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사천구룡방(8) >
꽝! 꽈과과광! 꽝! 꽝!
막강한 경파에 물보라가 천지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물벽이 대여섯 장까지 솟구치고 모래와 뒤섞인 물이 거죽처럼 일어나 상대를 향해 쏘아지기도 했다·
양 진영이 격돌하면서부터 두 사람이 주고받기 시작한 공방은 벌써 팔백여 합·
그 사이 여종매의 협봉검은 이빨이 죄다 빠져버려 톱날이 따로 없었다·
뇌정갑의 방천화극 역시 본래의 형상을 겨우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 날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일문의 문주이고 방주라는 사람들이 평범한 병기를 지니고 다닐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것은 병기를 통해 두 사람의 가공할 내공이 충돌하기 때문이었다·
어느 쪽도 아직 완벽히 승기를 잡지 못했다·
놀랍게도 은둔의 문파인 도화곡주 여종매는 흑도의 십대고수 중 한 명이라는 뇌정갑을 상대로 백중세를 이루고 있었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강의 양쪽에서 지켜보고 있는 수천의 무림인들과 언덕배기 위의 일만 군중 모두를 뜨악하게 만들었다·
꽝! 꽈광! 꽝꽝!
한데 구백여 합에 이르자 조금씩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변화무쌍하고 빠르고 아름다우며 비정한 여종매의 도화비검이 그 못지않게 변화무쌍하고 빠르고 잔혹무도한 뇌정갑의 화련소혼극(華達燒魂鼓)에게 조금씩 빈틈을 허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금풍!”
“네?”
“모래와 강물이 곡주님의 발을 묶고 있소·”
“아!”
남궁소소는 즉시 내 말을 알아듣고 신음했다·
남궁유룡이 아직 뇌검이라는 별호를 얻기 전 그는 도화곡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여종매와 칠주야 동안 대별산을 종횡무진 누비며 모두 다섯 번을 겨루었다·
그중 세 번을 이기고 두 번을 졌는데 패한 두 번 모두 여종매가 천금풍의 경신공을 함께 펼쳤을 때였다·
한데 지금 발이 푹쭉 빠지는 모래와 정강이까지 차오른 물이 그녀로 하여금 천금풍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었다·
“혹시 만세노조는 그걸 알고 일부러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도화곡과 가까운 곳에 있는 신창양가나 화양표국 중 한 곳이 어떻게 약점을 알고 정보를 흘려 주었을 것이다·
아니면 신창양가가 화양표국을 통해 알려주었거나·
그들이 이런 짓을 벌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표행이 실패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야 도화곡이 공중분해 되고 천금풍을 비롯한 신비로운 무공들이 세상으로 흘러나올 테니까·
문제는 우리가 이런 사실들을 짐작하고 있다는 걸 신창양가나 화양표국은 까맣게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명확한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뭐라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약 사실로 밝혀진다면 그들은 천룡표국이 나설 필요도 없이 남궁세가로부터 처절한 응징을 당할 것이다·
“그것까진 알 수 없소· 하지만 만약 천금풍을 펼칠 수 있었다면 만세노조는 도화곡주님의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나 천금풍을 펼칠 수 없는 여종매는 반대로 끝내 뇌정갑이라는 벽을 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여종매의 입에서 붉은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
무공이 경지에 이르면 외부를 쳐서 내부를 상하게 만들 수 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병기를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상하게 할 수도 있다·
여종매 역시 내가중수법으로 응수했을 테지만 약간의 격차로 말미암은 충격이 구백 합을 넘기도록 쌓이자 눈 덩어리처럼 커진 것 같았다·
꽈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여종매의 검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튕겨 나갔다·
휘청거리며 물러나는 그녀의 입에서 핏물이 쭉 뿜어져 나왔다·
뇌정갑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전신에 가득 찬 공력 때문인지 신법을 펼칠 때마다 물보라가 사방으로 일어났다·
“끈질긴 노파 같으니라고!”
허공으로 무려 일 장이나 솟구친 뇌정갑의 방천화극이 문자 그대로 벼락이 되어 여종매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절체절명의 순간·
꽝!
왼쪽 허공에서 번쩍이는 섬광이 나타나 방천화극을 때렸다·
방향이 꺾여버린 방천화극은 여종매를 아슬아슬하게 비켜나 강바닥을 찍었다·
여종매의 앞을 막아선 사람은 오대장로의 막내이자 팔대제자들의 맏이인 이막하였다·
그녀는 반격에 대비해 서너 장 밖으로 물러난 뇌정갑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여종매에게 물었다·
“곡주님!”
“비켜라!”
“소질이 상대하겠습니다·”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둘 다 죽여주마· 이 망할 할망구들아!”
사천구룡방의 결사대는 이제 쉰 명도 채 안 남은 상태였다·
당주들과 방주들이 배신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믿었던 통천방 출신의 수하들까지 파죽지세로 죽어 나가자 뇌정갑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그가 다시 물보라를 튀기며 달려왔다·
이막하도 마주 달려나갔다·
두 개의 그림자가 일 장 높이의 허공에서 하나로 격돌했다·
꽝! 꽈과과과광!
잠깐의 체공 상태에서 무려 여섯 번의 공방을 주고받고서야 각자가 스치듯 삼 장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뇌봉전별 (雷達電別)!
그야말로 우레처럼 만났다가 번개처럼 떨어진 격돌이었다·
한 번의 격돌이었지만 이막하 마저 뇌정갑과 백중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경험으로 말미암은 임기응변의 차이는 극명했다·
삼 장 밖으로 떨어져 내리는 순간 뇌정갑은 진각(震脚)을 밟으며 튕기듯 솟구쳐 왔다·
이어 체공 상태에서 몸을 비틀며 아직 반격의 자세를 취하지 못한 이막하의 가슴을 향해 방천화극을 벼락처럼 뻗었다·
대경실색한 이막하가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며 반격의 자세를 취하려 했다·
하지만 역시 모래와 물이 문제였다·
일촉즉발의 순간·
꽈앙!
굉음과 함께 이막하의 가슴을 노리던 방천화극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뒤쪽에서 날아든 여종매가 일검을 쳐서 떨어뜨린 것·
대신 한순간 그녀의 상체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노련한 뇌정갑은 그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죽어랏!”
뇌정갑의 좌장이 여종매의 가슴을 격타했다·
뻐엉!
굉음과 함께 여종매는 또다시 입으로 피를 뿌리며 튕겨 날아갔다·
그때 허공에서 그림자 하나가 뇌정갑의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협봉검을 머리 위로 쭉 뻗은 이막하였다·
방천화극과 좌장을 모두 출수한 그 찰나의 순간 뇌정갑의 머리 위쪽에 빈틈이 생겼던 것이다·
스캉!
뇌정갑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 그 상태에서 정수리부터 가랑이까지 ‘쩍!’ 하고 갈라져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쪽이 되어 철썩 넘어가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강물에 붉은 피가 번지고 내장으로 보이는 것들이 둥둥 떠올랐다·
뇌정갑의 일부였던 것들은 누구로부터 애도를 받을 사이도 없이 빠른 물살에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닥에 꽂혀 있는 방천화극을 잡은 손과 그 손에 연결된 다른 반쪽의 몸뚱어리는 흐르는 물살 방향으로 누운 채 아직도 매달려있었다·
한 인간의 집요함이 어느 정도까지 지독해질 수 있는지를 보는 것 같았다·
“곡주님!”
“곡주님!”
도화곡의 제자 수십 명이 서둘러 여종매에게 달려가 그녀를 에워쌌다·
그 바람에 바깥에선 그녀의 상태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한편 똑바로 서 있는 사천구룡방의 결사대는 이제 서른 명도 채 남지 않았다·
그에 반해 도화곡의 제자들은 아직도 이백오십 명을 그대로 유지했다·
승기가 확실하게 기울면서 더는 희생자가 나오지 않은 탓이다·
또 하나 쓰러진 사천구룡방의 흑도들은 죄다 죽거나 중상을 입고 죽어갔다·
그러나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도화곡의 제자 쉰 명은 모두 안전한 강기슭으로 빠르게 후송되어 당문 의원들의 집중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뇌정갑이 그만 지옥으로 가버렸다·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했다·
살아남은 사천구룡방의 흑도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마지막까지 오대장로들을 괴롭혔던 흑갈자 노청봉과 각주급 고수들을 시작으로 하나둘씩 칼을 버렸다·
이어 양손을 뒤통수에 붙이더니 모랫바닥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한 식경에 걸쳐 펼쳐졌던 처절한 전투가 마침내 도화곡의 압승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강의 양쪽에서 지켜보는 수천 무림인들과 언덕배기 위에서 구경하던 일만 군중은 모두 공황 상태에 빠져 버렸다·
뇌정갑이 저렇게 허무하고도 비현실적으로 죽어버릴 줄도 도화곡이 이렇게 압도적으로 사천구룡방의 결사대를 몰살해 버릴 줄도 까맣게 몰랐던 탓이다·
그 무렵 향주들과 오대장로들을 비롯한 도화곡의 모든 수뇌부는 상처를 입어 쓰러진 여종매에게 가 있었다·
수천 무림인들과 일만 군중의 시선 또한 여종매를 에워싸고 있는 도화곡의 제자들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쥐죽은 듯한 침묵이 흐르길 잠시 도화곡의 제자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옆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초췌할망정 꼿꼿하게 서 있는 여종매와 웃으며 그녀의 곁을 지키고 선 이막하였다·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뇌정갑의 장법이 어디 보통 장법이겠나·
십중팔구 양패구상으로 죽었을 거라 생각한 그녀가 멀쩡하게 살아있으니 놀라자빠질밖에·
여종매는 이막하와 함께 내가 인질들을 잡고 있는 강 이쪽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도화곡의 제자들 전부가 그녀들을 따라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여종매가 협봉검을 오른쪽 아래로 늘어뜨린 채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외쳤다·
“도화곡의 제자들은 사곡천을 건너 성도의 장원으로 들어가려 하외다· 이를 막아서려는 곳이 있다면 지금 당장 나서서 실력을 보이시길 바라오!”
대기가 떵떵 울리는 것이 내상을 입은 사람이라곤 믿어지지 않을만큼 웅혼한 내공이었다·
어느 문파의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는 상황에서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나는 그제야 인질로 잡고 있던 뚱보 노인을 놓아주었다·
나를 따라 서호삼견과 호리독사 남궁소소 당군백 두소부도 차례로 인질들을 놓아주었다·
이 상황에서 만약 우리를 해치려고 든다면 그거야 말로 정말 미친 짓이다·
천룡표국과 사천당문과 청성파를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는 뜻이니까·
그때 사천구룡방의 일당주인 혈염도 냉목풍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물가에 이르러 강 건너 모래섬의 여종매를 향해 공손히 포권지례를 한 후 말했다·
“방규에 따라 사천구룡방의 새로운 방주가 된 냉목풍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성도의 무림문파들을 대신해 도화곡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와아아아아!”
동시에 터져 나오는 일만 군중의 함성·
냉목풍의 말은 사실상 조건 없는 항복을 선언한 것이었다·
덧붙여 20년 넘게 이어진 사천구룡방의 독재와 폭거가 종식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일만 군중이 도화곡의 성도 입성을 산천초목이 떠나갈듯한 함성으로 환영하는 이유였다·
도화곡 제자들의 얼굴에 들불처럼 번져가는 환희와 기쁨의 표정을 나는 아마 평생토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래섬 위에 서 있는 이백오십 명의 여자들과 강 건너 기슭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오십여 명의 여자들은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가까스로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모르는 나만의 감격스러움이 있었다·
전생에서 도화곡은 화양표국과 함께 여정을 시작해 결국 성도에 도착한다·
하지만 화양표국은 이백 대 분량의 수레에 싣고 온 온갖 짐들만 장원에 부려 놓고는 떠나 버렸다·
밀림과도 같은 성도에 홀로 남은 도화곡의 제자들은 채 반년이 지나지 않아 절반가량이 죽었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이후 흑도의 고수들이 도화곡의 신비로운 무공비급을 구술받기 위해 흩어진 제자들을 추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생애에서는 그럴 일이 없을 것 같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표사가 된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그때 남궁소소가 나를 돌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알아요· 귀하가 이 일에 얼마나 헌신적인 노력을 쏟아부었는지· 그리고 아마 도화곡의 제자들도 모두 알 거예요·”
남궁소소의 말에 서호삼견과 호리독사 당군백 두소부가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들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부터는 우리를 찾지 말게· 매번 느끼는 거지만 자네는 너무 위험해·”
“특별수당 챙겨주는 거 잊지 말고·”
“간단한 일들은 깔짝깔짝해도 되지 않을까요?”
“저는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일견 이견 삼견 호리독사가 차례로 한 말이었다·
“우리에게는 보은패를 이미 써 버렸으니 어쩌나?”
“전 그래도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돕겠어요·”
“군백이 이렇게까지 누굴 신뢰하는 건 처음 보는 걸· 부럽군·”
두소부와 당군백 그리고 다시 두소부가 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