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표사 @신갈나무
1화· 나는 쟁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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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막고 나선 자들은 백여 명의 말 탄 칼잡이들이었다·
숱하게 이 길을 오갔지만 저들은 오늘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인근에 새로 산채를 연 녹림인지 표물을 노리고 멀리서 원정 온 마적들인지는 대화를 해 보아야만 알 수 있다·
“진평·”
“하명하십시오·”
“전낭을 들고 나를 따른다·”
“알겠습니다·”
“나머지 표사들은 모두 무기를 점검하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도록· 유사시 쟁자수들은 상자수의 지시를 따른다·”
상자수란 짐꾼을 뜻하는 쟁자수들 중에서도 가장 경험이 많고 노련한 우두머리를 말한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나였다·
간단한 지시를 끝낸 금라도(金羅刀) 가불염이 진평이라는 젊고 손빠른 표사와 함께 말을 탄 채 상대편 진영으로 또각또각 나아갔다·
“형님 괜찮을까요?”
내 다음 서열인 쟁자수 방자광이 슬그머니 어깨를 붙이며 물어왔다·
“절강성에서 천룡표국의 깃발을 보고도 함부로 칼부림을 벌일만큼 간 큰 도적들은 많지 않아· 게다가 노련한 가불염 표두님께서 직접 표행을 이끌고 계시잖나·”
올해 예순 살인 가불염은 평생을 표국일로 잔뼈가 굵은 그야말로 백전노장의 노표두였다·
그라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그렇겠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들 박도를 준비하도록·”
쟁자수들이 싸움을 하면 얼마나 할 것이냐만 그래도 양측이 모두 격돌하는 상황에선 머리 하나가 아쉬운 법이다·
그때였다· 갑자기 적 진영에서 두 개의 은빛이 번쩍였다·
동시에 협상을 하러 갔던 가불염과 진평의 머리가 거짓말처럼 어깨에서 뚝 떨어졌다·
“이런 미친!”
백여 명의 말 탄 적들이 지축을 뒤흔들며 달려왔다·
표사들도 도검을 뽑아 들고는 마주 달려나갔다·
가장 피하고자 했던 일이 결국 터지고 말았다·
“쳐라!”
적장은 가불염조차 단칼에 목을 떨어뜨릴 정도의 고수 거기다 숫적 열세까지 있고 보니 싸움은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피가 허공에 뿌려지고 살점이 사방으로 난무하길 한참 오십 명이나 되었던 표사들은 고작 대여섯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마저도 한칼씩 먹어 언제 목이 떨어질지 몰랐다·
쟁자수들도 나를 비롯해 열 명으로 줄었다· 모두 박도를 들고는 있지만 공포에 질려 감히 휘두를 생각조차 못 했다·
이번 표행이 처음인 어린 쟁자수들은 바지에 오줌까지 지리며 벌벌 떨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지금 막 비적이 휘두른 칼에 맞아 가슴이 쩍 벌어졌다·
“빌어먹을!”
이 정도면 싸움은 끝났다· 표사로서 그리고 쟁자수로서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더 이상의 저항은 의미가 없었다·
나는 박도를 버리고 표물을 실은 짐마차로 뛰어 올라갔다·
이어 정체불명의 적들을 향해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만해 이 개새끼들아!”
그리고 구석에 놓아두었던 커다란 항아리를 꺼내 발아래 표물 상자로 힘껏 던졌다·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가 깨지며 석유 냄새가 코를 찔렀다·
횃불을 만들기 위해 상시 싣고 다니는 석유 항아리였다·
재빨리 품속에서 화섭자를 꺼내 불을 붙였다· 화르륵 소리와 함께 노란 불꽃이 일고 연기가 머리 위로 솟아 올라갔다·
“모두 칼질을 멈춰· 안 그러면 이 마차를 불태워 버리겠다· 물러서! 물러서란 말이야! 씨발놈들아!”
내 서슬에 비적들이 잠시 칼질을 멈추고 한 걸음씩 물러났다·
잠깐 사이에 표사는 모두 죽고 살아남은 사람은 쟁자수만 나까지 열 명이었다·
“왜 욕을 하고 그러세효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이런 일을 하기엔 지나치게 젊은 비적 하나가 피 묻은 칼을 어깨에 척 올리고는 건들건들 다가왔다·
“좆밥은 꺼지고 대가리 나와!”
“저 호로·······”
“그만!”
묵직한 음성과 함께 곤충처럼 생긴 장년인이 말을 몰아왔다·
흉측한 얼굴에 박힌 섬뜩한 눈빛이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가불염과 진평의 목을 단칼에 날려버린 바로 그 자였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남은 사람들을 보내줘·”
“고작 마차 열 대 중 한 대를 볼모로?”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우리가 운송하는 표물이 무엇인지 알고 온 자들 같은데 그래 맞아· 이 표물은 예부좌시랑을 지내고 낙향하시는 왕인엽 대인의 서책들이야· 그중 한 대에 수천 년 전 공자께서 고대의 부적들을 직접 쓰고 엮은 것으로 추정되는 죽간본 한 보퉁이가 있지· 자 내가 어느 마차에 올라탔을까?”
곤충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이제 협상할 마음이 좀 생기셨나?”
“불은 금방 끌 수 있다·”
팡! 팡!
나는 딛고 올라선 나무 상자를 발로 서둘러 밟아 부숴 버렸다·
이어 부서진 상자 사이로 석유가 잔뜩 묻어 줄줄 흐르기까지 하는 죽간본 보퉁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화섭자를 갖다 대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반쯤 타다 만 죽간본을 갖다 주려고? 너희를 사주한 새끼가 그래도 좋대?”
“눈치가 빠른 놈이로군·”
“평생 눈칫밥을 먹고 살았지·”
놈의 눈이 잠시 내 짧은 왼쪽 다리에 머물렀다·
“절름발이인가?”
“개소리 말고 어쩔거야!”
화섭자가 절반이나 줄었다·
한시라도 빨리 쟁자수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곤충 얼굴이 비적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비적들이 옆으로 물러났고 자유의 몸이 된 쟁자수 아홉 명이 우물쭈물 내 눈치를 보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이놈들은 목격자를 없애기 위해 끝까지 너희를 추적해 살인멸구 하려 들 거야· 우르르 몰려가지 말고 뿔뿔이 흩어져· 말이 쫓아올 수 없도록 우거진 야산이나 강 쪽으로 도망쳐야 해·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 것 같아도 하루는 더 방심하지 말고 도망쳐· 알아들었으면 지금 가· 어서!”
“형님은 어쩌고요!”
“처 보면 몰라서 그런 말을 해? 헛소리 말고 빨리 애들 데리고 꺼져· 빨리 가란 말이다· 이 멍청한 새끼들아!”
“형님······!”
“미안해할 것 없어· 나도 죽기 싫지만 하필 내가 상자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거야· 그게 우리 규칙이니까·”
쟁자수들은 눈물을 훔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손에 든 화섭자는 이제 거의 바닥 난 상태였다· 나는 그때까지 왼쪽 손에 들고 있던 죽간본을 재빨리 품속에 집어넣었다·
이어 소맷자락을 입으로 물어뜯어 천 뭉치를 만든 다음 화섭자의 불을 옮겨 붙였다·
“다가오기만 해· 엉!”
슬그머니 다가오던 비적들이 움찔 놀라며 다시 물러났다·
나는 소맷자락에 옮겨붙은 불로 놈들을 위협하며 시간을 최대한 끌었다·
“왜 다들 말을 타고 도망가지 않는 거지?”
아까 그 곤충이 다시 물었다·
나는 저만치 가파른 산속 숲으로 꼴찌가 빠져라 흩어지는 쟁자수들을 힐끗 바라본 후 말했다·
“쟁자수들은 말을 탈 줄 모르니까·”
“너도 쟁자수인가?”
“그렇다·”
“기지도 뛰어나고 기백도 있고· 표사가 되었으면 제법 이름을 날렸을 것 같은데 왜 고작 쟁자수 노릇을 하고 있는 거지?”
“무공이 변변치 않아서 말이지·”
“다리 때문인가?”
“그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하긴 그것도 대단하군· 그런 다리로는 쟁자수 노릇 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아니 어떤 의미에선 더 어려웠을 수도 있었겠어·”
“내게 관심이 많은가 봐· 왜 살려서 수하로 거두시게? 월급만 두둑이 준다면야 한번 생각해 볼 수도 있고·”
“천만에· 잠시 네 놈의 시선을 끈 거야·”
순간 툭 하는 느낌과 함께 불뭉치를 든 내 손목이 잘려나갔다·
그걸 허공에서 누군가가 발등으로 툭 쳐 내더니 이번엔 무언가 화끈한 것이 등을 뚫고 들어와 가슴으로 튀어나왔다·
칼이었다·
나는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빨리 쟁자수들을 쫓아라!”
“죽간본을 빼앗아라!”
십수 명이 말을 달려 사라지는 게 보였다· 대여섯 놈이 죽간본을 빼앗기 위해 마차에 올라탔다·
‘그렇게는···· 안 될걸·’
비록 표행은 실패했지만 가는 길에 남의 밥상에 재를 한번 뿌려 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아직 남은 팔로 마지막까지 품속에 숨겨 두었던 작은 화섭자를 몰래 꺼냈다·
그때 비적 하나가 죽간본을 빼앗기 위해 발등으로 내 몸을 홱 뒤집었다·
순간 커지는 비적의 눈동자·
“너희는 이제 좆됐어· 씨발놈들아· 크크크·”
화르륵!
불씨는 내 가슴으로 옮겨붙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괴물이 되어 마차와 여섯 비적들까지 전부 집어 삼켜버렸다·
지나온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어려운 살림에도 나를 가르치기 위해 학당에 보내셨던 어머니 절름발이가 어떻게 쟁자수를 하겠냐며 비웃던 사람들···
내 평생 소원은 멋진 말을 타고 표물을 호송하는 표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절름발이에 변변한 무공조차 익히지 못했던 나는 허드렛일만 하는 쟁자수로 살았다·
무려 30년 동안이나·
단 하루도 고단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이제는 좀 편안히 쉴 수 있으려나·
‘한데 왜 이렇게 안 죽지?’
몸은 또 왜 이렇게 차갑고·
온몸이 불타고 있으니 미치도록 뜨거워야 하지 않나? 그런데 반대로 뼛속까지 시릴만큼 한기가 찾아들었다·
순간 첨벙! 하는 물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저게 뭐지?’
뭔 사람처럼 생긴 것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물살을 헤치며 나를 향해 날아왔다· 아니 헤엄쳐 왔다·
그러고는 나풀거리는 내 머리카락을 덥석 움켜잡더니 다시 제가 온 곳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뭔 놈의 환영이 이렇게 생생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