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 사천구룡방(4) >
“만약 농간을 부리는 것이라면 너는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냉목풍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의심의 씨앗을 뿌리는 데 성공했다·
하오문의 정보에 따르면 당주들이 따로 주머니를 차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단지 당주들을 징치할 필요가 있을 때 자금을 끊거나 족치기 위한 구실로 쓰일 뿐·
냉목풍은 방주가 묘족 여인을 독차지하기 위해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생각을 조금씩 키워 갈 것이다·
이제 두려움의 씨앗을 심을 차례였다·
“진위는 알아서 확인해 보시면 될 터· 저는 다만 신뢰의 증표로 책자를 드리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제가 원하는 걸 말할 기회를 얻는 값으로는 충분한 것 같습니다만·”
“기회를 주지·”
“귀 방의 방주께서 무림인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모아 무려 삼천 명을 만드셨더군요· 한데 그들 모두가 정말 아군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그게 무슨···?”
“전면전이 벌어지면 미리 약속해둔 스물일곱 명의 고수들이 각 세 명씩 동시에 당주들의 등을 노릴 것입니다· 일당주님은 특별히 제가 직접 지옥으로 보내 드리죠·”
냉목풍의 눈동자에서 대번에 가공할 살기가 피어올랐다·
내 목에 붙은 독산쌍도의 칼에서도 힘이 느껴졌다·
나 역시 냉목풍을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것처럼 노려보며 말했다·
“살고자 한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오늘 밤 첩들을 데리고 조용히 성도를 떠나시든가 아니면 저를 도와 포악한 방주를 죽이고 새로운 방주가 될 방법을 강구해 보시든가·”
“네 놈이 내 근처에라도 올 수 있을 듯싶으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좌수를 벼락처럼 바깥으로 휘두르며 독산쌍도의 손목을 쳐냈다·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그의 머리통을 통째로 잡아 탁자로 힘껏 내리쳤다·
쾅!
탁자에 안면을 정통으로 부딪힌 독산쌍도의 머리가 살짝 올라오는 순간 뒤통수에다 대고 다시 벽돌 깨듯 주먹을 내리쳤다·
퍼뻑!
피칠갑이 된 얼굴로 비칠비칠 물러난 독산쌍도는 벽에 등을 부딪친 후 털썩 주저앉았다·
손에는 여전히 두 자루 칼이 들려 있었지만 지팡이만도 못 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남의 목에 칼 함부로 붙이다 죽는 수가 있소·”
수하가 피칠갑이 되어 까무러치는데도 냉목풍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깨는 부르르 떨렸으며 얼굴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눈동자에선 경악의 빛이 어렸다·
목과 양쪽 쇄골이 만나는 곳에서 세 치 아래에 있는 마혈 이른바 천돌구곡혈(天突九谷穴)에 비격쌍뇌창 한 자루가 꽂혀 있기 때문이었다·
남궁소소는 말했었다·
“천돌구곡혈은 정수리를 통해 내려온 우주의 기운이 인체를 돌고 있는 아홉 개의 기운과 만나는 마혈이에요· 언제나 그렇지만 점혈(點穴)보다는 타혈(打穴)이 위력적이고 타혈보다는 침혈(銳穴)이 훨씬 더 무섭죠·”
그리고 덧붙였었다·
이 혈자리를 찾아 바늘로 정확히 찌르기만 하면 천하제일인도 나무토막으로 만들 수 있다고·
냉목풍 같은 고수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은 내가 암기를 출수하는 동작을 전혀 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깥에 경계무사들이라도 있었으면 독산쌍도가 탁자에 얼굴 박는 소리를 듣고 달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알아서 멀리 쫓아버리는 바람에 나만 수월해졌다·
나는 한 손을 쭉 뻗었다·
쑥 빠진 비격쌍뇌창이 순식간에 내 소맷자락 속으로 들어왔다·
그제야 냉목풍의 몸이 자유로워지며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헉헉헉·····”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대체 어떻게····”
냉목풍의 눈에는 내가 마치 격공섭물이라도 펼친 것처럼 보일 것이다·
호리독사도 뭐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몰라 나와 냉목풍을 향해 번갈아 눈알을 굴려댔다·
“생각하실 시간이 필요할 테니 질문에 대한 대답은 차후에 듣도록 하지요· 그럼 여러모로 실례가 많았습니다·”
나는 공손하게 포권지례를 한 후 뒤돌아 걸었다·
그러다 마치 무언가 생각나기라도 한 것처럼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중요한 걸 빼먹을 뻔했군요· 오늘 제가 하려던 일 중 두 가지는 사천당문과 청성파의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아직 시간이 될 것 같군요· 결과는 나중에 직접 보시기 바랍니다·”
냉목풍의 얼굴이 하얘졌다·
***
당문은 성도로부터 빠른 말로 이틀 정도 떨어진 남동쪽에 있었다·
청성산은 반대로 서북쪽으로 이백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고·
그러나 성도는 사천성을 대표하는 도시이기에 당문과 청성파가 규모와 상관없이 어떤 식으로든 거점을 마련해 둘 수밖에 없다·
성도의 남동쪽에 있는 당문의원(唐門醫員)을 찾았을 때는 해가 한 뼘쯤 남았다·
사천당문은 독과 암기의 조종으로 불리는 무림문파이기도 하지만 천하제일의 의가(醫家)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가문비전의 의술과 축적된 경험은 여타의 의원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해서 당문은 타지에 분타를 낼 때 다른 무림문파들과 달리 우선 의원부터 열었다·
온갖 고약한 병자들을 치료해 주고 받는 돈은 당문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실력 있는 의원을 길러내고 그들로 하여금 중원 곳곳에 의원을 열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해서 당문이 주력한 또 다른 사업은 약차들을 파는 대형 다루(茶樓)의 운영이었다·
하지만 성도에서 만큼은 다루를 열지 않았다·
사천구룡방이라는 흑도방파의 텃세가 워낙 드셌기 때문이다·
밀어붙이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은 했을 것이다·
사천구룡방의 위세가 아무리 대단해도 당문을 넘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다루 하나 열자고 사천구룡방과 전쟁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건 속가문파들을 통해 이런저런 사업을 하는 청성파도 마찬가지였다·
“천룡표국 십칠각주 이정룡입니다·”
“당문의원의 호원을 책임진 당청문입니다·”
서른 줄의 사내가 마주 포권을 쥐어왔다·
독을 다룬다는 선입견 때문인지 당청문은 눈에서도 독기가 짜르르 흐르는 것 같았다·
탁자에는 당청문 외에도 두 명의 사내들이 더 앉아 있었다·
한데 두 사람은 내게 가볍게 묵례만 할 뿐 자신들을 소개하지 않았다·
“먼저 온 손님들이 있어서 부득불 함께 모셨습니다· 혹시 불편하시다면 다음에 다시 약속을 정하도록 하시지요·”
빨리 할 말만 하고 꺼지라는 소리다·
아니면 내가 왔다는 얘길 듣고 다른 두 손님도 호기심에 이 자리로 불러 보라고 했던지·
“연락도 없이 찾아온 저의 잘못입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생각했던 것과 용모가 많이 다르시군요· 소문엔 대단한 미공자라고 들었습니다만·”
“사정이 있어 역용을 했습니다·”
“돌아가는 사정이 그러니 이해를 하겠습니다· 한데 천룡표국의 사공자라는 건 무엇으로 증명을 하시겠습니까?”
“그 전에 당 씨 성을 쓰시는 걸 보니 당문의 직방계 혈족이신 듯한데 당군백 소저와는 어떻게 되는 사이신지요?”
“사촌 오라비가 됩니다만·”
“하면 진위 정도는 아시겠군요·”
나는 품속에서 당군백에게 받은 호패를 꺼내 탁자 위로 슬그머니 올려놓았다·
호패를 집어 든 당청문의 눈이 한순간 동그래졌다·
“두 달쯤 전 당군백 소저와 표행을 함께 한 적 있습니다· 그때 기문진에 갇혀 큰일을 치를 뻔한 소저의 목숨을 구해 드렸지요· 그러자 소저께서 제게 호패를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든····”
“언제든 자신의 힘이 필요할 때면 한번은 달려가 목숨을 걸고 도와주겠다· 정룡 공자님께 보은패를 드린 이야기는 군백에게 이미 들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지금 당가타(唐家均)에 와 있습니다·”
당가타는 당문의 직방계 혈족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뜻한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당군백이 가까이 있으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당문청이 호패를 내 앞으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이정룡 공자님이시라는 건 확인했습니다· 이제 무슨 중요한 용건이 있기에 역용까지 하고 오셨는지 들어 볼까요?”
나는 호패를 당문청의 앞으로 도로 밀어 놓았다·
당문청과 두 손님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미 다 보고를 받고 계시겠지만 이틀 후면 천룡표국과 도화곡의 제자들이 성도에 도착하게 됩니다· 제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사천구룡방은 쉴 시간을 주지 않고 우리를 치려 할 것입니다·”
“그래서요?”
“당가타에 전서구를 날려 가장 뛰어난 의원 쉰 명만 지원을 해주십시오· 비록 당군백 소저에게 직접 드리는 부탁은 아닙니다만 이 정도면 호패를 돌려 드리는 값으로 그리 비싸지는 않다고 생각 됩니다·”
“그게 전부입니까?”
“그렇습니다·”
“사천당문의 참전을 요구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제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셨군요·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것도 전쟁의 일부입니다· 고로 당문은 자연스럽게 참전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의원들은 당문의 가장 중요한 자산· 전쟁이 벌어지는 곳으로 쉰 명이나 동원하려면 그들을 호위할 무사는 최소 두 배인 백 명은 있어야 할 터· 한마디로 당문의 의원들뿐만 아니라 타격대의 깃발까지 빌려 달라는 것이로군요·”
말을 한 것은 내가 아니라 손님 중 한 명이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매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서른 줄의 미공자·
그는 내 말 속에 담긴 뜻을 단번에 꿰뚫었다·
당문청과는 차원이 다른 통찰력이었다·
나는 그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결코 호기심 때문이 아님을 직감했다·
단언하건대 그는 사천당문의 사람이다·
당문 내에서의 서열도 그가 당문청 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당문청은 이제 내 관심 밖이었다·
의문을 사내에게 바로 물었다·
“빌려주시겠습니까?”
“빌려 쓰겠다는 것은 원상태로 돌려주겠다는 뜻· 사천당문의 무인들은 함께 피 흘리며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겠지요?”
“그렇습니다·”
“허장성세라· 당문의 깃발을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놈들을 물러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남궁세가의 영애께서 지금 사천구룡방에 반감을 품은 문파들을 규합 중입니다· 전쟁이 시작되면 저들 진영에선 내부의 배신자들 또한 속출할 겁니다·”
“자신만만하시군요·”
“다시 여쭙지요· 깃발을 빌려주시겠습니까?”
사내는 잠시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말했다·
“군백이 당신에게 빠진 이유를 알겠군· 난 당군룡이라고 하오· 내 이름을 들어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포권지례를 올렸다·
“알고 보니 추혼탈명(追魂奪命) 선배님이셨군요·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하하· 나더러 소개를 하지 않았다고 면박을 주시는 군· 내 동생의 마음을 빼앗아 간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었소· 사죄의 의미로 귀하의 조건을 수락하면 되겠소?”
“무언가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예?”
“하지만 당문의 사전에 깃발만 빌려주는 일은 없소· 그건 당문답지 않은 일이지· 피를 흘려야 할 상황이 되면 사천당문도 기꺼이 함께 피를 흘릴 거라고 국주님께 전해 주시오·”
추혼탈명 당군룡· 현 당문주인 독왕(毒土) 당유고의 유일한 적자이자 당군백의 오라비였다·
무엇보다 그는 장차 사천당문의 이끌 후계자였다·
아무리 후계자라고 해도 이런 일을 혼자서 함부로 결정할 수는 없다·
짐작하건대 당문주는 성도로 아들을 보내 급변하는 상황을 살피게 하는 한편 결정권을 준 것 같다·
“혹시 청성파의 속가도 찾아갈 생각이십니까?”
곁에 있던 또 다른 손님이 물었다·
학사풍의 옷차림에 눈동자에는 정광이 가득한 서른 중반의 사내였다·
“그렇습니다·”
“이번에도 두소부의 보은패를 내놓으시며 깃발을 빌려 달라고 하시겠군요·”
“두소부 선배를 아십니까?”
“청성파에서 온 제운학이라고 합니다· 두소부에게는 대사형이 되지요· 추혼탈명과 달리 제 이름은 못 들어 보셨을 겁니다·”
두소부도 선배라고 깍듯이 모시는데 그 선배의 대사형이 나타났다·
나는 또다시 벌떡 일어나 공손하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낙일검(落旧劍) 선배님을 뵙습니다·”
“저도 아십니까?”
“청성칠검(靑城七劍)의 수장을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후 제운학은 청성파의 역사를 통틀어 최연소 장문인이 된다·
덧붙여 그의 송풍검(松風劍)은 사천성에서 적수를 찾기 어려울 만큼 고강해진다·
“저를 어찌 아시는지···?”
“두소부 선배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 그렇군요· 저는 감히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즉시 청성산으로 돌아가 장문인과 장로님들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허락을 구해 보겠습니다·”
“천룡표국을 대신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덧붙여 도화곡의 제자들도 당문과 청성파에서 보여주신 호의를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100명이나 되는 무인들을 단지 협의지심 만으로 동원해 줄 문파는 없다·
당문도 그렇고 청성파도 그렇고 만약 무인들을 동원해 준다면 전쟁에서 이기고 난 후 반드시 전리품을 나누어 먹으려 할 것이다·
한데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바였다·
성도에 청성파와 사천당문도 함께 뿌리를 내려야 도화곡이 더욱 안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