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58화 (완결)
메시지가 잦아들고 흐릿하던 시야가 돌아온다·
‘겉보기엔 바뀐 게 없는데·’
[겉보기엔 그렇지·]
“····”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인다는 듯 예의 지팡이에 손을 올려둔 탑주가 말을 이었다·
[내 힘을 각인시켜 놓았네·]
“힘···?”
[격락한 성좌 ‘이름을 가지지 못한 창조자’의 힘이 닿습니다·]
조금 전 머릿속을 맴돌던 메시지 중 하나가 떠오른다·
‘이름을 가지지 못한 창조자·’
그건 한때 상급 성좌였던 유일신의 이명이리라·
[그리 심각한 얼굴 할 거 없네· 힘을 각인시켰다 하여 그대의 몸을 장악하는 것도 내가 당장 죽는 것도 아니니· 그저 만약을 대비했을 뿐이지·]
태현이 정말로 등탑에 성공했을 때·
삼천세계가 곧바로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한 안전장치 정도라고·
[물론 그 과정에서 몇몇 성좌들이 자네의 존재를 인식한 것 같네만·]
태현의 반응을 살피던 탑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신 없나?]
“그럴 리가·”
‘요마’와 ‘포식자’가 살아 있음을·
‘미궁’과 ‘십이지’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다른 녀석들이 이 몸을 인식해 봤자 해야 할 일이 바뀌는 건 아니야·”
[그렇다면 이제 돌아가게나· 멈췄던 시간은 곧 원래대로 돌아올 걸세·]
탑주가 다시 한번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저 지팡이가 바닥을 찧게 되는 순간 자신은 다시 탑의 6층으로 돌아가 등탑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나쁘지 않은 만남이었다·”
[톨킨에게도 그렇게 말해주게· 그 아이는 나름대로 자네를 걱정하고 있거든·]
“그 녀석은····”
[건투를 빌지·]
쿵·
태현이 말을 끝맺기 전 탑주의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렸다·
벌컥·
태현이 사라짐과 동시에 허공에 생겨난 문이 열렸다·
[아버지!]
나타난 건 푸른색 로브로 몸을 두른 젊은 여인·
줄곧 이곳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던 탑의 호민관이었다·
[방금 대체····]
[니나· 탑주라고 해야지·]
노인이 인자하게 웃으며 그녀의 말투를 바로잡았다·
니나·
그건 오로지 탑주만이 부를 수 있는 그녀의 진명이었다·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래·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긴 하지· 앉거라·]
스윽·
태현에게 그랬듯 찻잔을 소환한 그가 적당한 온도로 끓인 차를 대접했다·
[이제는 단순한 창조 마법도 힘에 부치는구나· 탑주 노릇도 오래 못 해 먹겠어·]
[····]
[찾아온 건 성력의 파동 때문이지?]
가만히 제 앞에 놓인 차를 보던 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선택을 하신 거죠?]
그녀는 알고 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탑주(塔主)·
삼천세계의 창조자라 불리는 자신의 아버지는 조금 전 후계를 선택했다·
[항상 말씀하셨잖아요· ‘용’을 돕는 게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그랬지·]
[그런데 왜 그런 녀석 따위에게···!!]
도플갱어·
이미 성좌의 격에 도달한 ‘요마’도 ‘포식자’도 아닌 존재·
제대로 된 이름조차 가지지 못한 가짜·
탑주는 그런 녀석에게 얼마 남지 않은 성력을 넘겨주었다·
탑을 수호하는 자로서 그녀는 누구보다 빠르게 그 사실을 인지하고 찾아온 것이다·
만약 의도치 않게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면 어떻게든 ‘김태현’을 찾아 찢어 죽이겠다·
그런 생각을 확실시한 순간이다·
[너무 미워할 거 없다· 내가 선택한 일이니·]
[아버지!!]
[괴이가 움직였다·]
[···!!]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니나의 몸이 움찔거렸다·
[대성좌가 어떻게 이곳에····]
[역시 모르고 있었구나·]
[그게··· 무슨····]
탑과 이어진 모든 중간계는 그녀의 관리하에 있다·
그런데 ‘괴이’가 개입된 중간계가 있다니?
대성좌가 아무리 몸을 숨긴다 해도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그녀의 생각을 읽은 탑주가 짧게 혀를 찼다·
[넌 출신지를 증오하는 경향이 있었지·]
[설마····]
스륵·
그들의 사이로 하나의 영상이 띄워졌다·
[····]
니나가 자신의 출신지였던 중간계를 눈에 담았다·
[어째서·]
어떻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왜 다른 곳도 아닌 저곳인가·
그녀가 탑주를 쳐다보았다·
[‘용’을 통해 접근했겠지· 녀석이 수를 쓴 것 같다·]
[바알··· 이 배신자 놈이···!!]
쾅!
분개한 그녀가 앉아 있던 원탁을 내려쳤다·
탑의 관리자들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유일신의 영향을 받은 자·
유일신이 조각의 형태로 흩뿌렸던 이들이 이곳에 모이게 된 건 ‘요마’가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면서 이루어낸 결과물이다·
‘요마’가 설계한 가능성이 ‘포식자’에게 주어졌고 도플갱어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이미 한 번의 회귀를 끝내고 상급 성좌의 격을 이룬 ‘용’은 ‘괴이’까지 끌어들여 가능성의 탑을 삼키려 하고 있었다·
[그 가짜····]
감정을 가라앉힌 그녀가 탑주와 눈을 맞췄다·
[제 이름도 가지지 못한 녀석을 선택한 게 이런 이유 때문인가요?]
[아니라곤 못 하겠구나·]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대답이었다·
[성정은 바알을 닮았더구나·]
바알·
‘용’이 되기 전 유일신이 빚었던 최초의 모습·
[····]
니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알고 있다·
눈앞의 노인이 ‘바알’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
삼천세계에 존재하는 유일신의 조각들 중 누구보다 강대하게 빚어진 존재·
이제는 제 창조주를 넘어선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한때는 그 아이가 삼천세계의 유일신이 되기를 바랐다·]
지금은 아니었다·
‘창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시조새’라면 모를까·
[‘괴이’는 위험한 녀석이다· 삼천세계의 생존 유무에는 관심이 없을 테지·]
오히려 ‘창성’의 힘이 깃든 삼천세계를 제 입맛대로 변형시키려 들 것이다·
그 결과물이 생명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더럽혀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용’은 성장을 위해 받아들일 테지· 대성좌를 목표로 하고 있을 테니·]
[그래서····]
[‘포식자’의 몸을 움직이고 있는 그 아이· 스스로를 아직까지 ‘김태현’이라 부르더구나·]
[····]
[6층에서 적지 않은 시간선을 경험한 게 득이 되었는지 실이 되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단 말이지·]
확실한 건·
[그 아이에겐 가능성이 있다·]
성좌의 아바타로서 성력을 안정화시킨 자·
6층을 선점한 이그문과의 전투는 일종의 시험대였다·
다소 무리한 방법이긴 했지만 그는 족쇄를 끊어내고 승리를 쟁취했다·
[하지만 아버지· 녀석이 바알의 성정을 닮았다면····]
니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선택을 받았다면····]
[미안하구나·]
[젠장···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그게 가짜 녀석일 줄은···· 아버지가 그렇게 결정했다고 나까지 따를 필요는 없는 거겠지?]
[그래·]
탑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싹트는 건 언제나 생각지도 못한 변수에서 시작되는 법이지·]
니나의 시선이 영상으로 향했다·
‘괴이’를 베어내고 있는 은발의 기사·
[그렇다면 나는 이 녀석으로 하겠어·]
자신이 오래전 떠나온 출신지·
괴이가 삼천세계를 침식하는 수단으로 선택한 시작점·
[이미 멸망이 예정되어 있는 곳을 선택하는 것이냐·]
니나가 물음에 답하지 않으며 히죽 웃어 보였다·
조금 전과 달리 모든 걸 받아들인 후련한 얼굴이었다·
[톨킨 녀석은 당연히 김태현에게 붙었을 테고·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한걸·]
탑을 구성하는 간부들·
본래 이곳 원탁에 자리해야 할 이들에게도 탑주는 선택을 강요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아버지의 선택이 틀리지 않길 바랄 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니나가 사라졌다·
[틀리지 않은 선택이라····]
혼자 남은 탑주가 ‘괴이’가 침공한 중간계를 살폈다·
자신의 조각을 쥔 은발의 남자·
필멸자의 한계에 근접한 그는 ‘괴이’의 침식을 늦춘 대가로 죽어가고 있다·
[에드안 유라시아·]
남자·
필멸자의 이름을 입에 담아보았다·
그리고·
[아다마스·]
다소 형태가 바뀐 자신의 조각·
그 역시 괴이를 상대한 부작용으로 온전치 않아 보였다·
[이렇게 또 새로운 변수가 탄생하는군·]
니나가 담당하기로 한 이상 자신이 개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의 시선을 따라 새로운 영상이 허공에 띄워졌다·
대공들과 함께 7층을 오르기 시작한 태현의 모습이 보였다·
하계의 대공들·
그중에는 자신의 조각이라 불렸던 이들도 ‘용’과 ‘요마’의 영향을 받아 각성한 이들도 있다·
[너의 적수가 또 늘어나겠구나·]
누구에게랄 것 없는 혼잣말에·
띠링·
[‘다섯 개의 심장을 가진 용’이 침묵합니다·]
그의 눈앞으로 경고와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디 한 번 지켜보자꾸나·]
탑주가 쓰게 웃으며 지팡이로 바닥을 찧었다·
스륵·
언제 존재했냐는 듯·
탑의 주인이 모습을 감추었다·
* * *
대우주 어딘가·
[괜찮은가·]
보이지 않는 권능에 속박당한 요마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시선이 권능에 속박되어 있는 만신창이의 포식자에게 향했다·
조금 전의 고문은 하급 성좌가 견딜 만한 것이 아니었다·
[버틸 만해·]
[····]
덤덤한 목소리에 요마가 후욱 숨을 내쉬었다·
대답과 달리 그의 상태가 온전치 않음을 알아서다·
[만약 우리의 존재력이 이어지지 않았다면··· 조금 전의 충격으로 소멸되었을 거다·]
포식자가 대답 대신 입꼬리를 비틀었다·
[너까지 잡힐 줄은 몰랐다·]
공허만이 가득한 곳에 요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포식자가 킬킬거렸다·
[너를 살리고 십이지가 도망칠 시간을 벌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용은 요마와 포식자를 결코 죽이지 않는다·
죽인다 해도 그건 삼천세계의 가능성을 모두 소진시킨 이후·
[우리의 쓸모가 다한 뒤다·]
[쓸모라····]
[뒷일이라면 걱정할 거 없어· 녀석이 이어받았으니까·]
[포식· 그 녀석은····]
[다혈질이긴 해도 멍청하진 않으니까·]
오히려 선이 없다는 점에선 그릇의 시작이 인간이었던 그들보단 나을 것이라고·
포식자가 단언하였다·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 ‘안’과 ‘바깥’은 시간의 흐름이 달라·]
포식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별자리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핵심 요소·
대성좌가 될 수 있는 가능성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십이지·
만약 그가 등탑을 포기하고 바깥으로 나와 대처하지 않았다면?
용의 배신으로 수많은 동료가 붙잡히고 개조되어 이번에야말로 희망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요마가 설계하고 포식자가 둔 수·
[그 오만한 녀석이라면· 용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거라 확신하지·]
[····]
비록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기다릴 수 있다·
요마가 가만히 포식자를 쳐다보았다·
[그래·]
전쟁의 판도를 바꿀 주사위는 던져졌다·
[모든 건 그 녀석에게 달렸군·]
* * *
탑의 99층에 도착한 태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거 신전으로 사용되던 곳인지 거대한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모양새·
눈앞에 아스모데우스가 있었다·
자신과 맹약을 맺었던 존재이자 6층에서의 전투 이후로 적으로 돌아선 존재·
“설마 용에게 개조당한 상태로 여기까지 따라올 줄이야·”
6층에서 이그문을 죽이고 ‘미궁’의 성력을 쟁취했다·
20층에서 모두를 살리는 대가로 오르갈을 잃었다·
35층에선 요르문간드를 희생시켜 목숨을 부지했다·
53층에선 로자리아를·
66층에선 엘븐을·
74층에선 티폰을·
87층에선 하자드를·
93층에선 루시퍼를·
98층에선 길페르를 잃었다·
세 명의 대공이 아스모데우스에게 소멸했다·
“이 지긋지긋한 탑도 한 층만 더 오르면 끝이다·”
[탑주를 만나 예견된 미래가 아니던가·]
아스모데우스의 목소리에는 용의 사념이 묻어 있다·
과거 자신과 맹약을 맺은 존재가 아닌 용의 꼭두각시·
“예견된 일이긴 했지· 정해진 미래는 좋아하지 않지만·”
[이날을 기다렸다·]
“이 몸과 생각이 일치하는군·”
태현이 마정석을 회전시켰다·
탑을 오르던 중 각성한 성좌의 격·
마정석에 각인된 성력이 발현되었다·
띠링·
[중급 성좌 ‘이름을 수집하는 노네임’이 공간을 장악합니다·]
퍼져 나간 성력이 일대를 지배한다·
순수한 삼천세계의 힘만이 허용되는 영역·
“이곳에서 성력은 사용할 수 없다·”
[노네임· 네 녀석이 가지기엔 과분한 이름이지·]
“약육강식· 이긴 자가 모든 걸 가진다·”
그게 삼천세계의 법칙·
[네놈은 바깥으로 나가지 못해·]
콰아아아아·
인간형을 취하고 있던 아스모데우스가 용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기·
하자드와 길페르를 소멸시킨 완전한 악마룡의 모습이자 삼천세계의 아스모데우스가 지닌 최강의 가능성·
그에 대항하듯·
쩌어어억·
그들의 발밑으로 신마력으로 빚어진 아가리가 벌려졌다·
쩌어억· 쩌어어억·
끝없이 벌어지는 아가리의 범위가 일대의 공간을 모두 담은 순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태현의 명령이 이어졌다·
“씹어 삼켜라· 포식·”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