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42화
[힘들게 찾았군·]
차원의 틈을 거닐던 이그문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앞에 ‘용’의 열쇠였던 자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보기보다 재주가 좋군·]
아스모데우스가 건조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가 있는 곳은 탑의 5층과 6층 사이·
굳이 세세한 범위를 나누자면 5·9층쯤 될 것이다·
[차원의 틈을 거니는 건 본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지·]
이그문이 말과 달리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츠즈즛·
그의 손길을 따라 신마력으로 이루어진 왕좌가 구현된다·
가만히 쳐다보는 아스모데우스·
왕좌에 걸터앉은 그가 한 쌍의 적안을 맞추었다·
[통합왕 수준의 힘을 손에 넣었나· 그렇다 해도 차원의 틈을 거니는 건 상당한 존재력의 소모가 뒤따르는 일이다·]
아스모데우스의 말에 이그문이 더 해보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네놈은 성좌 ‘의식에 기거하는 미궁’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 그 힘으로 차원의 틈에 대한 내성을 최소화했다·]
‘정확하군·’
수많은 시간선에 대한 기억뿐 아니라 다양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는 그다·
‘6층은 앞으로의 등탑을 위해 실험하기 좋은 곳이지·’
비슷한 상황인 티폰이 자신과 대등하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
[지금의 삼천세계는 성력을 지닌 자가 모든 걸 좌우한다·]
[도망자가 과분한 재주를 얻었구나·]
[그건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은 패배자 또한 마찬가지 아니던가·]
[킥·]
뻔뻔하게 맞받아치는 태도에 아스모데우스가 조소했다·
[도망자와 패배자· 틀린 말은 아니군·]
그는 누구보다 스스로의 처지를 잘 알고 있다·
바알에게 선택되어 상계왕이 되었고 김태현에게 패배했다·
그리고·
[지금의 무대에 대해서도 나름 잘 파악하고 있는 편이지·]
자신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 또한 ‘바알’이 계획한 것임을·
정확히는 바깥으로 나가 성좌가 된 ‘용’이 준비한 계획·
하급 성좌였던 그가 ‘시간선을 거니는 십이지’의 권능으로 삼천세계에 돌아와 수많은 가능성을 쥐었고 그때 해둔 장치 중 하나·
‘요마의 회귀에서 나는 지금과 같은 기억을 지니지 못했었다·’
수많은 시간선에서 가장 강했던 건 상계왕 아스모데우스·
그때의 기억을 지니고 힘을 빠르게 되찾을 수 있었던 건 ‘포식자’·
김태현이 회귀한 영향이다·
‘바알··· ‘용’이 지금의 상황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는군·’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발악할 생각이었다·
[그대는 하자드와 악마왕들을 포섭하는 데 실패했다· 현재는 실패에 대한 대가로 차원의 틈으로 들어와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지·]
상황을 파악한 건 너뿐만이 아니라고·
이그문이 알 만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꼴을 보아하니 상처의 회복은 끝나 보이는군·]
[····]
[그런데도 모습을 숨기고 있다는 건 다음 기회를 기다리고 있어서인가·]
씨익·
이그문이 비릿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혀가 길군·]
[혓바닥 길이를 비교하자면 그대도 만만치 않다 생각되는데·]
[피차 성좌의 힘을 머금고 있음을 아는 상황에서 전투를 원할 정도로 어리석어 보이진 않는다만? 그도 아니면 연이은 실패로 이성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가 된 건가·]
아스모데우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비꼬았다·
그가 자신의 근원인 악마족과 바알의 근원인 용족을 이용해 새로운 기회를 노렸듯·
이그문이 루시퍼 길페르 티폰과 같은 강자들을 통해 기회를 노렸음을 모르지 않아서다·
[그들 모두가 김태현과 새로운 계약을 맺었지· 미리 선점한 6층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는 걸 모를 거라 생각했나?]
김태현과 대공들이 6층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열었다는 걸 알고 있다·
본래 5층에서 6층으로 향하는 게이트는 신수를 이용해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네놈이 선점하며 통로를 없애버렸지· 탑의 가능성을 독식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말이야·]
[가능성을 독식하려 했던 건 너도 마찬가지다·]
[틀리지 않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할 필요는 없다·]
패배를 인정하고 새로운 기회를 노린다·
자신이 집중하는 건 그뿐이라고·
그가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망상을 입에 담는군·]
[혼자서라···· 나와 손을 잡고 싶다는 의사를 돌려서 말하는구나· 설마 6층까지 빼앗긴 건가·]
아스모데우스가 한심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그문은 성좌의 힘에 닿아 지금의 회귀에서 누구보다 먼저 움직였다·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다·
[후발대인 김태현에게 모든 걸 빼앗겨 결국 여기까지 찾아왔다· 이곳까지 찾아와 머리 굴릴 거 없다·]
그의 계획이 틀어지고 있는 것도 이그문이 김태현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영향이 크다·
무능한 놈·
[나에게 ‘미궁’의 힘이 주어졌다면 결과가 달랐을 것을·]
아스모데우스가 줄곧 생각만 하던 경우를 입에 담았다·
이그문이 어깨를 으쓱였다·
[착각하지 마라· 아직 본귀의 계획은 어느 것 하나 실패하지 않았으니·]
[····]
아스모데우스가 무슨 헛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그문의 분신이 요정의 숲을 찾아와 전투를 치렀고 성좌들의 힘이 충돌하여 몸을 숨겼음을 알고 있다·
이후 세력을 정비한 김태현은 6층으로의 등탑을 시작했다·
[지금 보이는 모습은 본체일 터· 불리하지 않으면 이제 와 손을 내밀 이유가 없을 텐데?]
[그대 말대로 본귀는 삼천세계의 모든 가능성을 독식하려 했다·]
용 요마 포식자·
이그문은 그들과 같은 성좌가 되고자 했다·
모든 가능성이 압축된 지금의 시간선이라면 ‘미궁’의 선택을 받은 자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탑의 6층에 자리한 건 무림(武林)·
중간계인의 이념이 대립하는 하찮은 세계·
탑이 자리하기 전에도 몇 번 경험한 별 볼 일 없는 인간의 세계였다·
그곳에서 혈마라 불리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었고 천마라 불리는 쓸 만한 그릇도 발견했다·
[하지만 본귀가 성좌가 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수준은 아니었지·]
기회를 선점하고도 상당한 시간을 소진한 건 그래서다·
차라리 본체를 이용해 직접 하계를 정리하고 6층을 정벌해도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여 쓸모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비록 김태현이 과거의 힘을 되찾고 대공들을 모두 포섭하는 것까지 막진 못했지만·
[6층에 녀석을 가둘 수 있었지·]
[····]
아스모데우스의 적안이 꿈틀거렸다·
김태현은 그의 대적자·
‘요마’의 힘에 닿은 것뿐 아니라 그 스스로가 성좌가 되었던 존재·
만약 그를 가두었다는 게 사실이라면·
‘나에게도 기회다·’
줄곧 기다리고 있던 완벽한 기회·
처음으로 아스모데우스의 얼굴이 풀어졌다·
[설명이 필요해 보이는군·]
[이제야 관심이 생긴 모양이야·]
이그문이 기꺼운 얼굴로 6층에서의 일을 전했다·
엘븐과 로자리아의 힘으로 닫아놓았던 게이트가 열렸고 자신의 개입으로 그들 모두를 다른 시간선으로 흩뿌려 놓았으며 가장 큰 걸림돌이라 할 수 있는 티폰과 루시퍼는 무력화시켜 놓았다·
[티폰은 자력으로는 탈출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트려 차원의 틈에 가두었고··· 루시퍼는 인간의 그릇에 봉인시켜 온전한 힘을 낼 수 없다?]
[그래· 김태현은 시간이 지날수록 권능을 봉인당할 것이다· 지금처럼 본귀의 힘에 의지해서는 대가를 치를 날이 오겠지·]
[오르갈과 요르문간드는?]
[그 녀석들은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자드가 거슬리긴 하지만··· 마룡의 피를 이어받은 그녀가 중간계에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지·]
기껏해야 몇 개의 시간선을 지배하는 정도·
시간선을 넘는다 해도 존재력엔 크게 상처 입을 것이다·
[언젠가 그들이 힘을 회복할 수도 있겠지· 그 또한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일 것이다·]
[로자리아와 엘븐이 게이트를 열어주지 못하면 그 시간은 더욱더 느려질 테고 말이야·]
아스모데우스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티폰과 루시퍼·
그들은 지금의 자신조차 상대하기 껄끄러운 존재들·
[기회를 노린다면 지금이다만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는군· 네놈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본귀가 정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생각하는가·]
스스스·
이그문의 금발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아스모데우스의 적안이 찌푸려졌다·
[본체가··· 아니야?]
[이그문이었던 존재· 성력에 닿아 통합왕의 힘을 지니게 된 뱀파이어 로드는 티폰과 전투하며 회복 중이다·]
[····]
[지금 그대의 앞에 있는 건 한때 혈마라 불렸던 인간의 육체에 기생한 분신· 본귀가 손에 넣은 두 번째 그릇이다·]
지금은 더 이상 분신이라 불리기 힘들 정도의 존재력을 지닌 채 5층과 6층을 오가고 있다고·
이그문이 스스럼없이 알려주었다·
[루시퍼를 봉인시킨 인간 또한 이리될 운명이었다· 혈마신공과 천마신공은 궁합이 잘 맞거든·]
츠즈즈즈·
이그문의 몸 위로 핏빛 신마력이 넘실거렸다·
인간의 육체로 통합왕급 존재력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과거 중간계 출신의 두 하계왕이 그랬듯·
그 또한 중간계 출신의 육체를 통합왕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계 출신으로서 최강이 되지 못하는 건 아니나 지금의 시간선은 중간계 출신이었던 두 성좌가 만들어낸 결과물·
[요마가 포식자에게 준비한 안배를 가로채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해야 했지·]
[큭··· 크큭···· 끊임없는 패배가 괴물을 만들어냈구나·]
통합왕급 존재력으로 빚어낸 육체가 둘·
게다가 정도는 알 수 없지만 성력의 힘까지 다룰 수 있다·
만약 티폰이나 루시퍼가 그의 손에 들어갔다면?
백세희라는 인간까지 더해 세 개에 달하는 본체를 지닐 수 있었으리라·
‘아니 다른 시간선에도 그릇을 더 준비해 두었을지 모른다·’
패배하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놈은···· 확실히 다른 시간선의 이그문과는 다르구나·’
아스모데우스가 마지막으로 남은 의문을 입에 담았다·
[5층에 남은 건 고작해야 대공 둘· 함께 그들을 치기 위해 온 건가·]
[그건 본귀 혼자서 충분한 일이다· 그대는 마계를 장악해 악마왕이라는 호칭부터 얻도록·]
[····]
아스모데우스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그 역시 악마왕들을 설득할 수 없다면 굴복시켜 지배할 생각이었다·
[그대가 판을 마련해 줄 필요는 없을 텐데?]
6층에 갇힌 이들이 빠져나올 실마리를 찾을 때까지 요정의 숲과 마계 모두를 처리해도 충분한 게 눈앞의 두 번째 본체다·
그런데 일부러 자신을 찾아와 마계라는 먹잇감을 양보하고 있다·
[6층을 지배해 보니 알겠더군· 지금의 시간선은 오직 한 명의 성좌만을 탄생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혀를 날름거린 이그문이 말을 이었다·
[아무리 달콤한 말로 속삭여도 탑을 올라갈수록 명확해지겠지· 지금의 탑은 요마가 포식자를 위해 마련한 안배·]
스스로 상급 성좌가 되길 포기한 ‘요마’가 ‘포식자’를 위해 미래를 건 시간선·
상급 성좌가 되는 걸로 만족해야 했던 ‘용’과 달리·
[대성좌를 만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인 시간선이란 말이지·]
[···!!]
이그문이 몸을 들썩이는 아스모데우스를 번들거리는 적안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김태현이 죽게 되면 그 가능성들은 어떻게 될까?]
다른 이가 탑을 오른다 하여 그 가능성을 온전히 차지할 수 있을까?
[아니·]
가능성이 쪼개진다면 대성좌가 탄생할 수 없다·
이그문이 제아무리 중간계인의 육체를 이용하여 탑의 가능성을 독식한다 해도·
[잘해 봤자 중급 성좌가 되는 것에 만족해야겠지·]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김태현은 바깥으로 돌아갔다·
[지금 그의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건 도플갱어라 불리던 녀석이다·]
‘요마’의 본질·
‘포식자’의 근원·
[····]
아스모데우스의 적안이 연이어 흔들렸다·
[이미 한 번 소유권을 넘긴 육체·]
[설마····]
[본귀가 다루어도 이상할 게 없지 않은가·]
[네놈····]
[그래· 김태현의 육체를 손에 넣어 변수를 줄인다·]
그리고·
[‘용’의 안배인 너를 이용해 탑의 가능성을 극대화할 것이다·]
‘미궁’의 힘을 손에 넣었기에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삼천세계의 흑막으로 존재한 ‘용’이라면 ‘요마’가 준비한 가능성 또한 노릴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까지 나를 이용하겠다?]
[안 될 이유라도 있나·]
[····]
전생에선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던 존재가 단단한 눈길로 쳐다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크크큭···· 배신이 확정된 동맹이라····]
아스모데우스가 광소를 터트렸다·
웃음을 멈춘 건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가 가늘어진 눈으로 이그문을 노려보았다·
[좋다 어울려주마·]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과거와 현재·
김태현의 앞을 막아서던 두 대적자가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