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5화
이름·
다른 이들은 몰라도·이름과 육체를 쟁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태현’에겐 중요한 문제였다·
지금의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수많은 단어가 떠오른다·
그중 어느 하나 만족스러운 게 없었다·
결국 머릿속에 남는 건 하나·
“김태현·”
스스로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이름을 입에 담았다·
등탑을 끝낸 뒤·
삼천세계의 모든 가능성을 쟁취하여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
‘진정으로 이 몸의 것이 될 이름이로군·’
지금껏 미물이라 구분한 인간이라는 종·
굳이 그 사실을 눈앞의 미물들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김태현의 뿌리가 인간이라 하여 지금의 자신이 미물이 되는 건 아니니·
“김태현····”
남궁천이 나직이 읊조렸다·
정파와 사파 마교를 통틀어 처음 듣는 이름·
‘역시 활동한 지 정말 얼마 되지 않은 게 분명하다·’
제갈선은 그가 서역인으로 추정되는 이방인이라 보고했다·
중원 무림과 달리 서역은 남궁세가와 정무맹의 정보가 완전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기이한 힘 역시 지금껏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다·
“화경의 경지를 이룩한 존함· 이 남궁천이 똑똑히 들었소·”
남궁천이 호흡을 고르며 눈앞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래· 이 몸의 이름을 기억한 건 그렇다 치고·”
으드득·
태현이 들어 올린 손을 한 바퀴 돌렸다·
갈색 마력으로 강화된 손이 흉흉한 기운을 드러낸다·
마음먹는다면 눈앞의 무인을 찢어발기는 데 부족함 없는 위력·
“책임질 준비는 되었겠지?”
“····”
꿀꺽·
남궁천이 마른침을 삼켰다·
상대가 의심할 여지 없이 화경(化境)의 경지이며 초절정과의 격차가 생각보다 컸다는 건 확인했다·
지금부터는 후일을 도모할 때였다·
“우릴 죽이면 그대는 무림의 공적이 되는 것이오·”
“기껏 생각한 게 협박인가·”
정무맹주의 경고·
중원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에 손꼽히는 자의 발언임에도·
“다짜고짜 검을 빼 든 녀석이 할 말은 아니군·”
태현이 덤비라는 듯 검지를 까딱였다·
“무례하군·”
“역류를 가라앉히기 위해 시간을 벌고 있지 않은가·”
“알고··· 있으셨는가·”
“너 같은 놈을 한두 번 보는 게 아니라· 굳이 장단을 맞춰줄 필요는 없지·”
태현의 두 눈이 휘어졌다·
적안이 발현된 두 눈은 초절정고수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잡아내고 있다·
승패는 갈렸다·
두 눈에 실린 호기심은 조금 특별한 벌레를 보는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흐음····”
머리가 갸웃거려진다·
기분이 묘하다·
정신지배의 권능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정보를 알아내려면 무력을 통해 직접 실토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결과물이 눈앞에 있는데·
“복잡한 기분이 드는군·”
“····”
영문 모를 소리에 남궁천의 두 눈이 흔들렸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잠깐 사이 잦아들어 있다·
태현이 개의치 않으며 피어오르는 감정을 곱씹어 보았다·
“내가 김태현이다·”
김태현은 인간이다·
인간은 속물적이며 불완전하다·
필멸자(必滅者)·
하계의 대공과 천계의 주인이라 하여 그런 필멸자의 굴레를 쉬이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을 주시하며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남궁천의 시선을 마주하며 찰나에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해 본다·
‘이 몸을 성장시킬 발판이 되어주길 기대했던가·’
6층에서 손꼽히는 강자·
그런데 막상 마주해 보니 전력은 기대 이하·
실망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할 것이다·
‘초절정이라 해도 대공급 권능에는 한참 못 미치는군·’
이그문이 아직도 6층을 집어삼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맹주라는 네놈조차 이 몸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패기를 발산하는 것만으로 절정고수들이 무릎 꿇었고·
강화한 신체로 적당히 손대중하는 것만으로 초절정고수들이 쓰러졌다·
그 과정에서 내상 입은 이들은 여전히 피를 토하며 정신 차리지 못하는 모양새·
사용한 권능은 고작 두 개였으나 그것만으로 정무맹의 정예 병력이 초토화되었다·
“잔챙이가 더 있다고 협박하는 꼴이 가당찮구나·”
“···!!”
태현의 말에 남궁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이룬 경지는 존경하나· 무림의 공적이 되어선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이오·”
가는 곳마다 감시가 뒤따르며 음식을 먹을 때는 항상 독을 조심하게 될 것이고 취침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삶이 이어질 것이라고·
“이곳에서 우리가 스러지더라도 수많은 무림인이 노리게 될 것이란 말이다·”
자신의 말에 힘을 싣듯 남궁천의 안광에 결연한 의지가 깃들었다·
기세에 공기가 흔들린다·
“김태현·”
남궁천이 들어 올린 검에 푸르스름한 기가 넘실거렸다·
검강·
초절정고수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지만 검황이라 불리는 남궁천의 검은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부서진 검의 경도를 보완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대는 무림을 적으로 돌릴 셈인가!”
웅혼한 외침에 태현이 혀를 찼다·
기껏 말 상대를 해주었더니 죽을 명분을 찾아 오히려 기세등등해졌다·
녀석뿐만이 아니다·
“대마두····”
피를 쏟던 제갈선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남궁천의 옆에 섰다·
“크윽····”
“아직도 머리가 울리는군····”
“맹주가··· 시간을 잘 끌어주었어·”
“꼴이··· 말이 아닐세····”
초절정고수 넷이 추가로 몸을 일으켰다·
개방 화산 무당 사천당가·
정무맹에 속한 정파의 초고수들·
무림에 한 획을 긋고 있는 핏발 선 눈이 태현에게 고정되었다·
“갈··· 정마대전도 아닌 상황에 이런 꼴이라니····”
“크흐흐흐··· 후배님들을 볼 면목이 서지 않는구려·”
“이곳이 우리의 무덤이 될지라도··· 팔 하나는 가져갈 것이다·”
“네놈이 무얼 노리든 생각대로 되진 않을 테지·”
남궁천 못지않은 협박·
태현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이젠 존대조차 하지 않는군·”
로자리아의 권능이 제한되지만 않았어도 정신지배로 정보를 뽑아낸 뒤 치워버렸을 텐데·
“적당히 상대해 줬더니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는 꼴이라니·”
그때·
‘····’
기시감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태현의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하계의 권능에 미치지 못하는 어중간한 대적자들·
남궁천의 반응으로 보아 마교의 대마두로 불리는 천마와 혈마에 대한 언급은 그가 기대한 이하다·
기껏해야 초절정고수 정도로 취급하는 모양새·
천마라는 놈은 몰라도 혈마인 이근문은 그래선 안 되었다·
“하····”
정사마를 막론하고 아직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화경의 경지·
전직 대공 이그문·
현직 혈마 이근문·
“하하····”
다 쓰러져 가는 남궁천을 앞에 두고서야 알게 되었다·
자신보다 약한 자를 앞에 두었을 때·
“이그문 이놈·”
그들을 아무렇게나 할 수 있음에도 그들의 쓰임새를 떠올리며 베풀 듯 살려주는 절대자의 기분을·
“6층에서 절대자 놀이를 하고 있었구나·”
혈마라는 직책으로 만족할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니면 그가 모르는 제약이 더 있던지·
어느 쪽이든 이 기이할 정도로 유지되는 평화가 이해되었다·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구나!!”
길쭉한 검강을 뽑아낸 남궁천이 소리쳤다·
다른 초절정고수들 역시 그 못지않은 기세를 발산하며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너희들· 탑에 대해 알고 있나?”
“괴이한 말을 하는군!”
“필시 정신을 흐트러뜨려 방심을 유도하려는 속셈일 걸세·”
“모두 다음 공격에 주의하시오!!”
“····”
기대한 반응을 보이는 건 제갈선이 유일했다·
태현의 시선이 제갈선에게 고정되었다·
“너는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데·”
“그건····”
입술을 달싹였으나·
“····”
이내 입을 닫는 제갈선이었다·
태현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몇 번 상대해 보니 확신이 든다·
눈앞의 노인들은 결코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이들 중 살려둬야 하는 건 제갈선 하나면 충분하다·
“처음부터 다른 놈들은 필요 없었군·”
어째서 그 혼자만 다른 반응을 보이는지 또한·
“곧 불게 될 거다·”
카아아아-·
하자드의 권능을 강화했다·
흑색 마력이 넘실거린다·
패기가 발산되었다·
반복되는 공방·
짓누르는 중압에 초절정고수들이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까지 버티다 무릎 꿇은 남궁천에게 다가갔다·
삼 갑자가 넘는 내공도·
평생을 쌓아 올려 완성한 검강도·
수없이 수련한 초식과 비전 검술도·
압도적인 패기 앞에서는 한낮 발버둥에 불과하다·
“대···마···두····”
남궁천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두 눈과 코에서 핏물이 흘렀다·
전력을 다해 저항하고 있지만 그뿐·
툭·
태현이 저항하지 못하는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내 이름은 김태현이다·”
남궁천이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콰직·
부서진 머리통과 함께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몸을 돌렸다·
“맹···주····”
“갈····”
“화산이····”
“무당····”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네 명의 고수들이 울분을 삼키는 게 보였다·
“네놈들도 서두를 거 없다·”
태현이 무릎을 펴지 못하는 고수들의 앞을 지날 때마다·
정무맹의 별이라 여겨지던 이들이 스러졌다·
* * *
“끄···아···아····”
“····”
제대로 된 비명조차 내지 못하는 제갈선을 내려다봤다·
팔다리의 뼈는 모두 부러뜨렸고 내공을 운용하지 못하게 갈비뼈를 적당히 비틀어 놓았다·
초절정 고수라 해도 결국 인간의 몸·
제갈선은 저항도 죽음도 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비명과 같은 신음을 흘리는 게 고작이었다·
툭툭·
가볍게 놀린 발이 제갈선의 복부를 건드렸다·
“끄···아····”
제갈선이 비명과도 같은 신음을 토해내었다·
스윽·
태현이 허리를 숙여 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처음에 넌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지·”
“···끄···아····”
“처음부터 연기한 건가· 갑작스럽게 떠오른 것인가·”
“끄···아···아····”
흔들리는 눈동자를 고정시킨 채·몇 번이고 말을 이었다·
“목격자는 없다·”
제갈세가의 무인들도·
끌어들인 정무맹의 무인들도·
모두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이제 말해 보거라·”
발산하고 있는 패기를 거두지 않은 채·
태현이 제갈선의 귓가에 속삭였다·
“탑의 6층·”
“무슨····”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말···을····”
웅얼거릴 뿐 문장을 만들지 못한다·
다른 초절정고수들을 처형할 때와 마찬가지 모습이었다·
도착 직후만 해도 사용 가능하던 정신지배의 권능이 봉인당하고·
탑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제갈선이 입을 열지 못한다·
“이 정도 했는데도 발설하지 않는 걸 보면 제약이 있는 거로군·”
제약이라면 누구보다 지독히 당해본 그다·
태현이 웃음을 흘렸다·
줄곧 방출하고 있던 패기를 거두어들였다·
카아아아-·
마정석이 회전하며 잿빛 마력이 피어올랐다·
발동된 권능에 제갈선의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어 간다·
“넌 죽이지 않으마·”
재생의 권능이 건재하는 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할 것이며·
“이 몸의 등탑을 위해 생명의 마지막 한 줌까지 쏟아내야 할 것이다·”
“···!!”
대답 따윈 고려하지 않은 명령이었다·
떨리는 몸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는 제갈선을 앞에 두고 태현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다·
띠링·
“····”
그의 눈앞에 달갑지 않은 메시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