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43화
정무맹주의 개인 연무장·
하자드와 태현이 다섯 걸음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었다·
“아직인가·”
“참을성이 부족하군· 이제 시작해도 좋다·”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음에 하자드가 무림의 언어로 답했다·
“좋아·”
츠즈즈즈즈·
태현의 몸에서 핏빛 마력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툭·
맞잡은 손을 통해·
츠즈즈· 츠즈즈즈·
하자드의 존재력이 빨려들기 시작했다·
패기의 마정석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키기기- 키기기기-·
봉인되었던 마정석이 조금씩 회전하기 시작한다·
그에 비례해 하자드의 존재력이 빠르게 가라앉는다·
띠링·
[흑색의 마력이 깨어납니다·]
짤막하지만 큰 의미를 담고 있는 메시지·
“역시·”
태현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권능의 원주인을 만났음에도 ‘패기’는 여전히 사용할 수 없었다·
이그문의 권능이라면 어떨까?
그런 가설에서 시작된 테스트·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흡수’의 권능을 이용해 하자드의 존재력을 취했다·
그리고 흑색 마력에 가해졌던 제재가 풀렸다·
“이그문· 재미있는 술수를 준비해 뒀군·”
하자드가 주먹을 쥐었다 펴며 중얼거렸다·
상당한 힘이 빠져나간 탓에 제대로 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무림(武林)·
지금의 시간선에 존재하는 무림에선 오직 이그문의 권능만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녀석이 세계의 제약을 건드리는 수준에 도달한 게 확실하다·”
“그래· 정면에서 맞닥뜨렸다 해도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웠겠지·”
자신들의 권능은 세계의 불순물로 취급되는데 이그문의 권능은 무공 정도로 인식되는 듯하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무림에 투자하며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몸을 숨겼다· 우릴 가두고 시간을 소모시키려 하는 의도도 명확해지는군·”
“이제 맹약자에게 달렸다· 어찌하겠느냐·”
“이제 와 고민할 이유가 있나· 계획대로 한다·”
이미 백세희와 제갈선과는 얘기가 끝난 문제다·
태현이 더 기다릴 것 없다는 듯 ‘폭주’와 ‘강화’의 마정석을 회전시켰다·
키이이- 키이이이-·
두 개의 마정석이 으르렁거리며 흑색의 마력에 힘을 보탰다·
“혼자서 괜찮겠는가?”
“흠·”
태현이 잠깐 사이 수척해진 하자드와 시선을 맞추었다·
“이 몸을 찾아내기까지 몇 개의 시간선을 넘었다고 했지?”
“다섯이다·”
“적지도 많지도 않군·”
본래라면 대공 정도의 존재력으로 시간선을 넘는 건 무리다·
가능성의 탑과 중간계라는 변수·
‘이그문의 수작으로 처음부터 시간선에 대한 이동이 옅어진 세계라는 환경이 아니었다면 그조차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그 모든 변수가 뒤섞이며 하자드 정도 되는 존재력으로도 시간선을 넘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대가로 상당한 존재력을 잃어야 했고 그마저도 조금 전 대부분을 흡수당했다·
영구적이진 않겠지만·
‘당분간 대공에 준하는 힘을 사용하진 못할 것이다·’
무림의 수준으로 친다면 화경 정도 수준으로의 격락·
하자드의 입장에선 힘을 모두 잃는 거나 마찬가지인 기분을 맛보아야 하리라·
“좋아하는 차라도 들고 있어라·”
“금방 올 것처럼 말하는군·”
“이 몸은 너처럼 길을 헤매지 않아·”
하자드는 태현과 다시 만나기까지 중간계 시간으로 1000년이 넘는 시간을 소모했다·
‘이 몸은 다르다·’
이그문의 권능은 물론 다른 대공들의 권능을 담은 마정석을 지니고 있다·
다른 시간선으로 흩어진 두 명의 대공을 찾아내기엔 적격이라 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덕분에 시간을 줄였다·”
“그대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군·”
하자드가 옅은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긴다면 루시퍼를 깨워라· 너라면 백세희도 기꺼이 목을 내어놓을 테니·”
백세희는 여전히 루시퍼와 제대로 된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던 중 하자드가 나타났고 그녀를 통해 힘의 사용법을 천천히 익혀가는 중이다·
그녀가 이 묘령의 여인을 동경하고 있다는 건 제갈선조차 알 정도였다·
“설마 이 몸을 버리고 새로운 계약을 맺진 않겠지?”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조심해라· 시간선을 여행한다는 건 상당한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니·”
“아이처럼 다루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다·”
츠즈즈즈즈·
태현이 블러드 필드를 전개했다·
손에 쥐어진 혈검을 이용해 허공을 베었다·
쩌억·
갈라진 공간의 틈이 달라붙지 않게 마력을 두른 몸을 집어넣었다·
“···!!”
전신에 거대한 압박감이 가해진다·
‘티폰 녀석· 이런 곳에서 전투한 건가·’
지닌 강체가 아무리 특별해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부터 떠오른다·
‘녀석을 찾는 건 마지막이 되겠군·’
강화와 폭주의 마력을 강화했다·
갈색과 푸른색 마력이 넘실거리며 차원의 틈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지금부터는 컨트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조금의 실수가 이어져도 이상한 시간선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몸이 인정하는 하자드조차 다섯 번 만에 성공했을 정도로 쉽지 않은 일이다만····’
푸른색 마력에 걸리는 낯선 감각·
기감을 곤두세우지 않았다면 놓쳤을 기시감에 태현의 적안이 휘어졌다·
곧바로 대마력과 공간도약의 권능을 사용했다·
눈앞에 홀로 드나들기 적당한 게이트가 생성된다·
머뭇거릴 필요 없이 게이트를 넘었다·
메스꺼운 기분·
존재력이 깎여나간다는 메시지가 연이어 들린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
눈을 뜬 태현은 자신이 거대한 배 위에 있음을 인지했다·
주위로 수천 명의 인간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그런데 복장이 무림인의 것과 차이가 있다·
“실수한 건가·”
그리 중얼거린 순간·
“해악(海惡)이다!!”
가까이 있던 인간 중 하나가 소리쳤다·
“계시대로 해악(海惡)이 나타났다!!”
“모두 공격대형으로!!”
‘해악?’
태현이 갸우뚱하고 있을 때·
인간들이 소리치며 공격을 시작했다·
들고 있는 건 어설픈 검과 창·
아무리 잘 쳐줘도 위협이 될 만한 물건은 아니다·
태현이 몸 상태를 확인했다·
시간선을 넘는 데 사용한 존재력은 1할 정도·
고작 한 번 이동한 것치곤 존재력 소모가 상당하다·
‘아니 하자드보다는 효율이 좋은 편이군·’
츠즈즈·
태현이 핏빛 마력을 몸에 둘렀다·
핏빛 마력에 닿은 인간들의 몸이 말라비틀어진다·
비명을 흘리며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소모된 1할의 존재력은 회복되지 않고 있다·
“쯧·”
혀를 찬 태현이 마력을 거두어들였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인간들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감히 다가오지 못하는 모습·
“확인이 필요하겠어·”
태현이 이번에는 다른 권능을 사용해 보려는 순간이다·
콰아아아아·
눈앞의 바다에서 돌풍이 불었다·
용오름·
갑작스러운 재해에 인간들이 바짝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해신님이 분노하셨다!”
“해신이시여 부디 자비를···!!”
“해악을 벌하여 주소서!!”
바람과 달리 넘실거린 해일이 몇 개의 배를 침몰시켰다·
그리고·
용오름이 걷히며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거대한 오드아이를 지닌 이무기·
“요르문간드·”
태현이 눈앞의 마해왕을 올려다보며 히죽 웃어 보였다·
[김태현·]
“여기서 신 놀음이라도 하고 있었던 거냐·”
물음에 오드아이가 번쩍였다·
두려움에 몸을 떨던 인간들·
적안에 물든 그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 녀석을 죽여라·]
요르문간드의 명령에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 * *
츠즈즈즈즈·
태현이 펼친 블러드 필드에 닿은 인간들이 그대로 말라가는 모습을 보였다·
수천의 목숨이 눈 깜짝할 사이 거두어진다·
“역시 이 몸이 실수할 리 없지·”
혈검을 쥔 태현이 언제든 전투할 수 있도록 마력을 퍼트렸다·
용오름과 부딪친 핏빛 마력이 스파크를 일으킨다·
[시간선을 넘은 것치고 멀쩡하군·]
“환영 인사가 시시한걸·”
자신을 적대하는 요르문간드의 태도보다 제대로 찾아왔다는 사실이 반가워 웃음이 새어 나온다·
주변은 바다·
그 바다가 모두 하계의 마해(魔海)·
‘중간계를 이렇게 만들 정도면 수백 년 정도로는 부족하다·’
단번에 요르문간드가 이곳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음을 인지하였다·
태현의 예상대로 요르문간드는 이곳에서 1200년의 시간을 보내었다·
그동안 무림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해일을 일으켜 인류 문명을 파괴했다·
시간을 들여 해상무역을 발전시켰고 몇 개의 산악 지대를 제외한 대부분을 마해로 채웠다·
[서역이라 불리는 세계를 지배한 건 700년 정도 되었지·]
“오·”
태현이 생각지 못한 스케일에 작게 감탄했다·
과거의 자신이나 행했을 법한 파괴와 창조여서다·
“시간선이 다르다는 걸 알았으면 이 몸을 찾아왔어야지·”
[본좌는 대공이다· 자처하여 목줄을 채우는 멍청이가 아니야·]
“뒤늦게 사춘기라도 찾아온 거냐·”
소모적인 대화가 이어진다·
태현이 요르문간드에게서 느껴지는 존재력을 가늠하며 승률을 확인해 보았다·
‘이그문의 권능만으로는 무리겠군· 권능 세 개 정도만 희생하면···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
그리되면 하자드와 루시퍼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데 제약이 따른다·
요르문간드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듯 보였다·
[한 번 넘어온 시간선을 돌아갈 땐 제약이 더욱 큰 법이지·]
“친절하기도 하지· 조롱이 많이 늘었군·”
[제안하는 것이다·]
“제안?”
[본좌는 이곳에 상계를 소환할 생각이다·]
“····”
[지금의 시간선을 중심으로 새롭게 판을 짜는 거다· 그리된다면····]
“기각·”
[····]
“그 말을 하는 녀석이 하자드였다면 고려해 볼 만했겠지·”
[멍청한 놈· 본좌를 상대로 승리한다 해도 네놈은 되돌아갈 존재력을····]
“이곳에 오르갈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에 오드아이가 꿈틀거린다·
“이곳에서 얼마나 힘을 길렀는지 네놈의 존재력이 강대하긴 하더군·”
오랜 시간을 들여 중간계의 환경을 하계와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었다·
인간들이 자신을 숭배하게 만들어 존재의 제약을 흩트려 놓았다·
그 모든 전제가 대공의 본체가 온전히 6층에 도달하고 누구의 방해도 없이 홀로 시간을 보내었기에 가능한 일·
인간들의 가능성을 희생시켰기에 도달한 결과·
“성장이라면 성장이라 할 만하군·”
요르문간드의 존재력은 게이트를 넘을 때와 비교해 소폭 상승했다·
“그런데 말이야·”
태현이 시간선을 탐색하기 위해 발산하고 있던 푸른색 마력을 완전히 꺼트렸다·
키이이이이-·
카아아아아-·
핏빛과 갈색의 마력이 넘실거리며 뒤섞인다·
“그렇게 대놓고 마력을 흩뿌리고 있으면 이 몸이 오르갈을 감지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거냐?”
뒤섞인 마력이 마해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확산을 막기 위해 마해가 장막을 형성했지만 그 행동이 더욱 확신을 심어주는 꼴이었다·
‘오르갈 녀석이 변하지 않았을 가능성에 걸어야겠군·’
처음부터 탐지는 미끼에 불과했다·
그는 대공들과 맹약으로 맺어진 관계·
갈색의 마력을 한계까지 발산하며 목소리에 마력을 담아 소리쳤다·
“오르갈!!!”
메아리치듯 태현의 목소리가 마해를 타고 울려 퍼졌다·
“서열정리 시간이다!!!”
[···!!]
콰르르· 콰르르르르·
마해가 소용돌이치며 일대의 공간을 차단하기 시작한다·
펼쳐진 영역을 기반으로 결계를 치려는 속셈·
[본좌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나!!]
결계를 강화하는 요르문간드를 비아냥거리려 혀를 차려 할 때다·
쾅!!!
완성된 결계의 한쪽 면·
그 위로 거대한 충격이 가해졌다·
충격의 근원에·
3미터 남짓한 크기의 마수가 있었다·
몸 곳곳에 자란 새하얀 털로도 가릴 수 없는 다섯 개의 뿔이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금이 간 결계를 찢어발긴 마수가 마해 위를 성큼성큼 걸었다·
쿵·
태현의 앞에 부복한 오르갈이 눈을 맞추었다·
심마에 빠졌던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단단한 눈빛·
[마스터·]
“성장했군·”
[마스터 덕분입니다·]
‘이 몸의 덕분이라고?’
그런 의문은 빠르게 밀어두었다·
그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존경의 눈빛을 한 오르갈의 기대를 채워주었다·
“시간이 없다·”
[하오면?]
태현의 검지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마해왕을 가리켰다·
“요르문간드를 잡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