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9화
무한에 위치한 제갈 분가로 가는 길·
객잔의 방에 들어선 태현이 거칠게 자리에 앉았다·
“제갈선·”
“말씀하시지요·”
“어째 우리를 보는 눈들이 많은데·”
“그건 공의 모습이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제갈선이 당연하지 않냐는 듯한 얼굴로 답했다·
“너희들의 옷차림으로 바꾸었는데도?”
“제 위명 때문일 수도 있겠군요·”
“너도 옷차림을 평범하게 했잖아·”
“사람이 뿜어내는 기운이라는 건 쉽게 가려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음····”
태현이 신음을 흘렸다·
옷차림만 바꾸면 될 줄 알았는데 여러모로 방해되는 게 많다·
“어쩔 수 없군·”
태현이 마력을 피워 올렸다·
쓸데없는 데 마력을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사용해야 할 때였다·
화아아악·
두 사람을 휘감은 진청색 마력이 그들의 모습을 변모시키기 시작한다·
“무슨····”
낯선 감각에 흠칫거리던 제갈선이 뒤늦게 청동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확인했다·
“···!!”
동그랗게 떠지는 그 모습에 태현이 킬킬거렸다·
“어떠냐· 젊음을 되찾은 기분이·”
“이 이건····”
제갈선이 앳된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손을 떨었다·
“반로환동(返老還童)···?”
단순히 겉모습을 변장한 수준이 아니다·
제갈선은 실제로 자신의 육체가 젊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초절정고수에 올라서도 노화를 정체시키는 게 고작이었다·
‘화경의 경지는 올라야 가능할 것이라 여겼는데 어찌····’
가장 먼저 떠오른 가능성은 사술(邪術)·
정파와 다르게 마도사파에서는 온갖 사술이 존재한다·
대마두 정도 되는 이라면 일시적으로 육체를 어리게 만드는 사술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내 그가 고개를 저었다·
‘마력··· 이계의 힘인가·’
일전 태현에게서 들었던 기나긴 내용들·
장편으로 된 소설이라 해도 부족함 없는 삶이었다·
그 이야기로 비추어 보건대 지금의 상황은····
“의태··· 또는 폴리모프····”
“이해가 빠르군·”
태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둘 다다·”
“둘 다···?”
“이 몸의 수준쯤 되면 그 두 가지를 구분하는 건 크게 의미가 없거든·”
“····”
“어찌 되었든 이 정도면 시선을 피하기엔 충분하겠지?”
태현이 턱을 까딱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태현의 이목구비도 묘하게 무림인의 것처럼 변해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풍기는 기운도 일류고수 정도로 갈무리했다·
“충분하오·”
“이제 날파리들의 시선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군·”
태현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청주라고 했나· 나쁘지 않군·’
식도락(食道樂)·
이 또한 육체를 지닌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일 터·
마정석을 회전시키지 않고 맛보는 무림의 술은 나쁘지 않았다·
“무한분가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정무맹이 위치한 곳은 무한·
호북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고 정무맹의 고수들이 일찍 당도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제갈선은 무한에도 분가를 위치시켰다·
“달린다면 칠 일· 지금처럼 유랑하듯 걷는다면 그 두 배쯤 걸릴 것이오·”
“내일부터는 달리는 걸로 하지·”
이미 무경각에서 몇 달의 시간을 보냈다·
쓸데없이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알겠소·”
“그런데 말이야·”
“···?”
“이제 겉보기에 우리는 비슷한 나이대란 말이지·”
태현은 이십 대 초반·제갈선 역시 겉보기엔 이십 대 초반 정도다·
“동년배에게 사용하는 말투로는 어색하다 생각하지 않나?”
“그것도··· 그렇군·”
“말투·”
“이러면 되겠나?”
말 한마디로 둘 사이에 그어져 있던 선이 옅어졌다·
과연 여러 사람을 지휘해 본 경험이 있는 자다웠다·
“적응이 빨라서 좋군·”
태현이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는 제갈선을 보며 재차 잔을 비웠다·
마주 앉아 젊어진 자신의 몸을 확인하던 그가 입을 연 건 청주 한 병이 비워졌을 즈음이다·
“무한분가에는 얼마나 머무를 생각이지?”
“정무맹이 이 몸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안정화될 때까지·”
“그건··· 쉽지 않을 거다·”
제갈선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전 남궁천이 대동한 정무맹 무인들은 모두 몰살당하지 않았다·
만약을 대비해 연락책들은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고 패배가 확정된 즉시 정무맹에 사실을 알리기 위해 자리를 떴다·
“그대가 우리와 손을 잡는다는 의지를 조금 더 일찍 피력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복잡해지지 않았을 거다·”
“이 몸을 멋대로 마두로 착각한 건 너희들이다만·”
“그건 그대가 먼저····”
“이미 지나간 일이다·”
“····”
태현의 입술이 비틀렸다·
“어차피 이 몸이 작정하면 정무맹의 잔당을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김태현··· 우리가 필요한 건 그대도····”
“탑의 가능성? 권능의 봉인을 해제할 방법?”
“····”
태현이 제 약점을 스스로 입에 담자 제갈선이 입을 다물었다·
“이 몸이 설마 아무런 계산도 없이 너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을까 봐·”
“····”
자신만만하게 눈을 맞추는 태현을 보며 제갈선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뭐지···? 설마 또 다른 수를 준비해 둔 것인가·’
사실이라면 위험하다·
남궁천을 비롯한 정무맹의 고수들이 다수 죽은 순간부터 무림의 균형은 기울었다·
‘김태현마저 등을 돌리게 되면 세상은 손쓸 새도 없이 마도사파의 손에 떨어질 것이다·’
물론 김태현이 혈마신교의 교주를 적대하고 있으니 마도사파라 하여 무사할 가능성이 적겠지만·
그들의 세력을 최대한 보존한 채 마도사파와 김태현의 싸움 구도로 만드는 게 우선이었다·
또한·
‘그 대공이라는 자들 또한 위험하다·’
김태현에게 들은 대로라면 대공들의 성격은 그 못지않게 제멋대로다·
그런 자들이 다섯이나 무림으로 넘어왔다고 한다·
놀랍게도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정보가 없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무한분가로 가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본가와 달리 정보의 구심점으로 삼기 위해 자리 잡은 곳·
중원 무림에 퍼져 있는 정보를 무한에선 보다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다·
‘정파에서 어떻게든 김태현을 품어야 한다·’
소속 고수들을 잃은 구파일방을 어떻게 설득할지는 제갈선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이제야 역할을 이해한 듯하네·”
태현이 실실 웃으며 새로운 청주를 개봉했다·
“무한분가에서 기다리는 동안 혈교와 대공들의 정보를 보고해라· 정무맹의 떨거지들은 그 이후에 만나 보도록 하지·”
태현이 더 이상의 반문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말했다·
명령이었다·
“···알겠다·”
“몇 달간 책만 봤더니 유흥을 좀 즐겨야겠군·”
“객주에게 말해 놓을 테니 용건이 있으면 불러라·”
자리에서 일어난 제갈선이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그로서도 젊어진 몸을 통한 변화를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리라·
혼자 남은 태현이 조용히 잔을 기울였다·
‘6층으로 올라온 지 수개월· 아직도 대공들의 움직임이 없는 게 이상하긴 하군·’
오르갈· 요르문간드· 루시퍼· 티폰· 하자드·
겉모습이야 폴리모프를 하면 간단히 해결되겠지만 문제는 성격이다·
자신 못지않게 제멋대로인 그들이니 떠오르는 대마두로 이름이 알려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제갈선의 정보망에 한 녀석도 걸리지 않았다 한다·
‘이상하군· 힘의 제약이 있었다 해도 얌전히 적응할 녀석들이 아닌데·’
태현과 달리 ‘정신지배’의 권능도 없으니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도도 떨어질 것이다·
취기와 함께 몇 가지 가능성이 떠오른다·
“두각을 드러내지 못할 정도로 힘이 격락되었거나· 이 몸처럼 누군가의 뒤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
어느 쪽이든 재미있는 일이었다·
하계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녀석들이 신분을 숨기며 미물이라 칭하는 이들 사이에 섞여 있는 셈이니·
“뭐 그건 이 몸도 마찬가지로군·”
이그문의 세력에 최대한 발각당하지 않으며 정체를 숨긴 대공들을 규합해야 한다·
술기운 때문일까?
지금의 상황이 기꺼워 묘하게 가슴이 뛴다·
인간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게임·”
마치 핸디캡을 떠안은 게임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건 이그문 또한 마찬가지겠지·”
이런 종류의 게임에서는 공세와 수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법이다·
태현은 수세보다는 공세에 익숙한 성격이었다·
“기다려라· 이 몸이 먼저 찾아내 줄 테니까·”
두근거림을 만끽하며·
청주 한 병을 추가로 비우는 태현이었다·
* * *
교주인 천마를 진정한 하늘이라 생각하며 마도를 걷는 자들·
세상은 그들을 천마신교(天魔神敎)라 불렀다·
그런 천마신교도들의 하늘·
새하얀 머리를 늘어뜨린 천마(天魔)의 귓가로 부하들의 고성이 들렸다·
“천마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피하셔야 합니다!”
“불경한 말이오나 이대로는 안 됩니다!”
“시간을 벌어보겠다고 나선 흑암대의 5할이 궤멸했습니다!”
“개방의 거지들과 교전하던 일장로와 2장로도 휩쓸린 것 같습니다·”
고성 속에서 천마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월영마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혈교(血敎)에 도움을 요청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천마의 시선이 눈을 내리깐 그에게 향했다·
곁에 있던 3장로와 4장로가 목소리를 높였다·
“월영마군! 천마님께 그 무슨 무례한 말이냐!!”
“그런 근본 없는 것들에게 천마님이 몸을 의탁해야 한다는 말인가?!!”
혈교의 1대 교주 혈마는 본래 천마의 왼팔이었던 자다·
그는 스스로가 교주의 자리에 오르길 원하여 혈마신교(血魔神敎)를 창시했고 현재는 천마신교와 함께 신교를 양분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천마신교와 혈마신교 모두 몇 번의 대가 바뀌었지만 그 사이는 여전히 좋지 못했다·
“····”
천마신교의 입장에선 분파나 다름없게 여기는 혈마신교에 몸을 의탁한다?
그건 교의 정통성을 빼앗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누구보다 정통성을 중히 여기는 장로들이기에 지금과 같은 반응은 놀라운 게 아니었다·
“하면 어찌하자는 말입니까· 신교 최강의 무력집단이라 할 수 있는 흑암대의 5할이 눈 깜짝할 사이에 궤멸하고 개방의 거지들과 교전하던 1장로님과 2장로님마저 목숨을 잃은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크흠····”
“섣불리 단정하기엔····”
3장로와 4장로가 반박하지 못하고 헛기침하며 말끝을 흐렸다·
월영마군이 입술을 짓씹으며 장로들을 노려보았다·
그에겐 정통이니 명분이니 하는 것보다 눈앞에 있는 천마의 목숨이 중요했다·
“천마님··· 정히 마음이 내키지 않으신다면 낙도(落島)로 몸을 피하시지요· 일단 옥체 보존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게 우선입니다· 놈은 괴물입니다· 정무맹주 남궁천이 와도 이런 식의 패도를 보일 수는 없습니다·”
“····”
가만히 듣고 있던 천마 백세희의 눈이 꿈틀거렸다·
패도(霸道)·
본래라면 천마가 지향해야 할 걸음이다·
그런데 갑작스레 나타난 존재가 그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장로와 부하들의 흔들림에도 아무런 반응 없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담긴 무게만큼은 가볍지 않았다·
“천마라 하여 다르지 않다·”
“천마님····”
“물론 본녀는 쉬이 죽을 생각이 없다·”
“하오면····”
“월영마군· 침입자의 이름이 뭐라 했느냐·”
천마의 물음에 월영마군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발음하기 쉽지 않은 이름인 까닭이다·
잠깐의 달싹임 끝에 그가 토해내듯 침입자의 이름을 내뱉었다·
“스스로 밝히기를 ‘루시퍼’라 하였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