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 사천구룡방(6) >
당군룡 제운학 당군백 두소부가 일제히 말에서 내리더니 이종산과 여종매의 앞으로 다가갔다·
“사천당문의 당군룡입니다· 천룡표국과 도화곡을 도우라는 가주님의 명을 받고 달려오는 길입니다· 다행히 늦지는 않은 것 같군요·”
“청성파 십칠대 제자 제운학 두 분 노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천룡표국과 도화곡을 도우라는 장문인의 명령을 받들어 사형제들을 이끌고 왔습니다·”
“당군백입니다·”
“두소부입니다·”
당군백과 두소부는 앞선 두 사람의 인사에 그대로 숟가락만 얹었다·
두 사람까지 격식을 갖추기에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종산과 여종매가 차분하게 답례를 했다·
“어려운 걸음들을 해주어 고맙네·”
“도화곡주 여종매입니다· 당문과 청성파에서 보여준 호의를 잊지 않겠습니다·”
어른들을 향한 네 사람의 인사가 끝나자 남궁세옥이 다가오더니 돌연 당군룡과 제운학에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두 분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오랜만이네· 세옥·”
“5년 만에 보는 건가?”
남궁세옥은 무림맹 용봉지회의 전임 회주였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당군룡과 제운학 역시 젊은 시절 용봉지회의 일원이었던 모양이었다·
뒤이어 남궁소소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고 당군백과 두소부도 남궁세옥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군백과 두소부와 남궁소소가 반갑다며 한층 격의 없는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대충 순서가 끝나자 당군백과 두소부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로 달려왔다·
“정룡!”
“선배님!”
“두 분께서도 오실 줄 몰랐습니다·”
“무슨 소린가· 생명의 은인이 위기에 처했다는데 당연히 와야지·”
“두소부 선배님 말씀이 맞아요·”
“고맙습니다· 당 소저도 고맙소·”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당군백의 얼굴이 어쩐지 빨개 보였다·
이틀 전 당군룡이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설마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당군백과 두소부는 서호삼견과 호리독사와도 반색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이견도 두 사람을 향해 그렇게 안 봤는데 의리가 있다느니 하면서 추켜 세워주었다·
두 사람과 서호삼견 그리고 호리독사는 일전에 백발노성을 무림맹까지 호송하며 몇차례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긴 사이였다·
인사를 끝낸 당군백과 두소부가 도검을 뽑아 들며 나란히 섰다·
이렇게 해서 내 옆에는 서호삼견과 호리독사는 물론이거니와 당군백· 두소부 남궁소소까지 서게 되었다·
음? 남궁소소?
“언제 옆으로 온 거요?”
“조금 전에요·”
“비검대와 함께 싸우는 것 아니었소?”
“거기나 여기나요· 그것보다 우리가 밤늦도록 함께 찾아다니며 동참을 호소했던 방파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건가 봐요·”
“사천구룡방 쪽으로 넘어가지 않은 것도 소득이라면 소득이니 너무 실망하지 마시오·”
“알았어요·”
이렇게 해서 강 이쪽의 전력은 순식간에 팔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수적으로야 아직도 한참 열세였다·
하지만 당문과 청성파의 고수들이 가세한 것이고 보면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표사들과 도화곡 제자들의 눈동자에서 이제는 한번 해볼 만하다는 투지가 끌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강 건너 뇌정갑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대갈일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 쓸어 버려라!”
“와아아!”
엄청난 함성과 함께 적 진영의 선두가 성벽처럼 허물어졌다·
앞쪽 무인들부터 우르르 뛰쳐나와 강을 건너오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쪽 진영은 새로 가세한 당문과 청성파의 제자들이 좌우 날개를 맡아 주면서 검진이 더욱 크고 공고해진 상태로 기다렸다·
마른 침이 꼴깍 넘어가고 검을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이종산의 입에서 공격을 개시하라는 명령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 사이 적 선두는 강 중앙에 있는 모래섬에까지 닿았다·
그때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선두의 이백여 명 외에는 아무도 도강을 하지 않은 것이다·
놀랍게도 나머지 이천팔백여 명은 원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마치 넓은 접시 바닥에 찰랑찰랑 담겨 있던 물이 탁자 위로 조금 흘러 내려 따로 떨어진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강을 건너 모래섬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사천구룡방주 뇌정갑과 이당주인 흑갈자(黑編子) 노청봉 그리고 두 사람을 따르는 충성스러운 무인들이었다·
짐작하건대 저들은 모두 과거 사천구룡방이 구룡으로 존재하던 시절 통천방의 방도였던 자들일 것이다·
무언가 낌새를 알아차린 뇌정갑과 노청봉이 진격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강변에 남은 사람들은 사천구룡방의 여덟 당주들과 그의 수하들 그리고 열입곱 개 방파에서 끌어모은 무인들 전부였다·
나는 일당주 냉목풍이 내 제안을 받아들였음을 깨달았다·
유추를 해보자면 그는 내가 떠나고 난 후 포악한 방주와 이당주에게 반감을 품은 당주들과 방주들을 찾아다니며 포섭을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와 만난 이야기 사천당문과 청성파가 개입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졌을 것도 분명했다·
모르긴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갈등한 당주나 방주들이 있었다면 사천당문과 청성파의 등장이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우리 작전이 성공했어요·”
“그러게 말이오·”
나와 남궁소소는 가슴이 벅차오른 나머지 얼싸안고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서호삼견도 감개무량한 표정들이었다 ·
천룡표국의 표사들과 도화곡의 제자들 비검대의 고수들 당문의 무인들과 청성파의 제자들까지 모두 어리둥절해 했다·
이 작전의 시작과 끝을 알고 있는 수뇌부 즉 이종산 여종매와 오대장로들 섭부용 그리고 남궁세옥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와 남궁소소를 보았다·
정말로 해낼 줄은 아무도 몰랐던 모양이다·
이종산이 나를 향해 굳게 다문 입술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잘했다’라고 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한편 모래섬에 올라간 뇌정갑과 이백여 명의 무인들은 말 그대로 하나같이 넋이 나가버린 것 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뇌정갑이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물었다·
“냉목풍 너의 짓이더냐?”
“우리 모두의 뜻입니다·”
“하지만 방주는 네가 되려고 하겠지?”
“당신은 무공은 고강할지 모르나 구룡을 품을 만한 그릇이 못 됩니다· 우리는 성도무림의 새로운 질서를 위해 도화곡과 공존을 모색해 보기로 했습니다·”
“묘족 계집 때문이 아니고?”
“놀라는 걸 보니 맞는 모양이군·”
뇌정갑은 이어 다른 당주들을 쓸어 보며 말했다·
“다들 내가 죽기를 바라고 또 바라야 할 것이다· 만약 살아서 돌아간다면 네 놈들의 눈알을 뽑고 사지를 토막낸 다음 돼지우리에 던져 줄 것인즉· 음하하하하하!”
엄청난 광소에 대기가 떵떵 울렸다·
각주급 이상의 고수들이 타고 온 말들이 고막이라도 터졌는지 팔짝팔짝 뛰기 시작했다·
광소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기마술의 고하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말들은 단 한 필도 남지 않고 픽픽 쓰러져 버둥거렸다·
내공이 약한 사람들도 귀를 틀어막거나 코피를 쏟아냈다·
모래사장 뒤쪽의 언덕배기에 앉아 있던 군중 속에는 살 맞은 참새처럼 픽픽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제야 뇌정갑이 웃음이 뚝 그쳤다·
그의 가공할 공력에 적아를 구분할 것 없이 모두 아연실색했다·
강 건너의 진영을 향해 광소를 터뜨렸기에 망정이지 이쪽을 향해 터뜨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꼭 당한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종산도 얼마든지 내공이 실린 사자후로 응수했을 테니까·
아니면 직접 검을 뽑아 들고 날아가 그의 목을 베어버렸던지·
이윽고 뇌정갑이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이보시오· 표왕! 상황이 이런데도 거기서 검진만 펼치고 있을 것이오? 산중 노파는 배짱이 없는 듯하니 이리와서 사내들끼리 어느 한 쪽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실컷 싸워 봅시다!”
상황이 역전되었다·
저쪽은 고작 이백 명 남짓· 그에 반해 이쪽은 네 배인 팔백여 명을 헤아린다·
고수의 숫자도 압도적으로 많다·
개전 명령이 떨어지면 적들은 순식간에 쓸려나갈 것이다·
뇌정갑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이종산과 자웅을 겨루겠지만 나는 이종산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이종산이 검을 뽑아 들고 개전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잠깐만!”
갑자기 막아선 사람은 여종매였다·
그는 이종산에게로 다가오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 힘으로 강을 건너겠습니다·”
“곡주님!”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압니다· 하지만 성도는 우리의 여정 중에 있는 도시가 아닙니다· 최종 목적지이지요·”
여종매는 강 건너로 천천히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저길 좀 보세요· 성도의 수많은 무림문파와 무림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고작 첫 걸음조차 우리 힘으로 떼지 못하고 다른 문파들에게 의지를 한다면 도화곡은 영원히 성도에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겁니다·”
도화곡의 제자 삼백 명만 물을 건너 모래섬에서 뇌정갑이 이끄는 이백의 결사대(?)와 끝장을 보겠다는 뜻이다·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여종매의 말은 너무나 타당해서 뭐라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비록 산중에서만 살았어도 일문의 존장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한데 그렇게 하면 도화곡 제자들의 희생이 적지 않을 것이다·
여종매가 그걸 모르지 않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을 한다는 건 이미 단단한 결심이 섰다는 걸 의미했다·
모두의 시선이 이종산을 향했다·
그는 모래섬을 넘어 건너편 강변에 운집한 이천팔백여 명의 무인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그 너머의 언덕에 새까맣게 앉아 있는 군중들도 살폈다·
잠시 후 결심이 선 듯 그가 시선을 거두었다·
이어 비장한 표정을 짓고는 여종매가 아니라 천룡표국의 표사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천룡표국은 여기서 표행을 중단한다· 고로 지금 이 순간부터 천룡표국의 모든 표사들은 표물을 호위하고 호송하는 일에서 손을 뗀다·”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표행의 중단은 곧 표행의 실패를 의미했다·
한데 이종산은 일생을 통틀어 단 한 번의 표행도 실패해 본 적이 없었다·
한번 받은 의뢰는 반드시 완수하고야 마는 지독한 근성과 놀라운 실력이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만들었고 강호인들은 오직 그에게만 표왕이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한데 지금 스스로 그 대기록을 깨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가장 잘 아는 나와 양진각이 동시에 외쳤다·
“아버지!”
“국주님!”
“잠깐만 시간을 주시면 소자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표행을 중단하시겠다는 말씀만큼은 제발·”
“너는 이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아비를 일구이언하는 사람으로 만들 셈이더냐?”
“대체 왜!”
“나는 한 번도 내 명성이나 기록을 위해 표행을 한 적이 없다· 다만 의뢰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떤 경우에도 포기를 하지 않았을 뿐·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든 오늘의 이 결정이 나를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남은 하루의 여정은 대별산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날짜를 전부 합친 것보다 더 어렵고 위험했다·
이종산은 지금 그 하루만큼은 오로지 도화곡의 힘으로 가는 걸 수많은 강호인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려는 것이다·
문득 남궁세가에서 처음 이 의뢰를 받았을 당시 ‘문파는 보통의 표물과 달라서 안전하게 뿌리를 내릴 때까지가 표행의 완성이다’라고 일갈하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역설적이게도 이종산은 지금 표행을 완성하기 위해 실패를 선언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쑥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이종산의 입장이라면 이런 생각과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이종산은 여종매를 향해 포권을 쥐며 말했다·
“부디 무운을 빕니다·”
여종매도 마주 포권을 쥐며 예를 갖추었다·
“천룡표국에서 본 곡에 보여주신 헌신과 호의는 죽어서도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여종매는 이어 천룡표국의 표사들과 남궁세옥을 비롯한 비검대의 고수들 그리고 나와 객원표사들에게도 일일이 포권지례를 올렸다·
그녀의 뒤쪽에서는 오대장로를 비롯해 도화곡의 모든 제자들이 여종매를 따라 똑같이 포권지례를 하고 있었다·
남궁세옥 당군룡 제운학 남궁소소 당군백 두소부 등등·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숙연한 표정이 되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호리독사가 내게 다가와 술 냄새를 확 풍기며 속삭였다·
“놈들의 동태가 수상합니다·”
“뭐가 말이오?”
“저기 좀 보십시오·”
강 건너 모래사장에 집결해 있던 이천팔백여 명의 무인들이 크게 술렁이고 있었다·
특히 열일곱 개 방파의 방주들은 방주들끼리 사천구룡방의 당주들은 당주들끼리 모여 무언가 심각한 얘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무슨 작당을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저것들이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려고!”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나는 도화곡의 제자들 중 아무에게나 다가가 초립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강 건너의 적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 냅다 뒤쪽의 숲으로 들어갔다·
숲을 통해 강 하류의 굽이진 곳까지 경신공을 펼쳐 달려갔다·
그런 다음 놈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재빨리 강을 건넜다·
이어 강변 모래사장 뒤쪽의 송림으로 다시 들어갔고 최대한 빠르고 은밀하게 이천팔백여 명이 모여 있는 적 진영으로 숨어드는 데 성공했다·
십칠 개 방파에서 닥치는 대로 끌어들였다 보니 자기들끼리도 모르는 사람 천지일 거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주변을 살피는데 때마침 저쪽에서 누군가 커다란 가마솥에 만두를 쪄서 나무통에 담는 게 보였다·
주위엔 그런 나무통을 들고 돌아다니며 원하는 이들에게 나눠주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나는 얼른 새 만두가 든 나무통을 집어 들었다·
천만다행으로 당주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다가갈 때까지도 누구 하나 제지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쯤엔 천천히 강을 건너고 있는 도화곡의 여제자들 삼백 명에게 모두 정신을 빼앗긴 상태였다·
나는 이따금 만두를 나눠 주면서 최대한 당주들의 뒤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잠시 후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또렷이 들리기 시작했다·
대화는 다른 당주들이 일당주인 냉목풍을 다그치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삼당주의 말씀이 맞습니다· 표왕이 표행중단을 선언해 버린 이상 당문과 청성파도 함부로 끼어들 수 없습니다· 도화곡은 몰살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방주께서 살아서 다시 강을 건너오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린 죽은 목숨입니다·”
“만약 방주께서 살아 돌아온다면 힘을 합쳐 싸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가장 앞줄에 설 테니 염려들 마십시오·”
“싸우면 이길 수는 있고요?”
“우리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사천구룡방의 내전입니다· 열일곱 개 방파의 방주들이 우리를 도와줄 것 같습니까? 고작 삼백으로 방주를 상대해야 합니다·”
“도화곡과의 격전으로 상당수가 죽을 테니 여전히 우리의 숫자가 훨씬 많을 것입니다·”
“20년 전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그때도 구룡 중 최약체라고 생각했던 통천방이 고작 여드레 만에 나머지 여덟 개 방파를 쓸어 버렸습니다·”
“우리야말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이제 와서 참전한다고 해도 방주께서 우릴 살려 주실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우리가 참전하면 십중팔구 천룡표국을 다시 끌어들이게 될 겁니다· 하면 당문과 청성파가 구경만 하고 있겠습니까?”
“방주에게 묘족 계집을 빼앗긴 분노 때문에 이러시는 게 아니고요?”
“뭐요?”
“애초부터 당신을 믿고 일을 꾸미는 게 아니었어· 만세노조께서 방주가 된 세월이 무려 20년이오· 얼음 두께 석 자는 하루 추위로 언 것이 아니거늘!”
좌중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여덟 당주들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머지 일곱 명의 당주들이 냉목풍을 잡아다 뇌정갑에게 제물로 바치며 용서라도 구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끝장이다·
그 순간 깡깡 소리가 소나기처럼 울려 대기 시작했다·
모래섬 위에서 도화곡의 제자 삼백과 뇌정갑이 이끄는 이백 결사대가 마침내 격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일곱 명의 당주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칼을 뽑았다·
나는 이동을 하는 척하며 삼당주로 보이는 자의 뒤쪽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무언가 낌새를 느낀 그가 벼락처럼 돌아서며 칼을 휘둘렀다·
나는 만두통으로 검을 받아 꺾어 부러뜨리는 한편 운철검으로 그의 하복부를 사정없이 그어 버렸다·
동시에 반대쪽으로 신형을 쏘며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그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이어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틀어쥐고 오른손에 든 운철검으로는 목을 감는 데 성공했다·
“모두 움직이지 마!”
주변이 대번에 벌집을 건드린 것 같았다·
나는 삼당주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며 당장에라도 목을 그어버릴 것 같은 시늉을 했다·
“다들 삼 장 밖으로 물러나·”
“모두 시키는 대로 해· 어서!”
보다 못한 삼당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잠깐 사이에도 그의 배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사람들이 뒤로 다급하게 물러나면서 내 주위로 동그란 공터가 생겨났다·
삼당주가 목을 잡힌 상태에서도 물었다·
“네 놈은 누구냐?”
“닥치고 있어·”
“알았으니· 일단 배를 좀 치료하게 해다오·”
“그만하길 다행인 줄 아시오· 깊지 않게 그었으니 망정이지 뱃가죽을 잘라냈다면 지금쯤 창자를 쏟아내며 죽었을 것이오·”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
“정 급하면 뱃가죽이라도 잡고 계시든가·”
그때 내 목소리를 알아본 냉목풍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목구멍을 쥐어짰다·
“너는 설마···?”
“제가 경고했잖습니까· 전투가 벌어지면 가장 먼저 당주들 숨통부터 끊으러 갈 것이라고요·”
“지금 우리가 참전한 것으로 보이나?”
“제가 이러지 않았다면 참전을 했겠지요·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다들 한 걸음도 함부로 옮기지 말라고 전하십시오· 안 그러면 이자는 죽습니다·”
그때 뚱보 노인이 소리쳤다·
“사당의 궁수들은 저놈을 향해 화살을 겨눠라· 내 명령을 기다리지 않아도 좋다· 누구든 기회가 엿보이면 뒤통수든 등짝이든 쏴 버···!”
뚱보가 말을 하다말고 표정이 굳었다·
그의 목 밑에도 시퍼런 칼 한 자루가 붙었기 때문이다·
칼 쥔 손의 주인은 놀랍게도 일견이었다·
“각주가 표사들을 두고 가면 어쩌자는 건가?”
그러면서 일견이 뚱보 노인을 앞으로 밀고 나왔다·
한데 사로잡힌 사람은 뚱보 노인뿐만이 아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여섯 명의 다른 당주들도 옆구리며 등에 칼을 붙인 채 앞으로 밀려 나왔다·
그들의 뒤쪽에는 이견 삼견 호리독사 남궁소소 당군백 두소부가 각각 칼을 들이대고는 금방이라도 찔러 죽여버릴 것 같은 위협적인 행동을 취했다·
내가 삼당주를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다른 당주들을 뒤로 물러나게 한 것이 의도치 않게 신의 한 수가 되었다·
그 바람에 흑도들 틈에 섞여 있던 저들이 힘들게 접근할 필요도 없이 바로 등이며 옆구리에 칼을 들이댈 수 있었던 것이고·
“어휴 저 개 또라이 같은·”
“이정룡이요?”
“이건 진짜 특별수당 줘야 해!”
“둘째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잔뜩 흥분한 이견과 삼견이 주고받은 대화였다·
여기에 두소부도 한입 보탰다·
“아직도 이러고 다니십니까?”
당군백은 행여라도 적들에게 빈틈을 보일까 봐 인질을 방패 삼아 이쪽저쪽을 돌았다·
남궁소소 역시 인질을 사로잡은 채 얼른 내 등에 자신의 등을 붙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천구룡방의 일곱 당주가 인질로 사로잡혔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당주들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사천구룡방의 흑도들까지 모두 공황상태에 빠져 버린 것 같았다·
당주들을 모두 사로잡았으니 사천구룡방이 참전할 일은 이제 없다·
그때부터 내 신경은 온통 모래섬 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격전에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