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소나기는 종일 내리지 않는다(2) >
깜짝 놀란 나는 손가락에 힘이 풀리면서 땅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리고 무언가 이상해서 다시 한번 장삼에게 물었다·
“말을 타고 온다고?”
“그렇습니다·”
“천룡표국 안에서?”
“그렇다니까요·”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이 여자가 점점 안하무인이 되어 가네· 외부인인 주제에 감히 말을 타고 천룡표국의 경내를 가로지른다고? 오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만들어 줘야겠군·”
“그게 아니고요· 정문을 통과한 소저께서 목적지를 밝히며 말고삐를 접객당의 수문무사에게 넘기려고 하시자 수문무사가 비룡당은 한참을 걸어가야 하니 편하게 타고 가시라며 도로 고삐를 내주었습니다·”
“이런 정신 나간 인간들을 봤나· 말에서 강제로 끌어 내려도 모자랄 판에 고삐를 아예 갖다 바쳤다고? 목이 달아나 봐야 천룡표국의 기강이 무서운 줄을 알 모양이군·”
“그게 아니고요· 남궁 소저께서 그건 법도가 아니라며 사양하시자 접객당의 무사가 남궁 소저께는 특별히 하마령(下馬令)과 해검령(解劍令)을 면제해 드리라는 상부의 명령이 있었으니 안심하시라고 그러더라고요·”
“뭐?”
외부인이 천룡표국을 방문하면 두 가지의 엄격한 규칙을 적용받는다·
말에서 내려 걸어야 한다는 하마령과 모든 무기를 풀어서 접객당에 맡겨 두어야 한다는 해검령이다·
그런가 하면 접객당은 정문의 경계와 손님들의 접객을 책임진 별외조직이다·
칠당십오각의 편제에 들지 않는 만큼 오직 표왕부의 명령만 받았다·
그러니 접객당의 수문무사가 말한 상부는 바로 표왕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표왕부에서 나왔다는 모든 말은 곧 이종산의 지시나 다름없었다·
갑작스러운 장삼의 말에 나는 얼떨떨했다·
하마령과 해검령은 천룡표국의 위엄을 지키는 일인 만큼 강호의 명숙들이 찾아와도 함부로 면제해 주는 법이 없었다·
객원표사 몇 번 했다고 아예 한 식구 취급을 해주시는 건가?
한데 비룡왕삼의 표정이 아까부터 좀 이상했다·
싱글벙글 웃으며 자기들끼리 눈까지 맞추는 것이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듯했다·
그러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세 사람 모두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표정을 굳혔다·
“왜들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때였다·
또각또각 말발굽 소리와 함께 누군가 비룡당의 경내로 들어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왔다!”
장삼이 목구멍을 쥐어짰다·
나도 모르게 귀영무의 신법으로 훌쩍 뛰어올라 처마 밑에 찰싹 달라붙었다·
동시에 호흡을 멈추고 기척을 숨기는 한편 사력을 다해 잠백비행의 은잠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왜 숨는 거지?’
나도 나지만 장삼도 웃긴 놈이었다·
갑자기 ‘풀을 뜯엇!’이라고 작게 외치더니 밑도끝도 없이 쭈그리고 앉아 마당에 자라는 풀을 뜯기 시작했다·
비룡왕삼이 영문도 모른 채 장삼을 따라 쭈그리고 앉아 풀을 뜯었다·
잠시 후 한껏 멋을 낸 궁장차림의 남궁소소가 백마를 타고 나타났다·
그녀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말했다·
“안녕하세요·”
“누구··· 엇!”
장삼이 깜짝 놀란 척을 하며 일어났다·
“아가씨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볼일이 있어 잠시 들렀어요· 오랜만이네요?”
“예? 예· 그러게 말입니다· 정룡 공자님께서 십칠각을 하사받으신 직후에 오시고 처음이시니 넉 달은 된 듯합니다·”
하인이라고 본체만체 않고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친근하게 대해주니 장삼은 살짝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런데 이분들은····”
“표사 왕대표입니다·”
“표사 왕중표입니다·”
“표사 왕소표입니다·”
“세 분께서 비룡왕삼이시군요· 늦었지만 각주로 승진하신 것 축하드려요· 다선초당에서 지내고 있는 남궁소소라고 해요·”
“저희를 어떻게···?”
“일차 표사 모집 당시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하신 표사님들이라고 들었어요·”
“저희야말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룡왕삼은 황송해 죽겠다는 듯 연거푸 허리를 숙였다·
누가 보면 남궁소소의 부하들인 줄 알겠다·
항주 사대 미녀 중 한 명이자 대남궁세가의 영애인 남궁소소가 자신들을 알고 있자 아주 감격스러워 죽겠는 모양이다·
그제야 나는 세 사람이 조금 전 그렇게 싱글벙글 했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누군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는데 저 인간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남궁소소를 마침내 직접 볼 생각에 한껏 들떴던 것이다·
남궁소소가 다시 장삼에게 물었다·
“당주께서는 어딜 가셨나요?”
“글쎄요· 어디 멀리 가셨는지 아침부터 통 보이질 않으십니다요·”
순간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모르고 있어!’
틀림없다·
남궁소소는 지금 처마 밑에 숨어 있는 나를 전혀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고 하더니 극한(?)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은신술의 묘리를 벼락처럼 터득한 모양이었다·
‘하아!’
너무나 기쁜 나머지 아주 살짝 호흡을 흘리고 말았다·
그때였다·
남궁소소가 갑자기 찌릿한 표정과 함께 처마 쪽을 올려 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녀가 물었다·
“거기서 뭐 하세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이어 양손을 탈탈 털며 일어섰다·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은잠술을 수련하고 있었소·”
“은잠술을요?”
“그렇소·”
“엇 공자님 거기 계셨습니까?”
장삼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비룡왕삼도 눈치를 보다가 뒤늦게 놀라는 시늉을 했다·
어색하다· 어색해·
남궁소소는 네 사람을 차례로 훑어본 후 다시 내게 말했다·
“엄청난 발전이군요·”
“무슨 엄청난 발전까지나·”
“아니에요· 성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범선 위에서 수련할 때는 아이들 숨바꼭질하는 것 같은 수준이었는데 방금은 정말 감쪽같았어요· 호흡을 흘리지 않았다면 계속 몰랐을 거예요·”
“한데 야심한 시각에 이곳까진 어쩐 일이오?”
“야심하다뇨· 이제 막 해가 지고 있는데·”
“지금부터 다선초당으로 돌아가도 중간쯤에서 이미 깜깜한 밤이 될 거요·”
“혹시 저 불청객인가요?”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쓸쓸한 기색이 어렸다·
그러자 장삼과 비룡왕삼이 이건 좀 아니지 않으냐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이 인간들이 대체 누구 편을 드는 거야·
“소저가 걱정되어 한 말이오·”
“난 또 빨리 가라고 눈치 주는 줄 알고 섭섭할 뻔했네요· 나름 십칠각이 비룡당으로 승격하는 데 공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그 점은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늦었지만 당주가 되신 것 축하드려요·”
“고맙소·”
“이제 승승장구하는 일만 남은 건가요?”
“그건 너무 좋게만 보는 거고·”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만 하시면 앞으로도 크게 성공할 거예요· 누가 뭐래도 전 귀하를 믿어요·”
나는 하마터면 말고삐는 장삼에게 줘버리고 안으로 들어가서 술이라도 한잔하자고 할 뻔했다·
“소저도 하는 일마다 다 잘 풀리길 바라오·”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래서 말인데 제 돈은 잘 있겠죠?”
마침내 올 것이 왔다·
절대로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어차피 들킨 거 마지막 체면은 지켜야 한다·
“물론이오·”
“목장을 운영하신 줄은 까맣게 몰랐네요· 구경이라도 좀 시켜주지 그랬어요· 천목산이면 별로 멀지도 않은데· 서호에서 배를 타고 가면 풍광도 좋다더만·”
“사정이 있었소·”
“들었어요· 국주님과 내기를 하는 바람에 철저하게 비밀로 해야 했었다고· 그래도 제게는 말해 줄 줄 알았네요·”
그러면서 남궁소소가 내 눈을 지질 듯이 노려보았다·
사실 그녀와 나는 이미 둘만 공유하는 비밀이 두어 가지 있었다·
화조신옹의 죽음에 관한 사연이 그랬고 그 늙은이에게서 내가 옛 마교의 보물인 용린신갑을 취했다는 사실이 그랬다·
그녀는 지금 시위를 하고 있었다·
나한테 정말 계속 이럴 거냐는·
“뭐 괜찮아요· 금전 삼천삼백 냥이 아주 없어진 것도 아니고· 장차 범선 다섯 척이 벌어들이는 돈의 일부는 제 몫이라는 거 아시죠?”
“대체 그런 얘기들은 다 어디서 들은 거요?”
“호리독사에게서요·”
너무나 쉽게 나온 대답에 한순간 말문이 콱 막혔다·
그러면 그렇지·
지금쯤 호리독사의 정수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을 것이다·
이제라도 튀어나와 남궁소소의 입을 막자니 비룡왕삼에게 잡혀 경을 칠 것 같고 가만히 있자니 남궁소소가 무슨 말을 더 할지 모르고·
이 인간 어디 두고 보자·
“소저의 몫은 확실히 챙겨줄 테니 걱정 마시오· 예전에도 말했었지만 소저가 그동안 나를 도와준 걸 생각하면 조금도 아깝지 않소·”
“그거야 회계가 투명할 때의 얘기죠· 물 밖으로 나온 빙산의 일각만 가지고 제 몫을 조금 떼어주는 거라면 얘기가 다르지 않을까요?”
“언제는 나를 믿는다더니·”
“돈 문제만 빼고요·”
“원하는 게 무엇이오?”
“투명한 동업자 관계?”
“동업자라고 하기에는 액수 차이가 좀 크지 않소?”
“투자자를 잘 못 말했어요·”
은근슬쩍 지위를 격상시키는 거 보소·
이러다가 언젠가 통째로 잡아 먹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소?”
“그걸 잘 모르겠어요· 저도 돈을 투자해서 무언가를 이렇게 키워 본 건 처음이어서요·”
대체 누가 무얼 키웠다는 거지?
이걸 적극적으로 반박을 하기도 그렇고 가만히 있기도 그렇고·
“그건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요· 비룡당으로 승격한 이후 표행 의뢰가 물밀 듯이 들어 온다면서요?”
“아직까지는 그렇소·”
“그럼 지금 당장 표행을 또 맡기는 어려우려나?”
“무슨 표행인데 그러시오?”
“소주에 근거지를 둔 유가상단(柔家商團)이라고 있어요· 합비에 새로 분타를 만들면서 매달 소금 오천 관씩을 운송할 계획이라더군요· 한데 믿고 맡길만한 표국을 찾지 못해 애를 먹는다고 들었어요· 한번 만나 보는 게 어때요?”
유가상단은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염상(鹽商) 즉 소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상단이었다·
열 손가락 안에라는 말만 듣고 우습게 보면 큰코 다친다·
나라에서 염전을 직접 관리하며 유통까지 엄격하게 통제하는 소금은 염인(鹽引)이라는 허가서를 받은 상인들만 운송과 판매를 할 수 있었다·
예로부터 소금은 큰돈이 되었고 거만의 부를 축적한 상단들은 대부분 염상이었다·
이게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염상이라고 해서 함부로 무시하면 안 되는 이유다·
하지만 나를 정말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유가상단은 그 유명한 휘주상인이었다·
만약 유가상단과의 거래가 성사된다면 비룡당을 대상으로 자강상단이 휘주상인들에게 내린 금표령(禁鏡令)을 단번에 무력화 시켜버릴 수 있다·
아마 거래는 쉽게 성사 될 것이다·
남궁세가의 은밀한 물밑 알선이 있었을 테니까·
뒤늦게 생각이 났는데 남궁소소의 어머니인 연화부인이 바로 유명한 휘주상인의 딸이었다·
남궁소소는 전혀 내색을 않고 있지만 이 모든 게 사실은 그녀가 만들어 온 그림이라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녀가 비룡당이 처한 상황과 문제점 그리고 해법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표국에 있었던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통찰력을 지녔는지 그저 놀라움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나를 찾아온 진짜 목적이 이것인 것 같았다·
말을 타고 헐레벌떡 달려온 것 역시 기쁜 소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알려주려고 그런 것이었고·
그것도 모르고····
“안 될까요?”
“안 되오·”
“왜요?”
내가 매우 좋아할 거라고 기대했다가 단숨에 거절해 버리자 살짝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미 표행 계획이 꽉 찼소·”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유가상단은····”
“미안하오·”
남궁소소는 한참이나 나를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말했다·
“눈치챘죠?”
“그렇소·”
“가끔 보면 진짜 산전수전 다 겪은 쉰 살 노인이 머릿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 같다니까·”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대체 왜 거절하는 거죠?”
“비룡당은 내 힘으로 키우고 싶소·”
“인맥도 힘이에요· 표국업계에선 매우 중요한 덕목이라고들 하던데·”
“유가상단은 소저의 인맥이지 내 인맥이 아니오·”
“대신 제가 귀하의 인맥이잖아요· 원래 인맥은 한 다리 두 다리 건너서 쓰는 거라고요· 그래서 인맥인 거고요·”
“소저는 내게 단순한 인맥이 아니라 고민을 함께 나누는 벗이오· 이런 식으로 이용하고 싶지는 않소·”
“사기나 치지 말아요· 그리고 걸핏하면 객원표사로 부려 먹더니 이제 와선 웬 딴소리래·”
“그것과는 다른 문제요·”
나는 그렇게 융통성 없는 사람이 아니다·
언젠가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먼저 손을 내밀 것이다·
하지만 유가상단이라는 패는 너무 컸다·
남궁소소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그런 큰 힘은 결정적인 순간 딱 한 번만 빌려 써야 하는 법이다·
“여전히 이해는 안 되지만 결정은 존중할게요·”
“고맙소·”
“그리고 오해하지 말아요· 다선초당에 오신 외종숙께서 마침 분타를 새로 내셨다기에 세옥 오라버니가 최고 실력의 표사들을 아는데 소개해 드릴까냐고 여쭈었고 외종숙께서 누구냐고 물으셨고···· 그런데 내가 이런 얘기를 왜 하고 있지? 아무튼 내가 귀하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녔다는 그런 망상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걱정 마시오·”
“그렇다고 내가 힘을 전혀 안 쓴 것도 아니에요·”
“알고 있소·”
유가상단주가 외종숙이었나 보다·
외종숙이면 연화부인의 사촌 오라버니쯤 될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에 나는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
“기왕에 해도 넘어갔는데 안으로 들어가서 술이나 한잔하고 가시오· 갈 때는 표사들 몇 명을 호위로 붙여 주겠소·”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왕대표가 포권지례까지 하며 불쑥 끼어들었다·
왕중표와 소표가 덩달아 포권을 쥐며 허리를 숙였다·
비룡당의 각주씩이나 되는 인간들의 허리가 저렇게 쉽게 구부러져서야·
호리독사도 그렇고 비룡왕삼도 그렇고·
남궁소소가 돌아가고 나면 연무장이나 몇 바퀴 돌려야겠다·
“김 샜어요· 그냥 갈래요·”
그러면서 남궁소소가 말고삐를 추려 잡았다·
나는 끝까지 범선은 다섯 척이 아니라 일곱 척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힘의 삼 할은 숨기라는 무림의 격언도 있거니와 큰 일을 하려면 반드시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비자금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때 인기척과 함께 가불염이 저만치 비룡당의 앞마당으로 들어섰다·
뒤로는 대여섯 명의 무인들이 더 따라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쭉 빠진 몸매에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예쁜 여자가 세 명이나 있었다·
등자에 한 발을 척 끼우고 말안장에 막 올라타려던 남궁소소가 그대로 멈추더니 물었다·
“저 여자들은 누구예요?”
“신입 표사들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