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0화
요정의 숲에 대공들이 모여들었다·
하나같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푸흐흐흐· 하계는 하계군·]
티폰이 웃음을 터트렸다·
[상계를 밟아보기도 전에 하계 전력이 반토막 날 뻔했군·]
루시퍼가 덧붙였다·
겉보기엔 정상으로 보이나 그 또한 존재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티폰과의 일전에서 상당한 마력과 신력을 소진한 까닭이다·
“둘 중 누가 이겼는데?”
태현이 킬킬거리며 물었다·
둘의 승부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오르갈을 데리고 나와 대공들과 현장을 찾았을 때·
그들은 이미 전투를 멈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저 막연히 무승부였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편한 대로 생각해라·]
[푸흐흐흐흐·]
“싱겁기는·”
태현이 혀를 차며 대공들의 면면을 살폈다·
서큐버스 퀸·
요정왕·
마해왕·
마수왕·
거인왕·
타천사·
그리고 드래곤 로드·
다들 겉모습은 초고속재생으로 회복했지만 하자드를 제외하면 알맹이는 이전과 비할 바 없이 약해져 있다·
그 가운데 태현이 있었다·
“이 몸의 계획과 달리 일이 어그러졌군·”
본래는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 없었다고·
태현이 간략하게 덧붙였다·
간단하게 자신에 대해 설명했다·
예상대로 티폰과 루시퍼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르갈은 막내 서열전에서 패배해 발언권이 없다·
루시퍼의 권능으로 훼손된 신체를 재생하고 엘븐의 권능으로 부족한 마력을 채워주었음에도 여전히 초췌한 몰골·
‘심마에 빠졌군·’
아무래도 요르문간드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불신의 늪에 빠진 듯하다·
각성과 심마는 종이 한 장 차이·
현 시간선의 오르갈은 계속된 패배로 이전처럼 고고한 격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명색이 일개 마물에서 왕의 칭호까지 오른 녀석이· 한심하군·’
요르문간드를 꺾었다면 지금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겠지만 그는 다시 한번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반대로 요르문간드는 이전의 격을 되찾은 상태였다·
어딘지 모르게 흉흉한 기세까지 풍기고 있다·
‘이 녀석은 천천히 교정시켜야겠어·’
요르문간드는 본래 뱀의 혀를 지닌 대공·
지금이야 힘으로 눌러 놓았지만 어떻게 뒤통수칠지 모른다·
태현이 앞으로 나섰다·
“이곳에 있는 대공들은 모두 나와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계약의 내용은 제각각이며·
서로의 이해관계도 다르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일치한다·”
등탑(登塔)·
100개 층으로 이루어진 탑을 올라 삼천세계의 가능성을 모두 취한다·
[푸흐흐· 100층에 오르면 우리도 성좌가 될 수 있는 건가·]
“그건 장담 못 하겠는데·”
[흐하하하· 너무 무책임한 발언 아닌가·]
“그래서· 이 몸과 탑을 오르지 않겠다고?”
[그럴 리가· 본신은 이미 형제와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티폰이 약속을 되짚듯 말했다·
“재미는 약속하지·”
태현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루시퍼가 호응했다·
[본천도 마찬가지다·]
“본천이라··· 어울리지 않게 호칭이 바뀌었군?”
[등탑에 앞서 신분을 확실하게 했을 뿐이다·]
명실상부 1천계 최강이었으나 ‘용’의 계략에 타천한 대천사·
그가 스스로를 하계의 대공이라 칭하며 태현에게 동조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티폰과 어울리더니 물이라도 든 건가·’
어찌 되었든 만족스러운 발언이었다·
다음으로 로자리아를 보았다·
“서큐버스·”
[본녀는 계약자와의 약속을 이행할 뿐·]
등탑은 돕겠으나 만약 그 끝에서 태현을 해하려 하면 막아설 것이라 하였다·
“뭐 우리의 맹약은 그걸 전제로 맺어진 것이긴 하지·”
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정·”
[×· 본요의 신수가 없으면 등탑이고 뭐고 없느니라·]
본래의 삼천세계에선 하계와 상계를 잇는 역할이었지만 현 시간선의 신수는 탑의 구성과 관련되어 있다·
신수와 동화되어 무한한 마나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엘븐은 등탑에 필수적이다·
“통과·”
태현의 시선이 하자드에게 향했다·
[본룡은 그대와 함께 목적한 바를 이룰 것이다·]
“더할 나위 없군· 요르문간드 넌?”
[본좌는 맹약에 따라 그대가 걸어간 길을 핏빛의 마해로 물들일 것이다·]
요르문간드가 웅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네놈 영역을 확장하겠다는 말이잖아·”
[····]
“맞을래?”
[맹약자의 뒤를 조용히 따라가겠다·]
“흠· 말이 짧은데·”
[조용히 뒤따르겠습니다·]
형님·
나지막이 덧붙인 말에 대공들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 뱀 새끼는 ××같은 ×××도 없지·]
[····]
엘븐의 욕지거리에 요르문간드가 얼굴을 붉혔으나 차마 입을 열지는 못했다·
태현이 마지막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오르갈을 쳐다봤다·
“막내·”
[저는 마스터의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오르갈이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조아렸다·
압축된 근육에 어울리지 않게 공손한 태도다·
“오르갈·”
[말씀하십시오 마스터·]
“너는 따로 호칭 없냐?”
[무슨····]
“막내라 해도 명색이 대공이잖아·”
[과 과거 사용하던 호칭이 있긴 했습니다만··· 평소 잘 사용하지 않아서····]
“괜찮아 쫄 거 없으니까 말해봐·”
[본존입니다·]
“본존?”
[넵·]
“스스로가 가장 높다는 뜻인가·”
[죄송합니다·]
“아니·”
태현이 흥미롭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나쁘지 않아· 지켜보는 재미가 있겠어·”
[가 감사합니다·]
과할 정도로 허리를 숙이는 마수왕·
툭툭·
어깨를 두드려 준 태현이 다시 한번 대공들을 훑어보았다·
“빠진 건 악마와 흡혈귀· 그리고 난쟁이인가·”
[톨킨의 소식은 찾을 수가 없더군·]
“그 녀석이라면 걱정할 거 없다·”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
“그래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문제지·”
[····]
짜증 난다는 듯 답하는 모습에 로자리아가 더는 묻지 않았다·
[악마족은 어떻게 할 거냐? 길페르가 살아 있다 해도 더 이상 악마왕이라 불릴 수 없다·]
“당연한 소릴 묻는군· 모두 복종시킨다·”
[그대에게 물은 본요가 ×신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요정이군· 그 길쭉한 귀로 잘 들어라·”
태현이 잠시 눈을 감았다·
스륵·
다시 눈을 떴을 때·
태현의 존재력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격락해 있었다·
“설마 이 모습으로 그대들을 마주할 줄이야·”
삐딱하고 오만함이 깃든 것과 달리 고요하고 점잖은 목소리·
[×· 설마····]
[길페르?]
엘븐과 로자리아가 가장 먼저 변화를 눈치챘다·
“괜한 걱정을 끼쳤군·”
[×··· 그 녀석의 심상 세계는 지낼 만하더냐·]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시간이 많지 않군· 알다시피 몸의 주인이 워낙 괴팍한 녀석이라 말이야·”
길페르가 검지를 들어 보였다·
손톱으로 한 줌의 진청색 마력이 피어올랐다·
스윽·
손톱이 허공을 긋자 마력이 따라 그어졌다·
“지금부터 이그문이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 현재 본마의 존재력으로는 한 번밖에 설명하지 못할 듯하군·”
잘나신 몸의 주인이 지금의 상태를 오래 유지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대공들이 길페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흡혈귀· 그 녀석은····”
* * *
게이트를 넘은 태현이 마계에 발을 들였다·
“공간 도약· 역시 쓸모 있는 권능이야·”
요정의 숲에서 마계로 단번에 이동했다·
직접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여전히 마력이 자체적으로 회복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심상 세계에 자리한 길페르 때문인지 성력과 접촉한 부작용인지는 아직까지 밝혀내지 못했다·
엘븐이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이런저런 실험 중이지만 왜인지 다음 층으로 갈 때까지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마력을 아낄 필요가 있겠고·”
태현이 저 멀리서 날아오는 비행체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좌표는 제대로군·”
악마·
그것도 평범한 악마가 아닌 악마왕급 존재력을 지닌 자·
쿠웅·
거칠게 착지한 악마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군·]
“아수라·”
태현이 고개를 조아린 악마왕을 보며 미소 지었다·
“몸은 다 회복한 듯하군·”
일전 태현을 비롯한 대공들은 새로운 악마왕을 확인하기 위해 마계를 찾은 적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성력과 접촉한 길페르와 전투가 있었고 오리지널이 바깥으로 나갔으며 돌고 돌아 이렇게 혼자 마계를 찾게 되었다·
“길페르가 격락하며 너희들의 세뇌도 풀렸겠지·”
[그렇습니다·]
“새로운 악마왕은 정해진 건가?”
[모두들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가·”
[마계를 통일하실 생각이신지요?]
본래 초대 악마왕이라 불리던 벨제버브와 디아블로가 두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하고 있던 마계(魔界)·
그들을 따르던 무수한 악마들이 지옥(地獄)이라는 이름의 개인 영역을 통치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마계에 네 명의 악마왕이 군림하고 있는 형세·
“종의 정점이 넷이나 되어서야··· 왕이라는 이름값이 바라지 않겠는가·”
키이이-·
마정석이 회전하며 자주색의 마력이 치솟는다·
태현이 아수라의 적안을 마주했다·
“이 몸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마계를 완전히 통일하도록·”
[알겠습니다·]
명령은 그걸로 충분했다·
후욱·
거체를 일으킨 아수라가 찾아올 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사라졌다·
“악마왕급에게도 정신지배가 통하는 걸 보면 격이 떨어진 건 아닌데·”
소진된 자주색의 마나가 회복되지 않는다·
“이래서야 대공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달갑지 않은 상황이지만 언제까지고 회복되길 기다릴 수는 없다·
“다음은 이그문이로군·”
탑의 6층·
성력에 손을 댄 쥐새끼를 잡으러 갈 시간이었다·
* * *
붉게 칠해진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건물·
신교의 장인들이 만들어 활용하길 수백 년·
신교의 교주 혈마(血魔)가 거주하는 공간이자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명의 침입자만 허용한 혈마신전·
그곳에서 한 남자가 홀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혈마·
붉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그가 비워낸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결국 이렇게 되었는가·”
목소리에 담긴 건 걱정보다는 귀찮음에 가까웠다·
중원 무림의 12대 혈마신군(血魔神君)이자 마교의 지존·
혈마(血魔) 이근문(李根門)·
그가 눈앞에 두고 있던 거대한 제단을 쳐다보았다·
“안타깝구나 안타까워·”
그가 제단을 손으로 쓸었다·
우웅· 우우웅·
살갗에 반응한 제단이 핏빛 아지랑이를 토해내었다·
“하계의 피를 못 마신 지도 오래되었군·”
이근문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스슥·
아무도 없던 신전에 한 명의 남자가 나타나 부복했다·
“제물을 가져와라·”
“충·”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남자가 빠르게 사라졌다·
신교의 최상급 전사만이 보일 수 있는 움직임·
중원 무림에서도 그 이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채 백 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
“부족하군·”
그런 움직임을 가진 이를 부하로 두었음에도 이근문은 만족하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가만히 제단을 쳐다보던 그의 입이 비틀렸다·
“길페르· 루시퍼· 티폰·”
중원 무림 어디에서도 쓰이지 않는 언어·
자신의 출신지인 하계(下界)·
그중에서도 지성체의 격을 지닌 자들만이 활용할 수 있는 하계어(下界語)를 입에 담았다·
“멍청한 놈들· 본귀와 손을 잡았다면 성력의 주인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건만·”
대의는 이곳에 있는데·
영역전쟁과 종족전쟁·
하계왕과 상계왕 같은 건 더 이상 대의를 위한 명분이 되지 못하는데·
“또 그 녀석과 손을 잡았다는 말이지····”
츠즈즈즈·
이근문의 몸에서 피어난 힘이 제단으로 흘러들었다·
제단을 품고 있는 일대의 공간이 일렁인다·
그리고 머지않아·
콰아아아아·
반원형의 게이트가 만들어졌다·
익숙한 소리와 함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중원 무림의 지배자· 혈마신군 이근문이 삼천세계로 향하는 통로를 열었습니다·]
[거대한 힘이 작용합니다·]
[불가사의한 힘으로 저항합니다·]
[하계 대공· 뱀파이어 로드 이그문의 육체를 불러옵니다·]
츠즈즈즈즈·
이근문의 몸에서 핏빛 마력이 치솟길 잠시·
[김태현·]
붉었던 머리카락이 금발로 물들었다·
그가 붉게 늘어진 금발을 매만지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죽여야겠어·]
이그문이 중원 무림과 하계가 이어진 통로로 발을 디뎠다·
띠링·
[탑의 5층으로 이동합니다·]
이제는 익숙해진 메시지가 머릿속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