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 붕정만리(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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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마산에 천하 녹림의 본산이랄 수 있는 녹림맹 총타가 들어선 것은 순전히 한 노인의 혜안 때문이었다·
오직 힘의 논리에 의해 서열이 정해지는 흑도방파들은 사승 관계로 이루어진 백도문파들에 비해 배신이 말도 못할만큼 많았다·
여기에 독립된 각각의 방파가 모인 연맹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흑도들의 연맹체 중 가장 큰 곳인 녹림맹은 십 년 이상 권좌를 유지하는 맹주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 30년 전 한 사람이 대파산에 있던 녹림맹 총타를 평원 한가운데 우뚝 솟은 이곳 복마산으로 옮겨 버렸다·
초대형 산채들이 밀집해 있는 북쪽의 진령산맥 서쪽의 대파산맥 동쪽의 대별산맥으로부터 수백 리씩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형 산채 하나가 혹은 몇 개가 연합해 복마산으로 쳐들어 온다면 반드시 징후를 들키기 마련이었다·
덧붙여 복마산에서는 시간을 벌 수도 있었고·
그래서인지 총타를 옮긴 장본인인 녹림도왕(綠林刀王) 백군악은 녹림맹이 탄생한 이래 가장 오랫동안 맹주를 해 먹고 있었다·
녹림맹주의 권좌를 어디 지정학적인 위치만으로 지킬 수 있나·
백군악은 강호인들이 모두 인정하는 천하십검 중 한 명이었다·
천하십검에서의 위치는 말석 정도?
별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성명병기는 칼이었다·
그러나 강호인들은 검객과 도객만큼은 근접한 무공의 특성상 따로 구분하여 서열을 정하진 않았다·
한 마디로 백군악은 지략과 무공을 겸비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적어도 여태의 맹주들 중에서는·
길을 막고 나타난 사람은 고작 열 명에 불과했다·
한데도 사백여 명이나 되는 표행단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열 명의 사내들 중 한 명이 들고 있는 깃발 때문이었다·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붉은색 바탕에 백호 한 마리가 포효하고 있는 깃발은 바로 녹림맹의 맹기였다·
이로써 저쪽에서는 녹림맹의 맹기가 이쪽에서는 천룡표국과 도화곡의 깃발이 펄럭이며 대치하게 되었다·
한 사내가 깃발을 뒤로하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마흔예닐곱 살쯤 되었을까?
떡 벌어진 어깨에 강건한 기세가 흔히 보던 산적 나부랭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특히 이종산과 마주하고 서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것이 예사 녹림도가 아니었다·
사내가 이종산을 향해 공손하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흑두산장의 삼당주 종추악입니다·”
파산신권(破山神奉) 종추악· 녹림맹주의 다섯 의제 중 한 명이자 녹림맹 서열 세 번째의 절정고수다·
수십 년 전 사대명표 중 한 명인 풍운표검 설인탁과 각각 입산식과 입표식을 치른 후 지금은 사실상 친구가 되었다는 낭만적인 사내·
“천룡표국주 이종산이외다·”
“국주님의 명성은 어려서부터 천둥소리처럼 들어 왔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실로 영광입니다·”
“과찬의 말씀이시오·”
“본 맹의 맹주께서 귀한 손님들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저를 보내어 모시도록 하셨습니다· 산장이 이곳에서 멀지 않으니 잠시 들러 목이라도 축이고 가시지요·”
정중한 초대의 형식을 취하지만 이건 경고였다·
순순히 따라오지 않으면 무사히 복마산을 넘어갈 수 없다는 경고·
녹림맹과 천룡표국의 수장들이 일반 산채와 표행단처럼 길바닥에서 만나 돈을 내놓아라 마라 드잡이질을 할 수는 없지 않겠나·
녹림맹주도 그걸 알기에 일부러 산장으로 초대를 하는 것이고·
“그럼 신세를 좀 지겠소이다·”
복마산 정상에 자리 잡은 흑두산장은 높은 목책들에 둘러싸여 있어 작은 산성을 방불케 했다·
산장 안쪽엔 통나무를 켜켜이 쌓아 만든 오두막 수십 채가 사방에 자리하고 있었다·
통나무로 지었을 뿐 크기는 천룡표국의 대형 전각들 못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사 층짜리였다·
산장의 한 가운데 공터에는 백여 개의 통나무 탁자가 오와 열을 맞추어 뿌려져 있었다·
탁자 하나당 열 명 정도 앉는다고 가정했을 때 족히 천 명이 동시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는 규모였다·
백군악은 맹수같은 녹림도 오백여 명을 거느린 채 누가 보아도 가장 상석인 곳의 커다란 의자에 왕처럼 앉아 있었다·
고목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체구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형형한 눈빛 그리고 탈속한 도사같은 은발의 머리카락이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다가왔다·
녹림의 역사를 새로 쓴 전설적 인물을 마침내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어서 오시오· 국주!”
“그간 별래무양하셨습니까?”
“보시다시피 산중에서 시커먼 것들과 재미없게 늙어가고 있다오· 그나저나 이게 대체 얼마만 이외까?”
“백운산에서 뵌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이십 년쯤 되었으려나요·”
“이십 년이라· 국주의 검던 머리카락이 하얗게 샌 것을 보니 과연 그런 듯도 싶구려· 한데 이제는 표행은 않고 경영에만 몰두하시는 줄 알았더니 이게 대체 무슨 난리외까?”
“사정이 그리되었습니다· 우선 인사들 나누시지요· 이쪽은 도화곡의 곡주이신 여 여협이시고 이쪽은 녹림맹주이신 백 대인이십니다·”
“여종매입니다·”
“백군악이외다·”
한순간 두 사람 시선이 허공에서 만나며 불꽃이 파팍 튀었다·
이후로도 하나마나한 인사치레의 말들이 몇 차례 오고 갔다·
그 사이 술과 고기를 받쳐 든 녹림도들이 개미떼처럼 줄지어 나타나서는 텅 비어 있던 탁자 위를 빠르게 채웠다·
“천룡표국과 녹림맹은 오래전부터 친구였소· 이십 년 만에 만난 친구들을 그냥 보내줄 수야 있나· 오늘은 밤늦도록 모두 편하게 먹고 마시도록 하십시다· 음하하하·”
표행단 사백여 명이 왼쪽 네 개 줄의 통나무 탁자 사십여 개를 차지하고 앉았다·
녹림도 오백여 명은 오른쪽 네 개 줄의 통나무 탁자를 차지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다·
“살다 살다 별 희한한 구경을 다 하는군·”
“뭐가 말입니까?”
“표사와 산도적들이 함께 밥을 먹는 거야 공생관계이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삼백여 명의 처녀들이 산도적들의 본산이랄 수 있는 흑두산장에 잡혀 온 것도 아니고 제 발로 걸어 들어와서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게 말이 돼?”
“처녀요?”
“늙어도 처녀는 처녀니까·”
“듣고 보니 그렇네요·”
이견과 삼견이 숨죽여 나눈 대화였다·
사실 나도 어느 정도 공감했다·
오늘 일은 무림사에 두고두고 기괴한 일로 기록될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도화곡의 제자들은 한참 배가 고플텐데도 불구하고 고기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
어리고 젊은 여자들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며 웃고 쑥덕거리고 침 흘리는 오백 마리의 산짐승들 앞에서 산해진미인들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나·
대충 식사가 끝나자 이종산이 말했다·
“이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군요·”
“벌써 가시다니요?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이시외까·”
“더 늦으면 복마산에서 밤을 보내야 합니다· 아직 해가 남아 있을 때 서둘러야지요·”
“밤이 두렵다면 흑두산장을 기꺼이 내어 주겠소이다· 오두막은 많으니 국주께서는 아무 걱정 말고 나와 밤새 술이나 실컷 마십시다·”
도화곡의 처녀 삼백 명이 산적 소굴에서 굶주린 짐승들과 함께 자라고?
그거야말로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여종매와 오대장로는 모욕감에 눈까풀을 파르르 떨었다·
“덕분에 식사는 잘했습니다·”
이종산은 떠날 의사를 분명하게 밝힌 후 양진각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진각이 작은 나무상자 하나를 백군악의 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그러자 종추악이 나무상자의 뚜껑을 열어 백군악의 앞쪽으로 조금 더 밀어 놓았다·
나무상자 안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은전 백 개가 탐스럽게 들어 있었다·
백군악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이게 무엇이외까?”
“아시다시피 천룡표국과 도화곡은 약간의 사정이 있어 부득불 복마산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맹주님의 배려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은전 백 냥이면 사백 여 명의 통행세로 딱 적당한 금액이었다·
산장으로 초대되어 술과 고기까지 얻어먹은 걸 생각하면 오히려 모자란 감도 있었다·
“먼저 바로잡을 것이 한 가지 있소이다· 협조가 아니라 허락이외다·”
“하면 허락을 해주시겠습니까?”
“물론이오· 하지만 그 전에 두 분께서 노부의 체면부터 좀 세워주셔야겠소이다· 듣자 하니 천룡표국과 도화곡이 오랜 관례를 깨고 깃발도 내리지 않고 복마산을 넘으려 하셨다지요? 강호인들이 이를 알면 노부를 두고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손가락질할까 두렵소이다·”
“아시다시피 그건 운송하고 있는 표물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무림문파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역대조사들의 위패와 현판 그리고 일문의 존장과 장로들도 함께 모셔 가는 중이고요· 함부로 깃발을 내릴 수 없음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면 복마산으로 오지 말았어야지요·”
말과 함께 백군악이 나무상자를 이종산의 앞으로 다시 밀어 놓았다·
“이건 도로 가져 가시오· 지금 백팔녹림채의 수장인 노부를 고작 일개 산채의 두령 대하듯 하시는 거외까?”
저 늙은이야말로 천룡표국의 수장을 일개 표두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나는 피가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다·
표사들도 모두 탁자 아래에서 주먹을 말아쥐고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이종산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말했다·
“원하는 걸 말씀해 보시지요·”
“천금풍의 비급을 우리에게도 주시오· 어차피 외부인인 남궁세가에 주기로 한 것 한 부 더 필사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소이다만·”
쾅!
“그게 무슨 헛소리요!”
더는 참지 못한 여종매가 탁자를 내리치며 일갈했다·
굵은 통나무를 붙여 만든 탁자가 터지듯 둘로 쪼개져 버렸다·
그 바람에 잔뜩 차려져 있던 음식이 땅바닥으로 와장창 쏟아졌다·
종추악을 비롯해 백군악의 오른쪽 다섯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녹림맹 장로들이 일제히 살기를 끌어 올리며 일어섰다·
이에 질세라 도화곡의 오대장로들을 포함해 양진각과 남궁세옥 역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수뇌부들이 앉은 첫 번째 탁자에서 시작된 파국의 기세는 다른 모든 탁자로 퍼져 나갔다·
오른쪽 줄 탁자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녹림도 오백여 명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쥐고 일어났다·
채채채채채채챙!
그에 대응하여 천룡표국의 표사들과 도화곡의 제자 삼백여 명도 파도처럼 일어나며 도검을 뽑아 들었다·
채채채채채채챙!
그 기세가 흡사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벌통에서 동시에 벌떼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평화롭던(?) 식사는 순식간에 살벌한 대치 상태로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생각지도 않은 어떤 그림에 동공이 저절로 좁혀 졌다·
협봉검을 뽑아 든 삼백여 도화곡 제자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구대제자들의 살기가 놀라웠다·
좀 전까지만 해도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던 여자들은 온데간데없고 금방이라도 상대를 찢어발길 것 같은 사나운 맹수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이게 무슨···!’
지난 밤 이종산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계획이 궁금합니다·”
“계획?”
“천하의 표왕이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설마 계획도 없이 범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실 리는 없을 테니까요·”
“녹림맹주라면 어떤 계획을 세울 것 같으냐?”
“먼저 웃는 얼굴로 초대를 하고 시비를 건 다음 비급을 내놓으라고 협박할 것 같습니다·”
“어찌하여?”
“녹림맹이 우리를 복마산으로 유인한 것이 맞다면 결코 돈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강호인들의 비웃음을 살 일이지요· 그건 일개 산채의 두령들이나 하는 짓거리가 아닙니까·”
“언제나 기대 이상이구나·”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비급을 받아내는 계획이 단지 초대를 하고 시비를 걸고 협박을 하는 것이라고?”
“우선은 비급을 탈취할 명분을 만들려고 하겠지요· 어떤 흉계든 그 범주 안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깃발을 내리는 게 아닌 이상 그 덫에 걸려들 수밖에 없을 것이고요·”
“복마산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깃발을 내리고 내리지 않고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될 것이다·”
“아!”
“네 말처럼 녹림맹주가 확실한 명분을 갖지 못한다면 전면전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 말거라·”
“어째서요?”
“이 표행단엔 천룡표국과 도화곡만 있는 게 아니다· 남궁세가도 함께 하고 있지· 알다시피 남궁세가는 무림맹의 가장 중요한 맹방이며 가주께서는 존경받는 원로이시다·”
“만약 오늘 전면전이 벌어져 남궁세옥과 소소 그리고 비검대의 신상에 문제라도 생기면 남궁세가와 무림맹으로 하여금 참전의 명분을 주겠군요·”
“그땐 전쟁이 아니라 녹림맹을 향한 백도무림의 토벌전이 될 것이다· 나름 지략가라는 소리까지 듣는 녹림맹주가 그걸 계산하지 않았을 리 없지·”
“하면 아버지의 계획은···?”
“우선은 그가 준비한 명분을 깨버리는 것이다· 하면 다른 시비들은 두렵지 않느니라·”
“···!”
“정녕 본맹과 척을 지려는 것이외까?”
“잠강의 중류 산 그림자가 구비지는 곳에 노화림(廣花林)이라는 거대한 갈대숲이 있지요· 현지인들도 길을 잃을까봐 함부로 배를 몰고 들어가지 않는다는 곳·”
“····!”
“그곳에 말과 표마차를 실을 수 있는 나룻배 백여 척이 숨겨져 있다고 하더군요· 그 정도면 최소 열 곳의 포구마을에서 운행하는 수량 인데· 맹주께선 설마 모르는 일이라고 하시진 않겠지요?”
녹림맹이 비급을 내놓으라고 할 명분은 표행단이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복마산을 찾아왔을 때에나 그나마 작게라도 만들어진다· 한데 녹림맹이 일부러 몰이를 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 증거를 찾아내 만천하에 알린다면 명분은 산산이 깨져 버리고 만다·
명분이 깨져 버린 순간부터 비급을 내놓으라는 으름장은 날강도짓이 된다·
녹림맹주가 본인의 입으로 말한 것처럼 일개 산채의 채주들이나 하는 짓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것도 천룡표국과 도화곡의 수장을 상대로·
백군악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이종산은 어떻게 배를 찾을 수 있었을까?
잠강 전역을 뒤질 수는 없었을 테니 분명 모든 걸 정확히 예측한 후 척후병에게 가볼 것을 지시했을 것이다·
나로서는 까마득한 경지처럼 느껴졌다·
“모두 자리에 앉아라!”
백군악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녹림도 오백여 명이 일제히 무기를 거두고 자리에 앉았다·
“모두 자리에 앉으십시오!”
이종산도 말했다·
표사와 도화곡의 제자들도 일사불란하게 다시 앉았다·
한바탕의 소동은 일단 싱겁게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지난 밤 이종산은 또 내게 말했었다·
“여자들이 익히는 무공이라는 편견 때문에 강호인들이 착각하는 게 한가지 있다· 도화비검은 아름다운 이름과 달리 비정하고 잔인하며 무서운 검공이다· 어쩌면 대비를 해야 할 쪽은 우리가 아니라 흑두산장일 수도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