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47화
기시감의 정체·
육체를 얻고 생긴 기시감은 틀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정확도에 놀랄 정도랄까·
일단 지금의 상황을 확실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자세한 설명 정도는 해주겠지?’
묻는 건 생각만으로도 충분하다·
곧바로 티폰의 대답이 이어졌다·
[본신은 6층과 융합하며 다양한 시간선에 대한 통찰을 지니게 되었다·]
‘시간이 없으니 둘러말할 거 없다·’
차원의 틈에 머무는 데는 존재력의 소모가 뒤따른다·
티폰과 이그문이 여기서 어떻게 전투를 치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반쪽짜리 상태론 슬슬 한계인가·’
지금의 상황에서 티폰과 전투한다면 필패·
최대한 무력 충돌은 피해야 한다·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언제든 대응할 수 있도록 마력의 운용을 체크했다·
구현된 티폰의 입이 움직였다·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린다·
뒤늦게 주술을 외고 있음을 인지했다·
스륵·
입 위로 눈알 하나가 만들어졌다·
‘닮았군· 크기를 줄이지 않은 거인왕의 눈··· 신체를 구현하는 것과 융합이 관계있는 건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다· 직접 보면서 듣는 게 이해하기 빠를 테지·]
눈알을 끔뻑이자 백지상태였던 시간선이 다시 한번 쪼개지기 시작한다·
수십 개에서 수백 개·
다시 수천 개로 늘어나는 선들·
뒤이어 홀로그램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선명한 영상이 신마력으로 구현된다·
‘····’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태현이 머무르던 곳과 요르문간드가 지배했던 곳·
대부분은 중원무림의 형태를 띠고 있다·
‘6층의 차원과 융합했다더니· 재주가 늘었군 티폰·’
흡사 신수와 동화한 엘븐을 보는 듯하다·
무한한 마력을 가용하는 엘븐과 시간선에 개입할 수 있게 된 티폰·
두 대공을 이용한다면 6층을 공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지금은 티폰의 본심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이게 어쨌다고?’
물음에 거대한 입이 씰룩인다·
[직접 시간선을 넘지 않아도 지켜보는 것 정도는 가능하더군· 이곳에서 수많은 시간선을 엿보았다·]
‘말을 돌리는군· 이 몸의 존재력이 바닥날 때까지 시간을 끌 셈인가·’
[하하하하· 본신은 그렇게 치졸하지 않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
[그도 아니면 조급해진 나머지 마음이 흐트러진 건가·]
‘다른 녀석들과 얘기해 봐야겠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구나·’
고개를 저은 태현이 오르갈과 이어진 마력을 이용해 돌아가려는 행동을 취했다·
‘····’
그런데 긴장 상태로 유지 중이던 마력의 사용이 차단되었다·
차단된 것뿐만 아니라 존재력의 소모가 0에 가깝게 줄어들었다·
[본신은 형제를 해할 생각이 없다· 그저 지금은 5층에 보내줄 수 없다고 말했을 뿐이지·]
‘머무를 시간이 늘었군· 이 몸을 왜 5층으로 보내지 않으려는지부터 듣도록 하지·’
시간선을 나타내고 있던 몇 개의 영상이 확대되었다·
제각각 다른 얼굴을 하고 있으나 하나같이 천마신교나 혈마신교의 복장을 하고 있다·
‘다른 시간선의 천마와 혈마로군·’
[그렇다·]
이들을 특정할 만한 이유를 떠올려 본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이그문의 그릇이 될 만한 자질을 지닌 녀석들인가?’
[역시· 형제와는 말이 잘 통한단 말이야· 그렇다면 이걸 보여준 이유도 짐작할 수 있겠나?]
‘본체가 될 수 있는 자질을 지닌 건 지금의 백세희 정도·’
그렇다면·
‘본체 수준은 못되지만 분신의 존재력을 담기엔 충분한 녀석들·’
[정답이다·]
정답을 맞혔음에도 태현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분신·
‘생각 이상으로 많다·’
[이들 모두가 이미 이그문의 분신과 접촉해 숙주가 되었다·]
‘····’
수십 개의 분신·
이그문이 6층에 있는 수십 개의 시간선을 지배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시간선이 이렇게나 많이 존재하는 것도 놀라운데 이미 지배하고 있는 수가 상당했다·
‘해당 시간선을 지우는 건 불가능한가?’
거대한 입이 휘파람을 불었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지 않겠나· 그건 6층을 관리하게 된 본신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테니 말이다·]
‘이그문이 지난 시간 동안 놀지 않았다는 건 잘 알겠군·’
태현의 시선이 입에서 눈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5층으로 돌아가는 걸 막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이 몸은 시간적 여유가 없다만·’
[그대가 이그문의 분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슨··· 헛소리냐·’
[형제는 이그문의 분신을 너무 많이 취했어· 게다가 언제부턴가 ‘흡수’에 의존하고 있지 않나· 봉인 당한 ‘포식’을 대체하기라도 하듯 말이야·]
‘그건 6층에서는 ’흡수‘가····’
[이 모든 게 이그문의 계획이라면?]
‘····’
[형제· 그대가 5층으로 돌아간다면 이그문에게 또 한 번 봉인당하거나 몸을 빼앗기게 될 거다·]
억측이다·
그리 생각한 순간에도 티폰은 말을 끝맺지 않았다·
[그녀가 지닌 ‘정신지배’와 ‘공간도약’은 시간선을 공략하는 데 유용하거든· 엘븐과 신수는 말할 것도 없지·]
‘이 몸을 우습게 보고 있군· 포식을 사용하지 못한다 해서 몸을 빼앗길 정도로 허술하진 않다·’
[그럴 것이다· 형제의 근원은 ‘요마’· 신마력과 권능에 관해서라면 본신보다도 우위에 있는 자일 테니· 하지만 루시퍼를 봐라·]
이그문의 그릇에 닿은 것만으로 봉인되었다·
거인왕은 차원의 틈과 융합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녀석이 지금과 같은 시간선을 거닐 수 있게 된 건 ‘미궁’의 힘일 터·
[만전이라면 모를까· 반쪽짜리인 상태로는 당해낼 수 없다·]
‘····’
[오히려 가장 먼저 로자리아를 공격하게 되겠지·]
‘지금 상태로는 5층으로 돌아가 봐야 이그문에게 몸을 빼앗긴다· 그러니 로자리아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기 위해 이 몸의 앞을 가로막겠다?’
[그리되는군·]
‘하·’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방법을 생각해 내지 않는 한 본신은 그대를 보내지 못해·]
‘독단을 내린 게 겨우 이 정도인가·’
[흐하하· 해답을 찾는 건 형제의 특기이지 않나·]
‘오만했구나· 실망스러운 선택이야·’
[틀렸다·]
목소리에선 더 이상 웃음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대는 아무것도 모른다·]
‘배신했다는 말을 참신하게도 표현하는군·’
[합리적인 방법을 찾기 전까지 그대는 5층으로 돌아가선 안 된다·]
‘쯧·’
[섭섭하게 생각 마라· 이 또한 운명이라는 것일지도 모르니·]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다·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거인이 세상을 지배하는 중간계에 대해 말해 줄까?]
‘그런 것 따위 알고 싶지 않아·’
티폰의 목소리를 흘리며·
‘돌파구를 찾아내지 못하면 영락없이 끝장이군·’
태현이 머리를 굴렸다·
* * *
가능성의 탑 5층· 요정의 숲·
[무언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진정해라 로자리아·]
엘븐의 말에도 로자리아의 근심 어린 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쉰 엘븐·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우리들의 맹약자다·]
[····]
[인정하기 싫지만 그 녀석을 선택한 건 계약자다· 녀석이 우리의 희망이라는 말이지·]
[····]
[그와 함께하고 있는 대공들을 믿어야 한다·]
[그대는 항상 믿음을 강요하는군·]
[그러지 않으면 버티기 어렵거든·]
엘븐의 즉답에 로자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요정과 서큐버스·
종(種)으로서 타고난 가치가 다르듯 그들의 가치관 또한 같을 수 없다·
계약자의 김태현을 돕는다·
공통된 목표를 위해 손을 잡고 의지했다·
지금은 아니었다·
‘도플갱어는 계약자가 아니다·’
그녀의 믿음은 함께했던 두 하계왕에게 한정되어 있다·
맹약은 일시적인 것일 뿐·
‘그가 계약자와 왕을 집어삼키려는 기색을 보인다면··· 소멸을 각오하고서라도····’
그때·
쿠구궁·
[····]
요정의 숲에 둘러놓은 결계가 흔들린 탓에 그녀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 마력··· 이그문이다·]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끝마친 엘븐이 숲과 연결된 결계를 강화했다·
신수에 닿으려면 최소 열 겹의 막을 뚫어내야 한다·
대공급이라 해도 족히 며칠은····
쿠구구궁·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게·
서걱·
절삭음과 동시에 허공이 갈라졌다·
콰아아·
갈라지며 생겨난 차원의 틈으로 금발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핏빛 마력을 두른 적안의 흡혈귀·
[약한 것들이 여기 모여 있었군·]
뱀파이어 로드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으며 대공들을 훑었다·
[X 같은 이그문·]
[요정왕· 그 험한 입 좀 어떻게 할 수 없나?]
[XX· 6층에 있어야 할 녀석이 여긴 웬일이냐·]
한층 거세진 욕설에 이그문이 혀를 찼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텐데· 다른 녀석들은 본귀의····]
말을 끝맺기도 전·
화아악·
신수와 동화한 로자리아가 새로운 퍼스널 스페이스를 펼쳤다·
[정신지배의 각성··· 아니 이건 공간도약과 뒤섞은 것일 뿐인가· 제법 단단한 밀도를 지녔군·]
말과 달리 혈검을 휘두른 것만으로 다수의 퍼스널 스페이스가 찢겨나간다·
[····]
로자리아가 대답 없이 공간을 재생시키고 엘븐이 신기 ‘엘’을 들고 달려들었다·
쾅·
이그문이 신기 ‘혈’을 들고 받아치는 모습·
[축복받은 힘이 겨우 이 정도인가?]
[XX· XXX·]
[아 본귀가 너무 강해진 탓이겠군·]
욕설을 흘리며 이그문의 혈이 엘을 밀어냈다·
엘븐이 밀려난 주위로 공간이 변형된다·
로자리아가 정령계의 형태를 띤 공간을 만들어낸 탓이다·
불의 정령왕 이그리트를 시작으로·
번개의 정령왕 젠키·
바람의 정령왕 바라노스·
대지의 정령왕 굴론드·
비의 정령왕 아사·
빛의 정령왕 루미너스·
정령왕들이 연이어 소환되었다·
엘븐이 재빠르게 달려들어 엘을 휘두르고 여섯의 정령왕이 보조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사용하고 있는 건 마력일 뿐이건만··· 뿜어내는 화력은 티폰의 신마력에도 뒤지지 않는가·’
이그문의 적안이 두 대공의 뒤에 자리한 신수를 흘깃거렸다·
전생에서 어째서 엘븐이 상계왕이 되었는지 알 거 같다·
하지만·
[본귀는 통합왕의 격을 이루었다·]
츠즈즈· 츠즈즈즈· 츠즈즈즈즈·
동시라고 해도 좋을 순간·
여섯 개의 관이 정령왕을 가뒀다·
[잔챙이들은 빠져있어라·]
영역 그 자체인 블러드 필드를 압축한 ‘피의 관’·
쉽게 빠져나오진 못할 것이라 경고하였다·
쾅!엘븐이 재차 거리를 좁혀 엘을 휘둘렀다·
공격한 건 그녀인데·
[···!!]
날개 하나가 찢겨 나간다·
혈이 휘둘러지는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던 탓이다·
[그 정도 권능을 지니고도 육탄전이라니· 우스울 따름이군·]
콰직·
엘븐의 어깨를 잡은 이그문이 나머지 날개도 찢으려는 순간·
콰르르르·
머리 위로 수백 개의 촉수 다발이 쏟아졌다·
이그문이 고개를 돌려 촉수의 주인을 확인했다·
[릴리스가 사용하던 무구·]
그 기원은 전대 대공이었던 베히모스와 리바이어던의 합작품이다·
[····]
릴리스·
선대 서큐버스 퀸을 떠올린 이그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로자리아와는 그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걱·
한 번의 휘두름에 공간이 갈라지고·
공간을 가르는 신기를 로자리아가 공간도약으로 피해내었다·
아공간에서 증식한 ‘촉수’와 ‘혈’이 자르고 재생하기를 반복했다·
신수와 동화한 자의 마력은 무한하다·
과거·
대공 수준에 머물렀다면 물량 공세를 뒤집지 못해 궁지에 몰렸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었다·
스스스·
이그문의 적안이 청안으로 물들었다·
로자리아와 엘븐이 무언가 대비하기도 전·
시계(視界)가 암전했다·
암전된 시계가 회복되었을 때·
[···!!]
[XX···!!]
두 개의 혈십자가 대공을 결박하고 있는 현실이 드러났다·
[더 이상 신수 동화는 허락되지 않는다·]
결박된 자의 존재력을 흡수하는 혈십자·
[승부가 갈렸군·]
빨아들인 신수의 마력이 핏빛 신마력으로 변환된다·
혈십자가 발하는 신마력이 요정의 숲을 잠식하기 시작한 그때·
돌연 엘븐과 로자리아가 결박당한 하늘이 찢겨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
갑작스럽기는 이그문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벌어지기 시작한 공간의 틈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으로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쳐 지나간다·
[설마····]
완전히 찢어진 차원의 틈으로·
파지직· 파지지직·
뇌전이 새어 나왔다·
이어서·
콰릉!
이그문이 자신을 노리고 내려친 뇌전을 튕겨내었다·
[어처구니없는 녀석이 나타났군·]
[와하하하하·]
웃음을 터트리는 거인왕의 주위로·
[본신이 돌아왔다!]
‘원소’의 권능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