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 표두가 되다(5) >
면접의 기회를 얻기 위한 일차 관문은 간단했다·
표사를 지원한 사람들은 삼백 근이나 되는 통나무를 양팔로 들어 올려서 자기 어깨 위로 넘길 것·
쟁자수들은 물에 담갔다가 꺼낸 건초와 나무 부스러기를 각자가 알아서 한 줌씩 골라온 다음 부싯돌을 최대 열 번까지만 쳐서 불을 피울 것·
효과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표사고 쟁자수고 간에 한 식경이 넘도록 단 한 명의 통과자도 나오지 않았다·
두 식경이 지나고 세 식경이 지났지만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바글바글하던 지원자들 수가 빠르게 줄어들어서 좋기는 했다만 통과자가 너무 없으니 여기저기서 불만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표사를 지원한 사람들 중 장대한 체구의 털북숭이가 통나무에 깔렸다가 낑낑대며 나오더니 심사위원석 쪽을 향해 용기를 내 소리쳤다·
“거 문턱이 너무 높은 거 아닙니까? 그래봐야 표사일 뿐인데 삼백 근이나 되는 통나무를 대체 무슨 수로····”
“어어····”
털북숭이의 항의가 지원자들의 갑작스러운 함성에 묻혀 버렸다·
그의 뒤쪽에서 비룡왕삼 중 막내인 왕소표가 통나무 하나를 두 팔로 안아서 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무거웠던지 몸 전체가 동지섣달 비 맞은 개처럼 바르르 떨리고 목이며 소매 밖으로 드러난 팔뚝에서는 지렁이 같은 핏줄이 파바박 섰다·
쿵!
비록 죽을힘을 다했을망정 그는 기어이 통나무를 자신의 어깨 뒤로 넘기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털북숭이 사내를 돌아보며 도발적인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석 달 전에 들어온 비룡당의 막내 표사요· 할 말 있소?”
털북숭이는 물론이거니와 아직 백여 명이나 남은 지원자들 전부 합죽이가 되어 버렸다·
일부는 기가 질렸는지 슬그머니 일어나서는 아예 도전을 포기하고 가버리기도 했다·
문제가 된 것은 표사쪽 관문만이 아니었다·
쟁자수들 쪽에서도 한 사내가 실패를 하자 제법 강단 있는 태도로 심사위원석 쪽을 향해 말했다·
“감히 비룡당의 당주님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구태여 왜 젖은 나무 부스러기며 건초를 갖다 놓고 불을 피워 보라고 하시는 건지요?”
“강남은 일 년 삼백육십 일 중에서 백일 정도 비록 소나기일망정 비가 옵니다· 비가 오고 나면 꼬박 하루가 지나야 겨우 나무가 마르기 때문에 사실상 이백 일은 마른 나뭇잎을 구하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그런 날에도 표행은 계속되고 쟁자수들은 불을 피워야 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노파심에서 말씀드리자면 소인은 금룡표국에서 오 년간 쟁자수 노릇을 했습니다·”
금룡표국이라는 말에 잠시 장내가 술렁거렸다·
금룡표국은 최근 항주에서 급격하게 부상하고 있는 표국이었기 때문이다·
몇 달 전에는 이화원에서 진왕을 보호하는 일로 천룡표국과 부딪히기도 했던 바로 그 표국이었다·
사내의 말이 계속됐다·
“외람되오나 당주님께서는 아무래도 표행을 시작하신지 얼마 안 된 데다 처음부터 표사로 발을 들여놓으시다 보니 하찮은 쟁자수들 일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저자가 감히····”
평소 점잖기로 유명한 가불염이 발끈하며 일어섰다·
처음 보는 자가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은근슬쩍 주군을 멕이니 살짝 평정심을 잃은 것이다·
그러다 이종산의 옆에 앉아 있던 곽석산이 ‘커험’하고 헛기침을 하자 화를 억누르며 다시 앉았다·
표사로서도 최고 선배인데다 그 자신을 발탁해 천룡표국으로 데려온 사람 역시 곽석산이어서 가불염은 곽석산을 매우 어려워했다·
그런데 나는 사내의 ‘표행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라는 말보다 ‘하찮은 쟁자수들 일’이라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 자신도 쟁자수였다면서 말을 저딴 식으로 하다니·
저런 자가 선배 쟁자수로 있다면 밑에서 배우는 쟁자수들 역시 자존감이 낮을 수밖에 없다·
나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방금 당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이유로 오랜 경력의 쟁자수들은 작은 대나무 통 속에 목화를 다져 넣고 다닙니다· 그래서 불은 어떻게든 젖은 나무를 말려가며 땐다고 할지라도 일단 불씨는 목화로 일으키지요·”
“만약 상자수가 목화통을 잃어버렸다면? 혹은 여정이 생각보다 길어져 목화를 다 써버리고 없다면? 그리고 그때가 하필 눈 내리고 삭풍까지 부는 겨울 저녁이라면 어쩌시겠습니까?”
“대수롭지 않은 한 번의 실수로 무공을 모르는 쟁자수들 전부가 밤사이 얼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금룡표국에는 지난 십 년 동안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었나요?”
실제로 전생에서 그런 일이 몇 차례 있었다·
아마 표국업 전체로 따지면 겨울에 동사하는 쟁자수들의 숫자가 훨씬 늘어날 것이다·
동사까지는 아니지만 동상을 입어 손발가락을 잘라내거나 입이 돌아가는 경우는 기강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천룡표국 안에서도 매우 흔한 일이었다·
표행은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다·
십 리를 갈 때는 비바람에 대비하고 백 리를 갈 때는 춥고 더운 날씨에 대비하고 천 리를 갈 때는 생사에 대비하라는 말이 쟁자수들 사이에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적지 않은 쟁자수들이 겨울에 동상을 입어 평생 불구로 산다는 건 저도 겪어봐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방금 물에 담갔다가 꺼낸 건초와 나무 부스러기만으로는 누구라도 불씨를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그때쯤엔 대마장이 비룡당의 무과를 구경하러 나온 다른 당과 각의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전부 표사와 쟁자수들이었고 매우 흥미롭게 지켜보던 중이었다·
한데 대부분의 쟁자수들이 사내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일부 늙은 상자수들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특히 내 옆에 앉아 있던 용소백은 입술까지 씰룩거렸다·
그도 나처럼 쟁자수들 일을 우습게 보는 사내에게 살짝 화가 난 듯했다·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화가 났을 것이다·
전대 국주때부터 천룡표국에 몸 담아온 그야말로 한평생을 쟁자수 일에 바친 사람이었으니까·
아마도 자신의 삶을 통째로 부정 당하는 기분일 것이다·
그가 내게 말했다·
“잠깐만 시간을 주시면 소인이 저자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얼마나 개소리인지를 증명하고 들어오겠습니다·”
“상자수님까지 나설 필요 없습니다·”
“예?”
지원자들은 그렇다고 쳐도 천룡표국의 표사와 쟁자수들까지 대다수 저자의 말에 수긍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쟁자수들 일이 결코 하찮은 게 아니라는 걸 가르쳐 줘야겠습니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제가 나서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주님께서 어떻게 불을····”
“직접 보시지요·”
귀하게 자라신 공자님께서 어떻게 젖은 건초와 나무 부스러기로 불을 피우냐고?
이래 봬도 내가 전생에서 30년 동안 쟁자수를 했던 몸이시다·
나는 지원자들이 불을 피우려고 갖다 놓은 첫 번째 무더기로 갔다·
앞선 사람들이 계속해서 실패를 하다보니 건초며 나무 부스러기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것들을 뒤적이다 쑥대를 하나 찾았다·
당연히 물에 담갔다가 꺼냈기 때문에 살짝 젖어 있는 상태였다·
한번 바싹 마른 풀은 잠깐 물에 담갔다가 꺼낸다고 해서 절대 촉촉한 생초로 돌아가지 않는다·
쑥대를 양 손바닥 사이에 넣고 열심히 비볐다·
일체의 내공을 끌어 올리지 않고 오로지 손바닥의 힘으로만·
그러자 잠시 후 잎 부스러기가 전부 가루가 되어 떨어지고 누리끼리한 섬유질만 솜처럼 남았다·
손바닥의 마찰 열에 의해 쑥솜의 작은 습기조차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나는 쑥솜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작은 나무꼬챙이에 찍어 땅바닥에 쿡 꽂았다·
그런 다음 부싯돌을 집어 들었다·
탁탁!
단 두 번이면 족했다
쑥솜으로 튄 불똥이 불씨가 되고 다시 솔잎과 새 다리 같은 작은 나뭇가지들로 옮겨붙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와아아!”
구경을 하고 있던 쟁자수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한 시진이 넘도록 단 한 명도 성공하지 못해 답답해 죽으려는 찰나 내가 최초로 성공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음 무더기로 갔다·
소여물통 두 개쯤은 채울법한 무더기를 뒤져 보니 팔뚝만한 대나무가 나왔다·
당연히 말린 대나무였고 물에 한 번 담갔다가 꺼낸 것이었다·
강남으로 표행을 다니다 보면 가장 흔하게 만나는 것이 바로 대나무 숲이었다·
부싯돌의 날카로운 면으로 대나무 표면을 긁었다·
그러자 대나무 섬유질이 실처럼 가느다랗게 벗겨지면서 도르륵 말려 올라왔다·
스무 번 정도 긁어모으자 메추리알한 크기로 뭉쳐졌다·
탁탁!
이번에도 딱 두 번· 여지없이 불씨가 살아났고 금방 한 줌 정도의 크기로 불을 피우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또다시 터지는 함성·
“와아아!”
세 번째 무더기로 갔다·
이번에도 대충 뒤적거리자 손바닥만한 크기의 두꺼운 소나무 껍질이 보였다·
건초도 그렇지만 나무 역시 일단 바싹 마른 이상 물에 한 번 담갔다가 꺼내는 것으로는 절대 속까지 젖지 않는다·
소나무 껍질을 반으로 뚝 부러뜨린 다음 잘린 단면을 서로 세게 비볐다·
그러자 속의 마른 부위가 밀가루처럼 잘게 부서져 내리며 바닥에 쌓이기 시작했다·
탁탁!
이번에도 역시 두 번· 불똥이 불씨가 되고 불씨는 순식간에 작은 불이 됐다·
나는 그렇게 열 개의 무더기 중 여덟 개를 옮겨가며 전부 다른 방식으로 불을 피웠다·
이 정도면 지금 당장 비를 맞는 것이 아닌 이상 거의 모든 상황에서 불을 피울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한데 함성은 다섯 번째에서 절정으로 치달았다가 점점 잦아들었다·
뒤늦게 하찮은 쟁자수들이나 하는 일을 이렇게 완벽한 솜씨로 해내는 사람이 표사이고 나아가 당주이며 표왕의 넷째 아들이라는 고귀한 신분임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아홉 번째 불을 피우고 열 번째 무더기로 옮겨 갈 때 지원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 번쩍 손을 들고 일어섰다·
“마지막 한 개는 제가 붙여도 되겠습니까?”
스물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아직 자기 차례가 되려면 한참이나 남은 사람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쟁자수쪽 줄이 아니라 표사쪽 줄에 서 있었다·
“귀하는 표사쪽 지원자인 것 같소만·”
“혹시 불을 피우면 추가 점수라도 좀 주실까 해서요·”
지원자와 구경꾼들 사이에서 왁자지낄 웃음보가 터졌다·
부싯돌로 불 피우는 것이 보기에는 쉬워 보이니 새파랗게 젊은 친구가 물색 모르고 나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귀하가 이 불을 피운다고 해도 저 통나무를 자신의 어깨너머로 넘기지 못하면 탈락이오· 쟁자수를 지원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오·”
“허락을 해주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작지만 단단한 체구의 사내는 앞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걸어 나갔다·
이어 돌연 통나무를 잡고는 번쩍 들어다가 뒤로 홱 던져 버렸다·
“읏차!”
쿵!
생각지도 않았던 돌발행동에 그리고 그 결과에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뜨악했다·
좌중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심사위원석에 나란히 앉아 있던 곽석산과 손지백 황자충 양진각 유지평은 점점 재밌어진다는 듯 손으로 허벅지까지 치며 껄껄 거렸다·
이종산도 하얀 치아까지 드러내며 활짝 웃는 것이 간만에 재밌는 구경을 한다는 표정이었다·
사내는 또다시 종종걸음을 치며 마지막 남은 무더기 쪽으로 왔다·
그러더니 고민을 할 것도 없이 무더기 속에서 짤막한 명아주 막대기를 집어 들었다·
명아주는 본래 들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풀인데 가을이 되면 사람 키보다도 높이 자랐다가 바싹 말라 죽는다·
사내는 허리춤에서 싸구려 박도를 쓱 뽑더니 명아주를 반쪽으로 쩍 갈랐다·
그런 다음 칼끝으로 하얗고 푹신푹신한 명아주 속살을 잔뜩 긁어모아 부싯돌을 치기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단 네 번 만에 불똥이 옮겨붙어 불씨로 살아났다·
사내는 끝내 주먹만한 모닥불을 피운 후에야 손을 탁탁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며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다했습니다· 당주님·”
좌중이 다시 한번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함께 표행을 하지만 표사들은 의외로 쟁자수들 일을 잘 모른다·
반대로 쟁자수들은 표사들 일을 잘 알지만 무공을 모르기에 감히 흉내 낼 수가 없다·
그래서 쟁자수일을 흉내는 내도 두 번 손이 안 갈만큼 잘하는 표사를 찾기란 정말 어렵다·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표사에게서는 더더욱·
“쟁자수일을 해본 적 있소?”
“진운표국(陣雲鏡局)이라고 복건성 남쪽 끝에 있는 작은 표국에서 오(五) 년 동안 쟁자수 노릇을 했습니다·”
“일신에 상당한 무공을 지닌 것 같은데 어찌하여 쟁자수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오?”
“쟁자수 노릇을 하면서 언젠가 표사가 될 생각에 죽으라고 수련을 했습니다· 다행히 열심히 하는 제 모습이 기특하다 시며 국주님께서 무공을 가르쳐 주셨고요·”
“국주님께서?”
“표사와 쟁자수를 모두 합쳐 백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표국이다보니····”
사내가 민망한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좋은 국주님이셨던 것 같은데 왜 떠난 것이오?”
“표국이 망해버렸습니다· 국주님은 빚쟁이들을 피해 처자식들과 함께 해남도로 도망가 버리시고 저는 산속으로 들어가 오 년 동안 죽으라고 수련만 하다가 표사가 되기 위해 하산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운 좋게도 천룡표국에서 표사들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들었고요·”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목표와 신념을 가지면 그것만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남들과 다른 속도의 발전이 있다·
여기에 재능이 더해지면 그리고 만약 신념의 대상이 무공이라면 그중 일부가 절정고수도 되고 천하십검도 되고 하는 것이다·
“이름이 무엇이오?”
“독고완입니다·”
“독고완 귀하는 오늘부터 대천룡표국 비룡당의 신입표사요·”
“면접을 통과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미 다 치렀소·”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내는 허리가 부러져라 인사를 했다·
지켜보고 있던 천룡표국의 쟁자수들 사이에서 천둥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