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사천구룡방(9) >
성도의 서쪽 외곽에 몇백 년은 된 듯한 낡고 오래된 장원이 하나 있었다·
야트막한 산비탈에 지어진 이 장원의 전 주인은 차마고도를 통해 서장과 교역하던 마방주(馬常主)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역시도 불과 삼십 년 정도를 살다가 떠났을 뿐이어서 최초로 장원을 짓고 살았던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쪽 구석에 석등이라든가 종각의 흔적 등이 남아있어 처음 지어질 땐 작은 절간으로 쓰였을 거라고 짐작했다·
쉽게 말해 승이 떠나고 새로운 주인들이 계속해서 고치거나 증축을 하면서 다섯 배 정도 커진 것이 지금의 낡고 오래된 장원이었다·
대별산을 떠나 성도로 들어온 도화곡 제자 삼백 명은 바로 그 장원에 둥지를 틀었다·
청소를 하고 마당에 가득한 풀을 뽑고 부서진 문짝과 비 새는 지붕들을 수리했다·
게 중에는 남자들이나 할 것 같은 험하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도화곡에서도 늘 하던 일인지라 어려움 없이 척척 해냈다·
장원은 비록 좁고 낡았지만 그 나름의 고아한 멋도 있었다·
무엇보다 장원 한가운데 흐르는 맑고 시원한 냇물이 도화곡을 연상시켜서 좋다고들 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기뻐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부상자들이 모두 완쾌되길 기다렸다가 함께 기쁨을 나누려고 꾹꾹 참고 있었다·
어제의 전투로 말미암은 부상자는 모두 일흔아홉 명에 달했다·
쉰 명 정도만 후송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상처를 입고도 끝까지 버티고 선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일곱 명은 아직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곡주인 여종매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오늘 밤이 고비입니다·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해보겠지만 내장을 완전히 진탕 당하시는 바람에 이제는 스스로 회복하지 않는 이상 도리가 없습니다·”
칠순의 노 의원이 한 말이었다·
당문에서도 최고의 실력자를 모셔왔다고 했으니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알고 보니 여종매는 뇌정갑에게 일장을 맞은 후 피를 한 바가지나 토했다고 한다·
하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버티면서 성도 무림인들과 냉목풍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것이었다·
어제의 전투는 끝났지만 그녀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원엔 밤이 늦도록 횃불이 밝혀졌다· 삼백여 명의 제자들 모두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부상자들이 누워 있는 방마다 늙은 의원들이 대여섯 명씩 달라붙어 공언한 대로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다 했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의원들은 저승 문턱까지 넘었던 여섯 명의 멱살을 잡아끌고 다시 이승으로 돌아왔다·
모두가 기적이라고 했다·
“당분간 누워서 지내야 하겠지만 적절히 약만 쓰면 목숨엔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곡주님께선 아무래도 오늘을 넘기지 못하실 듯 합니다·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하시길····”
노 의원의 한 마디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가슴 졸이며 이틀째 밤을 새운 도화곡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어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나 오대장로들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는 듯했다·
이종산도 짐작한 일인 듯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그날 밤 여종매는 섭부용을 통해 이종산과 남궁세옥에게 잠시 자신의 처소로 들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해왔다·
나와 남궁소소도 함께 오라고 했다·
여종매는 푹신한 이불을 깐 의자에 반쯤 묻히듯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숯이 발갛게 익어가는 커다란 청동화로가 놓여 있었다·
다시 좌우에는 오대장로들과 팔대제자 일부 그리고 구대제자들 중 향주급 고수들이 모여 앉아 차분한 분위기에서 임종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서들 오세요·”
여종매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다만 실낱같은 목소리에는 기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가 이종산에게 말했다·
“우리 이만하면 잘 한 거겠지요?”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처음 도화곡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는 막막하기가 꼭 망망대해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국주님을 만나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곡주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여종매는 남궁세옥과 남궁소소 남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치 손자와 손녀를 바라보는 할머니처럼 자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들도 고생이 많았네·”
“저희 역시 영광이었습니다·”
남궁세옥이 포권을 쥐며 대표로 말했다·
남궁소소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지려는 걸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여종매가 옆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막하가 비단 보자기에 정성스럽게 싼 무언가를 가져와 남궁세옥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여종매의 말이 이어졌다·
“약속했던 천금풍의 비급이네· 원본은 그 자체로 도화곡의 보물인지라 부득불 필사를 했음을 조부님께 잘 말씀드려 주시게·”
이야기가 여정이 시작되기 전으로 돌아갔다·
애초 여종매는 도화곡의 성도 이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해주는 문파에게 천금풍의 비급을 주겠다고 했었다·
문파의 영혼과도 다름없는 비급을 내놓은 것은 정말 찢어지도록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남궁세가를 비롯한 여러 무림문파에서 표국을 동원해 입찰한 것이고·
남궁유룡은 천금풍에 남궁세가의 제왕검을 파해(破解) 하는 묘리가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해서 천금풍을 입수하고 연구한 다음 제왕검의 약점을 보완하려 한다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사히 도화곡을 이전한 지금 여종매가 약속대로 천금풍을 남궁세옥에게 준 것이었다·
남궁세옥은 가만히 비단 보자기를 풀었다·
이어 새로 필사를 하고 가죽끈까지 끼워 묶은 비급을 한 장 펼쳐 보지도 않고 그대로 청동화로에 집어넣었다·
비급은 순식간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이막하가 목구멍을 쥐어짰다·
모두 소스라치게 놀라서 불타는 비급과 남궁세옥을 번갈아 보았다·
남궁소소 조차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라버니를 노려보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남궁세옥이 미친 줄 알았다·
남궁세옥이 천천히 말했다·
“지금부터 곡주님과 여러 장로님들께 할아버지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남궁가는 천금풍이 다른 문파로 흘러 들어가는 걸 막은 것만으로 족하다· 부디 성도에서 번영창성(繫榮昌盛) 하시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치를 보아하니 표행을 떠날 때 남궁유룡이 이미 남궁세옥에게 당부한 말인 듯했다·
상상치도 못한 노 강호의 배포와 결단에 나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내가 이런데 당사자인 도화곡의 제자들은 어떻겠나·
오대장로와 팔대제자들 그리고 향주들은 순식간에 눈동자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순간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남궁세옥에게 쏠려 있는 틈을 타 여종매가 얼른 눈물을 훔치는 걸 놓치지 않았다·
여종매가 말했다·
“가주님의 배려는 감사한 일이나 천금풍을 받지 않으면 남궁세가는 손에 쥐는 것도 없이 거액의 표행비만 부담하게 되지 않겠나? 그건 우리로선 너무 염치없는 일이지·”
“애석하게도 남궁가는 표행비를 지급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천룡표국의 국주님께서 한사코 거절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이종산을 향했다·
하나같이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표정들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동원된 인력이며 치른 싸움이 얼마인데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겠다고?
이건 나 역시도 금시초문이어서 깜짝 놀란 얼굴이 되어 이종산을 바라보았다·
이종산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천룡표국은 중단한 표행에 대해 표비를 받은 역사가 없습니다· 표규에 따르면 오히려 실패의 책임을 지고 두 배로 보상을 해야 하지요· 하지만 비록 천룡표국은 실패했어도 도화곡은 실패를 하지 않았으니····”
“이보세요· 국주!”
“표규는 국주라고 해서 함부로 어길 수가 없습니다· 더는 불필요한 논쟁이 될 터 부디 말씀을 아끼십시오·”
여종매는 지금 남은 진기를 모두 쥐어짜 자신이 벌인 일들을 하나씩 정리하는 중이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금덩이보다 더 소중하다·
아끼고 또 아껴서 남은 말들은 제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데 써야 하지 않겠나·
여종매는 눈물이 글썽이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겐 섭섭한 말이 될지 모르겠으나 누구보다 자네가 없었으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네·”
“좀 더 안전하게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삼백의 제자들 중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다고 들었네· 천하의 누가 이보다 더 안전하게 호송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곡주님께서····”
여기까지 말을 하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남궁소소가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여종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 다 이리 가까이 오시게·”
나와 남궁소소가 그녀의 앞에 가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종매는 양손을 내밀어 우리 두 사람의 손을 하나씩 잡더니 말했다·
“참 예쁜 아이들이구나· 울지 말거라· 내 나이 벌써 팔순을 넘겼다· 어차피 가야 할 길 두어 해 앞서가는 것뿐이니라·”
후배를 대하는 듯한 말투에서 갑자기 제자나 사손을 대하는 듯한 말투로 바뀌었다·
“내게 원하는 것이 있더냐?”
남궁소소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사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끝나면 한 가지 부탁하려던 것이 있었다·
그건 사천성 성도에 천룡표국의 분타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한데 지금 그 얘기를 하면 쓰레기가 되겠지?
“저도 없습니다·”
“하면 내가 선물을 하나씩 주랴?”
“···?”
“···?”
여종매는 우리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놓더니 자신의 머리에 꽂아 놓은 복숭아 꽃가지 모양의 은잠(銀管)을 뽑아 남궁소소에게 주었다·
“이건 감히 제가 가질 물건이 아닌 듯합니다·”
“받아 두거라·”
남궁소소가 어쩔 줄을 몰라하며 남궁세옥을 돌아보았다·
남궁세옥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받으라는 뜻이었다·
남궁소소는 두 손으로 공손히 은잠을 받았다·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시집갈 때 꽂으면 좋으련만·”
“꼭 그렇게 할게요·”
남궁소소는 얼굴이 발개지면서도 씩씩하게 대답했다·
여종매는 이어 나에게 잠시 시선을 주더니 이종산을 돌아보며 물었다·
“국주께서는 아들이 많으시다지요? 해서 한 명은 제게 주십사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성도로 터전을 옮기면서 문규를 약간 손 보았는데 이제부터 속가제자만큼은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자라면 남자도 들이기로 했습니다·”
힘이 드는지 여종매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이 아이를 도화곡의 첫 번째 속가제자이자 저의 마지막 전인(傳人)으로 삼고자 합니다· 이 늙은이의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란 말인가·
이미 세상으로 나왔지만 여자들만 제자로 들인다는 문규가 있으니 본가와 구별하기 위해 속가를 따로 두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한데 왜 하필 나를?
속가제자가 되면 그 문파의 무공을 배우는 대신 일정 부분 헌신을 하거나 돈을 벌어다 바쳐야 한다·
하지만 천리만리 밖에 있는 내가 그럴 수는 없다·
여종매도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내게 도화곡의 무공을 주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천금풍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아마 내 경신공이 일신에 지닌 다른 무공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모자란 것을 눈여겨보았던 모양이다·
한마디로 속가제자가 되면 사실상 의무는 없고 혜택만 한 보따리 짊어지고 가게 된다·
게다가 장차 성도무림의 거목으로 성장할 도화곡을 사문으로 둔다면 든든한 배경이 되었으면 되었지 방해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또 하나· 무림문파의 제자들과 달리 세가의 혈족들은 다른 스승을 모시거나 하는데 딱히 제약이 없었다·
가령 화산파의 제자가 무당파의 제자로 들어가면 큰 문제가 되겠지만 남궁세가의 혈족인 남궁소소가 무당파의 제자가 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여종매의 파격적인 제안에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사전에 전혀 얘기가 없었는지 오대장로들조차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반대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살짝 웃기까지 하는 것이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기색들이 역력했다·
이종산이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말씀은 감사한 일이나 저의 자식을 제자로 들이시어 무공을 전수하신다면 남궁세가와 가주께 실례가 될까 두렵습니다·”
“남궁가주께서는 오히려 아주 좋아하실 걸요·”
“예?”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
알쏭달쏭한 말을 해놓고 여종매는 재밌는지 빙그레 웃기까지 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기는 나와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남궁세옥만큼은 무언가 짐작하는 바가 있는 듯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나는 가만히 남궁소소를 돌아보며 표정으로 저게 무슨 소린지 아느냐고 물었다·
남궁소소는 촉촉이 젖은 눈썹을 하고는 자기도 모른다고 미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쨌거나 싫지는 않으신 게지요?”
“그 무슨 말씀을· 못난 저의 자식에게 이처럼 큰 은혜를 베푸시니 아비로써 실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얼 하느냐 어서 사부님께 배사지례(拜師之禮)를 올리지 않고·”
이종산이 말미에 나를 돌아보며 조용히 협박했다·
여종매도 이종산도 내 의견 따윈 관심도 없었다·
구태여 도화곡의 제자가 되기 싫은 건 아니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거절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마침 쓸만한 경신공이 필요한 참이긴 했는데····
‘에라 모르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격식을 갖추어 아홉 번의 큰절을 올렸다·
여종매 역시 고개를 세 번 숙이는 맞절로 제자를 맞는 예를 취했다·
“병신년 칠월 초파일 항주부 동산평에서 태어난 이정룡이 사부님을 뵙습니다· 도화곡의 팔대 속가제자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사문의 명예를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오늘 하루 세상에 나처럼 행복한 노파는 없을 것이다· 내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천금풍의 구결부터 가르쳐 주마·”
여종매가 여기까지 말을 했을 때 이종산을 비롯해 남궁세옥과 남궁소소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종매를 향해 마지막 포권지례로 조용히 작별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문파의 구결이 전해지는 걸 외부인이 지켜보면 안 되기 때문이다·
방안엔 이제 나와 여종매 그리고 도화곡의 수뇌부 이십여 명만 남게 되었다·
여종매가 내게 말했다·
“천금풍의 첫 번째 구결은 왕희지가 남긴 말에서 따온 것으로 비인부전(非人不傳) 부재승덕(不才勝德)의 여덟 글자다· 너는 이 글귀의 뜻을 잘 알고 있겠지?”
“인간이 아닌 자에게는 전수하지 말고 재주가 덕 보다 앞서게 하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너는 심성이 올곧고 나보다 배움이 깊으니 중언부언하지 않겠다· 항상 지금처럼 초심을 잃지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나머지 구결은 비급과 사저들의 말씀을 통해 배우도록 하거라·”
하루라도 도둑질을 하면 죽을 때까지 도둑이다· 스승과 제자의 사이도 이와 같다·
하나를 가르치고 배웠어도 사승은 사승이다·
더구나 그 가르침이 평생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한 마디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때쯤엔 여종매의 눈동자에 깃든 촛불이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야말로 작별의 시간이 임박했음을 느낀 나는 가만히 포권지례를 하고 물러나려 했다·
그러자 이막하가 말했다·
“앉아 있거라· 너도 이제 도화곡의 제자니라·”
“예? 예·”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종매가 조용히 이막하에게 말했다·
“이보게· 오장로·”
“말씀하십시오· 곡주님·”
“이제부터는 자네가 곡주일세·”
“그 그게 무슨!”
“성도에서는 무공보다는 장사꾼의 지혜가 필요할 일이 훨씬 많을 것이네· 자네는 우리 중 세상 경험이 가장 많은 데다 상재도 뛰어나니 잘 할 수 있을 걸세·”
“하지만 칠대 사숙들께서 계신데 어찌 제게 그런 중책을····”
“새로운 도화곡은 자네처럼 젊은 사람이 이끌어야 해· 저 할망구들은 이제 너무 늙어서 밥 먹고 욕이나 할 줄 알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안 그런가들?”
오대장로들 중 네 명은 여종매와 같은 항렬인 칠대제자들이고 이막하만 팔대제자였다·
칠대에서 팔대로 넘어갔으니 사실 그리 파격적인 인사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빨은 제가 곡주 사저보다 많아요·”
“혹시나 우리 중 누가 막하를 죽이고 곡주 자리를 빼앗을까 봐 그러시는 거라면 염려 놓으세요· 젊었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럴 기력도 없어요·”
“여기 걱정은 말고 편안히 가세요· 노구를 이끌고 한 달이나 걸었는데도 멀쩡한 걸 보면 저는 좀 더 있다가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사저는 좋으시겠어요· 저승에서 사부님을 뵈면 도화곡을 무사히 옮기고 왔노라고 자랑하실 수 있잖아요·”
여종매는 다시 이막하에게 말했다·
“자네도 보았겠지? 저 할망구들이 얼마나 악담을 잘 하는지·”
“곡주님···”
“구대제자들은 젊으니 낯선 곳에서도 얼마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네· 하지만 저 할망구들은 틀려먹었어· 그러니 자네가 외롭지 않게 각별히 신경을 좀 써 주시게· 그래 봐야 몇 년 못 살 걸세·”
곡주와 장로라는 지위를 벗어 놓고 보면 이들은 작게는 50년에서 길게는 60여 년 동안 희노애락을 함께 한 사이였다·
때론 친구였고 자매였고 남편이기도 했던 사람들·
그런 세월이 단절되는 순간의 고통과 상실감이 어떠할지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럼 잘들 계시게·”
그 말을 끝으로 여종매는 마치 낮잠을 자는 것처럼 차분하고 조용하게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까지 담담했던 장로들을 시작으로 모두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이제야말로 친정 큰 언니 혹은 어머니와도 같은 그녀와 각자가 이별할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