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16화
가짜를 처리하겠다·
그 의미를 모르지 않는 두 대공이 침묵했다·
[×····]
엘븐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이제는 그녀의 눈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한 균열·
길페르의 소멸이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인지한 것이다·
[그런 눈으로 볼 거 없다·]
종(種)의 정점에 올라보았고 하계의 정점에도 올라보았다고·
[그대와 삼천세계의 두 축을 담당한 건 재미난 경험이었다· 이제 마지막 여정을 선택할 뿐이지·]
[····]
덤덤히 자신의 최후를 가늠하는 동료를 보며 엘븐이 이를 깨물었다·
[로자리아·]
길페르의 시선이 엘븐과 다르지 않은 서큐버스에게 향했다·
[그대는 지난 생에서 대공의 정점에 도달했다·]
[····]
[몽식(夢食)· 그 힘이라면 이번 생에도 가능할 것이다·]
씨익·
길페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올라간 입꼬리를 타고 생긴 금이 선명했다·
[이번에는 죽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길페르의 존재력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아바타로서의 마지막 힘을 불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목숨을 걸어 겨우 이 정도로군·’
하계왕의 상태에서 지금과 같은 선택을 했다면 눈앞의 가짜를 보다 확실하게 몰아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마주 존재력을 끌어올리고 있는 태현을 눈에 담았다·
각인된 대공들의 권능을 충돌시켜 권능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서큐버스 퀸· 타천사· 드래곤 로드· 거인왕· 마수왕· 마해왕· 요정왕· 그리고 다수의 악마왕·
하나같이 종의 정점에 올랐던 자들의 권능·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육체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거북하군·’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던 듯했다·
[××!!]
스륵· 스르륵·
엘븐의 두 손에 한 쌍의 단검이 쥐어졌다·
신수의 가지를 잘라 만들었으며 고농도의 마력을 압축시켜 예리함을 배가시킨 신기·
[엘(L)·]
한 쌍의 신기를 꺼내어 든 요정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라라라라- ××- 라라라라- ×- ××××- 라라×- ×라라-]
선율에 맞추어 몸이 움직인다·
가로막는 마력의 장막을 찢어발기고 짓누르는 패기를 잘라내며·
태현과 빠르게 거리를 좁히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 미친년이·”
태현이 손을 뻗자 주위로 여섯 개의 장막이 펼쳐졌다·
꽈악·
주먹을 쥐자 장막이 육각형의 큐브를 이루며 조여든다·
까가가가각·
신기에 닿은 큐브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뿐·
까가가가가가각·
큐브는 잘려 나가지 않고 그녀의 검격을 견뎌내었다·
“어중간한 녀석이!”
태현이 웃으며 큐브에 두 개의 권능을 충돌시켰다·
‘패기’와 ‘강화’·
큐브 안으로 작용하는 중압감이 그녀의 움직임을 무뎌지게 하고 큐브를 강화시켜 검격을 견뎌내게 한다·
한 손으로는 큐브를 축소시키고 다른 손으로는 가시를 휘둘렀다·
콰직·
노리고 달려들던 촉수가 게이트째로 잘려 나간다·
찰나의 순간·
푸욱·
또 다른 가시가 접근하던 로자리아의 가슴을 꿰뚫었다·
[카학····]
로자리아가 비명을 지르면서도 태현에게 손을 뻗었다·
“어딜·”
서걱·
또 다른 가시가 그녀의 손을 잘라냈다·
치이익·
환부로 독의 권능이 주입된다·
당분간 재생은 쉽지 않을 것이다·
콰아아· 콰아·
세 개의 게이트가 열리며 촉수가 쏟아졌다·
단순한 시간 벌기·
또는·
“바꿔치기인가·”
태현이 게이트를 하나하나 잘라내며 자신의 눈앞에서 튀어나오는 엘븐을 쳐다보았다·
큐브의 안에는 촉수가 들어 있었다·
‘공간도약을 사용한 잔재주·’
태현이 손을 펼쳤다·
패기를 방출시켜 그녀를 밀어내었다·
[××!!]
콰직· 콰득·
엘븐이 두 번의 검격만으로 패기를 잘라내며 한 발을 내디뎠다·
한 번의 검을 휘두를 때마다 하나의 권능이 잘려 나간다·
“쯧·”
태현이 혀를 차며 의태에 변주를 주었다·
육체는 마수왕의 것으로·
거기에 하나의 손은 악마왕의 가시를 축소시켜 검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콰직!!
다가온 엘븐의 검을 몸으로 받으며 그녀의 복부를 꿰뚫었다·
[×××···!!]
내뱉는 욕설과 달리 입가에 선혈이 흐른다·
반면 태현의 몸에서는 잿빛 마력이 넘실거리며 충격을 빠르게 완치하는 모양새·
“루시퍼의 권능은 효율성이 좋아·”
재생(再生)·
고통을 감내할 정신력만 갖춘다면 공방일체라 하기에 부족함 없다·
당장 신기를 통해 대마력을 쏟아내는 엘븐의 공격에도·
스스스스스·
태현이 잿빛 마력을 강화하여 견뎌내는 모습을 보였다·
콰드드득·
가시를 비틀자 검을 쥐고 있던 엘븐의 손이 떨렸다·
“이 몸과 접근전을 펼치겠다는 오만함에 경의를 표하마·”
콰드드드드·
[××··· ×····]
엘븐이 대마력의 권능으로 재생력을 끌어올려 보았으나·
“어딜·”
잿빛 마력이 그녀의 재생력이 발동되지 않도록 강제하였다·
“죽이진 않을 것이나·”
태현이 가시로 독과 공포의 권능을 주입했다·
“굴종은 면하지 못할 것이니·”
다수의 권능이 주입된 엘븐의 몸이 흔들렸다·
두 눈과 코에서 피가 흘렀다·
찌이익·
머리를 잡은 태현이 그녀의 날개를 잡아 뜯었다·
“머리를 조아려라 요정·”
쾅·
무력화된 요정왕의 머리를 짓밟으며 태현이 한 쌍의 신기를 집어 들었다·
“이건 쓸 만해 보이는군·”
대공의 권능을 가를 정도로 완성되어 있는 무기다·
삼천세계의 표현대로라면 신기(神器)·
마력을 조작하여 싸우는 걸 즐겨하지만 이왕 육체를 얻었으니 무기를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부르르르·
“····”
새로운 주인을 거부하는 신기에 강제로 대원소의 권능을 주입시켰다·
파지지지직·
샛노란 뇌전을 휘감은 신기의 저항이 약해졌다·
“두 놈 남았군·”
서걱·
자신을 노리는 촉수를 잘라내며 반회전했다·
그리고·
등 뒤에서 생성되던 두 개의 게이트로 신기를 집어 던졌다·
하나의 게이트는 그대로 소멸하였고·
또 다른 게이트에서 나타난 건 뇌전이 흐르는 칼에 어깨를 허용한 로자리아였다·
태현이 검지로 신기를 겨누었다·
화륵!
대원소의 권능을 받아들인 신기가 불꽃을 토했다·
화마에 휩싸인 로자리아가 그대로 게이트로 몸을 숨기려는 순간·
쾅·
태현이 한발 빠르게 이동해 그녀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진즉 지배를 받아들였어야지·”
지면에 머리를 처박은 두 명의 대공을 확인하며 후욱 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주변이 안개로 뒤덮여 있다·
“이 두 년을 미끼로 영역을 펼친 건가·”
대공을 상대한 건 10초 남짓한 시간·
그 시간 동안 마계가 새롭게 변모되어 있다·
“성력을 사용하고도 이 정도라니··· 불쌍하구나·”
목숨을 걸었음에도 포식을 사용하지 못하는 자신조차 압도하지 못한다·
그녀가 사용하고 있는 힘이 반쪽도 되지 못하는 반푼이 수준임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숨어서 마지막 기회를 노리는 것인가·”
태현이 빙글 돌며 죽음을 앞둔 악마의 흔적을 찾았다·
잔재라 해도 성력인지라·
마력만 사용 가능한 상태에서 제대로 탐지되지 않는다·
‘녀석의 공격을 다시 허용하는 건 좋지 않아·’
몸을 숨기기 전에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으니 이 정도 영역을 전개했다면 곧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기회를 기다려 확실하게 물어뜯는···’
태현이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다·
후욱·
안개를 뚫고 하나의 형상이 다가왔다·
“길페르·”
부서진 유리처럼 조각조각 금이 간 악마왕의 모습이 어찌나 우습던지·
태현이 히죽 웃으며 다가오는 그녀를 맞이했다·
“마지막 공격치고는 직선적이군·”
키이이이- 키이이- 카아아아아-·
대공들의 마정석을 모두 회전시켰다·
녀석에게 공격을 허용했던 가슴이 욱신거린다·
재생의 권능으로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는 공격이라니·
‘마음에 들지 않아·’
장벽을 세우든 회피하든·
더 이상의 공격은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내색하지 않으며 그녀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길페르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긴장하고 있군·]
“입을 털 만큼 시간이 많지 않을 텐데? 마지막 발악을 하겠다면 지켜봐 주마·”
[발악이라···· 그건 그대에게 해당하는 말인 것 같다만·]
“····”
단순한 허세· 또는 도발·
‘어느 쪽이든 녀석에게 시간은 많지 않···’
···다·
그리 생각하고 있는 와중 시계(視界)가 반전했다·
“···!!”
[이제야 알아차렸나·]
상하좌우· 시야가 뒤집힌다·
길페르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그대는 방심하지 않았다·]
‘언제····’
태현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지금의 상태는 오감에 영향을 주는 환각에 걸린 상태·
‘대공들의 권능으로 대비는 충분히 해두었다·’
환각 따위에 당할 정도로 방비를 어설피 하진 않았다·
[수많은 악마왕의 권능을 흉내 내면서도 하나만은 사용하지 않더군·]
건드리기만 해도 바스러질 것처럼 금이 간 손톱·
길페르가 그것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진화· 본마가 악마왕이 되어 개화한 권능이지·]
“그따위 게 없어도···”
[그 말은 너의 권능 장악력에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언뜻 모든 대공들의 권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듯하지만 네놈이 삼천세계의 모든 걸 아는 건 아닐 테니·]
“····”
요마가 하계왕이던 시기·
포식자가 하계왕이 되어가던 시기·
자신은 수많은 권능을 지켜보고 먹어 치웠다·
[이름 모를 악마 중에서도 정신지배를 사용하는 녀석이 있다· 네놈이 경계할 필요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힘이지만·]
화아아·
길페르의 손톱이 진청색 마력으로 물들었다·
[성력과 결합되면 그대의 존재를 무너트릴 정도로 거대한 힘이 되지·]
천천히·
다가오는 게 머릿속으로 이해될 정도로 느리게·
길페르가 펼친 열 개의 손톱이 태현에게 다가왔다·
‘반···응···을····’
반응해야 하는데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느려지는 사고 흐름 속·
동일한 속도를 유지하는 건 길페르가 유일했다·
[네놈이 쥐어 든 신기를 매개로 엘븐과 로자리아의 권능을 닿게 할 수 있었다·]
‘망할 놈이·’
[네놈이 성력을 경계하는 동안· 본마는 마계에 존재하는 모든 악마들의 권능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이 미친 새끼· 그런 힘이 있었다면 진즉 이 몸에게 쓸모를····’
분명 머릿속에 맴도는 말인데·
입 밖으로는 뱉어지지 않는다·
멈추었다 해도 좋을 순간·
길페르의 적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대가 패배하는 건 진짜가 아니기 때문·]
휘어진 적안 위로·
조각조각의 금이 새겨졌다·
영원히 다가올 것 같던 길페르의 손톱이 기어이 몸에 닿았다·
콰드드드드득·
“···!!”
가시가 된 열 개의 손톱이 태현의 몸을 꿰뚫었다·
체내에 형성한 마정석이 모두 꿰뚫렸다·
[형제를 되찾을 시간이다· 가짜·]
‘카···아····’
나오지 않는 비명을 내지르며 태현이 몸을 떨었다·
띠링·
[‘의식에 기거하는 미궁’이 ‘운명을 거스르는 요마왕’과 접촉합니다·]
[‘의식에 기거하는 미궁’이 ‘다섯 개의 심장을 가진 용’과 접촉합니다·]
[‘의식에 기거하는 미궁’이 ‘삼천세계의 포식자’와 접촉합니다·]
머릿속에 울리는 메시지의 끝에·
[‘탑의 관리자’가 이런 법이 어딨냐며 소리칩니다·]
[‘탑의 호민관’이 차가운 시선으로 경고합니다·]
[‘탑의 호민관’이 탑의 법칙을 설파합니다·]
띠링·
[‘탑의 관리자’가 새로 만든 요술 지팡이를 휘두릅니다·]
[고유스킬 ‘판도라의 상자(???)’가 발동되었습니다·]
[고유스킬 ‘왕의 각인(???)’이 발동되었습니다·]
난쟁이의 절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