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48화
변수·
[····]
언제나 그렇듯 변수를 마주한 이그문의 눈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과거의 종족전쟁이 떠올랐다·
그는·
‘본귀는·’
하나의 천계 정벌을 담당하였다·
그곳에서 정체불명의 존재·
‘의식에 기거하는 미궁’과 접촉했다·
당시의 ‘미궁’은 세계의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이 힘이 언젠가 그의 운명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스쳐 지나가듯 말했을 뿐이었다·
정벌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방문을 끝내고 천계에서 나왔을 때·
스스로가 회귀했음을 깨달았다·
모든 게 김태현을 만나기 이전·
아니·
모든 게 완전히 똑같지도 않았다·
요정왕과 두 악마왕은 건재하며 릴리스는 이미 소멸해 존재하지 않았다·
뒤늦게 ‘요마’와 ‘김태현’이 지나간 시간선· 다수의 시간선이 뒤섞였음을 인지했다·
띠링·
[‘의식에 기거하는 미궁’이 ‘운명을 거스르는 요마왕’의 기억을 되살립니다·]
[‘의식에 기거하는 미궁’이 ‘삼천세계의 포식자’에 대한 경험을 되살립니다·]
[‘의식에 기거하는 미궁’이 ‘시간선을 거니는 십이지’에 대한 정보를 공개할 수 없음에 아쉬워합니다·]
‘의식에 기거하는 미궁’·
‘운명을 거스르는 요마왕’·
‘삼천세계의 포식자’·
‘시간선을 거니는 십이지’·
하나같이 낯선 이름을 들은 직후·
[···!!]
이그문의 머릿속으로 무수한 기억들이 주입되었다·
소우주와 대우주·
대우주에 맞선 성좌들의 융합 우주·
시간선을 거니는 성좌의 권능을 이용한 회귀·
‘용’과 ‘요마’가 그 힘을 이용해 한 번의 회귀를 경험했으며 이번에는 ‘포식자’의 차례가 왔음을 알게 되었다·
성좌가 되지 못한 이에게는 허락되어선 안 될 기억들·
[‘의식에 기거하는 미궁’이 삼천세계의 생물체를 걱정합니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메시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본귀를··· 미물 취급하지··· 마라····]
과분한 기억을 주입받은 대가로 전해지는 고통을 견뎌내며·
이그문이 짓씹듯 중얼거렸다·
[본귀에게··· 이런 기억을 전했다면··· 이유가 있을 테지····]
우연이든 필연이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이건 기회다·’
평범한 인큐버스에 불과했던 자신이 대공을 꿈꾸었던 것처럼·
수많은 대공 중 하나에 불과한 자신이 삼천세계의 주인이 될 나아가 하나의 별자리가 될 수 있는 기회·
[‘의식에 기거하는 미궁’이 생물체의 건강을 염려합니다·]
[본귀의 이름은 이그문이다· 감히 그따위로 부르지 마라 미궁·]
[‘미궁’이 ‘이그문’의 기억을 엿보았음을 전합니다·]
[‘미궁’이 ‘이그문’은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당당한 인생이 아니었음을 넌지시 강조합니다·]
[그건 네놈이 상관할 바 아니다· 원하는 바가 있을 테지· 말하라·]
[‘미궁’은 모든 것이 순리대로 될 것임을 설파합니다·]
[····]
이후 몇 날 며칠·
대화가 이어졌다·
‘미궁’이 그에게 특별히 원하는 건 없었다·
그저 성좌에 닿아 한 줌의 성력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이그문의 마음이라는 의사를 전했을 뿐이다·
그는 삼천세계의 가능성을 취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고 ‘미궁’은 하계 어딘가의 좌표를 알려주었다·
도착한 곳에 거대한 게이트가 있었다·
‘어디로 통하는 곳이지?’
생각에 대한 해답을 찾기도 전에 성력이 먼저 반응했다·
일전 주입된 기억·
머릿속에 자리 잡은 정보들이 시각화되었다·
삼천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수많은 소우주·
그런 소우주에서 탄생한 다양한 성좌들·
삼천세계에서 배출된 세 성좌의 행보·
그들이 삼천세계에서 보낸 걸음들·
지금의 시간선이 어째서 탑의 형태로 합쳐졌는지·
‘용’과 ‘요마’가 먼저 다녀갔고·
[‘포식자’를 위해 ‘요마’가 흩뿌린 안배가 곧 탑의 가능성이렷다·]
자신이 누구보다 빠르게 기회를 선점했음을 확신했다·
탑의 가능성을 탈취할 수 있는 몇 가지 계책이 떠올랐다·
하나하나가 충분히 실현 가능한 계획들이다·
그런 생각에 답하듯·
[‘미궁’이 모든 건 순리대로 될 것이라 강조합니다·]
[순리·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듯 말하는군· 아니 너라면 본귀의 미래가 보이는지도·]
크크큭·
그의 입가로 비릿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미궁’은 자신이 성력을 사용하는 게 좋지 않다 수없이 경고했다·
알고 있다·
강한 힘을 사용한 것에는 대가가 따름을·
[성력은 외부의 힘·]
가능성은 내부자들의 힘만으로 쟁취해야 성장이 뒤따름을·
[하지만 그 전에 새로운 판을 짤 필요가 있겠군·]
직후 이그문은 6층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소멸시켰다·
정확히는 찾을 수 없게 숨겨놓았다·
[‘미궁’이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한배를 타게 된 성좌가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탑은 100층까지 있다· 그대가 그러지 않았는가·]
지금의 힘으로 5층까지를 지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동료인 ‘포식자’를 제거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방법도 있지·]
뻔한 이야기다·
[그리될 경우 위험이 뒤따를 터·]
김태현이 무슨 힘을 가지고 회귀했는지 알 수 없다·
‘본귀처럼 성좌와 접촉한 게 아닌 그 자체로 성좌였던 녀석·’
모르긴 몰라도 무언가 수를 가지고 있으리라·
‘녀석과 접촉하는 건 최대한 미루고 제대로 된 판을 짠 상태에서 덤벼야 한다·’
만약을 대비해 대공들 중 손잡을만한 이들과 접촉했다·
그 과정에서 루시퍼와 길페르의 기억이 보존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타천사 루시퍼·
악마왕 길페르·
그들과 접촉하며 이그문은 새로운 가설을 확신하게 되었다·
‘본귀는 이전의 종족전쟁에서 역할을 끝마치고 돌아온 적이 있다·’
수많은 시간선 중 하나·
그랬던 경우에도 하계왕이나 상계왕은 되지 못했다·
통합왕은 더더욱 요원한 목표였다·
삼천세계의 진정한 왕좌(王座)·
그 자리는 오직 성좌가 되기 위한 자에게만 허락되는 자리였으니까·
계획이 진행될수록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성좌의 힘에 의존하지 말라는 ‘미궁’의 경고·
그런 경고가 애석하게 그는 루시퍼와 길페르를 끌어들이기 위해 한 줌의 성력을 사용했다·
불완전했으나 루시퍼와 길페르라는 패를 손에 쥐는 것치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분신을 만들었다·
뱀파이어 로드의 자리를 분신에게 떠넘겼다·
숨겨두었던 게이트를 통해 6층으로 향했다·
무림(武林)·
그곳에 도착한 것만으로 상당한 존재력이 소진되었다·
중간계와 하계 사이에는 거스를 수 없는 격차가 존재한다·
하물며 그 대상이 하계의 지배자인 대공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본체로 이동했음에도 이 정도 존재력이 소진된 건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것이다·
“웬 놈이냐·”
[····]
우연·
또는 필연적인 만남·
혈마(血魔)라는 자를 숙주로 삼게 되었다·
혈마신공과 핏빛 마력·
제법 궁합이 좋은 육체였다·
무림이라는 세계를 이해하는 데 인간들의 시간으로 50년 정도가 흘렀다·
중간계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기대했던 성장은 없었다·
존재력을 감추었다 해도 대공 본체가 온 것치고는 의미 없는 일·
‘지금의 무대에 김태현을 끌어들여 그가 지닌 가능성을 빼앗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겨우 중간계 하나로 그를 잡아둘 수 있을까?그의 힘조차 제한되는 이곳에서·
그리고 그가 다른 대공들과 함께 올지도 모를 일이다·
가장 좋은 건 그가 6층으로 오기 전에 처리하는 것이다·
100년·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5층과 6층의 연결을 살려 놓았다·
6층의 가능성이란 것을 샅샅이 파헤쳤다·
성과는 있었다·
차원의 틈을 이용해 시간선을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본래라면 말도 안 되는 방식·
하지만 그는 성좌와 닿아 기회를 움켜쥔 존재다·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시간선의 무림으로 이동하였다·
하나의 세계를 정복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정복한 시간선은 빠르게 늘어갔다·
숙주로 삼은 대상이 혈마일 때도 있고 천마일 때도 있었다·
때로는 정무맹주나 구파일방의 장문인 장로들을 취하기도 했다·
그들 정도가 아니라면 잠깐 사용하는 그릇으로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간선을 넘는 게 익숙해졌다·
중간계에서 얼마의 시간을 보내었을까?
‘본귀는 그릇으로 삼았던 녀석들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건 차원의 틈에 머무르는 순간에 한정해서다·
차원의 틈에 머무르는 시간을 늘리며 자신이 숙주로 삼았던 이들을 분신으로 부릴 수 있게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본귀는 그중 하나의 시간선을 비틀어 김태현의 출신지와 잇게 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혈마신교의 고수들 몇을 보내어 김태현 암살을 시도했다·
성공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일종의 테스트이자 시간 벌기·
보내었던 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상계왕 수준의 격을 지니게 되었다·
시간선에 본체가 아니라 분신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차원의 틈이 익숙해졌을 때·
그는 통합왕 수준의 격을 지니게 되었다·
과거였다면 바깥으로 나가 성좌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
‘지금의 성장에도 만족하여도 되었을 것이다·’
고개를 저었다·
그가 존재했던 곳은 수많은 시간선의 중심·
수많은 가능성이 압축된 곳이다·
5층에 남겨놓았던 분신을 통해 상계왕 수준의 티폰이 부활했다는 것도·
루시퍼와 길페르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도·
다른 대공들이 세계의 진실을 알게 되어 김태현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도 인지했다·
한때 자신을 굴복시켰던 존재가 턱밑까지 쫓아온 것이다·
[‘미궁’이 모든 건 순리대로 될 것이라 강조합니다·]
수많은 시간선을 건너며 이제는 아득한 과거가 된 미궁의 말·
달갑지 않은 메시지를 떠올리며·
[····]
이그문은 묵묵히 준비를 이어 나갔다·
격이 성장함에 따라 덩달아 성장한 분신을 확인했다·
6층에 가장 먼저 발을 디뎌 얻어낸 숙주·
혈마의 그릇을 통해 필멸자의 한계를 극복한 존재·
그리고 또 다른 시간선에서 찾아낸 천마 백세희·
그들을 이용해 새로운 판을 준비했다·
‘엘븐과 로자리아는 5층에 머물러 있다·’
오르갈과 요르문간드는 그의 계획에 큰 장해가 되지 못한다·
‘김태현의 가능성을 빼앗는 데 가장 큰 변수는 티폰과 루시퍼·’
그들을 제압한다면·
‘방해될 만한 녀석은 하자드 정도라 생각했다·’
마치 그들이 자신을 쫓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6층으로 유인했다·
차원의 틈에 머무르던 본체를 이용해 제각각 다른 시간선으로 흩어 놓았다·
아스모데우스를 만나 새로운 무대를 준비했다·
김태현을 사냥할 준비는 끝났다·
그리 생각했는데·
‘무언가 잘못되었다·’
원소의 권능을 발현하는 티폰을 보며 이그문의 적안이 가라앉았다·
[흐하하하하·]
티폰이 웃을 때마다 오색 원소가 휘몰아친다·
[티폰! 이것부터 풀도록 해라!! 본요가 신수와····]
손 한 번 휘젓는 것으로 엘븐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생각이 가라앉는다·
‘티폰 또한 조각·’
그가 신수와 동화되면 위험하다·
콰직!들고 있던 혈(血)을 티폰에게 박아 넣었다·
혈에서 발산된 신마력이 혈십자의 형태로 거인왕을 구속한다·
거체가 빠르게 줄어드는 모습·
허무할 정도의 제압이었다·
‘이게 정말 티폰이라고?’
자신이 차원의 틈에 가두어 놓은 거인왕과 비교하면 약하다는 평가도 민망할 정도다·
[····]
기시감에 이은 위화감·
‘김태현·’
자신에게 굴복당한 세 대공을 보며·
‘그 녀석은 지금· 어디에 있지?’
이그문은 잊고 있던 감정을 떠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