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 사천구룡방(3) >
나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났다·
일층 식당엔 하오문 향주 장인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오후 나는 그에게 사천구룡방 일당주와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만나겠답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한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장소뿐만 아니라 시간까지도 모두 자신이 정하겠답니다·”
애초 장인보를 통해 내가 제시한 시간은 밤이었다·
낮 동안에는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해야 할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소는 알아서 정하라고 양보를 한 것이고·
내가 무언가 일을 꾸미려고 하는 걸 눈치채고 그 전에 불러다 최대한 캐내려는 것이다·
하오문의 보고대로 영악한 자였다·
하기야 그랬으니 북신방 부방주의 신분으로도 살아남아 지금의 권세를 누리고 있겠지만·
“그래서 언제 어디서 보자는 겁니까?”
“정오에 사천구룡방으로 오라고 합니다·”
사천구룡방이라는 한 마디에 좌중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사람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응하는 건 아니겠지? 하는 표정들이었다·
“알겠습니다·”
“정말 가려고요?”
남궁소소가 불쑥 물었다·
“내 배짱을 시험해 보려는 거요·”
“수일 내로 우리와 전쟁을 벌여야 할 적 삼천 명이 모여 있는 곳이에요· 그간 놈들의 행보를 보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도 없고요·”
“삼백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오· 나 역시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최상의 해법을 찾을 수 없소·”
“이렇게까지 헌신하는 이유가 뭐죠?”
“난 표사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서호삼견도 호리독사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아침부터 또 삶은 돼지고기를 내오던 황 노인도·
그러자 남궁소소가 모기만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놈의 표사 타령·”
“다 들리오·”
“나도 함께 가겠어요·”
“소저는 나를 대신해야 할 일이 좀 있소·”
“서호삼절 선배님들도 계시잖아요·”
“서호삼절은 할 수 없는 일이오· 천룡표국의 이정룡이 아니면 남궁세가의 남궁소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오·”
“뭔데 그렇게 거창해요?”
“사천구룡방에 맞서 싸울 무림 방파와 독보강호하는 무림인들을 최대한 끌어모아 주시오·”
“그런 사람들이 있으려고요?”
“분명히 있소·”
“어디에요?”
“양강이 도와줄 것이오·”
양강은 처음 내 검파에 달린 소수옥녀의 수실을 알아보고 이곳까지 안내해준 사내아이의 이름이었다·
장인보가 덧붙였다·
“성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물론이거니와 무림인들에 대해서도 그 녀석이 모르는 건 별로 없지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눈치도 아주 빠르고요· 웬만한 어른들보다 나을 겁니다·”
딱 봐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남궁소소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말했다·
“휴우 알았어요·”
나는 일견은 돌아보며 말했다·
“세 분은 지금부터 남궁소소와 함께 다니시되 그녀의 안전을 다른 모든 일보다 우선순위에 두십시오·”
“알겠네·”
“모두 건투를 빕니다·”
***
나는 호리독사만 대동한 채 사천구룡방을 찾았다·
도둑질이 가히 입신의 경지에 들어서 그렇지 호리독사는 사실 호위무사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일류 고수였다·
다만 나도 그렇고 호리독사도 그렇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역용을 했다·
남궁소소가 솜씨를 발휘해 주었음을 물론이었다·
수문무사 한 명이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어디서 온 분들이십니까?”
“독산쌍도(究山雙刀) 형님께 면양에서 면양쌍견(河陽雙犬) 아우들이 왔다고 전하시오·”
독산쌍도가 누군지 모른다·
다만 사천구룡방으로 와서 독산쌍도를 찾으라 했다는 장인보의 말을 듣고 그대로 했을 뿐이다·
한데 수문무사의 태도가 대번에 달라졌다·
면양쌍견은 내가 대충 아무렇게나 흑도스럽게 지은 것이니 분명 독산쌍도라는 별호 때문일 것이다·
수문무사는 뒤쪽에 서 있던 또 다른 수문무사를 불러 우리를 일당(一堂)으로 모셔다드리라고까지 지시했다·
사천성 제일의 흑도방파답게 으리으리한 장원은 곳곳에서 끌어모은 무림인들로 바글바글했다·
작게는 서너 명씩 많게는 십수 명씩 모여 도검을 주고받으며 한창 수련을 하는 중이었다·
그 기세가 꼭 전쟁을 앞둔 군문의 진영 같았다·
수문무사와 거리가 벌어진 틈을 타 호리독사가 내게 속삭였다·
“어마어마하군요·”
“삼천 명이 모였으니까·”
“한데 우리한테 이렇게 막 보여줘도 되는 겁니까? 우리가 장원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정탐이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이미 정탐을 하고 있지만·”
“도화곡과 천룡표국은 가릉강에서 성도무림의 그 어떤 방파도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소· 그러니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질 일은 없을 것이오·”
“그걸 알고 우릴 불렀군요·”
“당연히 그랬겠지·”
“확실히 보통 노인네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시오·”
“제가 정신을 차린다고 뭘 알겠습니까? 정신은 공자님께서 차리셔야지요·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알았소·”
수문무사는 우리를 금룡당(金龍堂)이라는 현판이 붙은 전각의 수문무사에게 넘겼고 거기서 다시 어느 방 안으로 안내되었다·
방안엔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첫 번째 눈에 띄는 자는 대머리에 두 자루 유엽도를 찬 건장한 체격의 장년인이었다·
나는 그가 독산쌍도임을 간파했다·
독산(究山)은 민둥산이라는 뜻으로 대머리를 놀릴 때 흔히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인물은 붉은 혈색과 우람한 근육이 인상적인 육십 세 가량의 노인이었다·
사천구룡방의 금룡당주 보통은 일당주라 부르는 혈염도(血染刀) 냉목풍이었다·
하오문이 파악하고 있는 무공실력은 절정· 20년 전 구룡방의 통일 전쟁 당시 현 사천구룡방 방주인 만세노조 뇌정갑을 상대로 백 초를 버틴 유일한 인물이라고 했다·
“천룡표국 십칠각주 이정룡입니다·”
“배짱이 좋군·”
“피차일반입니다·”
“무슨 뜻이지?”
“적장의 아들을 집안으로 몰래 끌어들여 밀담을 나누고 있으니 말입니다· 만에 하나 방주께서 아시기라도 하는 날엔 큰 오해를 사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표왕의 그 잘난 넷째 아들을 유인해서 잡아다 바친다면 오히려 큰 상을 내리시지 않을까?”
“살아서 나가려면 어떻게든 당주님을 제 편으로 만들어야겠군요·”
“내 편으로 만든다라···· 풍운비룡의 명성이 자자한 줄은 알았지만 사천구룡방과 나를 이 정도로 우습게 보고 있는 줄은 몰랐군· 그래 무엇으로 날 사려는 지 들어나 볼까?”
“사천구룡방의 새로운 방주 자리면 어떻습니까?”
“···!”
“···!”
“···!”
냉목풍과 독산쌍도 그리고 호리독사까지 한순간에 석상으로 변해버렸다·
장내의 공기도 얼음동굴에 들어온 것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독산쌍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저만치 걸어가 방문을 열었다·
이어 바깥에 대기 중인 경계무사들을 향해 목구멍을 쥐어짰다·
“모두 십 장 밖으로 물러나 있으라· 또한 따로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개미새끼 한 마리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고·”
“존명!”
독산쌍도가 다시 자리로 돌아오더니 돌연 내 뒤에서 벼락처럼 칼을 뽑았다·
무얼 어떻게 해볼 사이도 없이 칼은 내 목에 찰싹 달라붙었다·
놀란 호리독사가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한편 득달같이 돌아서며 칼을 뽑아 들었다·
순간 ‘따앙!’ 하는 금속성과 함께 칼끝이 곤두박질쳐 나무 바닥에 박히고 말았다·
칼을 다시 뽑아 들려는 찰나 호리독사의 턱 밑에도 칼 한 자루가 척 붙었다·
뒤쪽에서 기습을 하려고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척 몸을 뺐다가 다가 온 것이다·
벼락같은 발도술(拔刀術)도 발도술이지만 잠깐 사이에 이런 기가 막힌 방법을 생각해낸 독산쌍도의 경륜이 놀라웠다·
냉목풍은 그때까지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돌덩이처럼 굳게 닫혔던 그의 입이 천천히 그리고 묵직하게 열렸다·
“네 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그럴만한 배짱은 있으시고요?”
“무어?”
“만약 저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표왕은 물론이거니와 천룡표국의 모든 표사들까지 사천구룡방을 쓸어버리기 위해 성도로 몰려 올 겁니다·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독산·”
“하명 하십시오”
“함께 온 놈의 목을 그어라!”
“존명!”
“잠깐만요!”
나는 외칠 수밖에 없었다·
독산쌍도의 칼이 호리독사의 목을 쓱 그으려다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깜짝 놀란 호리독사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냉목풍이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너를 죽이고 얼굴 가죽을 벗겨 다른 사람에게 씌운 다음 민강으로 가서 누군가와 싸움을 벌이는 척 하면서 시체를 강물에 던져 버리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사천구룡방을 나와서 민강을 건너다가 정체 모를 고수들을 만나 싸우다 죽은 것처럼 꾸밀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제가 사람을 제대로 봤군요·”
“무어?”
“흑도 십대고수 중 한 명을 도모하는 일인데 그 정도 배짱과 지혜는 있어야 함께 하지 않겠습니까? 합격이십니다·”
호리독사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냉목풍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허!’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나는 살짝 방심한 그에게 냅다 폭탄을 던졌다·
“방주께서 당주님을 제거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네 놈이 정녕!”
“시기는 이번 거사가 끝난 후로 예상됩니다· 십중팔구 이당주를 칼로 쓸 것이고요·”
냉목풍이 두 눈을 허옇게 뒤집었다·
의자 팔걸이를 붙잡은 그의 두 팔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나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무슨 근거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반 각이 넘어가기 전에 나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너와 너의 호위무사는 오늘 민강의 고기밥이 될 것이다·”
나는 대답 대신 품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냉목풍의 앞으로 쓱 밀어 놓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책을 집어 책장을 넘기던 냉목풍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 책 속엔 지난 10년간 그가 돈을 빼돌린 수법과 정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합치면 은전 삼천 냥쯤 되었다·
삼천 냥은 큰 액수지만 십 년에 걸쳐 빼돌렸다면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트집을 잡기에는 충분히 컸다·
장인보는 냉목풍이 주로 첩들을 굴리고 북신방 출신의 수하들을 건사하는 데 쓰였을 거라고 했다·
처음 저 내용을 봤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냉목풍이 빼돌린 돈의 액수보다 이걸 손금 보듯이 들여다보고 있었던 하오문의 놀라운 정보력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사천구룡방 내에 끄나풀이 많은 것 같았다·
어쩌면 고위직 중에 하오문도가 있을 수도 있고·
“이걸 어디서 났지?”
“제가 이걸 어디서 났는지보다 감히 누가 이런 걸 작성했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누가 작성했더냐?”
“이당주께서 방주의 명령을 받아 작성한 것으로 압니다· 이건 그가 방주께 보고한 책자를 운 좋게 필사 한 것이고요·”
“이걸 방주께 보고했다고?”
“방주께서 크게 노해 일당주를 제거하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만 북신방 출신 방도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는 말도 있었고요· 그 와중에 이당주는 일당주가 사라지면 묘족 여자는 방주의 차지가 될 거라면서 그 전에 한번 재미를 보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중이라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