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붕정만리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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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앙!
격렬한 첫 합과 함께 막강한 경파(動波)가 대기를 떨어 울렸다·
단순한 검과 검의 격돌이 아니라 두 고수의 내공이 부딪힌 탓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격검의 굉음들!
까강! 까가가강!
종추악은 권사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와 강맹한 검초로 남궁세옥의 검권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댔다·
콩을 볶는 것 같기도 하고 철판에 우박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이어지길 한참·
남궁세옥은 어느새 대여섯 장이나 밀려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기광이 맺혔다·
당혹감이라기 보다는 호기심과 놀라움 그리고 감탄의 빛이었다·
까앙!
몇 번째인지 모를 격돌이 크게 한번 일어났다·
고막이 얼얼할 정도로 터져 나오는 경파에 사람들은 모두 얼굴을 찡그렸다·
그사이 종추악은 메뚜기처럼 훌쩍 날아가 삼 장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두 사람 사이의 허공엔 지면에서 솟구쳐 오른 흙먼지가 뿌옇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남궁세옥이 물었다·
“이건 무슨 검법입니까?”
“아직은 이름이 없습니다·”
“세상에 이름이 없는 검법도 있습니까?”
“녹림엔 온갖종류의 검법을 익힌 검객들이 몰려들지요· 아무리 별 볼 일 없는 검법이라도 한 초식만큼은 제법 날카롭기 마련인데 그런 초식들만을 모아 적당한 보법을 깔고 초(招)와 식(式)을 이어 보았습니다·”
그때였다·
얼마나 집중을 했던지 도화곡의 오대 장로들이 속삭이듯 나누는 대화가 내 귓가에도 들려왔다·
“각각의 초식들이 상리(常理)를 벗어날 정도로 변화무쌍하더라니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변화무쌍하기만 하고 매끄럽게 이어지질 않으니 난잡하기 짝이 없는 검법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도 대단한 검법입니다· 남궁세가의 제왕검에 맞서 저렇게까지 집요하게 공세를 펼칠 수 있는 검법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창룡검이 아직 본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나는 권사인 종추악이 구태여 검을 들고 남궁세옥에게 도전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남궁세가의 제왕검을 상대로 자신들이 창안한(?) 검법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남궁세옥이 종추악에게 물었다·
“구태여 검법을 만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작은 검법 여러 개를 모아 큰 검법 하나를 만들어 함께 익히자는 취지이고 두 번째는 녹림맹에도 면면부절 이어지는 검맥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입니다·”
종추악은 근본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녹림맹에 검맥을 심어 일종의 뿌리와 뼈대를 만들려 하고 있었다·
산적놈들이 사승의 관계로 이어지는 무림문파를 꿈꾸다니·
이런 해괴한 인간들을 봤나·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남궁세옥이 말했다·
“승부를 마저 내도록 할까요?”
“부디 손속에 사정을 두어 주시길·”
이번엔 남궁세옥이 기다리지 않고 먼저 질풍처럼 신형을 쏘았다·
종추악은 한 걸음을 앞으로 턱 내디뎠다가 다시 물러나는 것으로 상대의 박자를 흔들어 놓으려 했다·
노련하기 짝이 없는 임기응변의 한 수·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별 소용이 없었다·
오른쪽 어깨 위로 솟구치는 남궁세옥의 검에서 별안간 벼락이 치기 직전의 소리 같은 것이 났다·
꾸르르릉!
뒤이어 두 자루의 검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꾸앙!
종추악의 장검 위로 떨어진 것은 분명 새파란 벼락이었다·
막강한 경력(勤刀)을 감당하지 못한 종추악은 그대로 상체가 내려가고 무릎이 접혔다·
그때쯤엔 무얼 어떻게 했는지 종추악의 왼쪽 옆구리로 두 번째 벼락이 떨어졌다·
그야말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속도와 위력·
종추악은 허리를 발작적으로 비트는 한편 왼쪽 땅에다 장검을 힘차게 찍으며 가까스로 벼락을 막았다·
꾸앙!
그러자 이번엔 오른쪽 어깨 위로 세 번째 벼락이 떨어졌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몰아치는 공격·
종추악은 사력을 다해 검을 뽑는 동작 그대로 벼락을 올려쳐 갔다·
파앙!
이번엔 소리가 다르더라니 종추악의 검이 수십 개의 파편으로 터져 버렸다·
아직도 벼락을 품은 채 꾸르르 울어대는 남궁세옥의 장검은 정확히 종추악의 오른쪽 목덜미 앞에서 우뚝 멈춰 있었다·
종추악은 손잡이만 남고 터져나가 버린 검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검편(劍片)에 맞은 옷자락은 사방이 찢어져 걸레가 따로 없고 왼쪽 볼에서는 제법 흥건하게 피까지 흐르는 상태였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실력 차·
그리고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검투의 결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남궁세옥이 마지막에 펼친 가공할 삼초식에 모두 얼음장이 되어 버렸다·
남궁소소가 내게 조용히 속삭여왔다·
“뇌공질천산(雷公比川山)이라는 초식이에요·”
“우레가 산천을 질타한다라니· 광오한 작명이군·”
“제왕검 최고의 절초니까요·”
“최고의 절초?”
“단언컨대 오라버니의 뇌공질천산을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은 강호에 그리 많지 않아요· 한데 저 자는 무려 세 번을 연달아 받고서야 비로소 무릎을 꿇는군요· 비록 적일지언정 대단한 고수예요·”
남궁소소는 종추악을 칭찬했지만 나는 오히려 남궁세옥과 제왕검에 대한 그녀의 무한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멋진 승부였습니다 ”
종추악은 포권을 쥐고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깨끗하게 패배를 시인했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드는 순간 그의 눈빛은 돌변해 있었다·
“괜찮다면 권법으로 다시 도전하고 싶습니다만·”
순간 남궁세옥의 표정이 굳었다·
왜 그런가 싶어 남궁소소를 돌아보았더니 그녀 역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왜 그러시오?”
“뇌공질천산을 펼치기 위해서는 막대한 내공을 쏟아부어야 해요· 아시다시피 오라버니는 그걸 세 번이나 연달아 펼쳤고요· 지금쯤 내공의 절반 이상을 소진한 상태일 거예요·”
“···!”
앞선 싸움은 누가 보아도 남궁세옥에게 유리한 방식이었다·
그러니 이번엔 권법으로 겨루자고 해도 마땅히 거절할 명분이 없다·
남궁세옥의 성격상 거절하지도 않을 테고·
아무래도 덫에 걸린 것 같았다·
종추악의 나이 마흔 후반· 오직 승부의 결과만이 중요한 흑도에서 30년을 갈고 닦은 노련함이 젊고 올곧은 성품의 남궁세옥을 곤경에 빠트린 것이다·
남궁세옥은 검을 꽂아 넣은 다음 조용히 검갑을 풀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어 비스듬히 서서 주먹을 교차해 쥐며 말했다·
“시작하시지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순간 장내가 쥐죽은 듯 고요해지며 팽팽한 긴장함이 흘렀다·
앞서 파격적인 선공을 서슴지 않았던 남궁세옥도 이번만큼은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남궁세옥의 발아래서 ‘뚝!’ 하고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발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갔던 모양·
그와 동시에 종추악이 신형을 쏘았다·
남궁세옥은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폭풍 같은 권초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종추악의 두 주먹도 동시에 작렬했다·
퍽! 퍼버벅! 퍽퍽퍽!
허공에서 난상으로 얽히고 부딪히는 네 개의 주먹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내가 여태껏 보지 못한 속도였다·
거기에 위력이 있었다·
소리만 들어도 내장이 진탕 당하고 팔다리가 뚝뚝 부러지는 것 같았다·
파산산권이라는 별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종추악이 익힌 파산백팔수(破山百八奉)는 무엇이든 부숴 버리는 파괴적인 힘이 특징이었다·
남궁세옥의 패왕권(顯王奉) 역시 남궁세가의 무공이 대부분 그러하듯 막강한 경력을 앞세운 권법이었다·
한마디로 강 대 강의 대결!
잠깐 사이에 두 사람은 백여 초식의 공방을 나누었다·
누구도 우세를 점하지 못한 상황에서 격돌음은 점점 위력을 더해갔다·
종추악이야 원래 이름난 권사이니 그렇다 쳐도· 남궁세옥의 권법이 이 정도까지일 줄 몰랐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던 어느 순간 종추악이 돌연 남궁세옥의 전권을 향해 쌍장을 떨쳤다·
뻐엉!
대기가 요동칠 정도의 굉음이 울렸지만 정작 튕겨 나간 건 종추악 그 자신이었다·
남궁세옥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종추악의 오른쪽 옆구리를 향해 좌장을 뻗었다·
뻐엉!
그러나 남궁세옥의 장력은 헛되이 허공을 격했다·
찰나의 순간 종추악이 약간의 유격이 생긴 틈을 타 질풍처럼 허리를 왼쪽으로 비튼 것이다·
비트는 힘을 이용해 허공으로 솟구친 그는 남궁세옥의 오른쪽 측두부를 향해 벼락같은 일권을 내질렀다·
남궁세옥은 남궁세옥대로 팽이처럼 돌며 우수를 들어 올려 주먹을 막았다·
동시에 종추악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일권을 내질렀다·
퍽!
주먹은 두 개였으나 격타음은 하나만 울렸다·
남궁세옥의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반면 종추악의 주먹은 측두부를 막기 위해 뻗은 손목을 정통으로 강타했다·
이어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남궁세옥의 얼굴 정면을 향해 종추악의 주먹이 훅 날아가다가 반 뼘 정도를 앞두고 뚝 멈추었다·
“악!”
도화곡의 제자들에게서 한발 늦게 터져 나온 비명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종추악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손속에 사정을 둔 셈이 되었다·
하지만 남궁세옥은 이미 충분히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종충악의 주먹에 강타당한 손목이 시퍼렇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래도 암경(暗動)에 당한 것 같았다·
현재로선 정확한 상태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만에 하나 암경이 뼛속까지 침투했다면 최악의 경우 한 손을 영영 쓰지 못할 수도 있다·
혈부투귀를 비롯해 일곱 녹림도를 때려눕히고 피를 보게 만든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래서 흑도가 무섭다·
“멋진 승부였습니다 ”
남궁세옥은 정중하게 포권을 쥐는 것으로 더는 싸울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어떤 시비도 걸지 않고 깨끗하게 패배를 시인한 것이다·
“와아아!”
상대가 술수를 썼든 안 썼든 승부는 승부였다·
사실상 첫 번째 그것도 천하의 남궁세옥을 상대로 거둔 승리에 녹림도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반면에 천룡표국의 표사들과 도화곡의 제자들은 표정을 굳혔다·
특히 남궁소소와 비검대의 고수들은 복수심에 어금니를 빠드득 갈았다·
남궁세옥은 또 말했다·
“각자가 일승과 일패를 거두었으니 본래대로라면 세 번째 대결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손목에 문제가 생겨 더는 싸울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이에 기권패를 선언합니다·”
남궁세옥은 전혀 미련이 없는 듯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술수에 진 것도 패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바람에 공터엔 이제 종추악이 홀로 남아 다음 도전자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가 말했다·
“상황이 묘하게 되었군요· 어쨌건 승부는 승부이니 제가 비무를 이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어느 분께서 나오시겠습니까?”
“제가 한 수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내가 장내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면서 말했다·
칠백여 쌍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로 쏟아졌다·
이종산도 여종매도 천룡표국의 표사들과 도화곡의 제자들도 모두 놀란 토끼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현재 대외적인 나의 무공 평가는 일류의 문턱을 넘은 정도· 녹림맹 서열 3위의 고수인 종추악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무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천룡표국의 십칠각주 이정룡입니다·”
“풍운비룡 이정룡이 자네로군· 명성은 익히 들었네· 듣자 하니 향시와 회시에서 연달아····”
“됐고요· 제가 선공을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팡!
북해투왕은 말했다·
굳이 귀영무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보법은 모든 무공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수련을 하면 할수록 그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나는 십초박의 선팔초를 폭풍처럼 펼쳤다·
가공할 속도와 기세에 당황한 종추악이 연거푸 뒷걸음질을 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여덟 번째 초식을 모두 펼치고 나자 거짓말처럼 빈틈이 찾아왔다·
백전의 고수인 종추악은 그 찰나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이 노옴!”
그가 일갈을 내지르며 반격해왔다·
저 주먹에 맞으면 나도 남궁세옥처럼 암경에 당해 뼛속이 시커멓게 변할지 모른다·
나는 반격할 공간을 만들기 위해 크게 한 걸음 물러났다·
종추악은 딱 그만큼 크게 보폭을 벌리며 따라붙었다·
쭉 내민 그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발아래에 청동빛 바늘 하나가 허공을 향해 뾰족하게 서 있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헛!”
종추악은 실로 엄청난 고수였다·
따끔한 고통을 느끼는 찰나의 순간 그는 발끝을 치켜드는 대신 발꿈치로 땅을 딛는 신기를 선보였다·
하지만 바늘은 이미 용천혈 주변에 반쯤 꽂힌 후였다·
놀란 종추악은 발바닥에 꽂힌 바늘을 뽑을 사이도 없이 깽깽이걸음으로 황급히 물러났다·
나는 찰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으며 선팔초의 순서를 바꿔 처음부터 다시 난사했다·
오른쪽 어깨를 치고 왼쪽 옆구리를 가격하고 다시 가슴과 복부를 수차례 가격하다 왼쪽 팔꿈치로 측두부를 후려쳤다·
퍽! 퍼퍼퍼퍽! 퍽!
한바탕 난타를 한 후 상대가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짧게 솟구쳐 오르며 오른쪽 팔꿈치로 정수리를 찍었다·
뻑!
“끕!”
종추악은 주먹으로 몇 번 반격을 시도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돌연 죽기 살기로 쌍장을 떨쳤다·
일단 나를 떨어뜨려 놓기 위한 한 수· 나도 그를 향해 쌍장을 출수했다·
뻐벙!
접장의 순간 흡사 송곳으로 쑤셔대는 듯한 암경이 손목을 타고 전해졌다·
하지만 그 몇 배에 달하는 나의 내공 경력이 그의 장심을 통해 손목과 어깨를 거쳐 내장 속으로 침투한 후 터져나갔다·
“커헉!”
대여섯 장 밖으로 튕겨 날아가는 그의 입에서 시뻘건 핏물이 뿜어져 나와 허공에 포물선을 그렸다·
쿵!
탁자에 처박히는 종추악의 얼굴 위로 먹다 남은 술이며 돼지고기가 와르르 쏟아졌다·
내장을 진탕당한 그는 의식이 까무룩 해지더니 이내 고개를 툭 떨구어 버렸다·
나는 선천오법술을 발동 그의 발바닥에서 재빨리 바늘을 뽑아 땅속으로 박아 버렸다·
위치를 정확히 기억해 두었음은 물론이다·
좌중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고요해졌다·
싸움을 시작하는 순간 종추악의 다리에 무언가 이상이 생겼음은 누구라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모두 내가 운이 좋아서 이겼다고 생각할 테지만 아무렴 어떠랴·
중요한 건 내가 이겼다는 사실이다·
꼼수는 이렇게 부리는 것이다·
“와아아!”
도화곡의 구대제자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반면 녹림도들은 께름칙한 승부에 모두가 벌레 씹은 얼굴이 되었다·
녹림맹에는 아직도 고수들이 많았다·
그들 중 몇 명이 악귀같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종추악의 복수를 하기 위해 내게 도전하려는 것이다·
대체 언제까지 싸워야 하나·
문득 허공을 올려다보니 해는 이제 한 뼘 정도 남은 상태였다·
서두르지 않으면 정말 복마산에서 밤을 보내야 할 수도 있다·
그랬다간 무슨 흉한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때였다·
여태 잠자코 앉아 있던 도화곡주 여종매가 쓰윽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백군악을 돌아보며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귀하가 원하는 건 결국 도화곡의 무공비급 일터· 애꿎은 아이들은 그만 괴롭히고 나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봅시다·”
여종매의 파격적인 제안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한데 또 다른 인물이 딴지를 걸고 나섰다·
“그건 사리에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말을 한 사람은 놀랍게도 이종산이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어떤 미사여구를 갖다붙인다고 한들 이건 법과 식을 갖춘 문파 간의 정식 비무가 아닙니다· 표물을 빼앗으려는 녹림을 상대로 한 방어전이지요· 하니 호위와 관련된 모든 책임과 의무는 천룡표국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명분도 확실하지만 이종산은 여종매가 질 경우를 생각한 것 같았다·
만약 여종매가 패배한다면 도화곡의 성도 이전은 그야말로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길이 될 것이다·
이종산이 내가 서 있던 공터의 한 가운데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흡사 산이 밀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만 들어가거라·”
“아버지····”
“이제부터는 내게 맡겨라·”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이종산이 백군악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이어 허리춤에 매여 있던 장검의 손잡이에 한 손을 척 올리고는 오연하게 말했다·
“이 정도면 서로 어깨는 충분히 견주어 본 것 같습니다· 결국엔 맹주님과 제가 승부를 보아야만 끝나는 싸움· 이쯤에서 주장전으로 결판을 내는 것이 어떨는지요?”
이종산은 지금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백군악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녹림도왕 백군악은 비록 말석일망정 천하십검의 일석을 차지한 초절정의 고수였다·
그에 반해 이종산은 천하십검에 한 자리가 나면 반드시 들어갈 인물이라고 평가받는 고수이고·
만에 하나 도전이 받아들여져 이종산이 이기기라도 하면 백군악을 몰아내고 당당히 천하십검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는 강호가 발칵 뒤집힐 일대사건이 될 것이다·
반대로 진다면?
이종산은 천하십검이라는 이름에서 더욱 멀어질 것이고 천룡표국은 녹림맹의 집요하고도 노골적인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다·
장내에 태풍이 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