안귀는 더욱 기세가 등등해져서 다그쳤다·
“뭐 하는 새끼냐고 묻잖아!”
“난 이정룡이라고 하오·”
“이정룡이 어떤 새낀지 내가 어떻게 알····”
말을 하던 사내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아직은 용모파기의 주인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항주 유흥가에서 20년 이상 잔뼈가 굵은 놈이라면 내 이름과 신분 정도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테니까·
“사공자께서 여긴 어쩐 일로····”
“내 형과 관련해서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소?”
“그걸 왜 저한테 묻는 겁니까?”
“우리 말을 잘 하시는 구려· 그것도 복건성의 사투리 위주로다가·”
“여하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뭐라도 좀 걸치고 나오겠습니다·”
그러면서 사내가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잠시 후 방안에 호롱불이 켜지는가 싶더니 ‘퍽!’ 소리가 들렸다·
이어 방안 전체가 비정상적으로 밝아졌다·
“이런 미친 새끼!”
쾅!
나는 발로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방안이 불길에 휩싸인 가운데 나신의 여자만 홀로 널브러져 있었다·
벽안귀가 여자를 때려눕힌 후 등잔 기름을 사방에 뿌려 불을 지른 다음 반대쪽 쪽문으로 도망친 것이다·
나는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벌거벗은 여자를 처음 봤다·
하지만 조금의 딴생각이 들 틈도 없었다·
재빨리 여자를 이불로 감싸 안은 다음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목구멍이 찢어져라 외쳤다·
“불이야!”
낡고 오래된 전각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망향가동의 구조상 한번 불이 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실제로 십 년에 한 번씩은 꼭 큰불이나 수백 명의 사람이 죽거나 터전을 잃었다·
망향가동의 사람들에게 화재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며 경기를 일으킬 악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방의 게구멍에서 족히 스무 명은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이 작은 집구석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마당 곳곳에다 미리 준비해둔 항아리의 물을 차례로 뿌려까지 열심히 불을 끄기 시작했다·
다행히 일찍 발견한 탓에 금방 불길이 잡힐 것 같았다·
“이 새끼가 사람들이 자고 있는 데 불을 질러?”
나는 물 항아리 하나를 빼앗아 몸에 끼얹었다·
그러곤 불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불길에 눈썹이 화르륵 말려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놈이 사라진 쪽문을 관통하니 예상했던 대로 또 다른 골목이 나타났다·
불길 때문에 어느새 골목길이 환해져 있었다·
더욱 깊이 들어가는 쪽이라 생각되는 방향을 향해 냅다 달렸다·
몇 번을 꺾어지며 달리길 한참·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옆에 있는 전각의 지붕으로 훌쩍 뛰어 올라갔다·
그런 다음 달빛 아래 파도처럼 너울지며 펼쳐져 있는 지붕들 위를 날아다녔다·
강호인들이 그토록 탐냈던 도화곡의 전설적인 경신공 천금풍을 펼친 것이다·
주변을 한참이나 훑으며 돌아다니던 끝에 마침내 후미진 골목길에서 꽁지가 빠져라 뛰어가고 있는 놈을 발견했다·
잠깐 사이 나는 놈의 머리 바로 위 오른쪽에서 달렸다·
같은 뿌리를 가진 무공이 으레 그러하듯 천금풍과 잠백비행의 궁합은 찰떡이었다·
천금풍의 경공술을 펼치며 잠백비행의 묘리를 담아내자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아무런 발걸음을 소리도 내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어이!”
놈이 달리는 와중에 힐끗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때쯤엔 공중으로 도약한 내가 놈의 면상을 향해 일각을 꽂아 넣고 있었다·
뻐억!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놈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한데 그대로 뻗어버릴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벌떡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허리춤에서 유엽비도 두 자루를 벼락처럼 뽑아 들고는 사뭇 도발적인 어투로 물어왔다·
“혹시 혼자 왔나?”
“코피나 쳐 닦아· 개새끼야!”
귀영무의 보법을 펼치며 눈 깜짝할 사이에 놈의 전권을 파고들었다·
놈에게도 한 수는 있었다·
정면을 향해 좌도를 쭉 찔러오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단도를 흘려보낸 나는 십초박의 선팔초를 놈의 상체에 소나기처럼 작렬시켰다·
퍽! 퍼퍼퍽!
두 자루 유엽비도를 피해가며 딱 사 초식을 펼쳤을 때였다·
놀랍게도 괴성과 함께 놈이 갑자기 왼쪽 어깨로 나를 힘차게 들이받아 버렸다·
“으아악!”
흡사 황소 뿔에 받힌 듯한 충격과 함께 나는 무려 네 걸음이나 주르륵 밀려났다·
그 틈을 이용해 놈이 미끄러지듯 달라붙더니 유엽비도를 난상으로 휘둘러댔다·
힘과 속도 어느 것 하나 대륙의 일류 고수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제가 사는 나라의 무슨 무술을 익힌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이놈은 비슷한 키의 대륙인들에 비해 팔 길이가 한 뼘 정도는 더 길었다·
그만큼 궤적이 커서 공방을 주고받기도 전권을 뚫고 들어가기도 어려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장검을 가져올 걸 그랬다·
일부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빈손으로 온 것이 화근이었다·
할 수 없이 비격쌍뇌창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놈의 한쪽 팔이 무슨 창처럼 훅 치고 들어왔다·
나는 놈의 칼끝에다 내 배를 정확히 맞추었다·
내가 전권을 뚫을 수 없다면 놈이 내 전권 속으로 들어오게 만들면 된다·
“죽어라· 애송이!”
푹!
유엽비도는 당연히 용린신갑에 가로 막혔다·
용린신갑의 안쪽에는 백 년 공력을 품은 단단한 근육까지 버티고 있어서 아마 돌덩이를 찌른 것 같았을 것이다·
“어 어떻게 한 거지?”
“일단 좀 쳐 맞고 얘기하자!”
벼락처럼 금나수를 펼쳐 놈의 칼 쥔 왼쪽 손목을 꺾어 잡았다·
이어 그대로 놈의 오른쪽 볼따구와 어깨와 팔을 푹푹푹 찔러 버렸다·
깜짝 놀란 놈이 또다시 왼쪽 어깨를 황소처럼 부딪혀 왔다·
이미 이능력을 발동시키고 있던 나는 옆으로 한 걸음을 물러나는 것으로 놈의 돌진을 가볍게 피해 버렸다·
그리고 몸을 날려 놈의 왼쪽 옆구리를 힘차게 찼다·
뻑! 소리와 함께 벽으로 날아가 붙는 놈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다시 한번 십초박의 선팔초를 작렬시켰다·
퍽! 퍼퍼퍼퍽! 퍽퍽!
양팔을 꺾고 갈비뼈를 세 대나 부러뜨리고 왼쪽 어깨의 쇄골을 주저앉히고 오른쪽 눈알에다 쇠뭉치 같은 주먹을 묵직하게 꽂아 넣고서야 놈이 외쳤다·
“그 그만!”
보통 사람은 눈에다 주먹질을 하면 뇌가 진탕 당하는 충격과 함께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만다·
한데 이 짐승 같은 놈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짧게 욕을 하더니 항복의 표시로 칼을 버리고 털썩 주저앉는 게 다였다·
“하아 독종이네·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