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51화
[····]
아스모데우스가 상태를 확인했다·
악마왕 길페르의 권능 진화·
그리고·
‘퇴화· 그건 상당히 위협적이군·’
이그문이 티폰 루시퍼와 함께 길페르와 손을 잡으려던 것도 그런 이유다·
권능이라는 건 일차원적으로 활용한다면 자신에게서 범위를 벗어날수록 위력이 약해진다·
대공이라 하여 그 위력과 범위가 향상될 뿐 큰 틀에서 보면 다르지 않다·
하지만 권능을 각성하게 될 경우엔 얘기가 달라진다·
‘주변의 생명체와 환경에도 영향을 미치는 게 가능해진다· 하물며 감소 되지 않는 위력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길페르·
그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진화의 축복을 받게 되며 그녀를 손에 넣는 것만으로 축복과 저주를 함께 손에 넣게 된다·
‘하계의 운이 또다시 김태현을 돕기 시작하는가·’
김태현·
자신의 대적자·
도플갱어란 녀석과 알맹이가 바뀌었지만 녀석은 길페르를 손에 넣은 것뿐 아니라 그녀의 격을 상당히 회복시켜 놓았다·
[심상 세계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나·]
길페르를 통찰한 아스모데우스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 권능은 각성시키지 못했군·]
꽈악·
아스모데우스가 자신의 몸에 박아넣은 가시를 잡으며 확신했다·
‘작용하는 힘은 마력·’
다행이라면 그녀가 하계왕 시절 손에 넣었던 신마력도 지금의 시간선에서 접촉했던 성력도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악마왕 수준으로 퇴화했을 테지·’
찰나의 시간을 쪼개어 생각을 정리해 본다·
6층의 시간선·
‘티폰을 이용해 가능성을 경험하며 길페르의 격도 회복시켰다·’
그리 이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길페르의 경우 완전히 회복한 건 마력뿐이라는 것이겠지· 그리고·’
콰직·
아스모데우스가 가시를 강제로 부러뜨렸다·
가슴을 꿰뚫은 가시는 제거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몽식에 당해 뜯겨나간 팔 또한 재생되지 않았다·
존재력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는 의미이리라·
[····]
태현 또한 신력이나 신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회복을 하지 못했거나·
회복을 하고도 교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태현을 통찰했다·
도플갱어·
분명 가짜에 불과할 터인데 상대하기 불편하다·
오히려 어떤 점에서는 김태현보다 더 까다롭게 느껴질 정도다·
그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이번에도 패배자가 될 운명이라·’
해볼 만하다 생각했는데·
[그 말은 상당한 상처로 다가오는군·]
그는 이번 시간선에선 패배자로 남을 생각이 없다·
그렇기에 현실을 직시했다·
‘승세가 기울었다·’
지금 상태로 심상 세계에서 악마왕 수준의 길페르와 몽식을 사용하는 김태현을 상대로는 완전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
‘최악의 경우 공멸·’
어떻게 승리한다 해도 타격을 입은 자신을 이그문이 손쉽게 제압하는 그림이 그려진다·
그들이 맺은 동맹은 언제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연약한 것이니까·
[····]
태현과 길페르가 양쪽에서 다음 공격을 노리고 있었다·
여기서 죽는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그만하지·]
아스모데우스가 투기를 낮추었다·
“그만이라·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일까·”
말과 달리 태현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여기서 나를 제거하는 게 목표는 아닐 텐데?]
태현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대와 손을 잡겠다는 의미다·]
“갑작스러운 행동이군·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요르문간드에게 본보기를 보였었지· 이 몸은 배신에 예민하다는 말이다· 특히나 네놈은 악마왕으로서의 권능이 ‘배반’이지 않은가·”
[····]
“추상적인 권능이지만 그건 네놈의 많은 걸 보여주고 있지·”
대악마 아스모데우스·
그는 악마라는 종을 배반하고 하계를 배반하고 끝내는 상계마저 배반할 생각을 품었다·
[그리하였기에 상계왕에 도달할 수 있었다· 모두가 그대처럼 희망을 품는 건 아니거든·]
“이번에는 이그문을 배반할 생각인가?”
물음에 아스모데우스가 마주 웃었다·
[아쉬운 모습을 보이는군· 조금 더 말이 통하는 녀석인 줄 알았다만·]
[맹약자· 이 녀석의 말을 더 들을 필요 없다·]
길페르가 권능의 밀도를 끌어올리며 참견했다·
요르문간드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뱀 같은 존재라고·
그녀가 단호한 목소리로 강조했다·
[길페르· 최강의 악마왕이라 불렸던 자가 지금 보니 겁쟁이이지 않은가·]
[배반자· 네놈에게 들을 말은 아니다·]
킬킬킬·
아스모데우스가 공격에 대비하며 육체의 긴장도를 높였다·
[지금 다시 맞붙으면 공멸이다·]
만전이라면 모를까·
[누가 이겨도 성력을 지닌 이그문과의 연전에선 살아남지 못해·]
“생각보다 현실적이군?”
[말하지 않았나· 나는 다시 패배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인정하지· 그대가 분위기를 바꾸었다·]
“좋아· 한번 들어보지·”
[맹약자!!]
“길페르· 우리가 한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지?”
[····]
무게 실린 태현의 말에 침묵하는 길페르·
지켜보던 아스모데우스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역시 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이지 않다· 해볼 만하겠구나·’
마음먹는다면 어디를 공략해야 할지도 눈에 훤히 보인다·
“이봐· 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 마라· 이 몸은 오리지널처럼 물렁하지 않으니까·”
[오리지널이라· 그렇게 구분하기로 한 건가·]
“거기까진 알 거 없고· 그래서·”
태현이 고개를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이 몸이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을 준비한 거겠지? 쓸데없이 시간을 벌 속셈이라면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럴 리가· 단언하지·]
“호오·”
비열한 미소와 저열한 웃음·
태현과 아스모데우스가 서로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분명 만족할 것이다· 두 개의 열쇠가 힘을 합치면 삼천세계의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테니 말이야·]
* * *
[겨우 이 정도였던가·]
이그문이 요정의 숲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초토화된 숲 한가운데·
다수의 십자가가 봉인식을 이루듯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들 하나하나에 대공들이 결박되어 있다·
티폰을 이어 나왔던 건 오르갈 요르문간드 루시퍼 하자드·
[본귀가 대공이던 시절 누구 하나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던 녀석들의 꼴이 말이 아니군·]
지금은 혼자서 이들 모두를 상대하고 있다·
[숙주라 해도··· 상당히 실망스러운 일이야·]
로자리아와 엘븐을 제외하면 본체라 할 만한 대공은 없다·
‘숙주라 해도 결합도가 높다·’
시간이 지난다면 통합왕 수준에 오른 자신의 분신처럼 대공들의 존재력을 감당할 정도·
‘그렇지 않았다면 시간 벌기도 되지 못했을 테지· 지금의 상황이 나타내는 바는 명확하군·’
숙주들을 통해 5층으로 돌아와야 할 정도로 6층에 갇힌 대공들이 헤매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에 대공들의 숙주를 이 정도씩이나 발견한 건 대단한 일이다·
[안 그런가 루시퍼·]
이그문이 잿빛 마력으로 찢어진 입을 재생하고 있는 백세희를 보며 말했다·
[전의를 꺾으려 봉인했건만 오히려 힌트를 주었던 듯하군·]
십자가에 속박된 몸을 빼내기 위해 들썩이는 백세희의 몸을 쥐려는 순간이다·
드드득·
[····]
무언가가 이그문의 발에 걸렸다·
돌로 만들어진 손·
투박하다 못해 조악한 그 손은 결박된 티폰에게로 이어져 있다·
[거인왕의 분신· 아직 저항할 힘이 남아 있는가·]
박살 난 얼굴과 사지가 찢겨 웃음조차 터트리지 못하는 티폰이 몸을 들썩였다·
[초라하군·]
츠즈즈즈·
닿은 손을 매개로 티폰의 존재력이 흡수되었다·
사르륵·
분신의 몸이 마력과 함께 흩날리기 시작한다·
차원의 틈에 갇힌 티폰이 자신의 존재 일부를 떼어내 분신을 만들어낸 것임을 확인했다·
[다른 녀석들처럼 숙주를 구하기도 힘든 상태라는 의미일 터·]
푸욱!
그가 혈을 박아 넣어 티폰의 분신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도록 존재력을 고정시켰다·
어차피 몸을 회복하는 대로 차원의 틈에 있는 티폰도 굴복시킬 생각이다·
자신과 달리 그의 본체는 하나이며·
[발목을 잡힌 건 네놈들이지 않은가·]
이그문이 숲의 주인인 엘븐에게 다가갔다·
[김태현은 어디 있나?]
[모른다· XX아·]
찰싹·
엘븐의 얼굴이 돌아갔다·
[여전히 입이 험하군·]
[이 XXX한 XXX이···!!]
이그문이 욕지거리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모른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저 영역의 대표이기에 물어본 것뿐이지·]
[이 XXX이· XX할 녀석이 과분한 힘을 얻어 설치는구나·]
[흠· 아가리부터 찢어놓는 게 맞겠어·]
죽일 생각은 없다·
요정왕은 자유를 박탈당한 채 자신에게 신수의 힘을 이양하는 양분이 될 테니까·
천천히·
푸우욱·
그녀의 복부에 새로운 혈검을 박아 넣었다·
[카학····]
[함부로 입을 열면 역류가 차오를 것이다· 이걸로 당분간은 얌전하겠구나·]
다음으로 잘려 나간 하체가 재생되지 않고 있는 로자리아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하체에 더해 특별히 눈을 도려내 놓았다·
정신지배를 허락할 정도의 격 차이는 아니지만 만에 하나까지 대비한 처세였다·
[네년은 김태현과 특히 가까웠지· 알맹이가 바뀌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소로운 것· 이런다 하여··· 삼천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듯싶더냐····]
[무의미한 저항을 계속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네놈들을 이용하면 김태현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쯤 어려운 일도····]
말을 끝맺기 전·
콰아아·
이그문의 뒤편에서 게이트가 열리며 아스모데우스가 걸어 나왔다·
[이런· 그 꼴은 뭔가·]
만신창이인 아스모데우스를 보며 이그문이 무심히 물었다·
악마왕들은 아스모데우스를 이 정도로 만들 수 없다·
[김태현· 녀석이군·]
[그래·]
[녀석은 어디 있지?]
[도망쳤다· 숙주와 함께 왔었지·]
툭·
아스모데우스가 쥐고 있던 두 개의 가시를 던졌다·
독망과 포악의 가시·
두 개의 가시에 닿은 핏빛 마력이 태현의 존재력을 알아챘다·
[····]
[6층으로 도망간 듯하다· 차원의 틈에 갇혔다던 티폰을 이용해 말이야·]
이 모든 게 이그문의 잘못이라는 듯 아스모데우스의 목소리엔 조롱이 섞여 있었다·
[그런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차원의 틈에 갇혀 있는 티폰의 본체와 6층으로 도망친 김태현을 처리해야겠군·]
이그문의 적안이 아스모데우스와 마주치며 정적이 흘렀다·
요정왕의 욕지거리도 백세희의 신음도 로자리아의 조롱도 그 순간만큼은 빛이 바랜 것처럼 조용했다·
침묵을 깨트린 건 이그문이었다·
[아스모데우스· 만약 그대가 본귀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그리하였겠지·]
[····]
[우리의 관계가 얄팍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일부러 놔줬다 생각하는 건가? 녀석에겐 몽식이 있다· 작정하고 도망친다면····]
[아니·]
이그문이 그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변명은 듣지 않겠다· 다시 묻지· 김태현은 어디 있나?]
츠즈즈즈즈···!!
요정의 숲 전역에 블러드 필드가 전개되었다·
곳곳에서 혈검이 생성된다·
‘성력 없이도 이 정도 존재력인가· 대적하려면 모든 걸 꺼내놓아야겠군·’
생각과 동시에 아스모데우스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곤란하군·]
드드드드·
악마왕이었던 존재가 용의 모습을 취했다·
마기가 이그문의 마력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실망스런 선택이다· 패배자·]
이그문이 마력에 한 줌의 신력을 덧씌웠다·
신마력과 닿은 마기가 조금씩 밀리는 모양새를 보였다·
콰아아아아·
아스모데우스가 벌린 입에서 브레스가 쏘아졌고·
그의 신마력과 마기가 부딪치며 만들어낸 파장이 일대를 뒤흔들었다·
츠즈즈·
혈을 불러들인 이그문이 브레스를 베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스모데우스와 열 걸음을 앞두었을 때·
[····]
위화감에 이그문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혈십자에서 풀려나 두 눈이 회복된 로자리아가 있었다·
그 옆에·
“흡혈귀·”
[김태현·]
“왕 놀이는 충분히 즐겼는가·”
여왕의 세계·
읊조린 태현과 로자리아의 마력이 동화되며 자주색의 마력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