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53화
[어떠냐· 이그문을 쓰러트리는 걸 도와주겠다· 그 대가로 서로의 등탑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지·]
아스모데우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탑은 100층·
비록 지금은 김태현이 앞서나가겠지만 정보가 없는 건 자신이나 이그문이나 김태현이나 마찬가지·
‘기회는 있다·’
‘용’ 또한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회귀시키진 않았을 테니·
“오리지널에 이어 이 몸과 겨뤄보시겠다?”
[안 될 것 없지 않나· 이그문보다는 김태현의 이름을 짊어진 그대와의 경쟁이 더 흥미로울 듯하거든·]
“····”
[····]
두 열쇠가 눈빛을 교환하길 잠시·
먼저 입을 연 건 태현이었다·
“거절한다·”
[····]
아스모데우스가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겉보기와 달리·
‘무슨 생각이냐·’
내심 진의를 읽으려 노력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
태현이 들어 올린 검지를 까딱거렸다·
“네놈은 이미 오리지널에게 한 번 패배했다· 그런 녀석과 다시 경쟁하는 건 구미가 당기지 않는단 말이지·”
[네놈··· 실없는 감정으로····]
“게다가 우리가 힘을 합친다고 해서 이그문 녀석을 순순히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아쉬운 소리를 하는군· 보아하니 본연의 권능은 물론 성력도 다루지 못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가 세 성좌의 힘이 모였던 순간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잘난 ‘포식’으로도 성력을 어찌하지 못했다· 하물며 포식도 사용할 수 없는 지금· 이그문이 성력을 사용하면 네놈으로선 걷잡을 수 없겠지·]
패배가 그려지는 판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고·
아스모데우스가 입장을 확실하게 드러냈다·
“이 몸과 맹약을 맺는 건 어떠한가·”
[우리에겐 크게 의미 없는 제약이군· 뭐 형식적이라 해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낫겠지·]
어차피 이그문과도 맺었던 것이다·
맹약이라는 건 서로의 격을 걸고 맹세하는 약속·
본래라면 파기한 순간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지만 성력(星力)이라는 힘이 개입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이그문은 ‘미궁’의 자신은 ‘용’의 성력을 지닌 존재·
‘요마’의 성력을 지닌 김태현이라면 맹약을 깨트려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가 이그문과 루시퍼 사이에 있었던 주술을 해제했다는 걸 이미 확인했기에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약속을 위한 증표를 원하는 거라면 맺도록 하지·]
“이 몸이 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만?”
태현이 고개를 검지로 제 머리를 가리켰다·
[설마 대공들과 같은 계약을 말하는 건가·]
어깨를 으쓱이는 태현·
[하·]
아스모데우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듣기엔 재미있어 보인다만 그래서는 추후의 경쟁이 애매해지지 않겠나·]
마정석을 형성한다는 건 서로의 권능을 동기화한다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권능의 사용권을 넘겨준 이그문과는 상황이 다르다·’
열쇠였던 그들은 상극의 존재·
김태현은 ‘포식자’였던 존재이며 ‘요마’의 힘도 잠재되어 있다·
[일전 세 성좌의 힘이 닿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고 있을 텐데?]
지금의 시간선이 제아무리 가능성으로 압축된 세계라 해도 감당할 수 있는 존재력은 한계가 있다·
[6층에서 어느 정도 힘을 되찾은 모양이다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성력을 실험하는 것 따위에 목숨 걸 생각은····]
“실험 같은 게 아니다·”
[···?]
“어차피 서로의 것을 노릴 거라면 시간을 지체할 필요 없겠지·”
‘이 녀석은 계속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상식에서 벗어난 말을·
그들의 본질과 벗어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
그 의도를 파악하려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다·
“심상에 네놈을 받아들이겠다·”
[···!!]
감정 표현이 드문 아스모데우스의 적안이 흔들렸다·
하계왕의 열쇠였던 자가 상계왕의 열쇠를 심상 세계에 받아들이겠다 말하고 있다·
[그 의미를 알고 하는 말인가·]
“잘 알다마다· 자칫 잘못하면 네놈이 이 몸을 집어삼킬 수도 있다는 의미지·”
[그런데도 그따위 제안을 한다?]
“이 몸의 대응력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군·”
[대응력····]
“이그문이 빠트렸던 함정에서 빠져나온 것뿐 아니라 6층에 존재하는 수많은 시간선을 타파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길페르의 격을 악마왕 수준으로 회복하는 데에도 성공했지·”
아스모데우스가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네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든·”
태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그에 상응하는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가·]
아스모데우스의 입가에도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너는 나와 동류로군·]
가식이 아니라 진짜 감정·
그가 속에 있던 말을 끄집어냈다·
[김태현에게 패배하여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은 것부터가 말이야·]
조롱이라 해도 좋다·
태현 또한 그 말에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동급 취급하지 마라· 대답은?”
[그 잘난 계획부터 들어보고 결정하지· 부디 시시한 내용은 아니었으면 좋겠군·]
“너를 성좌로 만들어주겠다·”
아스모데우스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런 말이라면 이그문도····]
“이 몸은 대성좌가 될 생각이다·”
[····]
지금껏 성좌를 칭함에 있어 기준은 삼천세계를 중심으로 탄생한 세 정점·
그리고 그들과 동맹관계로 보이는 ‘미궁’과 ‘십이지’다·
‘포식자’는 하급·
‘요마’는 중급·
‘용’ ‘미궁’ ‘십이지’는 상급 성좌의 격을 지닌 존재·
그들이 별자리 전쟁을 하는 이유가 대성좌의 놀음에 대항하기 위함임을 알고 있다·
“알고 있다면 대화가 쉽겠군·”
[네놈· 도대체 무슨 터무니 없는 꿍꿍이를····]
“대성좌의 심상에 존재하는 자라면 평범한 성좌는 아닐 터·”
[····]
“열쇠가 투덕거리는 건 이미 지나간 일이다· 앞으로는 별자리 녀석들을 상대로 격을 취할 생각을 해야겠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녀석이었군····]
아스모데우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회귀하여 새롭게 도전의 기회를 얻었을 때에도 이그문과 손을 잡아 다음 기회를 노리게 되었을 때에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
아니 애초에 지금 정도의 격을 달성하게 되면 감정이라는 게 익숙하지 않다·
그건 눈앞의 김태현도 마찬가지일 터인데·
그런데도·
‘고작 말 몇 마디 나누는 걸로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가·’
하하·
짧게 웃은 그가 몸을 들썩였다·
[하하하····]
들썩이는 몸과 함께 웃음이 터져 나왔다·
“흐음··· 그렇게까지 웃긴 제안은 아니라 생각했다만?”
[하하하하하····]
“흠··· 이 몸의 아량에 미치기라도 한 것인가· 뭐 어찌 되었든 선택은 네 몫이다·”
아스모데우스가 웃음을 멈춘 건 오래지 않아서다·
잠시 후·
과거의 맹약이 파괴되고 새로운 맹약이 이어졌다·
[····]
진화의 악마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 * *
‘감각이 차단되고 있다·’
암전하는 시야 속에서 머리가 빠르게 굴러간다·
수많은 상황을 가정해 보았다·
가정이 내린 결론은 하나·
아스모데우스가 김태현과 맹약을 맺은 것뿐 아니라 심상 세계의 주술까지 맺었다·
수많은 가정 중에서도 가장 확률이 희박한 경우·
그들의 관계와 아스모데우스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일어나고 말았단 말인가·’
그 결과로 자신의 오감이 완전히 꺼지고 있다·
‘무슨 짓거리를 벌인 것이냐·’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직전의 순간을 떠올려 보았다·
녀석의 적안과 마주친 직후 시야가 어두워졌다·
‘아스모데우스에겐 정신지배의 권능 같은 건 없다·’
자신이 모르는 권능을 지녔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녀석의 그릇은 이미 세 개의 권능을 지니는 것만으로도 한계다·’
그렇지 않았다면 ‘용’이 그에게 권능을 더 부여해 어떻게든 열쇠 전쟁에서 승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흡수’의 권능을 공유해 주었기에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다·
‘권능의 공유라도 일어난 것인가···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본귀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선 어지간한 수준으론····’
머릿속으로 변수를 포함한 수많은 가정이 새롭게 펼쳐진다·
까득·
이그문이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잇소리에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본귀가··· 당황하고 있다···?’
전지전능·
미궁의 힘을 얻고 삼천세계의 비밀을 깨닫고 유일신에 가까워졌다 생각했는데·
지금 그의 상황은 전지나 전능과는 멀어 보였다·
‘흡사 미궁에 빠져 길을 잃은 기분이지 않은가·’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어낸 인물을 떠올렸다·
김태현의 도플갱어·
알맹이가 바뀌었다 하여 방심하진 않았다·
오히려 보다 확실하게 짓밟아 가능성을 빼앗기 위해 몇 번이나 고심하여 선택한 길이다·
‘녀석은 본귀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담보삼았다·’
그 매개가 길페르든 아스모데우스든·
통합왕의 격에 오른 자신의 오감을 제한할 정도의 기술을 펼쳤다·
‘부족하다·’
이것만으로는 자신을 해할 수 없다·
신마력이 몸을 휘감고 있으며 지금의 육체에 충격을 주려면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출력을 지닌 공격을 가해야 한다·
‘무엇인가·’
자신을 심상에 끌어들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심상 세계는 정신력이 가장 큰 변수를 만들어 내는 곳·
만약 김태현의 노림수가 부족했던 출력을 대신하기 위함이라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허나 성력을 사용한다면 그조차도···’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
이그문의 몸이 움찔거렸다·
움찔거렸다는 감각 또한 착각일지 모른다·
확실한 건 그의 사고가 정답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성력을 사용하게 하기 위함이었는가·’
본디 삼천세계에서 사용해선 안 될 힘·
가능성의 탑을 매개로 한 지금의 시간선이 아무리 수많은 존재력을 포용할 수 있다 해도·
‘성력은 규격 외의 힘이다·’
사용할수록 삼천세계에는 해가 가해지고 탑의 관리자가 개입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양날의 검·
‘탑의 관리자는 김태현의 측근이다· 녀석이 개입하는 건 최대한 피해야 한다·’
초기에 확인한 몇 번의 실험과 일전 세 성좌의 힘이 닿았던 순간 파악한 사실이다·
그런 자신이 성력을 사용하게 만들고 있다·
‘관리자의 개입을 유도하고 있었던가··· 이 멍청한 놈들이····’
성력이라 하여 다 같은 성력이 아닌데·
성좌의 아바타·
그는 새로운 힘을 안정화시켰다·
그뿐인가·
‘6층에서 회복 중인 또 하나의 육체를 활용한다면 녀석들에게 보인 일말의 승기조차 사라지게 될····’
그때·
이그문의 머릿속에 새로운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티폰을 이용해 수많은 시간선을 빠르게 경험했을 김태현·
수많은 시간선을 경험했을 녀석은 자신의 육체가 있는 시간선은 찾지 않았다·
까딱·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
아무런 반응이 없다·
‘연결이 끊어져 있다!!’
자신의 육체가 단절되는 순간을 노렸음이 확실하다·
6층과 융합된 티폰·
자신의 심상을 매개로 좌표를 제공한 김태현·
녀석의 심상은 6층·
차원의 틈과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이그문의 오감이 빠르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정답을 도출했군·”
[···!!]
회복된 청각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빛을 발하며 서 있다·
“지금 막 네놈의 목을 따고 오는 길이다·”
무례할 정도로 건조한 목소리·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중간계의 시간으로 1만여 년이 지났다·”
[네놈····]
“덕분에 힘의 제한도 상당수 풀 수 있었지·”
광휘가 걷히고 오만한 얼굴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김태현을 마주했다·
“확인해 보고 싶지 않은가?”
[가짜 주제에· 발칙한 계획을 꾸미고 있었구나·]
태현이 답 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뜯어먹어라·”
들어 올려진 손이 이그문을 가리켰다·
쩌어억·
아가리를 벌린 어둠이·
발가벗겨진 대적자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