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18화
태현이 눈을 떴다·
퍼스널 스페이스가 해제되어 있다·
‘요정의 숲으로 나온 건가· 하여간 성력이 개입되면 예측이 쓸모가 없군·’
심상 세계에는 길페르를 잡아두었다·
성력을 사용한 대가로 육체가 소멸한 녀석이다·
지금 당장은 심상 세계에만 존재할 수 있지만 추후 태현의 육체를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뭐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만·’
김태현·
오리지널과 달리 자신은 타인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다·
어찌 되었든 심상 세계에 다시 들르는 건 바깥의 정리를 모두 끝낸 뒤가 될 것이다·
‘일단 엘븐과 로자리아를 마무리····’
그때·
콰득·
“···!!”
신수의 가지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저 멀리 신수와 동화되어 무채색 마나를 개방한 엘븐이 보였다·
그녀의 옆으로 로자리아 역시 무한한 마력을 지원받으며 촉수를 넘실거리고 있다·
“잡것들· 3차전이라 이거냐·”
태현의 입이 비틀렸다·
겉보기엔 재생을 완료했지만 정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어차피 틀어진 관계·
오늘 확실하게 힘의 우열을 가려 복종시킬 생각이었다·
“이까짓 거····”
태현이 중얼거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신수 동화는 그녀들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몸 또한 네년들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잊은··· 음···?”
태현이 사용되지 않는 마력에 당황했다·
띠링·
[고유스킬 ‘판도라의 상자(???)’가 발동되었습니다·]
[일시적으로 마력의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이건 또 무슨 개 같은 소리····’
태현이 어처구니없음을 넘어 분노를 느끼고 있을 때다·
몸을 옥죄는 신수의 가지가 더 강해진다·
신기 ‘엘’과 그 못지않은 갑주로 무장한 엘븐이 다가왔다·
그녀의 옆으로 공간이 일렁였다·
로자리아가 만약을 대비해 그녀의 주위로 공간에 간섭하는 방어막을 두른 것이다·
퍼스널 스페이스에서 신수 동화의 능력을 완전히 사용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작정하고 덤비는 모양새다·
[본요는 이번 생에서 누구의 희생도 원치 않았다·]
“이봐····”
[길페르는 악마족이긴 했다만··· 썩 마음이 잘 맞는 동료였다·]
로자리아가 거들었다·
“너희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 혀가 긴 걸 보니 네놈 상태도 정상은 아니구나·]
[퍼스널 스페이스에서 끝내지 못한 게 그대의 패착이다·]
엘븐과 로자리아가 독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 몸의 말부터 듣고····”
[×!!]
[닥쳐라·]
무채색과 자주색의 마력이 넘실거렸다·
태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의 임무를 떠맡기고 간 오리지널·
저 혼자 목숨을 걸고 덤비다 심상 세계에 정착한 길페르·
행동을 한 건 녀석들인데·
자신이 변명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끝장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상대해 주마·”
목소리에 살기를 담으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두 대공을 노려보았다·
‘× 됐군·’
감정에 지배되어 내뱉은 소리지만 몸에서 마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성력과 접촉한 것 심상 세계에서 ‘왕의 각인’이라는 스킬을 사용한 것이 문제인 듯했다·
‘왕의 각인’은 ‘판도라의 상자’와 마찬가지로 삼천세계와 다른 이질적인 에너지가 느껴졌으니·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게 영구적이진 않을 터· 일단 저 미친년들에게서 멀어져야 한다·’
자신과 맹약을 맺은 대공들·
티폰 루시퍼 하자드·
그들 중 한 명이라도 불러올 수 있다면 정상이 아닌 두 대공을 상대하는 것도 해볼 만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쿠구구궁·
일대에 거대한 중압감이 작용했다·
“큭큭큭··· 타이밍 한번 절묘하군·”
태현이 점점 거대해지는 패기의 위력에 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드래곤 로드·
성좌 ‘다섯 개의 심장을 가진 용’의 후손·
흑발을 흩날리는 여인이 미소 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 * *
“하자드·”
태현이 자신의 옆에 선 여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엘븐과 로자리아의 움직임마저 제지할 정도로 거대한 패기를 내뿜고 있다·
만약 태현이 그녀의 맹약자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영세한 육체로는 견뎌내지 못할 정도의 수준·
[잠깐 사이 많이 상했군·]
태현의 상태를 확인한 하자드의 적안이 휘어졌다·
지금의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리 웃지만 말고 좀 돕지 그러나·”
[도움이라··· 본룡을 만난 이후로 또 바뀌었군· 경험을 통해 배워가는 아이를 보는 듯하달까·]
“중간계와 관계하는 것 같더니··· 이 몸을 애새끼 따위와 비교하는 거냐·”
[후후후·]
달가워하지 않는 태현의 반응에도 하자드가 웃음을 흘려 보였다·
[하자드!!]
그때 패기를 흩뿌린 엘븐이 소리쳤다·
하자드 또한 더 이상 공격을 계속할 생각이 없다는 듯 패기를 거두어들이는 모습·
두 대공이 이십여 보 앞두고 멈춰 섰다·
[이게 무슨 짓거리냐· 보아하니 그 녀석 정체를 알고 있는 듯한데·]
[물론· 본룡은 이자가 이전 계약자의 도플갱어라 불리는 자임을 알고 있다·]
[이전 계약자···?]
로자리아의 적안이 꿈틀거렸다·
하자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본룡은 삼천세계의 포식자라 불리던 ‘김태현’과 계약을 맺었고· 그의 도플갱어인 ‘새로운 김태현’과 맹약을 맺었다·]
덤덤한 발언에 엘븐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자는 김태현이 아니다·]
로자리아가 여전히 신수의 가지에 속박된 채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태현을 보며 정정했다·
[계약자의 몸을 일시적으로 빼앗은 가짜에 불과하거늘· 어찌하여 그를 따르는 것이냐· 혹 강제적인 맹약으로····]
[착각하고 있군 로자리아·]
하자드가 그녀의 말을 자르며 고개를 저었다·
[본룡이 새로운 맹약을 맺음에 있어 강제성을 띤 적은 없다·]
오히려 차를 마시며 깊은 담소를 나누었다고·
[이 모든 건 본룡이 결정한 것이다·]
[····]
[····]
그녀의 차분한 말에 두 대공이 침묵했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세 여인 사이에 흐르는 기류에 태현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침묵을 깨트린 건 로자리아였다·
[실망··· 아니 참담할 정도의 혐오감이 드는군·]
자애로움과는 거리가 먼 전에 없이 싸늘한 목소리·
그녀의 가라앉은 적안이 하자드에게 향했다·
[그대는 이전의 기억을 되찾았다·]
[그래· 그대의 권능으로 과거 함께 전쟁을 수행하던 시기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지·]
[계약자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게 되었을 터· 그럼에도 계약자를 배신하고 가짜를 돕겠다는 건가·]
[×··· 동감이다· 너 정도 되는 녀석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 차라리 이그문처럼 성력이라도 받아들이려 하는 것이라면 이해라도····]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
싱긋·
하자드가 미소 지으며 손을 펼쳤다·
손 위로 흑색의 마력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키이이이-·
태현의 마정석이 하자드의 행동에 반응했다·
‘마력이 돌아오고 있다·’
비록 평소와 같은 자유로운 상태는 아니나 하자드의 권능을 담고 있던 마정석 하나에 마력이 빠르게 채워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고갈되었던 체력이 회복되는 듯했다·
[멈춰라·]
[본룡이 그대에게 명령받을 이유는 없다·]
로자리아의 싸늘한 목소리에 건조하게 답하는 하자드·
[×××··· 이 녀석이 길페르를 소멸시킨 건 알고 하는 행동이냐·]
엘븐이 태현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
잠시 그녀가 태현을 쳐다보았다·
사실이냐 묻는 적안에 태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러려 했는데 속박하고 있는 가지 때문에 침묵으로 긍정한 꼴이 되고 말았다·
[약육강식· 우리가 알던 하계의 법칙이었지·]
[하자드!!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변질되었구나····]
엘븐과 로자리아가 적의를 드러냈다·
[변질이 아니라 변화에 대한 적응이라 보아야겠지· 그대들이야말로 계약자 김태현에 대한 의존이 심하군·]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친다·
“크큭····”
가만히 듣고 있던 태현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지금의 상황이 되고서야 이해가 된다·
티폰과 루시퍼에게도 하지 않았던 로자리아와 엘븐에게는 할 마음도 들지 않았던 오르갈과 요르문간드에게는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던 행동을·
어째서 하자드에게만은 자처하였는지·
“나아가기 위해 모든 걸 버릴 준비가 된 자· 그리고 그러지 못한 자의 차이였군·”
과거 김태현이 이들과 전쟁을 치렀던 곳과 지금 그들이 발 딛고 선 곳은 완전히 다른 시간선이다·
엘븐 길페르 루시퍼가 기억을 지니고 있는 건 그들이 지닌 격과 이그문이라는 버러지가 부린 잔재주의 결과일 뿐이며·
“다른 대공들이 모두 기억을 전해 받을 수 있었던 건 이 몸이 있었기 때문이지·”
태현이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으려 입술을 달싹이는 엘븐과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로자리아를 쳐다보았다·
“멍청한 것들· 이곳은 삼천세계의 모든 가능성이 집약된 시간선이다·”
이전이었다면 입에 담는 걸 불허했을 내용이었다·
“이 몸이 김태현을 잡아먹었다면 그 또한 이번 시간선의 가능성의 일부라는 것이지·”
참고 있던 로자리아의 마력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일대의 공간이 일렁인다·
[대화가 아닌 전투를 원한다면 본룡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로자리아·]
하자드의 경고에 엘븐이 서큐버스 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꾸나·]
[····]
로자리아가 넘실거리던 마력을 가라앉혔다·
지금 하자드를 적으로 돌리면 문제가 복잡해짐을 알아서다·
그들은 성좌의 힘을 손에 넣은 이그문과 아스모데우스를 처리하지 못했다·
이미 최강의 악마왕이었던 길페르가 소멸한 마당에 대공들의 전력이 줄어들어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었다·
“서큐버스보다는 요정 쪽이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 이 ×××놈아·]
“입이 험한 건 어쩔 수 없고··· 이거나 풀어라·”
[××것· 잘난 네놈이 ×× 직접 풀어라· 그리고 하자드·]
[말해라·]
[우리가 계약자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건 그대도 잘 알고 있겠지?]
[알다마다·]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건· 우리가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의미도 될 터· 본요가 틀렸나?]
물음에 하자드가 태현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이제 사실을 말해줄 때도 된 것 같다만·]
“쯧·”
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 취급하지 말라는 게 누구였더라·]
“쯧· 쯧쯧·”
태현이 계속해서 혀를 찼다·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 건 덤이었다·
[거대한 힘을 타고났으나 오랜 시간을 사념으로만 존재했다지·]
“이봐 하자드· 그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그래서 이렇게 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이니· 이번에는 본룡이 이해해 주도록 하마·]
“이 몸을 그런 식으로····”
[본룡의 계약자였던 김태현· 그리고 맹약자가 된 새로운 김태현·]
“야·”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도록 하지·]
태현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하자드가 말을 이었다·
[그 전에 지켜보고 있는 눈을 속일 필요가 있을 거 같군· 로자리아 퍼스널 스페이스를 만들어 주겠나?]
[····]
로자리아가 조용히 손을 휘저었다·
스스스스·
공간에 파문이 일길 잠시·
겉보기엔 조금 전 요정의 숲과 다를 게 없지만 어느새 그들이 새로운 공간에 진입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열 겹이나 응축된 공간인가·]
하자드가 공간의 내구도를 파악하며 작게 감탄했다·
[전투도 염두에 둔 것이로군?]
히죽·
그녀가 공간 곳곳의 게이트를 탐지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본녀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로자리아가 차갑게 선을 그었고·
[××··· 본요의 성질도 그만 시험해라· 여긴 내 집이란 말이야·]
엘븐이 동조했다·
[그대들의 배려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여야겠지·]
“이봐 하자드· 일단 이것부터 풀고····”
여전히 신수의 가지에 묶인 태현이 목소리를 내었으나·
[계약자였던 김태현은 바깥으로 나간 상태다·]
들리지 않는다는 듯 설명을 이어가는 하자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