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4화
하자드가 눈을 떴다·
두 눈에 담긴 건 거대한 숲이다·
[····]
주위를 둘러보았다·
함께 있어야 할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곤란하군·]
조용히 중얼거렸으나·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그저·휘이이이·
살갗을 간지럽히는 바람만이 불어올 뿐·
[흐음··· 좌표는 고정되어 있었을 텐데·]
이그문과 접촉한 적 있는 길페르의 정보·
신수와 동화된 엘븐이 대공들의 도움을 받아 탐지해 낸 좌표·
로자리아의 두 번째 권능을 이용해 열게 된 안정적인 게이트·
6층으로 향하는 통로는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다·
시간차를 두고 넘었든 다 같이 넘었든·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와 시간선은 동일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게 자신뿐인 걸까·
풀리지 않는 의문에 하자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으로 떠오른 가설·
[길페르의 정보가 잘못되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은 낮군·]
맹약자를 비롯해 몇 명의 대공이 추가적으로 확인했다·
하급 악마로 격락한 그녀는 책략을 꾸밀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외에 몇 가지 가설이 추가적으로 떠오른다·
엘븐과 로자리아의 배신·
게이트를 여는 과정에서의 실수·
6층을 선점하고 있던 이그문의 함정·
그들이 예상치 못한 탑의 제한·
하나의 이야기를 엮어도 될 만큼 수많은 변수들·
[····]
이내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의심하자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자니 싹트는 건 불신뿐·
[그런 건 본룡과 맞지 않는군·]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았다·
양손을 양 무릎에 올리고 눈을 감아 머리를 비웠다·
명상(冥想)·
교류하는 중간계를 통해 알게 된 그곳에 거주하는 마법사들이 마나 하트를 강화하고 마법 연산을 증진시키기 위해 수없이 행하는 수양법·
[후우우··· 후우····]
그녀가 옅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주변을 둘러싼 온도가 조금은 바뀐 듯했다·
개의치 않고 명상을 이어갔다·
체내에서 세 개의 심장이 맥동하는 게 느껴진다·
첫 번째 심장은 드래곤 하트·
용족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마력의 원천·
두 번째 심장은 마나 하트·
중간계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거대한 마나의 원천·
세 번째 심장은 마정석·
김태현을 만나며 새롭게 형성한 계약과 맹약의 증표·
드래곤 하트만으로 마정석의 역할을 하기엔 충분한지라 그녀 정도 되는 존재라면 번거롭게 형성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새로운 심장을 연성한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다·
‘김태현·’
맹약자는 계약한 대공들의 권능을 마정석 각각에 담아두고 있다·
처음에는 계약을 위한 매개물이 필요해서였겠지만·
‘지금은 그러는 편이 계약을 단단하게 유지할 수 있어서일 테지·’
권능의 충돌을 막아주고 힘을 보다 쉽게 컨트롤할 수 있게 해준다·
혹 하나의 권능이 폭주하더라도 다른 권능을 이용해 빠르게 가라앉힐 수도 있다·
그녀가 세 번째 심장을 연성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계약자 김태현·
맹약자 김태현·
그와의 연결고리를 단단하게 하여 마룡왕의 피를 억제하는 것·
그리하여 조종당하지 않고 온전히 힘을 컨트롤하는 것·
세 번째 심장을 연성할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
눈을 떴다·
명상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니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다·
[어울리더니· 본룡도 닮아가는구나·]
인간(人間)·
용족에 비하면 하찮은 힘을 지닌 생명체·
용족의 로드인 그녀가 닮기엔 너무도 미약한 존재였다·
그런데 왜일까·
지금의 감정이 싫지 않다·
인간의 심상 속에서 오랜 시간을 기생하여 누구보다 인간과 비슷해진 초인(超人)이 떠올랐다·
뒤늦게 육체를 얻어 세상에 나왔으나· 스스로가 지닌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존재·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냐·]
하자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함께 탑을 오르기로 약속했으니·일단은 그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 * *
[짜증 나는군·]
오르갈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입을 열었다·
[본존이 어째서 네놈과 단둘이 있는 거지?]
물음에 요르문간드가 그를 쳐다보았다·
조소하듯 입가는 말려 올라가 있고 오드아이에는 한심함이 가득하다·
[본좌가 할 말을 대신해 주는군·]
[본좌는 무슨· 눈깔에 힘 안 빼지?]
오르갈이 으르렁거렸다·
일전의 서열전에서 ‘간발의 차이’로 패배했기 때문일까·
그는 여전히 요르문간드를 작은형님으로 인정하길 거부하고 있었다·
그 속이 뻔히 보여 요르문간드가 혀를 찼다·
[네놈과 같이 일을 꾸민 적이 있다는 게 부끄러울 정도군·]
[뭐?]
[어쩌다 그렇게 망가진 거냐 오르갈·]
[이 새끼가 그래도·]
마수왕이 솥뚜껑만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손을 휘감은 갈색 마력에 근육이 강화된다·
[····]
가만히 지켜보던 요르문간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리 그라 해도 폴리모프 상태로는 부담스러운 공격이다·
본체가 인간형이고 영역에 크게 영향받지 않는 오르갈과 달리 그는 형태와 영역의 유무가 큰 차이를 불러온다·
[하아····]
한숨을 내쉰 그가 말을 이었다·
[한때는 거인왕을 상대할 정도로 패기 있던 녀석이· 어쩌다 이리된 것인지·]
지능이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퇴화한 듯하다고·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뒷말을 꾹 눌러 삼키는 요르문간드였다·
[길게 말할 것 없다· 덤벼라·]
[멍청한 놈· 지금의 본좌를 네놈 따위가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물러터진 비늘만 믿고 까부는 놈이·]
[쓸데없는 소리 말고 기세를 거둬라·]
[아무리 생각해도 일전의 패배는····]
[멍청한 놈! 아직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감이 안 오는 거냐?!!]
[뭐가?]
[이··· 병··· 아니··· 순진한 놈····]
요르문간드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 같은 마수왕을 보며 그가 쓰게 웃었다·
[게이트의 좌표는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우리밖에 없다는 건····]
[게이트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말이잖아·]
오르갈이 당연하지 않냐는 얼굴로 답했다·
[그걸 아는 녀석이 싸움을 벌이려는 건가·]
요르문간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시선을 주변으로 향했다·
숲·
그것도 요정의 숲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광활하게 펼쳐진 곳이다·
처음 발을 딛은 세계이나 사람의 발길이 드물다는 건 한눈에 알 수 있다·
[숲을 좌표로 지정한 건 신수의 영향을 받은 엘븐이····]
[보다 쉽게 좌표를 고정하기 위해서지·]
[····]
[본존이 설마 그런 것도 모를까?]
[····]
[····]
요르문간드의 반응을 이해한 오르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말 모른다고 생각했군·]
[그러니까··· 이곳에 다른 녀석들 없이 우리만 있다는 건····]
[게이트를 지나며 좌표가 변경되었다는 거겠지· 이상함을 느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야·]
[····]
이성적인 판단에 요르문간드가 할 말을 잃었다·
오르갈이 씨익 웃어 보였다·
[가장 먼저 게이트를 넘은 마스터를 비롯해 하자드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다· 티폰과 루시퍼는 말할 것도 없지·]
[···그래·]
[어쩌면 시간이 뒤틀렸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겠군·]
[너··· 멍청해진 게 아니었나?]
[이 새끼가· 입조심해라·]
[이해가 되지 않는군·]
[본존은 새로운 주인을 모시게 되었을 뿐 그 격마저 퇴화하진 않았다·]
오르갈이 허리를 펴고 가슴을 부풀렸다·
존재감이 한층 부각된다·
[설마··· 일부러···?]
일부러 멍청한 척 연기했다고?
요르문간드의 오드아이가 반짝였다·
[푸흐흐흐흐· 더 이상의 추측은 듣지 않겠다·]
[····]
오르갈이 침묵하는 마해왕을 보며 몸을 들썩였다·
멍청할 정도로 순박한 웃음·
광기가 깃든 웃음을 얼마나 흘렸을까·
털썩·
오르갈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번엔··· 또 뭐냐·]
[본존은 여기서 마스터를 기다릴 것이다·]
[부족한 판단이군· 이런 곳에서 기다린다 하여 네놈을 발견할 수 있을 리····]
[마스터와 본존은 잘라낼 수 없는 맹약으로 이어져 있다·]
[제정신인 줄 알았더니· 역시 세뇌당했군·]
욕지거리에 오르갈이 손을 휘저었다·
[서열 정리를 다시 할 게 아니라면 가서 주변이나 둘러봐라·]
일방적인 명령에 요르문간드가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건지· 이성적인 건지·’
어느 쪽이든 이곳에서 시간만 보내고 있을 수는 없다·
[본좌에겐 본좌만의 방법이 있다·]
돌아오지 않을 테니 기다릴 거 없다고·
할 말을 끝낸 요르문간드가 오르갈의 반대편으로 걸었다·
머지않아 그의 모습이 나무에 완전히 가려졌다·
[흐흐· 뱀 같은 성질머리하고는·]
오르갈이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며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이전부터 머리를 굴리는 건 그와 맞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걸 확인했으니 결국 언젠가는 다시 찾을 것이다·
[흡·]
숨을 삼키며 팔을 굽혔다·
[후욱·]
거친 숨을 내뱉으며 굽혔던 팔을 폈다·
굽히고 펴는 반복되는 동작·
몸을 일으킨 건 반복된 횟수가 천 번을 넘었을 때다·
가슴께와 두 팔에 자극이 상당하다·
[팔굽혀펴기라··· 과연 대단한 수련법이다·]
맹약자이자 마스터인 태현이 남몰래 알려준 방법·
지금의 훈련을 수백 년 정도 반복하면 요르문간드의 비늘을 완력만으로 뜯어낼 수 있을 거라 했다·
가르침을 받은 건 상체 훈련만이 아니다·
오르갈이 두 다리를 어깨너비만큼 벌리고 섰다·
그리고·
[흡·]
엉덩이를 뒤로 빼고 천천히 내려앉았다·
[후욱·]
자극을 놓치지 않으며 그대로 무릎을 편다·
마찬가지로 천 개 정도를 반복했을 때 굵은 땀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면을 딛고 선 두툼한 두 다리가 전투라도 치른 것처럼 피로하다·
[흐흐흐· 본존은 아직 더 성장할 수 있다·]
성장이라는 성취감을 맛보기 시작한 마수왕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확신이 든다·
태어날 때부터 강했던 그가 수련을 통해 다음 경지를 노릴 수 있다는·
[끝까지 가면 본존이 최강이다·]
탑의 6층에 자리 잡은 무림·
어딘가의 숲속·
막내를 탈출하기 위한 마수왕의 폐관 수련이 시작되었다·
* * *
“이제 끝인가·”
태현이 쓰러진 무인들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피칠갑을 한 중년의 남자가 몸을 일으킨다·
정무맹주· 검황 남궁천·
인간들의 나이로 60을 넘은 나이에 정무맹 최강의 칭호를 얻은 남자·
정파의 초절정고수 중에서도 최강이라 불리는 탓에 달리 정파제일인이라 부르는 이도 있을 정도다·
특유의 겸손한 성품 탓에 과도한 칭호라 말하면서도 남궁천 스스로도 내심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전설로나 전해지는 경지·
화경(化境)을 눈앞에 두었기 때문이다·
죽기 전 그의 두 손으로 천마와 혈마라는 마두의 우두머리를 처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랬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반쯤 부러진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킨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갈선의 요청으로 함께 호북성을 찾은 초절정고수들·
화경의 경지라 추정되는 수수께끼의 외인(外人)을 상대하기 위해 불러들인 정무맹 최강의 무인들이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
그가 끓어오르는 피를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정녕··· 인간인가····”
“이 몸이 인간처럼 보이나?”
“····”
물음에 물음으로 답하는 태현을 보며 남궁천이 입을 열었다·
“이름을 묻고 싶소·”
‘흠· 자신을 쓰러트린 녀석을 인지하는 무림의 통상적인 과정인가·’
정신지배의 권능으로 대략적인 문화를 파악한 태현이다·
그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근문보다는 좋은 걸로 하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