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7화· 현인신
“조부님· 세상이 조부님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하얗게 센 머리엔 붉은 기가 살짝 남아 있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새파란 청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런 노인을 보는 청년의 눈동자에 잠시 안타까움이 머물다 사라졌고 이내 고개가 저어졌다·
“되었다· 위태해 보여도 세상은 흐름대로 흘러갈 터이니 괜히 나서서 다시 세상의 흐름에 엮이고 싶지 않구나·”
“하지만 바로스 그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조부님께서 만드신 제국이···!”
“그만하거라 빅터· 모든 게 네 욕심이 자초한 일 아니더냐·”
청년 로건은 모든 것을 안다는 듯 간절한 눈빛의 늙은 손자를 외면했다·
그러자 피가 나도록 입술을 꽉 깨문 노인 빅터 맥라인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게 그게 왜 잘못입니까!’
그 자신도 그 어머니도 눈앞에 있는 신인의 피를 물려받아 보통 사람의 몇 배에 달하는 긴 수명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을 제국을 안정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고스란히 바쳐 왔다·
하지만 여전히 신민들이 숭배하는 것은 자신이나 어머니가 아닌 저 얼굴에 주름 하나 없는 자뿐이니·
‘황실의 전통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입 밖으로 감히 내뱉을 수 없는 말이지만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저 ‘그 올바른 바람’이 살짝 어긋나는 바람에 황실의 방계 핏줄 아레스 가문에서 괴물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그로서는 황궁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저 조부 아니 괴물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딱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내가 그리도 원망스럽더냐?”
“···!”
자신의 푸른 눈과는 다른 선명한 붉은 눈 저 무도한 바론 아레스 놈과 닮아 있는 얼굴이 그의 속을 꿰뚫어 보듯 싸늘하게 물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황급히 손을 내저어 보지만 반응이 너무 늦었음을 빅터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변명을 덧붙였다·
“저 저는 그저 위대한 제국에 조부님께서 다시 나타나시면····”
바로 고개를 숙이며 열심히 이유를 갖다 붙이는 손자를 보는 로건은 그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어리광 부리지 말거라 빅터· 네 과오를 내게 씻어달라니? 네게 제국의 황제로서 자격이 있다 생각하느냐?”
“제국의 위상을····”
말을 하다 말고 참담하게 구겨지는 늙은 손자의 얼굴·
‘어렸을 때는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는데·’
인과를 끊어 내기 위해 간섭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을까·
권력이 사람을 망치는 사례는 많이 겪어 보았지만 그게 제 혈육인 꼴을 보니 그저 모든 것이 허망하기만 했다·
결국 로건은 손자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그만 가 보거라 빅터· 네 업보는 네가 치워야지·”
“조부님!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하시는 겁니까? 이대로라면 조부님께서 애써 세운 제국이···!”
손자가 처음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로건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제국이 아니라 네가 무너지는 거겠지 내 자손아·”
“어 어찌 그런 말씀을····”
“바론 그 아이도 결국은 내 동생의 자손이니 어차피 크게 보면 맥라인인바· 맥라인 안에서의 다툼은 결코 제국의 붕괴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와 내 동료들이 그 정도 기반은 닦아 놨으니·”
큰 충격을 받은 것일까·
맥라인 제국의 3대 황제 빅터 맥라인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다 이내·
“제가 제가 ‘지혜의 붉은 눈’을 이어받지 못해서 이렇게 홀대하시는 겁니까!?”
“음?”
“신황제의 정통성을 타고나지 못했다고 수군거리는 말이 제게 얼마나 큰 수모가 얼마나 큰 상처가 되어 왔는지 아시냔 말입니다!!”
빅터의 처절한 표정을 보면서도 로건은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인과력의 문제 때문에 바깥소식에 가능한 관심을 끊으려 하긴 했었는데 이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닌가·
‘지혜의 붉은 눈?’
제국 성립을 함께했던 동료들이나 스승님이 이 말을 들었다면 얼마나 웃었을까·
자신이 젊을 적부터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해 왔는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저런 말이 나올 수가 없을 텐데·
‘어째 ‘묶는 힘’이 빠르게 약해진다 싶었더니·’
진실과 다른 허황된 소문이 퍼져 나가며 그의 존재를 점차 세상에서 밀어 내고 있는 듯했다·
‘뭐 이제야 더 미련도 없지만·’
로건은 열변을 토하고 있는 손자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 열등감이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리 부족했을까·
모든 이의 위에 서는 운명을 타고나 황제가 된 아이가 어찌하여 저렇게 추한 꼴로 늙어 버렸을까·
신인이니 현인신이니 멋대로 추앙하지만 자신은 여전히 인간 하나 제대로 꿰뚫어 보지 못하는 그저 힘 좀 센 인간일 뿐이라는 게 새삼 절절하게 느껴졌다·
“저는 저는 조부님께 대체 어떤 의미입니까? 예!?”
“사랑스러운 손자···‘였’지·”
이제는 다 늙어 버린 손자이자 맥라인 제국의 황제 빅터 맥라인을 보는 로건의 눈빛은 건조하기만 했고 그것을 마주 보는 늙은 손자이자 황제의 눈에는 차가운 분노가 자리 잡았다·
하지만 로건은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했다·
‘사람은 스스로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다 빅터·’
늙은 손자의 어리광을 받아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것이 결국 그가 해야 할 ‘의무’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 * *
– 세상은 결국 순환한다·
로건이 일시적인 격의 상승이 아닌 진정으로 신인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얻은 깨달음이었다·
빗물이 강이 되어 바다로 흐르고 그 물이 다시 하늘에 올라 비가 되듯이·
이 땅의 모든 것은 마땅히 그리 흘러가야 했다·
계속해서 순환한 세상의 모든 것이 지속적으로 업을 쌓아 세상 자체의 격을 높여 신에게 닿는 것·
그것이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의 진짜 목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얻은 깨달음과 현실 사이엔 많은 괴리가 있었다·
‘당혹스러웠었지·’
모든 것이 순환해야 할 세상이 멈춰 있었으니까·
다행히 그 이유를 금세 찾아낼 수 있었다·
고대의 마룡이 남부 산맥 너머에 소환해 놓았다는 끝없이 다른 차원·
그리고 미숙한 시절의 자신이 억지로 뜯어내 버린 9대신의 요람·
그 사기꾼들이 이 세상에서 뽑아먹은 수많은 영혼·
그 세 가지가 무거운 닻이 되어 세상의 올바른 순환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로건은 마법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신인의 경지에 오른 최초의 ‘인간’으로서 그 닻을 치우고 상처를 치유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자각했다·
기생충들은 떼어냈지만 닻은 없애지 못한 까닭에 세상이 서서히 침몰해 가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그 자신을 위해서라도·
‘의무를 다한다면 사소한 보상 정도는 챙겨도 되겠지요?’
로건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진정한 신에게 무언의 허락을 얻었고 그의 곁에 남은 사람들과의 마지막 시간을 서글프게 하지만 또 기쁘게 보냈다·
그 모든 일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의 영혼에 머물러 있었다·
‘충분히 행복했다· 하지만····’
너무 바빴다·
가족만을 지키고자 했던 울타리가 너무 커져서 수많은 사람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진정 아껴 주어야 했던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있어야만 했다·
‘조금만 더····’
평화로운 시대에서 조금만 더 행복하고 싶었다·
그 역시 인간이었으니까·
그래서 그 소중한 인연들이 모두 떠나고 없을 때부터·
그때부터 그는 이 세상에 자신을 묶어 두는 인과를 본격적으로 끊어 내기 시작했다·
황궁의 심처에 틀어박혀서 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음으로써·
“컹!”
“아 물론 널 제외하고 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시절에서 조금도 변치 않는 신수의 후예이자 마수의 왕 티르·
은빛 강아지 형태의 녀석이 다가와 몸을 비비적거렸다·
녀석 역시 많이 외로울 것이다·
함께 했던 모든 인연이 특히 에일렌이 세상을 떠난 뒤부터 유독 기운이 없어진 녀석이었으니까·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킁?”
턱을 긁어 주는 손길에 더해진 말·
티르가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반드시·”
하지만 로건의 붉은 눈은 오직 진심만을 담고 있었으니 세상에 초탈한 듯했던 신인의 마음에 남은 유일한 열망이 신수의 후예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 * *
맥라인 제국에 광풍이 불었다·
– 초마검사 바론 아레스 그가 바로 신인의 재림이다·
– 위선과 죄악에 가득한 황제를 끌어내리자!
아레스 후작가·
황실의 지속적인 견제로 대공가에서 강등되고 점차 힘을 잃어 추락하던 가문에서 천재가 탄생한 것이다·
그것도 9대신교가 힘을 잃은 사이 연일 세를 불려 가는 로건 교(敎)에서 숭앙하는 신인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후 황실과 황실의 방계 핏줄 사이의 갈등이 불러일으킨 내전은 제도를 뒤집어엎었고 결국 황제와 그 측근이 제도를 탈출하는 대사건까지 일어나며 반군이 황궁을 점령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황궁 폭파 마법진!? 그 미친 황제 놈이 제대로 돌았구나!!”
붉은 눈 붉은 머리의 청년이 노성을 터트리자 옆에 있던 적청의 오드아이 청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슬아슬했지만 어쨌건 막았으니 됐지요·”
“하 어쩐지 너무 쉽게 황궁을 비운다 싶더라니····”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게 있습니다 바론 님·”
“음?”
“황궁의 마법진 전체와 연동된 대규모 폭발 마법인데 그 폭발의 방향성이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향해 있었다는 겁니다·”
“그거야 우리가 입궁한 이후에 터트리려 한 것 아닌가?”
“그런데 그 폭발의 최종 목표가 이 대전도 아니랍니다·”
“뭐라고?”
“황궁의 지하 깊숙한 곳 오래전에 금지(禁地)로 지정된 지저의 중심부를 노린 마법진 같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황궁의 지반을 무너트리려 했다는 건가? 설마 그런 걸로 내가 죽을 것이라 생각지는 않았을 텐데?”
“그럴 리가요· 그들도 주군의 능력을 알 텐데요·”
오드아이의 청년 에드 아이반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 개발한 초월 마법 ‘전마강갑(戰魔剛甲)’이 있는 이상 눈앞의 바론 아레스는 그야말로 불사신에 가까웠다·
황제가 시도했던 수많은 암살 시도가 만들어 낸 완벽한 보호 마법이자 전투 마법·
마법진의 모든 여력을 바론에게 집중시킨다 해도 그가 죽을 확률은 절반에도 못 미칠 것이다·
그런데 지하라니?
“금지에 뭐가 있지?”
“그걸 모르니까 금지 아닙니까·”
“···확인해 봐야겠지?”
“그러시죠 뭐·”
세상에 어느 누가 눈앞의 이 남자를 막을 수 있을까·
에드는 호기심으로 빛나는 붉은 눈을 보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별다른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지하 깊숙이 내려가 그 실체를 대면하기 전까지는·
그그그그긍·
– 무슨 일이지? 빅··· 호 아니구나· 빅터가 아니야·
도대체 얼마나 두꺼운지 감도 안 잡히는 석문이 기계식 장치에 의해 열리자마자 들려온 목소리·
새까만 어둠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엔 사람의 근원적인 공포심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흠칫 놀라며 눈앞의 바론을 바라본 에드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조심· 뒤로 후퇴·
짧은 수신호를 보내는 그의 목덜미에 흥건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인 것이다·
그 상황에서·
– 크르르르르·
어둠 속에 떠오르는 12개의 붉은 눈과 함께 들려오는 맹수의 울음소리·
바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망쳐 에드! 최상급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마수다! 군을 끌고 와!”
뒤이어 그의 검이 포스와 마나를 머금고 허공에 특별한 문양을 그리는 순간·
크드드드득·
우우우우웅·
주변의 돌무더기가 그대로 뜯겨 나오며 바론의 전신을 둘러싼 중장갑으로 변했다·
일순간 3m가 넘는 거대하면서도 날렵한 기사 형상의 골렘으로 변한 바론· 제국 초기에나 몇 있었다는 오러마스터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다 자부하는 그의 특기 전마강갑이 발동한 것이다·
그 전신에 흐르는 포스와 마나가 조화되며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왜 오러유저도 마도사도 아닌 바론이 제국 최강자 중 하나로 불리는지 여실히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면을 압박하는 불쾌하고 끈끈한 살기의 주인을 이길 수 있을지 바론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 워 워· 진정해라 티르· 적이 아니야·
어둠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붉은 눈의 수가 차르륵 줄어들더니 이내 자그맣고 똘망똘망한 한 쌍의 노란 눈으로 변했다·
‘티르?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확연하게 줄어든 살기에 떠나려던 에드의 발걸음이 멈칫하는데·
– 로니안 녀석의 후손이로구나· 옆에는 빅토르 녀석의 후손··· 부관인가? 하하· 빅토르 녀석이 봤으면 열 좀 받았겠구나·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저벅저벅 석실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붉은 머리 붉은 눈의 청년이 은빛 강아지를 데리고 나타났다·
“바···론?”
에드가 골렘으로 변한 바론과 눈앞의 청년을 번갈아 바라보는데·
“드디어 그때가 왔구나· 내 모든 인과가 끊어지는 때가·”
어둠 속에서 나타난 청년 로건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