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11화
툭·
천공성에서 뛰어내린 태현이 지면에 착지했다·
스르륵·
시험 삼아 시도해 보았던 악마왕 형태가 해제되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진청색 마력이 검붉은색으로 되돌아간다·
“오르갈과 요르문간드는 아직 전투 중인가····”
대공으로서 지닌 격이 다소 손상되더라도 승부를 내기 전까진 멈추지 않을 듯했다·
성장의 단계에 접어든 오르갈은 몰라도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의 요르문간드에겐 골치 아픈 싸움이 될 것이다·
“그래· 전투라는 건 모름지기 그런 맛이 있어야지·”
죽지만 않는다면 루시퍼에게 부탁해 치료할 수 있다·
“그러다 죽으면 어쩔 수 없고·”
태현이 대수롭지 않아 하며 숲을 거닐었다·
심상 세계에선 마음먹은 대로 지형을 조절할 수 있었는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생기니 귀찮은 게 이만저만이 아니다·
“실재하는 육체에 적응하는 것도 일이군·”
김태현이 포식자의 역할을 위해 바깥으로 떠나고 활동한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아 동맹 전력 중 절반을 만났다·
그들이 가진 나름의 욕망을 전제로 약속도 받아냈다·
‘아직까진 만족스럽군·’
태현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남은 건 하자드 엘븐 로자리아 길페르·
‘엘븐과 로자리아는 마지막이다·’
티폰과 루시퍼야 자신의 태도가 변한 걸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지만 그녀들은 누구보다 김태현과 가까웠던 대공들·
자칫 정체가 탄로 날 가능성이 있다·
‘탄로 나더라도 아군을 한 명이라도 더 끌어들인 뒤여야 한다·’
포식을 사용할 수 없다 해도 개인의 무력은 이미 1회 차 회귀의 전성기 수준으로 회복했다·
엘븐과 로자리아가 합심하여 달려든다 해도 어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으음··· 아니야· 그것들의 권능은 앞으로도 쓰임새가 크단 말이지·”
엘븐의 대마력과 신수 동화·
로자리아의 정신지배와 공간이동·
심상 세계와 포식이라는 카드를 잃은 자신에게 있어 그들의 권능은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
최대한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탑을 올라가는 데 이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다음은 하자드겠군·”
화아악·
발밑으로 검붉은색 마력이 퍼져 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레어가 탐지된다·
그 안에서 마룡의 기운이 느껴졌다·
김태현이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떠올려 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마룡왕에게서의 독립을 원했지·’
루시퍼에게 했던 것처럼 욕망을 조금만 건드리면 될 일이다·
어렵지 않게 그녀를 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랬는데·
[거절이다·]
자신을 앞에 두고 차를 홀짝이는 하자드를 보며·
“····”
태현이 말문을 잃었다·
* * *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제대로 들은 것 같군·]
“····”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원한다면 다시 한번 말해주지· 본룡은 그대의 제안을 거절한다·]
단호하게 답한 하자드가 새로이 따른 차를 마셨다·
“이해가 안 되는데·”
태현이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나와 함께 탑을 오르는 것· 그게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던가·”
하자드가 대꾸 없이 조용히 차를 홀짝였다·
기어이 잔 하나를 비워낸 그녀가 손을 휘저었다·
공간이 일렁이며 몇 개의 찻잔이 추가로 소환된다·
‘마법인가·’
축복받은 육체를 지닌 용족의 또 다른 특기·
권능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위력이지만 여러모로 실용적인 재주라는 건 부정하기 힘들다·
‘지금 중요한 건 마법 같은 게 아니다·’
태현을 힘껏 돕겠다는 티폰·
서열 정리를 위해 한창 치고 박고 있는 오르갈과 요르문간드·
피조물의 격을 벗어나 스스로 성좌가 되길 원하는 루시퍼·
이외에 아직 제대로 된 대화를 한 적 없는 길페르 엘븐 로자리아·
이그문을 제외한 하계의 대공들 모두가 태현과 계약을 맺었고·
등탑을 돕기 위해 요정의 숲에 모여 있다·
“함께 탑을 오르자는 제안은 지극히 평범한 것일 텐데?”
[···]
“다시 한번 서로의 목표를 확인하고 계약을 강화하자는 것뿐이다·”
하자드는 찻잔을 기울일 뿐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지금은 김태현을 연기해야 할 때였다·
태현이 그녀가 손대지 않은 찻잔을 집어 들었다·
슬쩍·
잠시 눈길을 준 하자드가 추가로 다섯 개의 찻잔을 새로이 소환했다·
“····”
[····]
침묵 속에서 두 초월자가 찻잔을 홀짝였다·
어느새 둥그런 테이블 위로 텅 빈 찻잔이 가득 찼을 때다·
[차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군·]
하자드가 조용히 물었다·
“좋아한다 말한 적 없다·”
[그런 것치곤 열 잔이나 비웠군?]
하자드가 태현의 앞에 놓인 빈 잔을 가리켰다·
“물음에 대한 답변을 듣기 전까진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 어울리지도 않는 취미에 동참해 봤지·”
[···?]
“조금은 궁금하기도 하고·”
[성격이 바뀌었군·]
“티폰과 루시퍼도 그러더군· 물론 그 녀석들과는 빙 둘러 대화할 필요가 없었지·”
[그런가·]
하자드가 손을 저었다·
스르륵·
그들 사이에 놓여져 있던 찻잔들이 사라졌다·
[이제야 대화를 시작해 볼 수 있겠군·]
“···?”
태현이 무슨 의미냐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대화는 이전부터 하고 있는 것 아니었나·”
[그건 대화라기보다는 강압에 가까웠지·]
“····”
패기의 권능을 지닌 자가 강압을 논하다니·
태현이 어처구니없는 반응을 숨기지 못하고 있을 때다·
[본룡은 성력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성좌로서 그대가 어떤 무게를 짊어져야 했는지도 막연하게 이해할 뿐이지·]
“설명은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로자리아의 권능을 이용해 2회 차 회귀와 별자리 전쟁에 대해 알려주었다·
태현과 계약을 맺고 요정의 숲에 머무르겠다 약속한 것도 그래서다·
[세 성좌의 힘에 노출되었다더니 성격이 많이 바뀌었군·]
“····”
하자드의 말에 태현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많은 걸 내포하고 있어서다·
[본룡이 알던 김태현은 무턱대고 타인의 욕망을 건드리는 자가 아니다·]
욕망을 건드린다 해도 그에 합당한 절차를 거쳐 마음을 사는 쪽이었다고·
하자드가 태현의 두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중간계· 그곳 인간들의 사고방식을 학습한 건가·”
[안 될 건 없지·]
하자드의 반응에 태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 정도 되는 존재가 그런 것에 물드는 건가·”
[그대 또한 중간계 출신이지 않은가· 본룡은 그대에게 옮았다 생각했다만·]
하자드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단호했다·
[이곳에 모인 대공들 중 누구 하나 평범하지 않은 자가 없다· 목적 또한 제각각이지·]
“그러니 그들의 목적에 맞게 계약을 새롭게 맺자는 거 아닌가·”
태현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아까부터 말이 빙빙 돌고 있다·
약육강식(弱肉强食)·
줄곧 힘의 논리로 살아온 그에게 이런 식의 문답은 달갑지 않았다·
묻는 건 항상 자신이었고· 답은 항상 정해져 있었으니·
[그대는 함께 탑을 올라 성좌의 격을 이루는 걸 도와주겠다 제안했다· 그리하면 본룡의 오랜 선조로부터 소모품 취급당하지 않을 것이라 했지·]
“거짓을 말하진 않았다·”
[거짓은 아닐 터· 사실임을 부정하진 않겠다·]
“그런데 왜!”
어째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냐·
태현이 하자드의 적안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적안은 티폰처럼 유희하고 있지도 루시퍼처럼 공허하지도 않았다·
그저 상대를 관찰하고 있을 뿐·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김태현을 구하기 위해 목숨도 걸었던 녀석이··· 기억을 되찾고 성격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김태현이 포식자가 되어 바깥으로 나간 직후·
깨어난 그와 가장 먼저 마주친 건 로자리아였다·
오르갈과 요르문간드야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해도·
티폰과 루시퍼는 하나같이 성격이 바뀐 거 같다 말하였다·
하자드는 한술 더 떠 제안을 거절하기까지 했다·
‘이 몸이 무언가 놓치고 있다·’
머릿속으로 김태현이 걸어간 행보를 떠올렸다·
주제 파악 못 하고 날뛴다 생각했던 것들이 있었고·
자신을 믿고 부리는 객기라 치부하던 것들도 있었다·
그중 어느 것 하나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게 없었다·
‘그 녀석은 혼자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플레이어라 불리는 인간들을 동료로 삼았다·
하계에선 대공들과 관계를 맺었다·
상계에선 절대자들을 이용하였다·
영역전쟁과 종족전쟁·
하계왕과 통합왕을 정하는 대전쟁에선 심상 세계를 제집처럼 들락거렸다·
쓸모에 따라 선택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김태현의 행동을 적당히 흉내 내어 그가 이룩한 가능성들을 수단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는데·
‘빤히 읽히고 있었다는 건가·’
티폰과 루시퍼·
그리고 하자드·
그들이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의 의미를 한층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찰나의 시간을 고찰하여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자드가 태현의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고맙군· 덕분에 머리가 한층 맑아진 기분이다·”
[잠깐 사이 또 변했군· 마냥 성력과 접촉한 영향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겠어·]
“아니· 성력과 접촉한 영향이다·”
몸의 주인이 바뀌었는데·
영향이 없었다 말할 수 있을 리가·
“무례에 대한 사과·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지·”
[호오· 무엇이?]
“네가 아니었다면 언제까지고 과거의 망령만 좇을 뻔했거든·”
[망령이라··· 그건 성력과 접촉하기 전을 말하는 건가?]
“잠깐 사이 변한 건 너도 마찬가지다· 그건 성력에 접촉했기 때문인가?”
물음에 물음으로 답하였다·
하자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레어에 들어와 처음으로 보인 감정 표현이었다·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그래·”
[대화에는 차가 빠질 수 없지·]
하자드가 기분 좋은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
스륵·
그들의 앞에 다과상이 차려졌다·
[중간계에는 다양한 식도락이 존재하지· 이야기가 길어진다 해도 심심하진 않을 것이다·]
“듣고 놀라지나 마라·”
와작·
다과 하나를 베어 문 태현이 익숙한 움직임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 * *
탑주와 탑의 관리자가 된 톨킨에 대해선 제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육체의 주인이던 김태현이 바깥으로 나갔고 심상 세계에 존재하던 자신에게 등탑의 임무가 떠넘겨졌다는 사실·
지금의 상황을 로자리아나 엘븐이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다는 짐작·
고해성사라도 하는 기분으로 하자드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된 거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하자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컨대 도플갱어라 불리던 존재가 계약자의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거군·]
“막상 사실을 들으니 계약을 물리고 싶어지는가?”
태현이 후련해진 얼굴로 물었다·
바깥으로 나간 김태현을 연기하는 게 아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그걸 위해 실험 삼아 해본 행동이다·
묘하게 찝찝하던 감정이 날아간 걸 보면 효과가 나쁘지 않았다·
[계약자의 심상 세계에 있던 그 막무가내와 이렇게 마주 앉게 될 줄이야·]
“막무가내까지야·”
[인간들의 표현으로 오래 살고 볼 일이로군·]
“그래서· 이제 대답을 들을 수 있겠는가?”
처음의 제안·
“등탑을 위해 대공들 모두와 새로운 계약을 맺고자 한다·”
바깥으로 나간 김태현이 아닌·
도플갱어라 불리던 자신과의 계약·만약의 상황에도 서로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맹약·
[먼저 비밀을 말해주었으니 상응하는 대가는 지불해야 하지 않겠나·]
“음···?”
하자드가 마룡으로서의 정체성·
1회 차의 종족전쟁에서 자신이 천계 주인에게 패배했을 확률·
그리하여 마룡왕의 꼭두각시가 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짐작만 했을 뿐 나누어 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수많은 시간선이 꼬이며 만들어진 세계다·]
“쓸데없이 돌아왔군·”
[서로에 대한 이해는 확실하게 되었지·]
하자드가 손을 내밀었다·
[본룡은 그대와 함께 탑을 오르겠다· 로드의 이름을 걸고 그대의 등탑을 도울 것이야·]
태현이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후회하지 않을 거다·”
[잘 부탁하지· 새로운 형제·]
“····”
형제·
낯선 단어를 읊조리며·
“이 몸과 계약한 걸 환영한다·”
비릿한 웃음을 숨기지 않는 태현이었다·