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 소나기는 종일 내리지 않는다(3) >
“이번에 새로 뽑았다는 그 신입 표사들 말인가요?”
“그렇소·”
“여자들이 스스로 지원 했다고요?”
“그렇소·”
“왜요?”
“당연히 표사가 되기 위해서겠지·”
“여자들이 표사직에 지원을 하는 게 자주 있는 일인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여자 표사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아서요·”
“당연히 그럴 것이오· 예전에는 여자를 표사로 뽑는 표국이 아예 없었으니까· 나도 표사 모집 방을 붙일 적에 반신반의하며 ‘여자도 가능’이라고 한 마디 적어 넣으라고만 했는데 정말로 지원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줄은 몰랐소·”
“처음부터 여자를 뽑으려고 했다고요?”
“그렇소·”
“왜요?”
“당연히 표사로 쓰기 위해서지· 이상하다· 아까부터 왜 계속 했던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표사는 노숙을 예사로 해야 하는 데다 하나같이 험하고 거친 일들뿐인데 과연 여자들이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시커먼 남자들 사이에서?”
“나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소· 하지만 소저를 보고 나의 그런 생각이 아집과 편견이었다는 걸 깨달았소·”
“저요?”
“그렇소·”
“···!”
의뢰를 맡다 보면 여자 무사들의 손길이 필요한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가령 호위나 호송을 하는 대상 중에 귀부인이 있다고 치자·
호위의 첫 번째는 그림자처럼 따르며 의뢰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이다·
한데 호위의 철칙을 지키겠답시고 귀부인이 생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곳까지 남자 표사가 따라다니며 지켜볼 수는 없지 않겠나·
한데 자객은 상대가 볼 일을 보고 있다고 해서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이것 외에도 몸이 닿을 정도의 밀착 경호를 하거나 잠자리를 지키거나 업고 달려야 할 때도 많다·
지금까지는 그때마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밀착 경호를 포기하거나 무례를 무릅쓰고서라도 밀착 경호를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내가 알기로 정식으로 채용된 여자 표사는 오직 천룡표국 하고도 비룡당에만 있소· 잘만 키우고 훈련하면 다른 표국들과의 경쟁에서 엄청난 장점으로 작용할 것이오· 정말 획기적이지 않소?”
이런 우쭐한 생각을 하는 사이 가불염과 신입 표사들이 내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그들은 먼저 나에게 동시에 포권지례를 올렸다·
이어 가불염은 남궁소소에게도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표두가 되신 것 축하드려요·”
“모두 소저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제가 뭘 했다고요·”
“소저께서 당주님을 도와 어려운 표행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신 덕분에 제가 내부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 일이라면 제가 사고를 치긴 친 것 같네요·”
가불염은 이어 뒤를 돌아보며 신입 표사들에게 말했다·
“모두 인사들 드려라· 남궁세가의 영애이신 남궁소소 소저이시다· 십칠각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객원표사로서 당주님과 함께 표행을 하신 분으로 우리 비룡당과는 인연이 깊으시니 다들 소저를 뵈면 선배 표사를 대하듯 깍듯이 예를 갖추도록· 특히 여표들은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우렁찬 여섯 개의 대답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리고 앞다투어 남궁소소에게 자신들을 소개하며 포권지례를 올렸다·
비룡왕삼이 그랬던 것처럼 신입 표사들도 소문으로만 듣던 남궁소소를 직접 보게 된 것이 매우 신기한 듯 했다·
····
····
“신입 표사 독고완입니다·”
“신입 표사 염지약입니다·”
”신입 표사 여소옥입니다·”
“신입 표사 운휘향입니다·”
마지막 세 명은 공교롭게도 모두 여자였다·
나이는 셋 모두 스물서너 살 어림이었고 하나같이 간편한 무복에 청건을 썼으며 허리에는 장검을 찬 상태였다·
여성스러움을 완전히 제거한 이 복장은 내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들이 알아서 착착 준비한 것들이었다·
그래도 타고 난 여성스러움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용모는 감출 수가 없었다·
“남궁소소라고 해요· 그런데 세 분 소저는 여자의 몸으로 왜 굳이 이렇게 위험하고 거친 일을 하려는 거죠?”
“멋있어서요·”
“진짜 무인이 되려고요·”
“세상 경험을 쌓고 싶어서요·”
앞으로의 세상은 어떨지 모르나 지금 시대에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렇게 많지 않다·
잘 풀려야 상계에 몸을 담는 것인데 그것도 상재가 없으면 평생 남자들이 하는 일을 옆에서 보조해 주는 역할밖에 못 했다·
남궁소소는 잠시 어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하고 당당한 신입 여표사들의 대답에 같은 여자로서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았다·
다른 여자들은 몰라도 그녀는 이해할 것이다·
여자의 몸으로 유가문파의 개파조사가 되겠노라는 야망을 품은 여걸이니까·
대충 인사가 끝나자 내가 가불염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입니까?”
“신입 표사들에게 교육을 하고 난 후 저녁이나 먹고 헤어질 생각에 함께 식당으로 가던 중 묵룡당의 표사들에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기로 잠깐 들렀습니다·”
“무슨 이야기를요?”
“삼공자님께 변고가 생긴 듯합니다·”
“변고라뇨·”
“삼공자님께서 열흘 전 표사 열 명을 이끌고 합비로 표행을 떠나셨는데 도착 예정일보다 닷새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식이 없다고 합니다·”
“전부 실종되었다는 뜻입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잘 못 들으신 거 아닙니까? 어젯밤 장로회의에 셋째 형님이 불참은 했어도 표왕부에서 아무런 말씀이 없었거늘·”
“사흘 전 묵룡당의 표두들이 표왕부에 보고를 하려는 걸 혹여라도 삼공자님께 흠이 될까 봐 청화부인께서 막으셨다고 합니다·”
“이런 멍청한!”
그걸 청화부인에게 물어본 표두들도 멍청한 것들이고 욕심에 눈이 멀어 중요한 시간을 놓쳐버린 청화부인도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그럼 지금까지 손을 놓고 있었단 말입니까?”
“사흘 전부터 청화부인께서 만금산장에 부탁하시어 은밀히 추적을 해오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태가 심상치 않은 듯하자 오늘 낮 국주님께 말씀을 올리신 것 같고요·”
다른 표국도 마찬가지지만 천룡표국에서 출발하는 모든 표행단은 총타로의 회귀본능을 가진 전서구 두 마리씩을 가지고 가도록 되어있다·
한 마리는 목적지에 도착한 후 모두 무사함을 알리기 위해 다른 한 마리는 표행중 표물을 노리는 자들의 습격으로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구원요청을 하기 위해·
말이 좋아 구원요청이지 사실은 복수를 위한 단초를 남기고 죽으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이 때문에 표행 중 전서구를 담당한 표사는 매일 아침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로 향하는 중인지를 기록해 전서구의 다리에 묶어 둔다·
갑자기 비적에게 기습을 당하면 자세한 내용을 쓰고 앉아 있을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총타로 날아온 전서구는 실종된 표행단을 추적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데 닷새가 넘도록 전서구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은 흉수들이 전서구를 가장 먼저 제거해 버렸음을 의미한다·
고도의 전문가들이라는 뜻이다·
마치 전생에서 나와 표사들을 몰살시켰던 그 정체불명의 고수들처럼·
“대체 무슨 표물을 옮기는 중이었답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리지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사람은 전립성이었다·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다시피 한 그는 남궁소소에게 잠깐 포권지례를 올리고는 얼른 내게 보고를 시작했다·
“보름 전 묵룡당을 지목해서 의뢰가 하나 들어 왔었습니다· 천룡각의 장부에는 가격이 맞지 않아 거절한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실제로는 삼공자님께서 은밀히 표행단을 꾸리셨던 모양입니다·”
“혹시 암표였습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표사 일을 처음 해보는 신입 여표사들은 암표가 무엇인지 몰라 나만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때다 싶었는지 남궁소소가 가까이 오라는 듯 세 명을 손짓해 불렀다·
이어 선배 표사가 후배 표사를 가르치듯 작은 소리로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암표는 표물이 무엇인지 일절 묻지 않고 목적지까지 운송해 주는 걸 말해요· 경우에 따라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표행을 의뢰한 사실까지도 비밀로 하고요·”
“표물을 모르면 표비는 어떻게 책정하죠?”
“정확한 책정이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일단 터무니 없이 높은 액수를 불러 놓고 상대의 반응을 살펴 가며 조정하는 거죠·”
“이문이 많이 남겠네요·”
“대신 보통의 표행 보다 몇 배나 위험하죠·”
“그건 왜요?”
“만에 하나 표행 정보가 누설되면 비적들의 목표가 되기 쉬우니까요· 암표는 그 특성상 표물을 잃어버려도 표주가 찾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해서 표물만 전문으로 노리는 비적들은 암표를 두고 임자가 없는 물건이라고들 하죠·”
일전에 내가 해준 얘기를 앵무새처럼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설명이 끝나자 남궁소소는 나를 바라보았다·
세 명의 신입 여표들도 따라서 다시 내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묵룡당으로 승격까지 했으면서 왜 그런 무리를 했답니까?”
“위로는 두 분 형님들이 승승장구하시고 아래로는 당주님께서 사실상 자신을 일찌감치 앞지르고 계시니 마음이 급하셨던 게지요· 해서 이번 표행을 성공적으로 끝낸 후 국주님께 인정을 받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대체 얼마를 받기로 했답니까?”
“금전 백 냥이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순간 좌중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 졌다·
특히 단일 표행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액수에 신입표사들 입이 쩍 벌어졌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미 내가 몇 차례나 그것보다 높은 액수의 표행들을 해냈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무렵 이병룡의 실종은 전생에선 없던 일이다·
이번 일만이 아니었다·
지금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이미 전생과 달라진 지 오래였다·
모두 나라는 존재가 일으킨 일종의 지진이었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좋은 방향으로였는데 갑자기 이병룡 이 멍청한 인간이 사고를 칠 줄이야·
“그래서 지금 어쩌고 있답니까?”
“일단 합비분타에 전서구를 보내 방초산 분타주로 하여금 인근을 수색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룡표국에서는 표왕부의 명으로 총표두님께서 추적대를 꾸리시는 중이고요·”
여기서 합비까지는 오백 리도 넘는 길·
거리도 멀거니와 무엇보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어느 길로 갔을지 모르고 어디쯤 갔을지도 모르기에 제아무리 노련한 표사들로 추적대를 꾸린다고 한들 쉽지 않을 것이다·
표사일이 이런 게 위험하다·
표행을 하는 동안엔 운 좋게 분타를 스쳐 가는 게 아니라면 총타와 연락을 주고받을 방법도 도움을 받을 방법도 사실상 없다·
때문에 출발하고 도착할 때까지의 안전은 오직 표행단 내에서 알아서 지키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표물을 노리는 비적들은 언제나 있어왔다·
표국업의 역사는 표물을 노리는 비적들과 지키려는 표사들 사이의 끝없는 전쟁의 기록이었다·
지금까지 표국들의 사후 유일한 대책은 흉수들을 찾아내 씨를 말릴 정도의 무자비한 보복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만약 표물을 노리는 비적들이 있다면 자기 표국의 깃발만 보고도 오줌을 지리도록·
그 방면으로 천룡표국은 대륙의 모든 표국들 중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았다·
누군가 이병룡과 표사들의 목숨을 취했다면 철저히 흔적을 지우고 조용히 숨어 지내야 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꼬리를 들켰다가는 몇 명이 되었든 정체가 무엇이든 소굴이 통째로 몰살당하고 말 테니까·
아무래도 표왕부로 가보아야 할 것 같다·
가불염을 돌아보며 말했다·
“표사들을 몇 명을 뽑아 남궁 소저를 다선초당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리고 오도록 하세요·”
“제가 신입 표사들을 이끌고 직접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나는 다시 남궁소소를 돌아보며 말했다·
“소저 다음에 또 봅시다·”
“제 걱정은 말고 어서 가보세요·”
“장삼과 호리독사는 나를 따라 오도록·”
“알겠습니다·”
장삼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호리독사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당연하다·
그들의 눈에 호리독사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명령에 불복종한 표사는 그 즉시 퇴출이오만·”
툭!
저만치 옆에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묵직하게 떨어지며 바닥에 착지했다·
모두가 뜨악했다
특히 비룡왕삼과 남궁소소의 얼굴이 서로 다른 의미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 사이 몸을 쓰윽 일으킨 호리독사가 내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깜빡 잠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